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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Dec 20. 2022

우리가 탑 아래에서 본 것은

나딘 로베르 쓰고, 제라르 뒤부아 그린 <우리가 탑 위에서 본 것은>


소리가 들리는 책이 있죠. 이 책이 그래요. 나딘 로베르가 쓰고 제라르 뒤부아가 그린 <우리가 탑 위에서 본 것은>.



보았는데 들렸죠. 영차영차. 힘을 내는 소리. 토끼 한 마리가 위를 향해 오르고 있어요. 앞서 오른 토끼가 기다리고 있고요. 영차영차. 누가 내는 소리일까요. 물론 우리 눈앞에는 토끼 두 마리가 있지만, 확신은 잠시 미뤄둘까요. 이 책은 눈앞에 있는 것 너머를 보는 이야기거든요.

      

바깥을 상상하는 토끼가 있어요. 마을의 경계는 높고 빽빽한 숲인데, 아무도 그 숲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토끼는 숲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죠. 숲 너머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탑을 쌓기 시작해요. 토끼가 스스로 감격한 것처럼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현실에는 현실이 끼어드는 법. 태풍으로 토끼가 그동안 쌓아 올린 탑이 쓰러져요. 그때 마을 사람들이 나서요. 사실 토끼가 탑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마을 사람들이 돌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에요. 처음에는 토끼가 만든 빵을 먹으려고 돈 대신 토끼가 원하는 돌을 가져다주었지만, 나중에는 탑을 위해 돌을 가져다주거든요. 이제는 마을 사람들도 탑을 쌓는데 힘을 합치고 마침내 완성된 탑 위로 올라간 토끼는 숲 너머를 보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좋은 문학이 그런 것처럼, 우리는 이 책에서 문장 하나를 손에 쥐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거예요. 어떤 문장이 좋을까요? 권력과 관념을 벗어나서 '숲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겠다 마음먹을 수도 있고, 시도는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어요. ‘어마어마한 생각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진실을 지나, 어렵고 더디더라고 그 끝에는 ‘마침내’로 시작하는 결말이 기다린다는 것도 알게 되겠죠. 정답은 없어요.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우리는 서로 다른 문장을 가져갈 테니까요.


저는 이 책에서 ‘모두 열심히 탑을 쌓았지요’를 가져가서 더 곰곰이 생각하려고요. 마침내 숲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된 토끼를 보며 용기를 내고 싶어졌다면, 모두 열심히 탑을 쌓았던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을 가졌거든요. 언젠가, 저도 탑 위를 오르는 토끼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언제나, 저는 ‘모두’였어요. 이미 모두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어요. 탑을 쌓는데 힘을 보탤 자격이요.

      

모두가 쌓아 만든 탑을 보면서 <크로셰 산호 프로젝트>가 생각났어요. 2007년도에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2022년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어요. 프로젝트 결과물은 세계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고요. 저는 크로셰 산호 프로젝트를 해러웨이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해러웨이는 생물학을 전공한 페미니스트이고 우리의 시대와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요. 이렇게 소개하니까 복잡하네요. 덕분인지 해러웨이의 사유 역시 복잡함을 추구해요. 경계 너머를 바라보고 구분을 해체하고 서로를 합치죠. 해러웨이는 ‘공-산’ 개념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공-산은 함께 만들어 낸다는 뜻이에요. 세계의 무엇이든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고 상호 의존적으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개체가 아니라 공-산적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존재하자고 말해요.


지구와 지구의 생명이 이제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어요. 그리고 과학으로 이 위기를 해결하려고 하죠. 하지만 해러웨이는 오직 과학만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해요. 과학과 예술과 기술 그리고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공-산적인 방법에서 해결 가능성을 찾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개입하고 응답하는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는데, 그중 하나가 크로셰 산호 프로젝트예요.


출처: 크로셰 산호 프로젝트 홈페이지


과학자 마가렛 버트하임과 시인 크리스틴 버트하임은 바다의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산호들이 죽어가는 것에 주목해요. 산호들의 죽음은 오직 산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모든 생물들에게 영향을 미치죠. 그래서 산호의 표백으로 바다 생태계가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을 예술 전시를 통해 알리기로 했어요. 마가렛 버트하임은 수학적 개념 모델의 기초가 된 코바늘 뜨기로 산호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요. 크로셰 산호를 만들기 위한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열이 추가될 때마다 일정하게 코를 늘리면서 뜨개질을 하면 구불구불한 주름이 만들어지는데 이 모양이 산호와 닮은 것을 이용한 거죠. 미술관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코바늘 뜨기를 모으려고 인터넷을 통해 프로젝트 인원을 모집했고, 전 세계 27개국 8000명의 사람들이 참여를 했다고 해요. 전 세계에서 보낸 산호가 아주 커다란 작품이 된 거예요.

      

해러웨이는 이 프로젝트를 설명할 때 ‘연결’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더라고요. 두 사람이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생각을 예술 활동으로 옮겼고 이 예술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두 사람과 연결된 다른 사람들이 생겼죠. 서로 연결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전시를 본 관람객들 역시 연결되었고요. 연결은 연결을 부르고 점점 커져요. 직접 바다로 뛰어들지는 않아도 작고 크게 산호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기다란 울타리가 생긴 셈이죠. 해러웨이는 이러한 연결을 ‘worlding’이라고 불렀어요.


우리 가까이에도 이러한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공동체가 있어요. 크로셰 산호 전시에 대해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환경예술단체 ‘에코 오롯’은 제주 해변에서 주워 온 해양 쓰레기 조각으로 플라스틱 만다라를 만들고 해체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줍고 모으고 만들고 기억하는 이 프로젝트 역시 누구나 참가할 수 있어요. 연결의 연결로 만드는 모두의 일이에요.


출처: 펭귄 뉴스 (에코 오롯 제공)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이 그림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했던 질문은, ‘왜 탑인가?’


토끼는 숲을 걸어서 가로지를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넘어갈 수도 있어요. 탑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숲 너머를 알 수 있죠. 그런데 왜 하필 탑이었을까요? 저는 탑이 증언이라고 생각해요.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모두가 여기에 있었다고, 돌 하나하나가 쌓여 탑이 된 것처럼 사람 하나하나가 연결되어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고. 우리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기억하고 전달하는 증언. 토끼의 탑과 크로셰 산호 그리고 플라스틱 만다라.

      

아무래도 영차영차 소리는 탑 아래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내는 소리일 것 같아요. 여러 사람이 모여 기운을 돋우려고 함께 내는 소리. 우리가 탑 위에서 본 것은 숲 너머 세계였어요. 우리가 탑 아래에서 본 것은 숲 너머 세계를 향하는 숲 속 공동체, 모두의 가능성이고요.


저도 언젠가 탑 위에서 숲 너머를 보는 토끼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언제나 나는 모두와 연결되어있음을 잊지 않고 숲 너머를 상상하는 또 다른 토끼에서 돌을 건네주는 사람이 되겠어요. 용기와 희망은 멀리에 있는 줄만 알았더니, 이렇게 성큼 가까워지네요.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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