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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Sep 29. 2024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최종)

RAND 연구소와 생명공학자 폰 노이만

7장 게임이 된 전쟁
RAND 연구소와 전쟁의 과학

“도덕과 윤리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온 우리의 문명, 그리고 게임이론 말고는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죽는 사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우리의 문명은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가?”
— 로버트 오펜하이머, 1960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Pravda)》는 분홍색과 흰색 회반죽으로 덮인 건물을 소개하면서 “죽음과 파괴를 몰고올 미국 먹물들(지식인)의 본거지”라고 낙인찍었다. 그 후 2003년에 현대식 건물로 이전했지만, 'RAND'는 여전히 ‘미-소 냉전과 핵 저지력의 냉담한 논리’를 상징하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랜드 연구소 로고와 구 건물 출처 구글 이미지]

RAND의 악명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대에 미국의 포크 가수 피트 시거(Pete Seeger)〈RAND 찬가(The RAND Hymn)〉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매우 비꼬는) 일부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작사, 작곡은 말비나 레이놀즈(Malvina Reynolds)].


오, RAND 연구소는 세상을 위한 곳이라네
Oh, the Rand Corporation's the boon of the world
그들은 돈을 받고 하루 종일 생각하지
They think all day long for a fee
그들은 앉아서 불꽃을 일으킬 게임을 하고 있다네
They sit and play games about going up in flames
문제는 너와 나, 그리고 꿀벌이 게임에 나온다는 거지
For counters they use you and me, honey bee
그들은 너와 나를 이용하고 있다네
For counters they use you and me
(……)
펜을 한 번만 누르면 그들은 우리를
With a stroke of the pen, they can change us
인간에서 벽에 번쩍이는 숫자로 바꿀 수 있다네
from men into numbers that flash on the wall.
이 똑똑한 영웅들은 우리를 0으로 변화시킨다네
These brainy heroes transform us to zeros
그래서 결국 우리가 넘어지면 누가 상관하나
So who gives a damn if we fall, after all,
우리가 넘어지면 누가 상관하나
Who gives a damn if we fall.
[피트 시거의 〈RAND 찬가〉 출처 유튜브]

RAND의 설립자가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가장 유력한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공군 사령관이었던 헨리 햅 아널드(Henry ‘Hap’ Arnold, ‘Hap’은 ’Happy’)일 것이다. 그는 전쟁 기간 내내 강력하면서도 독자적인 군대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적을 공격할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헨리 아널드 출처 구글 이미지]

“연구만 하고 개발은 안 하는 팀”


전쟁이 끝나기 몇 달 전부터 아널드는 미국의 군사력 증강을 위해 애써 모아놓은 전문 지식과 고급 인력이 종전과 함께 흩어지는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예지력이 뛰어났던 그는 대륙간탄도미사일(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ICBM)의 출현을 예고하기도 했다.


아널드는 1944년 11월 7일 그의 수석 과학고문인 노이만과 같은 헝가리 출신 테오도르 카르만(당시 그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항공공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었다)에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의 모든 가능성을 조사하여 대비책을 강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로부터 9개월 후, 카르만과 그의 동료들은 「새로운 지평을 향하여(Toward New Horizons)」라는 제목이 붙은 33권짜리 보고서를 제출했고, 묵직한 보고서를 받은 아널드는 며칠 동안 꼼꼼하게 읽은 후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보고서에서 카르만은 “공기역학과 전자공학, 그리고 핵물리학에서 이룩한 과학적 발견은 미래 공군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선언한 후, ICBM과 드론(drone) 등의 제작에 필요한 기술 개발 과정을 수백 페이지에 걸쳐 나열해 놓았다(대부분의 정보는 독일 항복 후 미국으로 데려온 독일 과학자들로부터 얻은 것이다).

[아널드(오른쪽)와 같이 있는 테오도르 카르만(왼쪽)과 보고서 관련 기사 출처 구글 이미지]

그중에서도 훗날 RAND 연구소의 초석이 될 기본 개념은 ‘과학의 응용-운영 분석’이라는 작은 섹션에 실려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 기계의 ‘두뇌’에 관한 내용이었다.


카르만의 보고서는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은 엄청난 실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단, 전선의 지휘관과 참모들에게 집중되었던 지원을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과학자들에게 돌려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가 평화 시에도 정상적으로 진행되도록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널드는 전시 연구 예산 중 아직 사용하지 않은 1,000만 달러를 민간 항공기 제작사인 더글러스에어크래프트사에 결성될 연구팀에게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더글러스는 샌타모니카 본사에 새 조직을 위한 특별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때 더글러스사의 수석엔지니어인 아서 레이먼드(Arthur Raymond)‘연구・개발(Research ANd Development)’이라는 뜻의 RAND를 명칭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더글러스 회장의 오른팔이었던 프랭크 콜봄(Frank Collbohm)이 마땅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연구팀을 이끌기로 했는데, 그의 ‘임시직’은 향후 20년 동안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최고 전문가들만 모였다는 싱크탱크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무기도 만들지 않은 채 연구 보고서만 잔뜩 쌓여갔다. ‘연구・개발팀’이 아니라 ‘연구만 하고 개발은 안 하는 팀(Research And No Development)’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1946년 3월 1일, 공군 대표가 계약서에 서명을 휘갈기면서 드디어 프로젝트 RAND가 공식으로 출범했다. 세부 조항에는 “지원금은 공중전을 포함하여 공군에게 요구되는 광범위한 전술과 과학기술을 지속적으로 연구・개발하는 데 사용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RAND와 더글러스의 관계는 얼마 가지 않아 빠르게 악화되었다. 오만가지 일로 갈등을 겪던 끝에 결국 1948년 5월 14일에 ‘프로젝트 RAND’는 ‘RAND 연구소’라는 독립적 비영리조직으로 재편성되었고(당시 연구원은 200명이 넘었다), 마찰을 빚었던 더글러스에어크래프트와 작별을 고했다.


현실로 다가온 ‘경쟁의 과학’


공학 및 물리학 분야에서 RAND가 추구하는 경향은, 콜봄이 1946년에 다섯 번째로 고용한 천문학자 존 D. 윌리엄스(John Davis Williams)의 영입 후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응용수학위원회(Applied Mathematics Panel, 국방연구위원회의 산하기관)의 전시 책임자였던 워런 위버가 추천한 사람이다.


전쟁이 끝난 후 군 지휘부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얻은 귀한 지식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게다가 국방 예산이 현저하게 줄어든 상황에서 신무기 개발이나 군사 작전에 필요한 지출은 다른 지출 항목과 신중하게 비교되어야 했다.


위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항목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점수로 나타내는 ‘군사적 가치 산출법’을 제안했는데, 이 작업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도구는 게임이론뿐이었다.


1947년 9월, RAND에서 주최한 뉴욕학회에서 위버는 초기 조직을 위한 선언문을 낭독했다. 드디어 체스 챔피언 에마누엘 라스커가 꿈꿨던 ‘경쟁의 과학’의 시대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작전 연구는 오직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RAND는 평화로운 시기에도 전시에 획득한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일반적인 전쟁 이론을 분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윌리엄스가 RAND에 고용되었을 때, 그는 ‘군사적 가치 평가’를 전담한 새 연구팀을 이끌었다. 게임이론 마니아였던 그는 『전술대전(The Compleat Strategyst)』이라는 게임이론 입문서를 집필했는데, 만화 캐릭터로 등장한 RAND의 분석가들이 재미있는 농담을 주고받는 형식이어서 일반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윌리엄스의 '전쟁 대전' 출처 구글 이미지]

윌리엄스는 RAND에 고용된 즉시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1950년에 작성된 'RAND의 연례보고서'를 보면, 게임이론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전략 폭격과 대공 방어, 공중 보급, 공중 지원, 심리전 등 RAND에서 연구・개발한 모든 정보는 수학적 분석을 통해 하나의 모형으로 통합된다. … 이 일반적인 연구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철학은 …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의 『게임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RAND는 설립 초기부터 노이만의 정신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연구소였다. 설립 이념과 연구 분야, 연구 방법, 연구원들의 성향 등 노이만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만 빼면 거의 “노이만에 의한, 노이만의 연구소”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1947년 12월 16일, 윌리엄스는 노이만에게 다음과 같은 고문 초청 편지를 보냈다. “RAND에서 작성한 모든 연구 논문을 보내드릴 테니 한번 검토해주시기 바랍니다. 귀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건(인상 찌푸리시건, 힌트를 주시건, 의견을 주시건), 우리에게는 무조건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심지어 윌리엄스는 노이만의 거절을 걱정하면서 말미에 이렇게 추가했다. "우리를 위해 별도로 시간을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침에 면도하는 동안 생각해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내용이어도 좋으니, 면도 중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우리에게 알려주시면 됩니다.”


“자, 이제 점심 먹으러 갑시다!”


노이만은 그다음 해부터 RAND의 자문에 응하며 로스앨러모스와 프린스턴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가 연구소 복도를 거닐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와 질문을 퍼부으며 북새통을 이뤘고, 윌리엄스는 노이만을 당황하게 하려고 장난삼아 까다로운 수학 문제를 내곤 했으나 뜻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노이만은 RAND의 분석가들 못지않게 전술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군사적 가치’라는 개념에 꽤 익숙하여 게임이론과 연결시키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번은 윌리엄스의 편지를 받기 몇 달 전인 1947년 10월 조지 댄치그(George Dantzig)라는 통계학자가 노이만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굿 윌 헌팅’ 스토리의 모티브가 된 댄치그 이야기]

그는  ‘선형 프로그래밍(linear programming)’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여 군대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병사들에게 영양식을 공급하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적용하려 했지만 엉뚱하게 큰 숫자들이 튀어나와 노이먼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노이만 앞에서 댄치그가 칠판 가득하게 대수학과 기하학이 섞인 복잡한 수식을 다 채우자마자, 곧바로 선형 프로그램의 수학 이론에 대한 노이만의 강의가 이어졌고, 댄치그는 거의 한 시간 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노이만의 설명을 경청했다.


노이만은 그 문제가 2인 제로섬 게임의 최대최소 정리와 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금방 알아차렸고, “해결 가능한 문제”와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빠르게 분류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선형 프로그램은 데이터센터 내부에 서버를 배치하는 문제에서 백신의 구매 및 배포까지,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당시 군 소속 수학자의 당면 문제와 공군의 수요가 맞물려서, 1948년 RAND의 주요 목표는 노이만의 세 가지 관심사인 컴퓨터와 게임이론, 그리고 핵폭탄에 집중되었다.


당시 ‘슈퍼Super(수소폭탄)’와 관련된 초기 계산에는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을 위한 난수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RAND의 엔지니어들은 난수를 생성하는 전자장치를 만들었다. 그리고나서 1949년 윌리엄스는 전자컴퓨터 개발 회사들을 순회 방문했지만, 자신의 계획이 어느 곳에서도 실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없이 우울한 풍경”이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어쩔수없이 RAND는 미국 최고의 컴퓨팅 전문가인 노이만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자 노이만은 반 농담조로 물었다. “그게 꼭 컴퓨터로 해야 하는 일입니까?”  《포천》의 기자 클레이 블레어(Clay Blair)의 기사에 의하면, 당시 RAND의 과학자들은 기존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들고 노이만을 찾아갔다고 한다.


과학자들의 열띤 설명을 경청한 후, 노이만이 말했다. “여러분, 문제가 뭔지 정확하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RAND의 과학자들은 판서를 하고 차트를 넘기면서 또다시 두 시간에 걸친 장황한 설명을 이어나갔고, 노이만은 손을 머리카락 속에 파묻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노이만은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멍하니 바라보았다.

RAND의 과학자들은 그가 “지나치게 복잡한 설명을 듣다가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았다”고 했다. 잠시 후 노이만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컴퓨터가 없어도 됩니다. 제가 답을 알고 있거든요.” 할 말을 잃은 채 눈만 끔뻑이는 과학자들 앞에서 노이만은 문제의 해답으로 가는 몇 가지 단계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후, 아무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자, 이제 점심 먹으러 갑시다!”

 

RAND는 그들에게 주어진 최선의 대안을 선택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노이만의 컴퓨터 프로젝트에 편승하기로 한 것이다. 얼마 후 프린스턴으로 파견된 RAND의 연구팀은 같은 목적으로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두 눈을 부릅뜨고 컴퓨터가 업데이트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 일을 계기로 1949년부터 1951년까지 고등연구소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윌리스 웨어(Willis Howard Ware)라는 공학자가 1952년에 RAND로 영입되었는데, 그는 향후 55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RAND의 컴퓨터과학 분과(1960년에 창설)를 이끌었다.


RAND 머신은 1953년에 가동되기 시작하여 몬테카를로 폭탄 시뮬레이션과 댄치그의 병참(군대의 물자 보급) 문제에 동원되었다. 사람들은 이 컴퓨터를 존 폰 노이만과 ENIAC을 합쳐 'JOHNNIAC'이라 불렀고, 컴퓨터 옆의 벽에는 노이만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보란 듯이 걸려 있었다.

[윌리스 웨어(위)와 조니악으로 불린 RAND 머신 출처 본문]

2인 결투 게임과 로이드 섀플리


RAND에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연구해온 주제 중에 ‘수학적 2인 결투(mathematical duel)’라는 것이 있다. RAND에서는 다양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문제를 크게 단순화시켰다. 예를 들면 전시에 두 대의 비행기나 두 대의 탱크, 또는 폭격기와 전함이 일대일로 맞붙은 경우이다.


RAND의 2인 결투에서 각 플레이어는 가능한 한 발사를 자제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필살의 한 방’을 날리되, 반드시 상대방보다 먼저 쏴야 한다. RAND에 상주하는 연구원과 일시적으로 방문한 객원연구원들은 서로 경쟁하듯 가능한 시나리오를 일일이 분석하여 모든 경우에 정확한 해를 찾아냈다.


그중에서 「조용한 결투(Silent Duel)」(둘 다 상대방의 총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언제 발사했는지 모르는 경우)와 「총알 1개 대 2개, 동일한 명중률」을 포함하여 여러 편의 논문을 쓴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과학자 할로 섀플리(Harlow Shapley)의 아들인 로이드 섀플리(Lloyd Shapley)였다.

[할로 섀플리와 RAND 당시의 로이드 새플치 출처 구글 이미지]

1948년의 어느 여름날, 그는 RAND의 연구원들이 한가득 모인 세미나실에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여 노이만의 관심을 끌게 된다. 세미나를 하던 중 한 연구원이 노이만에게 “두 전투기 사이의 결투 문제에 정규해(formal solution)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 요청했다.


노이만이 약 1분 동안 허공을 응시하다가 칠판으로 달려가 증명 과정을 열심히 써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죠, 그럴 필요 없어요. 훨씬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이드 섀플러는 실제로 그 자리에서 필판으로 나가 다른 방식으로 증명을 해냈다.


얼마 후 노이만은 섀플리의 논문을 모두 읽고 그에게 환상적인 제안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와 맞먹는 급여를 준다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수준의 제안이었을 것이다.


프린스턴의 게임 괴짜들


섀플리는 노이만의 격려와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1950년에 프린스턴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가 이끌던 연구실은 현재 게임이론의 온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곳에 있는 동안 섀플리는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의 게임이론에서 제기된 (해결되지 않은) 핵심 문제 하나를 해결했다.


“연합의 구성원들에게 배당금을 공정하게 나눠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협동 게임에서 각 플레이어(또는 배당금의 총액수를 좌우하는 요인들)의 기여도를 수치로 나타낸 ‘섀플리값(Shapley value)’을 정의하여 최선의 배당금 분배 규칙을 유도해냈다.


이것은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의 ‘협동 게임이론’이 현실 세계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첫 번째 힌트였다. 그러나 섀플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의 친구인 프린스턴의 수학자 데이비드 게일(David Gale)과 함께 더욱 중요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게일은 동료 수학자들에게 “임의의 선호 패턴에서 모두가 짝을 이루는(즉 결혼을 하는) 안정한 해가 존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냈는데 이 문제의 답을 제일 먼저 우편으로 보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섀플리였다.


섀플리의 해는 두 그룹의 사람들을 일대일로 짝짓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게일과 섀플리는 공동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 해는 응시생과 대학교를 연결할 때에도 응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들이 발견한 해는 훗날 ‘게일-섀플리의 지연된 승인(Gale-Shapley deferred acceptance)’으로 불리게 된다.


섀플리는 201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는데, 당시 노벨위원회에서는 ‘지연된 승인’을 수상 이유 중 하나로 거론했고, 그 덕분에 섀플리는 ‘최고의 수학적 중매쟁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게일과 섀플리의 2012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 장면 출처 구글 이미지]

존 내쉬의 ‘내쉬 균형’ 이론


경제학을 비롯한 수학 이외의 분야에 게임이론을 적용하여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는 섀플리 외에 또 한 명의 수학자 존 내시(John Forbes Nash, Jr. 1928~2015)를 꼽을 수 있다. 두 사람이 프린스턴에서 처음 만났을 때, 섀플리는 26세의 연구원이었고 내시는 22세 대학원생이었다.


프린스턴은 천재로 우글대는 도시였지만 내시는 그중에서도 자신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특히 유태인과 비교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섀플리와 마찬가지로 내시도 게임이론 마니아였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수학과 학과장 앨버트 터커(Albert Tucker)가 주최하는 주간 세미나에 꾸준히 참석하여 첫 연사로 나온 노이만의 강연을 경청했고, 바로 이곳에서 얼마 후 그가 발표하게 될 첫 번째 게임이론 논문의 기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내시는 ‘교섭 문제(Bargaining Problem)’에 힐베르트와 노이만의 공리적 방법을 도입하여, 특정 조건이 충족된 경우 2인 협동 게임의 해를 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내시는 비대칭적인 경우에도 『게임이론』에서 도입한 ‘효용 점수’를 두 사람에게 할당하여 교섭 문제의 정확한 해를 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모두 만족하는 지점이란, ‘두 효용 점수의 곱’이 최대가 되는 지점이다.


젊은 시절 내시는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는 대학원 신입생이었던 1948년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아인슈타인을 찾아가서 입자와 중력장의 상호작용에 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겠다며 거의 한 시간 동안 아인슈타인의 칠판에 수식을 써 내려가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내시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연구실을 나가려는데, 아인슈타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젊은이, 물리학 공부를 좀 더 해야겠어. 하지만 그 열정은 꼭 간직하게.” 그래도 전혀 기죽지 않았던 내시는 다음 해 가을에 게임이론의 돌파구를 찾았다며 이 분야의 원조인 노이만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젊은 시절의 내시 출처 구글 이미지]

내시와 게임이론의 재해석


1949년에 노이만은 정부와 군대, 대기업, 그리고 RAND의 자문에 응하느라 몹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서인 루이즈가 전화 통화 중 갑자기 소리를 질러댔다. 전화 속 내시가 노이만을 만나게 해달라며 찰거머리처럼 매달렸기 때문이다. 결국 노이만은 그 바쁜 와중에 당돌한 대학원생과 마주하게 되었다.


잔뜩 긴장한 내시는 게임이론 분야에서 그의 최고 업적이자 마지막 업적이 될 이론을 칠판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플레이어의 수에 상관없이 모든 유형의 게임(제로섬 또는 비제로섬)을 분석할 수 있는 수학 체계를 제시한 후, 둘 중 한쪽이 전략을 변경했을 때 모든 게임에서 특정 결과가 공통적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요즘은 이런 유형의 해를 ‘내시 균형(Nash Equilibria)’이라 한다.


노이만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내시가 증명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자신의 방식대로 증명을 끝내버렸고, 그 바람에 내시의 프레젠테이션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건 아주 간단한 문제라고. 그냥 고정점 정리잖아.”


내시의 증명에서 노이만이 가장 싫어했던 부분은 전체적인 논리를 떠받치는 공리였다. 플레이어들이 뭉치면 분명히 이득이 되는데도 서로 협동하지 않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훗날 내시는 노이만이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을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구세대의 방어적 태도”로 해석했다.


하지만 노이만은 1953년에 『게임이론』 3판의 서문을 쓸 때 비협동적 게임이론(non-cooperative game theory)에서 내시의 업적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게다가 1955년 프린스턴 대학교 세미나에서 내시가 “n-게임 이론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할 때 노이만이 진행을 맡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화기애애했다.


죄수의 딜레마


1949년 RAND에서는 내시의 논문이 커다란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내시의 해와 노이만-모르겐슈테른의 해가 똑같이 타당하다고 밝혀진 마당에, 사람들은 과연 어떤 해를 선호할 것인가? 1950년 1월에 RAND의 연구원 메릴 플러드(Merrill Meeks Flood, 1908~1991)와 그의 동료 멜빈 드레셔(Melvin Dresher)는 이것을 확인하는 한 가지 실험을 고안했다.


이 실험은 이후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이자 RAND의 고문이었던 앨버트 터커(Albert W. Tucker)의 일화로 재편성되면서 최악의 게임을 상징하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로 알려지게 된다. 이 이야기는 몇 년에 걸쳐 보완되고 다듬어지면서 원래의 모습에서 다소 멀어졌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갱단 멤버 A, B가 경찰에게 체포되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2개의 독방에 분리 수용되었다. 두 사람 모두 중범죄로 기소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지만, 가벼운 혐의로 기소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검사는 두 죄수에게 제안을 한다. A와 B는 각각 상대방의 중범죄를 증언할 수도 있고,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 수도 있다. 두 사람을 개별적으로 심문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메릴 플러드, 멜빈 드레셔, 앨버트 터커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죄수의 딜레마에 존재하는 유일한 내시 균형은 둘 다 상대방을 배신하는 경우이다. 플러드와 드레셔는 이 비제로섬 게임을 현실에서 실행했을 때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의 행동이 내시의 이론을 따르는지, 또는 노이만-모르겐슈테른의 절충안을 따르는지, 아니면 그 외의 원리를 따르는지 확인하기 위해 간단한 형태의 ‘2인 포지티브섬(손익의 합이 양수인 경우) 비협동적 게임’을 실행해보았다.


이 실험[흔히 ‘비협동적 짝(Non-cooperative Pair)’으로 불림]에서 두 플레이어의 전략과 그에 따른 보상은 아래 표와 같다. 선발된 두 사람(A와 W)은 죄수의 딜레마 같은 내시 스타일 비제로섬 게임의 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게임은 100번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참가자들은 게임 도중 자신의 반응과 이유를 기록하기로 했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의 행동이 내시의 이론을 따르는지, 또는 노이만-모르겐슈테른의 절충안을 따르는지, 아니면 그 외의 원리를 따르는지 확인하기 위해 간단한 형태의 ‘2인 포지티브섬positive-sum(손익의 합이 양수인 경우) 비협동적 게임’을 실행해보았다.


이 실험은 W에게 훨씬 유리한 쪽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두 사람 모두 협동을 거부한 왼쪽 아래 사각형이 바로 이 게임의 내시 균형에 해당한다. 즉, A와 W가 줄곧 이 전략을 고수한다면, 게임을 100번 실행했을 때 윌리엄스는 50센트를 손에 쥐고 앨키언은 무일푼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실험을 해보니 앨키언은 40센트, 윌리엄스는 65센트를 획득했고, 두 사람이 협동한 경우는 100번 중 60번이었다. ‘합리적인 플레이어’보다 훨씬 많은 횟수다. (자세한 과정은 생략)


플러드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내시 균형은 올바른 해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두 참가자는 상금을 나누는 규칙을 전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협동에 입각한 노이만-모르겐슈테른의 해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죄수의 딜레마는 각 개인이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했을 때 모두에게 더 나쁜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에, 종종 ‘합리성의 역설’로 묘사되곤 한다. 플러드와 드레셔는 내심 노이만이 죄수의 딜레마를 풀어주기를 바랐지만 손도 대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들도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즘 대부분의 게임이론가들은 “플러드와 드레셔가 다뤘던 것과 유사한 종류의 딜레마에는 해답이 없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그런 문제에는 진정한 역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플레이어(죄수)라면 침묵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1회성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가끔씩 침묵을 택하는 것일까? 정말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조현병을 겪고 있을 시절의 내시와 부인 엘리시아 라지 출처 구글 이미지]

현실로 다가온 핵전쟁의 위협


1946년 10월 4일, 노이만이 클라라에게 편지를 보냈다. “앞으로 2년에서 10년 사이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요.” 노이만은 역사 이래 가장 끔찍한 핵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느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떠올린 최선의 대책은 예방 전쟁(preventive war)이었다. “소련을 기습해서 핵무기고(그리고 다수의 사람들)를 완전히 파괴하면 된다. 물론 도중에 보복 공격을 할 수 없도록 가능한 한 빠르게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제 핵공격’은 끔찍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고위 권력자들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옵션’이었으며, 대다수의 미군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심지어 평생을 평화주의자로 살았던 버트런드 러셀도 러시아에 “핵 야망을 포기하거나, ‘세계정부’에 합류하거나, 전쟁을 맞이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노이만은 “소련이 핵무기로 보복할 능력을 갖췄다”고 판단한 순간부터 선제공격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 같다. 그는 1954년에 오스왈드 베블런과 회의를 한 후 클라라에게 편지를 썼다. “속전속결로 끝나는 전쟁은 아직 학문적 연구 대상일 뿐이라고. 지금 당장은 빠르게 끝낼 방법이 없다고”


아이러니하게도 노이만이 예방 전쟁 노선을 포기했을 때, 미국 정부는 그것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1954년 1월 12일에 아이젠하워 내각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미국이 핵무기를 최대한 활용하면 전면전은 물론이고 소규모 군사 도발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덜레스(좌)와 아이젠하워(우) 출처 구글 이미지]

이후 노이만은 전후 집권당이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항상 국가를 위해 봉사했고,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가 반공이라는 기치 아래 좌익분자를 사냥하고 개혁주의 성향의 학자들을 괴롭힐 때에도 광적인 박해를 매우 싫어했다.


또한 그는 소련에 선제공격을 가하도록 미국 정부를 설득하면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미국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 AEC, 위원장 루이스 스트라우스)가 주최한 비밀 청문회에서 궁지에 몰린 그의 친구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변호하기도 했다.

[청문회 당시 스트라우스와 오펜하이머 출처 구글 이미지]

4주에 걸친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1954년 6월 29일 자로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자격을 박탈했다. 하지만 2009년에 역사가들이 KGB의 문서를 뒤지던 중 “소련 정보부가 오펜하이머를 영입하기 위해 여러 번 접촉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했다. 결국 스파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1955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노이만을 원자력위원회의 위원으로 추천했고, 노이만은 정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의 지인들은 "“오펜하이머를 그토록 괴롭혔던 정부 기관에 어떻게 몸담을 생각을 할 수 있느냐”며 비난의 목소리를 쏟아냈고, 오스왈드 베블런도 대노하여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게임으로 핵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그 무렵 RAND에서는 가장 시급한 군사 문제(소련과의 핵전쟁을 피하거나, 핵무기 공격에서 살아남기)를 해결하기 위해 게임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게임이론, 특히 ‘죄수의 딜레마’는 20세기 말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냉전의 공포 속에서 미국의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강력한 도구였다.


RAND의 1세대 분석가 중 핵 저지력 문제를 연구한 대표적 인물로는 앨버트 월스테터(Albert Wohlstetter)를 들 수 있다. 냉철하면서도 사실에 근거한 분석으로 유명했던 그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국방 지식인’으로 꼽히며, 처음부터 보기 드문 매파였다.


그는 1951년에 싱크탱크에 합류하여 수학 분과의 자문으로 활동했다. 그의 아내 로버타(Roberta)도 RAND 사화과학 분과에서 서평가로 일했는데, RAND의 경제 분과 책임자인 찰스 히치(Charles Hitch)가 미국 전략공군사령부(Strategic Air command, SAC)의 해외 기지가 들어설 적절한 장소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RAND팀의 연구 결과는 「전략 기지의 선택 및 활용 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제출되었고, 월스테터는 이 내용으로 1950년대 말에 「공포의 미묘한 균형(The Delicate Balance of Terror)」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두 핵강국이 대치한 상황에서는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세간의 믿음에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월스테터는 게임이론의 최대최소 정리를 간단하게 언급한 후, “소련의 전략을 분석할 때에는 서방 국가의 이점보다 소련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며, 양쪽의 전략을 정량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한 전략의 효율성은 양쪽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며, 이 상호작용은 복잡한 수학적 과정을 거쳐야 알 수 있다.”


그의 결론은 “핵 교착 상태란 있을 수 없으며 경계 완화는 금물이다”로 요약된다. 미국의 취약점이 노출되면 소련이 선제공격을 해올 것이고, 이를 막으려면 미국이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논리다.

[1985년 부인과 함께 ‘자유의 메달’을 수여 받는 월스테터(좌) 출처 구글 이미지]

핵무기 대치 시대가 시작되다


1950년에 RAND는 다양한 연구를 통해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이 미국 공군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국방부는 1951년에 3,000파운드(약 1,400킬로그램)짜리 로켓을 5,000마일(8,000킬로미터)까지 날려 보내는 아틀라스 미사일 프로젝트(Atlas Missile Project)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로켓에 실을 수 있는 폭탄 무게의 한계로 위기에 처했지만, 1953년 노이만과 텔러는 RAND의 물리학자들에게 로스앨러모스에서 제작 중인 폭탄이 로켓에 실을 수 있는 정도로 가벼워질 수 있음을 알려주었고, “어딘지 모를 곳에서 갑자기 폭탄이 날아와 도시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아널드의 꿈이 곧 실현될 것 같았다.


이 뉴스는 공군 수석 과학자 데이비드 그릭스(David Griggs)를 거쳐 RAND의 또 다른 물리학자 브루노 아우건스타인(Bruno Augenstein)에게 전했고, 아우건스타인은 뉴스에 담긴 정확한 의미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작업을 서두른 이유는 1953년 8월 12일에 소련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릭스와 아우건스타인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소련의 핵실험에서 떨어진 낙진에는 소량의 리튬(Li)이 섞여 있었다. 이는 곧 상온에서 고체로 존재하는 중수소화리튬(LiD)이 수소폭탄의 연료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만일 소련이 중수소화리튬의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면, 폭격기 탑재가 가능할 정도로 작은 폭탄을 만들어 로켓의 탄두에 장착할 수도 있다.


공군은 지난 10월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실효성을 검증하기 위해 11명의 과학자와 공학자로 이루어진 ‘주전자위원회(Teapot Committee)’를 결성했는데, 위원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바로 노이만이었다.

[Teapot 위원회 관련 자료 출처 구글 이미지]

1954년 2월 8일, 아우건스타인이 새로 작성한 보고서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 프로그램 수정안(A Revised Development Program for Ballistic Missiles of Intercontinental Range)」이 공군본부에 도착했다.


노이만이 이끄는 주전자위원회의 보고서는 이틀 후에 도착했는데, 신기하게도 두 보고서의 내용이 거의 비슷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에 미국은 아틀라스 프로젝트에 부과된 엄격한 규제를 완화하고, 수소폭탄이 장착된 미사일을 개발하는 속성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1957년 8월 21일, 소련의 R-7 로켓 ‘세묘르카(Semyorka)’가 카자흐스탄에 있는 바이코누르 우주선발사기지에서 이륙하여 4,000마일(8,400킬로미터) 상공에 도달했고, 몇 주 후에는 동일한 로켓에 실린 스푸트니크 1호 위성이 지구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노이만이 주도한 프로그램의 결과물로 탄생한 아틀라스 로켓은 1958년 11월 28일에 첫 비행에 성공했으며, 탄두를 장착한 아틀라스 로켓은 아우건스타인이 예상했던 날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정식으로 운용되기 시작했다. 단추 하나로 전 세계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 대치 시대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최초의 ICBM SM-65 Atlas와 아틀라스 로켓들 출처 구글 이미지]

RAND에서는 노이만의 게임이론을 국방 정책에 접목하는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이 연구를 가장 적극적으로 홍보한 사람은 허먼 칸(Herman Kahn, 1922 - 1983)이었다. 칸은 핵 저지력을 주제로 자신이 강연했던 내용을 모아서 600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작성했다. 월스테터는 당장 태워버리라고 했지만 결국 이 원고는 『열핵전쟁(On Thermonuclear War)』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양장본으로 무려 3만 부가 팔려나갔다.


칸의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은 핵전쟁이라는 암울한 주제에 블랙 코미디를 가미하여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풍자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바로 “가장 위대한 코미디 영화 100편” 중 3위를 차지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이다.

[허먼 칸과 열핵전쟁 출처 구글 이미지]
[스탠리 큐브릭과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출처 구글 이미지]

전쟁의 개념이 달라지다


RAND에서 마지막으로 게임이론을 핵 저지력 문제에 적용한 사람은 하버드 대학교의 경제학자 토머스 셸링(Thomas Schelling, 2005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이다. 전쟁을 일종의 협상 행위로 간주했던 그는 195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갈등을 해소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안했다.


“게임이론은 단순한 갈등(제로섬 게임)에 중요한 통찰과 조언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충돌과 상호 의존이 혼재된 상황(전쟁, 전쟁의 위협, 파업, 협상, 범죄 예방, 계급투쟁, 인종 갈등, 가격 할인 전쟁, 협박 메일, 관료제나 사회적 위계질서, 교통 체증, 자녀 교육 등)에서 기존의 게임이론은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셸링은 “암묵적 소통만으로는 국가나 집단 사이의 충돌이 핵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경고했고, 쿠바 미사일 사태가 발발하기 몇 년 전에,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 사이에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대화 채널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마스 셸링과 저서 출처 구글 이미지]

핵 저지력에 관한 노이만의 마지막 책 『원폭 전쟁의 방어(Defense in Atomic War)』(1955년)에는 새로운 폭탄의 위력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금 미국과 소련의 무기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아군과 적군이 사용했던 폭탄의 총량은 수백만 톤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자폭탄 하나만으로 그보다 훨씬 큰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91 제2차 세계대전에 동원된 모든 무기와 병력을 단 한 대의 비행기에 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노이만은 과거와 현재의 전쟁 양상이 크게 달라졌음을 강조했다. 과거에는 전투원들의 능력에 따라 전황이 오락가락했지만, 초강대국이 초강력 무기를 보유한 지금은 전쟁의 개념 자체가 달라졌고, 항상 이 카드는 최후의 선택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것이다.


인내심 전략(적의 선제공격에 무조건 보복하는 전쟁 오르가즘의 반대 전략)은 1960년대에 RAND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재래식 군대의 소규모 공격에 대응하여 핵무기로 으름장을 놓는 작전은 소련의 침략(동유럽 침략)을 저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소규모 전쟁에 대한 RAND의 기본 대응 방침은 ‘카운터포스(counterforce)’였다. 전쟁 초기에 도시를 제외한 곳에 보복을 가한다는 이 전략은 RAND의 버나드 브로디가 처음 개척했고 RAND의 분석가들이 게임이론을 도입하여 보완한 후, 윌리엄 카우프만(William Kaufmann)에 의해 가장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다듬어졌다


RAND 전문가들의 간접적인 도움을 받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가 1960년 대선에 승리한 후로, 미국 정부에는 카운터포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RAND식 해결법’은 미군의 사고방식에 깊이 각인되어, 미-소 핵충돌 방지책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중동의 소규모 전쟁 계획을 수립하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카우프만과 최근 전쟁 억지 전략 출처 구글 이미지]

“우리는 빌려온 시간에 살고 있다”


지난 2019년 6월, 미국 국방부에서 소규모 핵전쟁 계획과 실행 방안에 대한 미군의 지침이 웹사이트에 공개되는 사고가 벌어졌다. 「합동 핵작전(Joint Nuclear Operations)」이라는 제목의  60페이지짜리 문서 JP 3-72는 사이트에 올라오자마자 신속하게 삭제되었지만, 내용은 이미 공개되었다.


문서의 세 번째 장인 ‘계획 및 표적 선정(Planning and Targeting)’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핵무기는 앞으로 100년 안에 사용되겠지만, 제한된 지역 안에서 제한된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1962년에 출간된 책 『상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상』에서 인용한 것으로, 책의 저자는 허먼 칸이었다.


2005년에 토머스 셸링은 노벨상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지고 더 많은 국가와 테러 집단이 핵무기를 갖게 된 지금, ‘핵무기 사용에 대한 범세계적 거부감’이 과거처럼 작동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빌려온 시간(진작 끝날 운명이었는데, 덤으로 할당받은 시간)에 살고 있는 셈이다.”


1950년대 중반에는 노이만도 빌려온 시간에 살고 있었다. 방사성 물질을 자주 다뤄서 그랬는지, 몸에 해로운 식습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운이 없었는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췌장에서 자라난 암세포가 서서히 그의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노이만은 그 마지막 몇 년 사이에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창의적인 업적을 남겼다.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의 경이로운 능력을 바닥부터 철저하게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이 만든 초고속 컴퓨터의 한계와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물인 인간 두뇌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8장 생명의 논리를 찾아
스스로 복제하는 기계와 마음을 만드는 기계

그녀가 말했다. “안드로이드도 우리처럼 외로울 거야.”
—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필립 딕


엔지니어 겸 수학자인 애드리언 보이어(Adrian Bowyer)는 훗날 ‘다윈식 마르크스주의’라 불리게 될 아이디어를 2004년에 처음으로 떠올렸다. ‘스내피(Snappy)’라 불리는 이 기계는 렙랩(RepRap, Replicating Rapid Prototyper), 즉 자신을 복제하는 3D 프린터로서, 전체 부속품의 80퍼센트를 프린트할 수 있다.

[애드리언 보이어(좌)와 렙랩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아이디어가 구현되면 모든 가정집은 무엇이건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직접 생산하는 공장이 될 것이다(물론 아직은 플라스틱제 물건만 만들 수 있다). 오타와에 있는 칼턴 대학교의 공학자들은 부족한 20퍼센트(나사, 모터 등)까지 복제하여 ‘완벽한 자기복제’가 가능한 프린터를 연구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달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만으로 작동하는 프린터를 구상 중이다. 현장에서 채취한 재료만으로 자신의 부품을 재생하는 로버(rover, 탐사용 로봇)를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다. 이 기계가 달에 설치되기만 하면 자기복제를 통해 개체수를 늘이고, 늘어난 노동력을 이용하여 반자동으로 가동되는 우주 공장을 짓고, 얼마 후 도착할 인간을 위해 달 기지를 건설하는 등, 어떤 임무도 해낼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을 복제하는 기계


이 모든 시도에 영감을 불어넣은 책이 바로 노이만의 『자기복제 오토마타 이론(Theory of Self-reproducing Automata)』이다(아서 벅스가 노이만 사후 그의 자료들을 정리해서 10년만인 1966년에 정식 출간).

[출처 구글 이미지]


한편 노이만은 1951년에 『오토마타의 일반적 및 논리적 이론(The General and Logical Theory of Automata)』을 썼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일반적으로 자연 유기체는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사람이 만든 기계보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기체에서 발견된 일부 규칙은 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단백질 구조 분석 제안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에 대한 매컬러와 피츠의 논문을 읽은 후로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된 노이만이 이 무렵 제안했던 가장 흥미로운 주제 중의 하나는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단백질은 세포 안에서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하는 생명의 기본요소이며, 대부분의 유전자에는 단백질 생성에 필요한 암호가 저장되어 있다.


1940년대에도 단백질은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있었지만 당시는 분자구조가 밝혀지기 전이었고, 엑스선 결정학(crystallograpy)은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단백질 결정에 엑스선을 쪼인 후 뒤쪽 스크린에 나타나는 반점의 패턴을 분석하면 단백질의 내부 구조를 추측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 필요한 계산량이 당시 컴퓨터의 용량을 훨씬 초과한다는 점이었다.


1946년과 1947년에 노이만은 단백질의 사이크롤 모형(cyclol model)을 개발한 미국의 저명한 화학자 어빙 랭뮤어(Irving Langmuir, 1881~1957, 1932년 노벨 화학상 수상)와 수학자이자 생화학자인 도러시 린치(Dorothy Wrinch, 1894~1976)를 만났다. 린치는 단백질을 ‘서로 연결된 여러 개의 고리’라고 생각했는데, 훗날 이 가정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어빙 랭뮤어와 도러시 린치 출처 구글 이미지]

당시 노이만은 분자를 수 센티미터짜리 금속 구로 바꾸고 엑스선 대신 레이더를 발사하여 산란된 패턴을 단백질 실험 데이터와 비교하자고 제안했다. 이 실험은 지원금을 확보하지 못해 실행되지 못했지만, 엑스선 결정학으로 단백질의 구조가 밝혀질 때까지는 다양한 기술과 이론(그리고 상당한 인내력)이 추가로 필요했고, 마침내 1958년이 되어서야 그 베일을 벗게 된다.


오토마타의 자기 복제 이론 제안


또한 노이만은 1944년부터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가 주최한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서 두뇌와 컴퓨터의 연관성을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노이만의 오토마타 이론은 1948년 9월 24일에 패서디나에서 '행동의 두뇌 역학(Cerebral Mechanics in Behavior)’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힉슨토론회(Hixon Symposium)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 자리에서 공개된 내용을 정리하여 1951년에 책으로 출판한 것이 『오토마타의 일반적 및 논리적 이론』이다.

[힉슨토론회 출처 구글 이미지]

노이만이 구축한 이론의 중심에는 '범용튜링머신'이 자리 잡고 있다. 임의의 튜링머신의 세부 구조와 작동 원리가 주어지면 범용튜링머신은 그것을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다. 노이만은 “튜링머신 스타일의 오토마타가 자신을 복제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파고든 끝에, 세 가지 필요충분조건(이 조건을 만족하면 복제가 가능하고, 복제할 줄 아는 머신은 이 조건을 만족하는, 그런 조건)을 찾아냈다.


첫째, 자신을 닮은 복사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일련의 지침(명령)이 주어져야 한다. 이 지침은 원리적으로 튜링의 종이테이프와 비슷하지만, 기계 자체와 동일한 재질이어야 한다.

둘째, 기계에는 이 지침을 실행하여 새로운 오토마타를 만들 수 있는 구성 장치(조립 도구)가 있어야 한다.

셋째, 이 기계는 새로운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지침서를 작성하여 새로 만든 기계의 어딘가에 저장해야 한다(그래야 새로 만들어진 기계도 또 다른 복사본을 만들 수 있다).


DNA의 구조가 밝혀지기 5년 전에, 그리고 과학자들이 세포의 복제 과정을 이해하기 한참 전에, 노이만은 하나의 개체가 자신을 복제할 때 거쳐야 할 기본적 단계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의 이론적 기초를 다져놓았다.


오토마타 이론과 자기복제기계의 원리


1951년에 출간된 노이만의 책을 가장 먼저 읽은 사람 중에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 200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라는 생물학자가 있었다. 훗날 막스 델브뤽(Max Delbrück, 196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과 함께 박테리오파지를 연구하고, 1960년대에는 크릭과 함께 유전자 암호를 해독하게 될 사람이다.

[시드니 브레너와 막스 델브뤽 출처 구글 이미지]

그는 1953년 4월에 DNA의 이중나선 모형을 보는 순간 “기계를 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계의 특성을 결정하는 정보까지 복제되어야 한다는 건 DNA의 구조가 발견되기 전에 노이만이 이미 증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전적으로 옳았다. DNA는 정보를 복제하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였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노이만이 상상했던 최초의 인공생명체는 바다에 표류하는 여덟 종류의 ‘부품(또는 기관organ)’이었다. 각 부품은 고유한 기능을 갖고 있으며, 수도 충분히 많다, 8개 중 4개는 논리연산을 수행하는 부품으로 이들 중 1개는 신호발생장치이고 나머지 3개는 신호처리장치이다.


신호처리장치 3개는 각각 ‘자극기관’, ‘우연기관’, 그리고 ‘억제기관’인데, ①자극기관은 2개의 입력장치 중 하나가 신호를 감지했을 때 활성화되고 ②우연기관은 두 입력장치가 모두 신호를 감지했을 때 활성화되며, ③억제기관은 두 입력장치 중 하나만 작동할 때 활성화된다. 나머지 4개는 구조 관련 부품으로, 하나는 지주(버팀대)이고 2개는 지주를 자르거나 붙여서 더 큰 배열을 만드는 기관이며, 마지막 하나는 자극을 받았을 때 수축하는 근육이다.


오토마타가 따라야 할 이진수 명령(DNA)은 종이 테이프 대신 지주 자체에 정교한 방식으로 암호처럼 새겨져 있다. 여러 개의 지주가 톱니 모양으로 연결되어 척추를 형성하고, 각 연결 부위에 또 다른 지주가 연결되어 있으면 ‘1’, 그렇지 않으면 ‘0’이 할당된다. 종이테이프에 쓰거나 지우는 동작이 “연결 지주를 추가하거나 없애기”로 바뀐 것이다.

[지주로 만들어진 2진수 테이프 출처 본문]

노이만이 제시한 부품이 주어지면 바다에 표류하는 오토팩을 만들 수 있으며, 완성된 오토팩은 주변에 떠다니는 부품을 수집하여 자신의 ‘지주 DNA’와 똑같은 DNA를 가진 또 다른 오토팩 복사본을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실수로 지주가 부러지거나 원형보다 길어지면 변이가 탄생하는데, 대부분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가끔은 아무 이상이 없거나 오히려 개선된 오토팩이 탄생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노이만이 상상했던 자기복제 모형의 초기 버전이다. 당시 울람은 단순한 규칙에 따라 주변과 상호작용하는 2차원 결정격자(2-D crystalline lattice) 오토마타 모형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노이만이 여기서 힌트를 얻어 개발한 것이 바로 ‘세포 오토마타 모형(cellular model of automata)’이다.


세포 오토마타 모형의 구조


노이만의 자기복제 오토마타는 끝없이 펼쳐진 2차원 격자에 살고 있다. 각 사각형(또는 세포)은 각기 다른 29가지 상태 중 하나에 놓일 수 있으며, 자신과 맞닿은 4개의 사각형하고만 통신을 교환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각형(세포)는 휴면 상태에 있다가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깨어났다가 다시 휴면상태로 돌아간다. 나머지 28개의 상태 중 8개는 자극을 전달할 수 있는 전송상태,  다른 8개는 ‘특별한’ 자극을 전달하는 전송상태, 4개는 ‘두 시간 단위’만큼 지연된 신호를 전달하는 ‘융합 상태(confluent state)’, 마지막 8개는 ‘민감한 상태(sensitized state)’로서 특정 입력 신호가 들어오면 ‘융합 상태’나 ‘전송 상태’로 바뀐다.


노이만은 이 ‘살아 있는 행렬’을 이용하여 거대한 장치를 만들었다. 그의 작업은 서로 다른 세포를 결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렇게 초기에 사용된 세포를 ‘기본 기관(basic organ)’이라 한다. 기본 기관 중 하나는 자극에 반응하여 일련의 초기 펄스를 만들어내는 ‘펄서(pulser)’이며, 또 다른 기본 기관은 특정한 이진배열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신호를 출력하는 ‘디코더(decoder)’이다.


다음으로 노이만은 자기복제에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품을 조립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일련의 휴면 세포(‘0’)와 전송 세포(‘1’)로 테이프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테이프셀(테이프의 한 구획)에서 읽거나 쓸 수 있는 제어 장치(control unit)를 추가하면, 2차원에서 작동하는 범용튜링머신이 만들어진다.


다음으로 노이만은 격자의 모든 세포를 향해 구불구불 뻗어 나가서 원하는 상태로 자극을 준 후, 곧바로 회수할 수 있는 ‘팔’을 만들었다. 설계도에 그려진 웅장한 건물은 노이만이 세상을 떠나고 몇 해가 지난 후 그의 연구 노트에 적힌 대로 조립을 수행한 아서 벅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다.


완성된 기계의 몸체는 80×400개라는 만만한 개수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여기에는 자기복제에 필요한 지침을 15만 개의 사각형에 저장한 긴 꼬리가 달려 있다. 시작 신호가 울리면 괴물 같은 기계가 테이프에 적힌 명령을 읽고 실행하면서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자신과 똑같은 복사본을 만들기 시작한다. 촉수처럼 생긴 팔이 지정된 위치까지 길게 뻗어나와서 세포를 차곡차곡 쌓으며 자손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조립이 완료되면 팔이 수축되어 부모 기계의 몸으로 돌아가고, 새로 태어난 자손 기계는 당장이라도 자기복제를 시작할 수 있다. 외부에서 제어를 하지 않으면 오토마타는 자기복제를 무한정 실행하면서 방대한 공간을 자신과 똑같은 오토마타로 가득 채울 것이다.

[노이만의 자기 복제 범용 조립 장치, 출처 본문]

이것이 바로 벅스가 원하는 결과였다. 『자기복제 오토마타 이론』이 출간된 1966년에는 노이만이 설계한 29개의 상태를 구현할 정도로 강력한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벅스는 자신이 완성한 오토마타가 자기복제에 성공하리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1944년에 노이만이 실행했던 첫 번째 시뮬레이션은 속도가 너무 느려서, 복사본은 다음 해에 논문이 발표될 때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노이만의 자기복제 오토마타는 수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인공생명’을 연구하는 새로운 과학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자기복제장치는 과도하게 설계되었다. 이런 복잡한 기계가 원시적인 디지털 흙구덩이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진다는 것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아가 "더 단순한 오토마타가 시간이 흐를수록 복잡하고 튼튼해져서 누구나 ‘생명체’로 인정할 만한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자기복제 오토마타 이론』이 출간된 직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한 수학자가 책을 대충 훑어보다가 이 질문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훗날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세포 오토마타를 선보이게 된다.

[콘웨이 출처 구글 이미지]

콘웨이의 ‘라이프’ 게임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박사과정을 마친 게임마니아 존 호턴 콘웨이(John Horton Conway, 1937~2020, 프린스턴 대학교 수학과 교수)는 바둑에서 힌트를 얻어 노이만의 29개 상태를 ‘죽었거나 살았거나’의 단 두 가지 상태로 줄이고 2차원 격자로 만들어 다음과 같이 규칙을 단순화했다.


(1) 8개의 이웃 중 2개, 또는 3개가 살아 있으면 중심세포는 살아남는다.
(2) 8개의 이웃 중 4개 이상이 살아 있으면 중심세포는 (압사당해서) 죽는다. 그리고 8개의 이웃 중 살아 있는 세포가 1개 이하이면 중심 세포는 (외로워서) 죽는다. (죽은 돌(세포)은 게임판에서 제거된다)
(3) 텅 빈 세포(빈칸)의 이웃 중 정확하게 3개가 살아 있으면, 그 중심에서 새로운 세포가 탄생한다(즉 새로운 돌이 게임판에 올려진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세포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몇 세대(위의 규칙에 따라 한 번 변할 때마다 한 세대가 지난 것으로 간주한다)를 거치는 동안 이상한 형태가 나타나서 점점 커지거나 무無로 사라졌다. 그들은 이 게임을 ‘라이프(Life)’라 불렀다. 콘웨이의 오토마타는 노이만의 모형에서 볼 수 없었던 생명체의 특징을 보여주었으니, 그것은 바로 ‘운동(locomotion)’이었다.

[라이프 게임 출처 구글 이미지]

콘웨이는 게임을 하면서 발견한 특이사항들을 차트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친구인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에게 보냈다. 가드너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수학 게임(Mathematical Games)’이라는 칼럼을 연재하여 퍼즐 마니아와 프로그래머, 회의론자, 그리고 수학광들 사이에서 거의 전설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콘웨이의 게임 ‘라이프’를 소개하는 가드너의 칼럼이 1970년 10월에 게재되자 사방에서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개중에는 뉴델리와 도쿄, 심지어 모스크바에서 온 편지도 있었다. 울람도 이 대열에 합류하여 오토마타를 주제로 자신이 쓴 논문 몇 편을 콘웨이에게 보내기도 했다.

[콘웨이가 가드너에게 보낸 게임 규칙과 특이사항들 출처 본문]
[가드너와 수학 게임 게재 글 출처 구글 이미지]

그의 오토마타는 노이만보다 훨씬 단순한 시스템으로 놀라운 복잡성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게다가 콘웨이는 노이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 자체를 유지할 수도 있다고 확신했다. “‘라이프’는 충분히 큰 규모에서 살아 있는 배열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삶을 살아가고, 진화하고, 번식하고, 영역 다툼을 하고, 박사학위 논문도 쓸 수 있다.” 물론 그러려면 게임판은 우주보다 큰 정도로 커야 한다.


단순한 규칙에서 창발하는 복잡한 현상


콘웨이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외롭게 쟁기질을 해오던 오토마타 마니아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 고립된 집단의 본부 격인 미시간 대학교에서 아서 벅스가 1956년에 설립한 학제간연구센터 ‘컴퓨터논리그룹(Logic of computers Group)’은 콘웨이의 게임이 탄생한 후로 수학적 유기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메카가 되었다.


‘미시간 그룹’은 1960년대에 최초로 오토마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실행했고, 수많은 오토마타 연구팀이 이곳에서 파생되었다. 그룹의 초기 멤버 중 한 사람이자 1975년에 세포 오토마타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작성했던 토마소 토폴리(Tommaso Toffoli)는 오토마타와 물리적 세계 사이에 심오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토폴리는 복잡한 물리법칙에 오토마타 이론을 적용하면 훨씬 간단한 형태로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기 그지없는 양자역학의 세계도, 단순한 규칙을 따르는 노이만의 수학 기계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을 확인하려면 ‘가역적 오토마타(reversible automata)’ 즉 역으로 추적이 가능한 오토마타가 존재한다는 것부터 증명해야 한다(예를 들어 ‘라이프’의 2차원 버전은 ‘텅 빈 게임판’으로 끝나기 때문에 추적이 불가능하다).


토폴리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가역적 오토마타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게임판의 차원을 늘이면 모든 오토마타를 가역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증명했다(예를 들어 ‘라이프’의 3차원 버전은 가역적이다).


토폴리가 박사학위 과정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던 중, 과거에 MIT 인공지능연구소 소장을 지냈던 에드워드 프레드킨(Edward Fredkin)이 접촉을 시도해왔다. 프레드킨은 토폴리에게 새로 조직된 정보역학그룹(Information Mechanics Group)에 합류할 것을 권했고, 토폴리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MIT 그룹은 곧 오토마타 연구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 분야에서 토폴리가 이룩한 업적 중 하나는 컴퓨터과학자 노먼 마골러스(Norman Margolus)와 함께 슈퍼컴퓨터보다 빠르게 세포 오토마타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세포 오토마타 머신(Cellular Automata Machine, CAM)’을 설계한 것이다.

[Claude Shannon, John McCarthy, Professor Fredkin and Joe Weizenbaum, in 1968 출처 구글 이미지]
[토폴리와 저서 출처 구글 이미지]

1982년에 프레드킨은 그의 사유지인 카리브해의 모스키토섬(지금은 영국의 억만장자 리처드 브랜슨(Richard Branson)의 소유로 넘어갔다)에서 비공개 정보학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젊은 수학자 스티븐 울프럼(Stephen Wolfram, 1959~)이 등장하면서 예기치 않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울프럼의 1차원 오토마타와 새로운 과학


프레드킨과 마찬가지로 울프럼은 자연계의 복잡성이 반복적으로 실행되는 단순한 계산 규칙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심지어 그 규칙은 단 하나일 수도 있다). 그는 약간의 계산을 거친 후, 단일 세포 오토마타가 이 규칙을 10의 400제곱쯤 실행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물리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스티븐 울프럼 출처 구글 이미지]

울프럼의 오토마타는 1차원에서 진행된다. 노이만과 콘웨이의 이론은 2차원 평면에서 펼쳐졌는데, 울프럼은 1차원 수평선을 놀이터로 삼은 것이다. 이곳에서 각 세포는 오른쪽과 왼쪽에 하나씩 2개의 이웃을 가질 수 있으며, 죽거나 살아 있거나 둘 중 하나의 상태에 놓일 수 있다. 그는 오토마타의 생사를 좌우하는 규칙이 매우 단순하다는 뜻에서 이 게임을 ‘기본 세포 오토마타(elementary cellular automata)’라 불렀다.


울프럼의 게임에서 하나의 세포는 자신과 인접한 세포하고만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이들과 자신의 상태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 인접한 3개의 세포는 총 8가지 상태에 놓일 수 있다. 살아 있는 상태를 ‘1’, 죽은 상태를 ‘0’으로 표기하면 가능한 배열은 111, 110, 101, 100, 011, 010, 001. 000이다.


울프럼은 오토마타의 생사를 좌우하는 8개의 규칙을 0~255 사이에 있는 하나의 숫자에 대응시키기로 했다. 여기서 선택된 숫자(십진수)를 이진수로 바꾸면 1과 0으로 이루어진 8자리 숫자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위에 열거한 8가지 배열(111, 110, 101…)에서 중앙에 있는 세포의 다음 단계 상태(죽기 아니면 살기)를 나타낸다(이 게임은 각기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255가지 버전으로 실행할 수 있다.

[기본 세포 오토마타에 적용된 울프럼의 규칙 출처 본문]

규칙-90을 적용하면 좀 더 복잡한 무늬를 얻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삼각형 속의 삼각형’ 형태로서, 삼각형 속에 작은 삼각형이 반복적으로 들어 있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각기 다른 스케일에서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는 형태를 프랙탈(fractal)이라 하는데, ‘시어핀스키 삼각형(Sierpiński triangle)’으로 알려진 규칙-90의 결과는 다른 종류의 세포 오토마타에서도 볼 수 있다.

[출처 구글 이미지]

규칙-30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가운데 있는 세포의 다음 단계 색은 가운데 세포와 오른쪽 세포가 모두 흰색인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왼쪽 세포의 색과 항상 반대이다.” 가운데와 오른쪽 세포가 모두 흰색인 경우, 가운데 세포의 다음 단계 색은 이전 단계의 왼쪽 세포와 같다. 그런데 검은 세포 하나에서 출발하여 50세대쯤 내려가면 거의 혼돈에 가까운 무늬가 나타난다.


표준통계법으로 분석을 해봐도 검은 세포와 흰 세포는 전혀 반복패턴이 없고 완전히 무작위로 나타난다. 이 결과가 발표되자 많은 사람들이 규칙-30의 무작위 삼각형 무늬와 미묘하게 닮은 소라 껍데기를 울프럼에게 보내왔고(위 사진 참조), 그는 소라 껍데기건 양자역학이건 이런 패턴이 자연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단 몇 줄짜리 기본 알고리듬으로 자연의 무작위성을 재현할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규칙 30을 적용한 무늬와 비슷한 모양의 청자고동의 껍데기 출처 본문]

울프럼은 규칙-110에서 더욱 놀라운 거동을 발견했다. 이전과 똑같이 검은 사각형 1개에서 출발했는데, 검은 무늬가 왼쪽으로만 확장되면서 전체적으로 직각삼각형 형태로 자라난 것이다(규칙-30은 좌우로 똑같이 퍼진 피라미드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패턴은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혹시 이런 규칙이 콘웨이의 ‘라이프’ 게임에 나오는 ‘글라이더’처럼 한 부위에서 다른 부위로 신호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한 이 1차원 기계는 범용 컴퓨터가 될 수도 있다. 1990년대에 울프럼의 연구조교였던 수학자 매슈 쿡(Matthew Cook)은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규칙 110과 확대한 모양(라이프 게임의 글라이더와 비슷한 모양) 출처 본문]

울프럼은 이런 식의 컴퓨터 실험에 기초하여 오토마타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예를 들어 규칙-0이나 규칙-255처럼 초기 배열에 상관없이 균일한 최종 상태로 빠르게 수렴하는 오토마타는 클래스 1에 속한다. 그리고 몇 가지 가능한 결과들 중 하나로 끝나면 클래스 2에 속하는데, 최종 패턴은 안정적이거나 규칙-90(시어핀스키 삼각형)에서 얻은 프랙탈처럼 각 단계마다 같은 무늬가 반복된다.


또한 규칙-30 같은 무작위 패턴은 클래스 3에 속하고, 마지막으로 규칙-110처럼 불규칙한 무늬가 ‘움직이면서 상호작용하는 규칙적 구조’에 의해 끊기는 경우는 클래스 4에 속한다. 범용 계산이 가능한 모든 오토마타는 이 4개의 클래스 중 어딘가에 속해 있다.


오토마타를 주제로 울프럼이 발표한 일련의 논문은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개중에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노이만 시대의 학풍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수학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가 (울프럼의 연구실을 가득 채운) 컴퓨터로 얻어진다는 주장에 심한 반감을 드러냈다.


울프럼은 1983년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합류했다가 4년 만에 학계와 연을 끊고 ‘울프럼리서치(Wolfram Research)’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의 주력 상품이었던 ‘매스매티카(Mathematica)’는 그가 설계한 컴퓨터 언어로 만들어진 강력한 수학 계산용 프로그램으로, 1988년에 출시된 후 지금까지 수백만 부가 팔려나갔다.


이후 울프럼은 자신이 새로 설립한 회사에 전념하느라 세포 오토마타에 대한 연구를 한동안 중단했다가, 2002년에 『새로운 과학(A New Kind of Science)』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드라마틱한 복귀를 선언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학계를 떠나 은둔자처럼 숨어 살다가, 느닷없이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의 초안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과학계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한 울프럼은 다시 한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거의 20년이 지난 2020년 4월에 또다시 컴백했다. 울프럼리서치의 연구팀이 두 명의 젊은 물리학자 조너선 고라드Jonathan Gorard와 막스 피스쿠노프Max Piskunov의 응원에 힘입어, 각기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1,000개의 우주를 시뮬레이션한 것이다.


일부 물리학자들은 울프럼의 주장에 관심을 보였지만, 학계의 전반적인 반응은 여전히 썰렁했다. 하지만 울프럼이 세포 오토마타를 지도에 그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작업을 해낸 사람은 울프럼이 유일하다. 그의 책은 오토마타를 생명의 대략적인 시뮬레이션이 아닌 원초적 본질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연구 의욕을 끝없이 자극하면서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기계 속의 작은 우주


노이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수학이 단순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인생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기초한 진화론에 완전히 매료되었으며, 고등연구소의 5킬로바이트(0.005메가바이트)짜리 머신으로 DNA처럼 자신을 복제하면서 가끔씩 변이를 낳는 일련의 코드를 실행했다.


노이만이 갈아놓은 토양에 ‘디지털 라이프’의 씨앗을 처음으로 뿌린 사람은 완고하기로 유명했던 노르웨이 태생의 이탈리아 수학자 닐스 알 바리첼리(Nils Aall Barricelli)이다. 진정한 독불장군이었던 바리첼리는 박사학위 과정 졸업을 코앞에 두고 500페이지짜리 장문의 학위논문을 제출했다가 분량을 줄이라는 심사위원의 요청을 거절하는 바람에 학위를 받지 못했다.


노이만은 바리첼리가 고등연구소 머신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해왔을 때 흔쾌히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연구 보조금을 신청하는 지원서까지 써주었다. “유전학에 대한 바리첼리의 연구는 매우 독창적이면서 흥미롭습니다. … 그의 연구에는 많은 계산이 필요한데, 이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최첨단 고속 디지털 컴퓨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1953년 1월에 프린스턴에 도착한 바리첼리는 3월 3일 밤에 자신이 만든 숫자 생명체를 디지털 서식지에 풀어놓았다. 바로 이날이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이라는 분야가 처음으로 탄생한 날이다. 그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만으로는 새로운 종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으며, 서로 다른 두 유기체가 긴밀하게 협조하여 하나의 복잡한 생물로 융합하는 ‘공생발생(symbiogenesis)’이 훨씬 그럴듯한 설명이라고 주장했다.


노이만의 기계 안에 바리첼리가 창조한 작은 우주는 공생발생설에서 착안하여 “유전자도 과거에는 바이러스 같은 유기체였다가 서로 결합을 시도하여 훗날 출현할 다세포 유기체의 모태가 되었다”는 가설을 확인할 목적으로 설계된 것이다.


바리첼리의 시뮬레이션에서는 수십 년 후에 울프럼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얻게 될 것과 비슷한 패턴이 나타났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바리첼리의 숫자 유기체가 바로 1차원 오토마타였던 것이다. 또 이번 실험에서는 펀치카드에 흥미로운 현상이 기록되었는데, 바리첼리는 이것을 ‘자체 수리(self-repair)’나 ‘부모 유전자 서열 전승(crossing of parental gene sequence)’과 같은 생물학적 사건과 연결시켰다.


바리첼리는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공생발생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생명체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지구뿐만 아니라 외계행성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결론지었다. 오늘날 공생발생은 단순한 원핵생물(prokaryotic organism, ‘원핵’이라는 원시적 세포핵을 가진 생물. 이들이 진화하여 진핵생물이 되었음)에서 식물 세포와 동물 세포가 탄생한 이유를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인공생명을 주제로 한 최초의 학술회의는 1987년 9월에 로스앨러모스에서 개최되었는데, 물리학자와 인류학자, 생물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 160명이 한 자리에 모여 사흘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워크샵을 주도해썬 컴퓨터과학자 크리스토퍼 랭턴(Christopher Langton)은 바리첼리가 자주 쓰던 용어로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그의 업적을 상기시켰다. “인공생명은 자연 생명체의 특성이 반영된 인공적 시스템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생명체의 정수를 논리적 형태로 추출하는 것이다.“


자기복제를 할 수 있는 최초의 인공 생명체


랭턴은 노이만의 29가지 상태 오토마타를 영국의 컴퓨터 과학자 에드거 코드(Edgar Code)가 8-상태로 단순화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것을 보고 이후 여러 번의 단순화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고리(loops)’(‘랭턴 루프’)라는 형태에 도달했다.


고리의 복제가 시작되면 팔이 길게 자라다가 한쪽으로 말리면서 부모를 닮은 사각형 딸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한 번의 복제 주기가 끝나면 부모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부모와 딸의 몸에 새로운 팔이 자라면서 다음 주기의 복제 과정이 시작된다. 단, 4개의 면 모두가 다른 고리의 팔로 에워싸인 경우에는 새로운 팔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이 수명을 다하면 ‘죽은 몸체’가 중심부에 쌓이고, 그 주변을 산호초 같은 외피층이 에워싸게 된다.

[크리스토퍼 랭턴과 ‘랭턴 루프’, ‘루프 군집’ 출처 구글 이미지, 본문]

랭턴은 다양한 오토마타로 실험을 반복하다가 ‘람다lambda(λ)’라는 일종의 조절용 다이얼을 도입했다. λ값을 0에 가깝게 세팅하면 반복되는 패턴으로 고정되고 1에 가깝게 세팅하면 무작위 패턴으로 의미있는 계산이 나타나지 않으며, 울프럼의 클래스 4 오토마타는 정보를 안정적으로 저장하고 전송할 수 있는 λ값에 대응된다.


노이만이 말했듯이 모든 생명은 뾰족한 칼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거기서 한쪽으로 치우치면 퇴화하는 쪽으로 합성이 진행되고, 반대쪽으로 치우치면 합성이 폭발적으로 일어나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과거에 지구의 원시생명체가 우연히 이 지점을 찾았다면, 그들보다 훨씬 똑똑한 인간이 다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1989년에 한 학술지에 기고한 글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인류는 금세기(20세기) 중반에 생명을 소멸시킬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아마도 금세기 말에는 생명을 창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이 부과될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인공 유기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2010년이었으니, 랭턴의 예측은 10년쯤 빗나간 셈이다.


바로 그해에 미국의 생명공학자이자 사업가인 크레이그 벤터(Craig Venter)와 그의 동료들은 박테리아의 일종인 우폐역균(Mycroplasma mycoides)의 게놈(genome)과 거의 동일한 복사본을 만들어서 게놈이 제거된 세포에 이식했다.


그러자 세포는 새로운 명령에 따라 ‘부팅’되었으며, 정상적인 박테리아처럼 증식하기 시작했다.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컴퓨터를 부모로 가지면서 자기복제를 할 수 있는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다. 새로 태어난 생명에는 ‘신시아Synthi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크레이그 벤터와 ‘신시아’ 출처 구글 이미지]

노이만의 세포 오토마타는 이 분야에 등장한 모든 이론의 씨앗이 되었으며, 생명을 창조하겠다고 나선 용감한 개척자들에게 번뜩이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운동형 오토마타(kinematic a utomaton)도 결실을 맺었다.


존 케메니가 노이만의 아이디어를 일반 대중에게 소개한 직후에 한 무리의 과학자들이 그와 같은 장치를 컴퓨터가 아닌 현실 세계에 구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장치는 생명 체처럼 부드러운 재질이 아니라, 주로 볼트와 너트로 이루어진 딱딱한 기계였다.


나노기술의 선구자인 에릭 드렉슬러(Eric Drexler)는 이 장치를 '덜컹대는 복제기(clanking replicator)'라 불렸다(필립 식의 소설 제목을 따서 '오토팩스(autofacs)'라 부르기도 했다).

[덜컹대는 복제기 출처 본문]

또 다른 몽상가들은 덜컹대는 복제기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저 무한한 생산 능력을 영양가 있는 곳에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상상한 것은 필립 식의 소설에 등장하는 오토팩의 '온순한 버전'이었는데, 위스콘신-매디슨 대학교의 수학자 에드워드 무어(Edward F. Moore, 2912~2003)가 첫 번째 제안을 내놓았다. 하늘과 육지, 그리고 바다에서 원료를 추출하는 '인공생명 공장(Artificial Living Plants)'이 바로 그것이다.

[무어의 인공생명 공장 개념도 출처 구글 이미지]

자기복제 오토마타에 관심 있는 과학 자들이 무어의 프로젝트를 구제해줄 좋은 방안을 떠올렸다. 환경오염이 문제라면, 우주로 내보낼 수도 있지 않은가? 몸집을 작게 줄이면 환 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고, 지구를 그리워하지 않으므로 굳이 귀환할 필요도 없다. 노이만의 자기복제 오토마타 이론에서 탄생한 이런 유형의 우주선을 '노이만 탐사선(von Neumann probes)'이라 한다.

[폰 노이만 탐사선 개념도 출처 구글 이미지]

노이만 탐사선을 처음으로 떠올렸던 사람 중에는 노이만의 고등연구소 동료였던 프리먼 다이슨도 있었다, 그는 1970년대에 무어의 아이디어를 검토하다가 토성의 제6위성(여섯 번째로 큰 위성)인 엔켈라두스(En celadus)에 파견된 오토마타를 상상해보았다


의식을 가진 기계와 스위치 문제


1980년에 NASA는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미래의 우주 개발 계획에서 인공지능과 오토마타의 역할"을 주제로 샌타클라라에서 워크숍을 개최했고, 18개 대학과 NASA의 직원들이 모여서 10주 동안 난상토론을 벌인 끝에 완성된 최종 보고서에는 훈련 비용만 1,100만 달러로 책정되어 있었다.

 

이 중에는 리처드 레잉(Richard Laing)이 이끄는 연구팀이 노이만 스타일의 오토마타를 이용하여 달과 외계행성, 그리고 머나먼 우주까지 지구의 식민지로 개척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자기복제시스템(Self-Replicating System, SRS) 연구팀의 보고서는 자기복제기계가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론적 사례를 열거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 된다. "노이만을 비롯하여 그의 뒤를 계승한 컴퓨터과학자들은 자신을 복제하는 기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자체 성장 달 기반 생산 시설 출처 본문]

한편 이 프로젝트의 사회적 및 철학적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연구팀은 달 기지가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스스로 진화하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모든 것이 이들의 생각대로 진행된다면 달에 고립된 기계가 어느 날 '의식'이라는 것을 갖게 되지 않을까?


"외계에 설립한 자동 공장이 위협으로 간주되었을 때 언제든지 스위치를 끌 수 있어야 하는가?" 이것을 '전원 차단 문제(unpluggability problem)'라 하는데, SRS팀은 "로봇 시스템의 행동이 인간의 분석 능력을 초월하는 시점이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고 주장한다.


확산, 복제, 진화하는 노이만의 이론


1980년대에 이르러 노이만이라는 이름은 어느새 '자기복제기계'와 동의어가 되었다. 우주 탐험에 열정을 불사르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지만, 그 뒤를 이어 유전공학과 분자생물학이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노이만의 이론은 그 안에 등장하는 자기복제기계처럼 끊임없이 확산되고, 복제되고, 진화를 거듭했다. 자율적 개체들 간의 상호작용을 시뮬레이션하는 토머스 셸링의 '에이전트기반 모형(agent-based models,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결국 모이게 된다는 이론)'도 노이만의 세포 오토마타에서 파생된 것이다.

[시작 배열과 최종 배열 출처 본문]

그 후 에이전트 기반 모형이 더욱 정교해지고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면서 시뮬레이션도 디지털화되었는데, 초기 사례 중 하나가 바로 로버트 액설로드의 '죄수의 딜레마' 경연대회였다.


요즘 에이전트 기반모형은 박테리아 집단의 확장 패턴과 주택 시장의 추이에서 세금 납부 현황과 투표 진행 상황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노이만은 말년에 떠올렸던 오토마타를 인생 최고의 업적으로 여겼다(말년이라고는 하지만. 40대 후반~50대 초반). 이론에 함축된 의미가 가장 크고 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울람도 노이만의 자기복제기계가 컴퓨터 분야에 남긴 업적과 함께 가장 영속적이고 흥미로우면서 가장 가치 있는 이론이라고 했다.


이 점에는 골드스타인도 동의한다. "노이만의 자기복제 이론은 그의 초기 관심사였던 논리학과 말년에 관심을 가졌던 신경생리학 및 컴퓨터를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단 하나의 도구로 3개의 분야에 심오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수학과를 갓 졸업한 신분으로, 1948년에 ’행동의 두뇌 역학(Cerebral Mechanics in Behavior)’이라는 주제로 열린 노이만의 힉슨토론회 강연을 경청했던 존 매카시(John Mccarthy, 1923~)도 그 자리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진화론을 응용해서 똑똑한 기계를 만들고 싶었는데, 오토마타로 실험을 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하나의 오토마타가 자신의 환경에 해당하는 다른 오토마타와 상호작용을 교환해서 똑똑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것이다."


훗날 매카시는 '인공지능(AI)'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한 장본인이 되었고, 1950년대 후반에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와 함께 MIT에 인공지능연구소를 설립하여 이 분야의 연구를 선도하게 된다.

[출처 구글 이미지]

인간 두뇌의 비밀에 도전한 노이만


1955년 초에 노이만은 예일 대학교에서 다음 해에 개최될 예정인 실리만 기념 강연회(Silliman Memorial Lectures)에서 컴퓨터와 두뇌를 주제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원래 실리만기념강연회는 2주 동안 열리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스케줄이 워낙 바빴던 노이만은 1주일 안에 강연을 끝내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1955년 7월 9일, 노이만은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의장인 루이스 스트라우스와 전화 통화를 하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병원에서 몇 차례 검사를 받은 후 다음 달에 뼈암(육종) 진단이 나오자, 그는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해 말부터 노이만은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도 실리만 강연 약속만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그는 사력을 다하여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써내려 가면서 실리만 위원회에 강연을 하루나 이틀로 줄여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3월이 되자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


노이만이 마지막으로 남긴 강연 노트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컴퓨터와 두뇌(The Computer and the Brain)』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그가 발명한 기계와 두개골 속에 내장된 부드러운 조직의 성능이 체계적으로 비교되어 있는데, 수치만 놓고 보면 두뇌의 계산 능력은 컴퓨터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이토록 초라해 보이는 인간의 두뇌가 어떻게 최고 성능을 탑재한 컴퓨터보다 훨씬 수준 있는 농담을 구사하는 것일까? 그 비결은 ‘동시 처리 능력’에 있다. 즉 두뇌의 작동 방식은 노이만의 컴퓨터 같은 직렬(serial)이 아니라 병렬(parallel)이며, 바로 여기서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다.

[노이만의 컴퓨터와 두뇌 출처 구글 이미지]

구글의 자회사인 딥마인드(DeepMind)에서 개발한 세계 최고 성능의 인공지능 신경망도 일종의 병렬 처리 장치로서, 특정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을 때까지 각 인공 뉴런에 할당된 가중치를 조금씩 바꿔나간다. 그래서 인공신경망이 작동하는 방식은 ‘학습’을 통해 배워나가는 인간의 두뇌와 매우 비슷하다.


인간의 두뇌와 컴퓨터를 이토록 명확하게 비교한 것은 노이만이 처음이었다. “노이만은 완전히 다른 분야였던 컴퓨터과학과 신경과학 사이에 다리를 놓음으로써 두 분야를 멋지게 통합시켰다.” 발명가이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의 말이다.


노이만이 실리만 강연 노트를 써내려 가던 무렵, 심리학자 프랭크 로젠블래트(Frank Rosenblatt)는 매컬러와 피츠의 인공신경망을 ‘학습 가능한 시스템’으로 개선한 퍼셉트론(perceptron, 두뇌의 인지 능력을 모방한 인공 네트워크)을 개발했다.


일부 미래학자들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인공지능이 세상을 몰라보게 바꿔놓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시점을 ‘특이점(singular point)’이라 하는데,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도 바로 노이만이었다.


노이만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병원 문을 나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Medal of Freedom)’을 받기 위해 백악관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그가 메달을 받는 자리에서 “이 영예를 누릴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자, 아이젠하워는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노이만에게 자유의 메달을 수여하는 아이젠하워 출처 구글 이미지]

노이만의 암은 참으로 잔인한 시기에 찾아왔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부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53년에 노이만의 초청을 받아 고등연구소에 합류했던 브누아 망델브로(Benoît Mandelbrot, ‘프랙탈’의 아버지)는 그 시기를 회상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프린스턴에 머무는 동안 노이만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수학자들은 그를 더 이상 수학자로 취급하지 않았고, 물리학자들도 그가 단 한순간도 진정한 물리학자인 적이 없었다며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는 컴퓨터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프린스턴으로 초빙했는데, 기존의 학자들은 그들을 ‘프로그래머’라 부르며 고매한 학문의 전당에 빌붙어 사는 하층민으로 취급했다. 한마디로 노이만은 고등연구소에서 기피 대상 1호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쿠르트 괴델은 노이만이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몸이 편찮으시다니 심히 걱정됩니다. 첨단 의학의 도움을 받아 하루 속히 완쾌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나 눈치 없기로 소문난 괴델은 짧은 인사말을 건넨 후 곧장 본론으로 직행했다. “가능하다면 요즘 제가 연구 중인 수학 문제에 대하여 귀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튜링머신이 실제로 만들어진다면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 후의 내용을 요약하면, “튜링이 결정 문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답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수학적 증명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노이만이 괴델의 문제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클라라가 노이만을 대신해서 간략한 답장을 보냈을 뿐이다(노이만이 괴델의 편지를 읽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이때 괴델이 언급했던 것이 바로 ‘P-NP 문제(P versus NP problem)’인데, 문제 자체가 추상적이어서 긴 세월 동안 수학자들을 괴롭혀오다가 197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구체적으로 정의되었으며, 수학 역사상 가장 증명하기 어려운 난제 중 하나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생각하는 것만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사람


노이만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마리나가 그에게 물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도구를 만들 때는 아주 의연하셨잖아요. 그런데 본안 한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왜 그렇게 심란해하세요?"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죽음이 코앞으로 임박했을 때 노이만은 병원에 상주하는 가톨릭 사제를 불러서, 그 옛날 부다페스트 시절에 가족 전체가 개종한 후 무관심해왔던 신앙으로 되돌아왔다. 마리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를 떠올렸을 겁니다. 그분은 지옥이 존재할 확률이 아무리 낮다 해도 0이 아니라면, 평생 무신론자로 살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신도가 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 선택이라고 생각했지요."


노이만의 몸을 잠식하던 암이 어느새 뇌까지 도달했다. 지구에서 가장 날카롭던 한 사람의 지성은 그렇게 서서히 저물어갔다. 마지막 순간에 노이만은 마리나에게 "7+4" 같은 단순한 산수 문제를 내달라고 부탁했는데, 마리나가 던진 몇 개의 문제에 노이만은 하나도 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노이만의 병실을 자주 방문했던 에드워드 텔러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 하지만 노이만은 생각을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이었다. 오직 생각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 이었을지도 모른다."


1957년 2월 8일에 노이만은 결국 마지막 숨을 거두었고, 그의 몸은 프린스턴에서 1년 먼저 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와 클라라의 부친인 찰스 댄(Charles Dan)의 묘지 옆에 안장되었다.


1984년까지 살면서 노이만의 아이디어가 실현되는 현장을 수없이 목격해온 울람도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노이만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평생 동안 약속의 땅을 그토록 열심히 개척해놓고, 정작 본인은 그곳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클라라는 1958년에 미국의 해양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칼 에커트(carl Eckart)와 재혼하여 라호야로 이주했으나 그녀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생활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1963년 11월 10일, 윈더시비치에서 칵 테일 드레스를 입은 채 젖은 모래에 반쯤 묻힌 클라라의 시신이 발견되 었다.


클라라는 미완성으로 끝난 자신의 회고록 중 '조니Johnny'라는 제목이 달린 장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이상하고 모순적이면서 논쟁을 즐기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이처럼 순진하면서 쾌활했고, 복잡하고 천덕스러우면서 이 세상 누구보다 똑똑했지만,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은 거의 원시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자연의 커다란 수수께끼, 그러나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편이 더 좋은, 그런 수수께끼 같은 남자였다."


에필로그
노이만, 그는 어떤 미래에서 왔는가?


노이만에게 성공으로 가는 길은 교통체증이 없고 제한속도도 없는 다중 차선 고속도로였다.
— 클레이 블레어 2세, 1957

이 말을 하려고 여기 온 거예요. 우리 집에 불이 났다고요!
— 그레타 툰베리, 2019


1950년의 어느 날, 로스앨러모스에서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가 점심 식사를 하던 중 갑자기 외쳤다. “대체 (외계인들이) 다들 어디 있는 거야?”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페르미는 《뉴요커New Yorker》라는 잡지를 읽다가 쓰레기통이 없어진 것을 외계인의 소행으로 돌리는 만화 주인공을 보고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 후로 이 질문은 ‘페르미 역설(Fermi paradox)’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우리은하에 외계인이 그렇게 많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왜 그들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는가(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누구나 인정할 만한 증거를 제시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노이만도 인류가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지적 생명체라고 생각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직후에, 그는 반농담 삼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별이 자체 중력으로 수축하여 대폭발을 일으킨 초신성(supernovae)은 문명을 한 방에 날려버릴 기술을 가졌으면서 공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어떤 가련한 외계 종족의 최후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인류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어느 날 울람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던 중 ‘특이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인류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방식으로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는 시점”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이 과연 인류에게 좋은 일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는 아직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인공적으로 탄생한 초지성적 존재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애완동물처럼 키울 것인가? 혹시 인류의 문명을 송두리째 날려버리지는 않을까?


노이만은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일시적이긴 했지만) 선제공격을 열성적으로 옹호했고 전체주의를 혐오하는 발언을 자주 했기 때문에 주변인들 사이에 다소 냉소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평소 노이만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적인 관계에서는 매우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인류의 존폐를 좌우하게 될 위기 상황이 수십 년 안에 닥친다는 생각을 할 때, 노이만의 내면에서는 냉정한 합리주의와 관대한 박애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다. 1955년 《포천》 6월호“인간은 기술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Can We Survive Technology)?”라는 제목으로 실린 그의 논평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직설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우리에게는 여유가 거의 없다. 무기와 통신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지역 간, 또는 국가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으며, 그 규모도 날로 커져가는 추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규모 충돌도 순식간에 지구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다. 무한히 크게 느껴졌던 지구가 인지 가능한 수준으로 좁아진 것이다.


[1955년 6월호 포천, 노이만의 글 출처 구글 이미지]

기후변화가 지구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한참 전에, 노이만은 석탄과 석유를 태울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CO2)가 지구의 기온을 높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단순한 경고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지면에 페인트를 입혀서 햇빛의 반사량과 기후를 조절한다는 새로운 지구공학적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지구의 온도 상승과 대책을 논한 것은 아마도 모든 분야를 통틀어 노이만이 처음일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미 겪은 전쟁이나 핵무기의 위협보다 기후변화를 극복하는 문제가 국가 간의 결속력을 더욱 공고하게 다져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또한 노이만은 핵반응로의 효율이 빠르게 높아져서 미래에는 핵융합 에너지를 사용하게 될 것이며, 오토마타는 고체전자공학(solid-state electronics)의 발전과 함께 더욱 활발하게 연구되어 초고속 컴퓨터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술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교한 기후 조절 장치를 무기로 사용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재앙을 피하려면 새로운 정치적 형태와 절차가 필요하다[1988년에 설립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패널(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은 바로 이것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였다]. 노이만의 논평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아무리 부작용이 심각하다 해도, 새로운 아이디어의 출현을 막을 수는 없다. 오직 세상을 불안정하고 위험하게 만들기 위해 개발된 기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유용하게 쓸 수 있다. … 진보의 부작용을 막는 치료제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분야에서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발전의 혜택을 있는 대로 누리고 싶다면 100퍼센트 안전한 삶은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삶’이며, 안전도를 높이려면 국가 중대사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기술의 모든 폐해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만병통치약은 없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부분적인 치료제를 갖고 있다. ‘인내심’과 ‘유연한 사고’, 그리고 지구의 생명체 중 오직 인간만 갖고 있는 ‘지성’이 바로 그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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