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로마 세계의 종언
‘모든 불행은 훈족이 뿌린 씨에서 생겨났다.’
기독교회가 ‘배교자’라고 규탄한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장교로 전쟁터를 전전하고, 그 황제가 죽은 뒤에는 은퇴하여 문필생활을 시작한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100년 전인 4세기 중엽에 이미 훈족의 위협에 주목했다. 그가 훈족을 묘사한 글을 간추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라기보다 두 발로 움직이는 야수. 말을 타면, 말 등과 두 다리 사이에 끼워서 가지고 다니는 날고기를 요리도 하지 않고 먹는다. 납작한 얼굴에 작은 점 같은 까만 눈을 가졌고, 수염은 거의 없고,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이다. 숲속에 살고, 쥐가죽을 삼실로 얼기설기 이어붙인 옷을 걸치고, 그것을 빨지도 않고 찢어질 때까지 입기 때문에 늘 악취를 풍긴다.
신발도 양가죽을 삼실로 꿰매 붙였을 뿐이어서 걸어다니기가 어렵고, 그래서 장시간 보행에는 적당치 않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무엇을 할 때도 어디에 갈 때도 말을 탄다. 전쟁터에서도 말에서 내려 싸우기를 극도로 싫어한다. 다만 말을 탄 훈족은, 인간이 말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과 한몸이 되고, 그래서 대단한 돌파력을 발휘한다.
5세기 로마 제국도 마침내 훈족과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훈족에게 밀려난 게르만계 야만족이 로마 제국 영토로 쳐들어와서 눌러앉아버렸기 때문에, 그들을 밀어내던 훈족이 로마 제국 영토 경계선인 도나우강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장소는 오늘날의 헝가리와 거의 겹치는데 이 지방이 훈족의 새 본거지가 되었다.
444년은, 이제까지 형을 앞에 내세우고 자기는 2인자의 지위에 있었던 아틸라가 벼락에 맞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형을 대신하여 훈족을 혼자 이끌게 된 해였다. 444년 이전의 훈족은 그들에게 밀려난 게르만계 야만족에게는 두려운 존재였지만, 로마 제국에는 오히려 다루기 쉬운 상대였다.
아틸라의 동로마 침공
동로마 제국은 아틸라의 형 블레다에게 매년 700리브라(260킬로그램)의 금괴를 주기로 하고 ‘동맹자’ 협정을 맺었다. 명목상으로는 용병료지만, 실질적으로는 도나우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 영토로 쳐들어오지 않는 ‘대가’였다.
하지만 아틸라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남쪽에 펼쳐진 동로마 제국 영토였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우선 로마 시대에 비미나키움이라고 불린 코스톨라크를 점거한 후 바로 서쪽으로 1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싱기두눔(오늘날의 베오그라드)을 점령했다.
당시 도나우강의 로마 가도는 베오그라드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태어난 나이수스(세르비아 니시), 세르디카(불가리아 소피아), 하드리아노폴리스(터키 에디르네)를 지나 콘스탄티노폴리스(터키 이스탄불)까지 발칸 지방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아틸라는 이 길을 따라 동로마제국으로 나아갔다.
동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항복을 받은 아틸라는 이후 동로마제국 사절의 인선까지 간섭했다. 자신은 로마인 이외의 모든 민족과 부족을 통합하여 제국을 창설할 것이기 때문에 로마 제국 황제와 동격이고 자신에 대한 사절도 거기에 어울리는 지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 요구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즈음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황제의 누나 호노리아와 결혼하겠다고 제의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깜짝 놀랐다. 갈리아에 있는 총사령관 아이티우스와 의논한 뒤 아틸라의 청혼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이미 아틸라의 눈은 동로마 제국을 떠나 서로마 제국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아틸라는 도나우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가지 않고,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들어갔다. 그 이유는, 프랑크족 족장이 죽자 뒤에 남겨진 장남과 차남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형은 아틸라에게, 동생은 서로마제국의 아이티우스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틸라는 갈리아로 갔는데, 이것은 라벤나에 있는 황제를 안심시켰을 뿐만 아니라 갈리아에 있는 아이티우스의 입장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한편 로마제국 변경을 방위하는 고위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 서고트족과 훈족 틈에서 10년간 볼모로 지낸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Flavius Aëtius)가 호노리우스의 사망과 새 황제의 추대 과정에서 훈족 병사들을 방패 삼아 갈라 플라키디아를 협박하여 ‘로마군 사령관’의 지위를 얻어 갈리아 지방의 방위를 맡게 된다.
이후 아이티우스가 황제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이티우스가 갈리아의 분리 독립을 꾀한다고 의심하여 북아프리카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보니파키우스를 다시 ‘군사령관’에 임명하여 아이티우스를 반역죄로 토벌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둘은 432년 ‘리미니전투’에서 맞붙어 전투에서는 보니파키우스가 승리하였으나 아이티우스가 둘 간의 결투를 제안하여 보니파키우스는 결투에서 상처를 입고 닷새 후에 사망하게 된다(아이티우스의 하인이 주인이 쓸 창을 더 길게 개량하여 결투에서 승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이티우스는 리미니 전투에서의 패배 뒤 갈리아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도 입지가 불안해지자 훈족에게로 달아나 있었는데 보니파키우스의 죽음을 듣자 곧장 훈족의 군대와 함께 라벤나로 진군해 황실을 위협했다.
아이티우스는 보니파키우스의 미망인인 펠라지아와 결혼하고 서로마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갈라 플라키디아를 끌어내리며 이후 454년 발렌티아누스 3세에게 살해 당하기까지 22년간 절대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총사령관' 아이티우스
이후 아이티우스는 게르만족들도 두려워하는 훈족을 우군으로 삼고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족장 겐세리크와는 강화를 체결하여 20여년간 서로마제국을 그럭저럭 잘 지켜냈다. 서로마 제국에서 아이티우스 시대가 20년이나 계속된 내적 요인은 세 가지였다.
첫째, 막판에는 적이 되지만 그때까지 아이티우스가 계속 우군으로 삼은 부족이 북방 야만족도 모두 두려워하는 야만족 중의 야만족인 훈족이었다는 것.
둘째, 북방 야만족의 각 부족들이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자기네 영토를 확보하는 데 여념이 없는 상태여서 이탈리아까지 쳐들어올 여력이 없었다는 것.
셋째, 라벤나 황궁도 로마 원로원도 아이티우스의 지위와 권력을 위협하기에는 무력했다는 것. 이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을 생각지 않고 아이티우스에게 천하를 허락한 이유는 단 하나, 야만족 출신 아버지와 로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스틸리코와는 달리 아이티우스는 부모가 둘 다 로마인이라는 것뿐이었다.
이후 아이티우스는 프랑크족의 후계 다툼을 두고 훈족 아틸라와 대립하면서 451년에는 서고트족의 테오도리크와 함께 반아틸라연합군을 결성하여 오늘날 상파뉴 지방 근처에서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샬롱 전투'라고도 부른다)에서 훈족의 아틸라, 동고트족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452년에는 황제의 누나 호노리아와의 정략결혼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틸라가 이탈리아를 쳐들어 왔는데, 이 때 남프랑스에 있던 아이티우스는 움직이지 않았고 교황 레오1세가 중재하여 아틸라는 물러간다. 이때부터 로마 주교는 로마 교황으로 불리게 되었고, 서방 기독교도 전체가 의지하는 기둥이 되어갔다.
그런데 다음 해인 453년에 '아틸라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연회를 벌이다가 갑자기 많은 피를 토하고 그대로 죽었다는 것이다. 장례는 훈족만이 아니라 훈족 산하에 들어가 있던 게르만계 야만족 수령들까지 참석하여 웅장하고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어쨌든 이후 훈족은 후계자 다툼으로 사분오열하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 다음 해인 454년에 발렌티아누스 황제는, 원래 아이티우스가 어머니인 갈라 플라키디아를 실각시킨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가, 아틸라가 이탈리아에 쳐들어 왔을 때 움직이지 않은 것을 사과하지도 않고 오히려 황제의 딸을 며느리로 달라고 요구하자 전격적으로 자신의 장식용 칼로 아이티우스를 살해하였다.
해가 바뀌어 서기 455년 3월 16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교회 앞 광장에서 군대를 사열하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는 갑자기 대열을 떠나 달려온 두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이 두 사람은 야만족 출신으로, 반년 전에 살해된 아이티우스 밑에 있던 자들이었다. 이후 서로마제국 최고 권력층에서는 혼란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455년에 반달족의 겐세리크가 로마를 쳐들어 왔는데, 서로마제국은 레오 교황의 중재로 사실상 백기 항복에 가까운 강화를 맺고 다시 한번 ‘로마 겁탈’을 당하였다. 이 때는 로마가 자진해서 반달족이 원하는 모든 금화 뿐만 아니라 동상, 다리 난간, 문짝까지 다 내주었다고 한다.
발렌티아누스 황제를 이은 황제 막시무스가 단 석달만에 455년의 ‘로마 겁탈’ 당시 민중들에게 살해된 이후 뒤를 이은 아비투스(Avitus)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갈리아에서 황제로 옹립되었다. 게다가 서고트족 왕이 천거했다. 그는 456년에 이탈리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관료들에 의해 강제로 퇴위 당하고 결국 살해되었다.
라벤나의 황궁 관리들이 다음으로 뽑은 황제는 마요리아누스(Majorianus)라는 야만족 출신 군인이었다. 그런데 이 새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상당히 의욕적인 태도를 보여서, 궁정관료들의 기대를 배신하게 된다. 또한 무리하게 북아프리카 정벌을 추진했다가 겐세리크의 화공에 하무하게 패배하고 결국 관료들에게 살해당한다.
또한 468년에 동로마제국에 의해 서로마제국 황제가 된 안테미우스와 동로마제국 레오 황제가 함께 대규모 군대를 조성하여 다시 한번 반달족을 쳐들어 갔으나 역시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 동로마제국은 완전히 서로마제국에게서 손을 떼게 되었다.
이후 475년 10월 31일 열 다섯살의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취임한 직후, 서로마제국의 야만족출신 장군들이 자기네들에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땅을 달라고 요구했다가 황제가 이를 거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말하자면 노동조합이 경영자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것과 비슷했다.
이에 대해 야만족 출신 장군들이 무력투쟁을 벌여 결국 그 우두머리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의 황제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기원전 753년부터 헤아리면 1,229년 뒤인 476년에 허망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야만족이라도 쳐들어와서 치열한 공방전이라도 벌인 끝에 장렬하게 죽은 게 아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도 없고 처절한 아비규환도 없고, 그래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소년 황제가 퇴위한 뒤 오도아케르가 대신 제위에 오른 것도 아니고, 아무도 황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작가는 이 부분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의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서술한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눈 아래 펼쳐진 카르타고시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건국한 지 700년, 그 오랜 세월 동안 번영을 누린 도시가 잿더미로 변해가는 것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모르나, 승리한 로마 장군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군 총사령과 헥토르의 말을 입에 올렸다.
“언젠가는 트로이도, 프리아모스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전사들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뒤에 서 있던 폴리비오스가 왜 하필 지금 그 말을 하냐고 물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폴리비오스를 돌아보며, 그리스인이지만 친구이기도 한 그의 손을 잡고 대답했다.
“폴리비오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영화를 자랑했던 제국의 멸망이라는 위대한 순간을 목격하고 있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 로마도 이와 똑같은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는 비애감이라네.”
제3부 제국 이후(post imperium)
제3부에서는,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의 ‘팍스 바르바리카'(야만족에 의한 평화) 상황과 동고트왕국의 테오도리쿠스가 오도아케르를 제거하면서 이탈리아를 차지한 이야기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옛 서로마제굿 영토를 회복하려 했던 이야기들이 나온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그 영토는, 이탈리아는 라벤나 황궁에 머무르며 왕을 자칭하던 오도아케르에 의해, 브리타니아는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갈리아지방은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서고트족에 의해, 히스파니아는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에 의해, 북아프리카는 반달족에 의해, 발칸반도 북쪽은 동고트족에 의해 정리되었다.
이 중 야만족의 국가들에서도 여러 영웅들이 등장하였는데, 파리를 최초로 수도로 정한 프랑크왕국의 클로비스 1세(라틴어: Chlodovechus I),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 대왕(Theodoric the Great Flavius Theodericus) 등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동고트왕국의 토오도리쿠스 대왕
테오도리쿠스는 서기 454년에 동고트족 족장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고트족은 당시 동로마 제국과 ‘동맹자’ 협약을 맺고, 오늘날의 독일 서부에 해당하는 도나우강 상류 지대를 주거지로 삼고 있었다.
테오도리쿠스는 8세부터 18세까지 10년 동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볼모로 지냈다. 18세가 되던 해에 족장인 아버지가 노령을 이유로 아들을 곁에 두고 싶다고 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부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에 아버지가 죽게 되어 20세에 동고트족의 지도자가 된다.
이후 그는 이웃의 야만족들과 맞붙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여 조금씩 영유지를 넓혀갔다. 우선 도나우강 중류로 진출했고, 이어서 하류에까지 손을 뻗게 될 무렵에는 동로마 제국 황제도 무시할 수 없는 ‘동맹자’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한번 추방되었다가 불과 1년 만에 복위한 제노 황제의 제위 탈환을 도와준 뒤로는 테오도리쿠스의 입장이 더욱 견고해졌으며, '파트리키우스'라는 귀족 칭호도 받게 된다.
테오도리쿠스는 동고트왕국의 초대 국왕으로서 동로마 황제 제논과 협정을 맺고 489년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4년에 걸쳐 싸우다가 오도아케르와 강화를 체결하는 척 하더니 갑자기 축하연에서 오도아케르를 살해하고 라벤나 황궁을 차지하였다.
그 이후 테오도리쿠스의 지배는 72세 때인 526년에 죽을 때까지 무려 33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는 구 서로마제국 영역의 새로운 실권자가 되었는데, 뛰어난 정치력과 외교 능력을 통해 혼란기에도 안정된 치세를 이룩하여 '대왕'이라는 호칭까지 받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카시오도로스(Cassiodorus)'같은 로마인 귀족 집안 출신 훌륭한 신하의 도움도 있었다. 그는 17년 동안(그의 나이 30세부터 47세까지) 테오도리쿠스의 통치에 협력하면서, 집정관을 포함하여 모든 요직을 역임했다. 그의 글들은 직접 정리한 『바리아이』(Variae : 잡문집)라는 책으로 남아 있다.
베네딕투스 수도원
카시오도루스의 동시대인 가운데 중부 이탈리아의 누르시아에서 시골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베네딕투스(Sanctus Benedictus de Nursia, 480년~547년)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수도 생활을 시작했고 서기 529년경 나폴리 근처의 카시노 언덕(Montecassino) 위에 수도원을 세웠다.
베네딕투스가 혁명적이었던 것은, 이제까지는 명상에만 몰두하여 세상과 단절된 존재로 여겨졌던 동방의 수도자상을 배제하고 속세와도 적극적으로 접촉하는 새로운 수도자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도 어부를 비롯하여 각자 직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노동을 중시한 베네딕투스의 생각이었다.
베네딕투스는 수도원 생활의 일과표까지 결정했다. 해뜰녘부터 오전 10시까지 노동, 10시부터 정오까지 소리 내어 기도하고, 그 후 가벼운 식사 후, 오후 3시까지 휴식을 취하되, 이 시간에는 소리를 내지 않고 기도한다. 오후 3시부터 해질녘까지는 다시 노동을 하고, 해가 진 뒤에는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나중에는 그리스·로마의 저작을 베껴 쓰는 일도 ‘노동’에 추가하여 중세 유럽 수도원의 ‘모델’이 되었다. 이런 수도원은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유럽 각지에 설립되어 중세 시대에 정신의 커다란 보루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수도원도 적지 않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로마 제국 황제인데도 후세가 ‘대제’라는 존칭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세 사람밖에 없다. 후세는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한 시대니까 그들에게 ‘대제’라는 존칭을 바친 것은 기독교회다. 다시 말해서 위의 세 황제는 기독교회가 좋아하고 인정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발칸 지방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라는 로마식 이름은 외삼촌(어머니 비길란티아의 오빠)인 유스티누스 황제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그는 젊었을 때 외삼촌(군사령관으로서 황실호위대장을 맡고 있었다)의 부름을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나이 들고 자식이 없는 삼촌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나중에는 외삼촌의 뒤를 이어 동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행운까지 거머쥐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군대 경험은 전혀 없고, 정무 경험도 전혀 없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해도 좋을 만큼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다. 그런데도 중요한 안건에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상당히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유스티누스 황제의 치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35세 되던 해부터 9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처음 3년을 뺀 나머지 6년 동안 실제로 나라를 통치한 것은 황제의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였다고 한다.
그는 ‘테오도라’라는 이름의 무희를 사랑했는데, 동로마 제국에서는 원로원 의원과 하층계급 여자가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도 원로원 의원이 되어 있었지만, 아름답고 도도하고 현명하고 매력적인 여자를 아내로 삼기 위해 제국의 법률까지 바꾸어버렸다.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틴어: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는 527년에 황제에 올라 565년까지 38년 동안 치세를 하면서, 사산 조 페르시아의 침입을 막아내면서, 하기아('거룩하다'는 뜻, '아이아', '아야'라고도 부른다)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고, ‘로마법 대전’*을 편찬하는 치적을 이루어냈다.
[로마법 대전]
정식 명칭은 ‘Corpus Juris Civilis’니까 ‘민법’(juris civilis)의 집대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형법을 비롯하여 모든 법률이 망라된 법령집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라고도 불리는 『로마법 대전』은 당시의 고명한 법률가 네 명이 6년에 걸쳐 기존의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서기 2세기 중엽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공화정 시대부터 제정까지의 법률을 망라하여 편찬한 법령집을 참고하여 만들었다.
하지만 『로마법 대전』 자체는 유스티니아누스가 통치한 동방에서는 끝내 활용되지 않았다. 라틴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법 대전』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긴 중세를 거친 뒤 서방에서 그 위력을 재인식하게 된다. 중세 유럽의 공통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럽 국가들은 모두 기독교 국가였다. 따라서 기독교 국가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필터’가 그대로 통용되었다. 고대 로마의 법률을 되살린 유스티니아누스를 유럽인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울러 이교도인 아리우스파가 지배하고 있는 옛 서로마제국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성전(聖戰)'을 벌였는데, 533년 동로마 최고의 장군인 33세의 벨리사리우스(Flavivs Belisavs)를 보내 단 보름만에 반달 왕국을 토벌하였다.
또한 535년에는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을 토벌하기 위해 다시 벨리사리우스를 보내 시칠리아와 로마, 밀라노를 탈환하고 드디어 라벤나까지 함락시키면서 552년까지 계속 동고트족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벨리사리우스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와 마찬가지로 발칸 지방에서 태어났다. 다만 나이는 열여덟 살쯤 아래다. 젊어서 군대에 들어가,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그를 동방 담당 사령관에 임명했다. 27세에 벌써 장군이 된 것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병력을 주어도 참신하고 대담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여 승리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는 벨리사리우스를 능가할 무장이 없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비교될 정도로 로마 제국의 최고의 장군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데,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제41장에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의 훤칠한 키와 당당한 용모는 가히 영웅의 풍모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관대하고 정의로운 성품으로 그는 백성들의 애정도 잃지 않으면서 병사들의 사랑도 받았다. 병들고 다친 병사는 약과 돈으로 구할 수도 있지만, 사령관의 병문안과 미소로써 더 효율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
그의 무훈을 목격한 사람과 기록한 역사가는 전쟁의 위험 속에서 그가 용감하되 경솔하지 않고, 신중하되 겁먹지 않으며, 상황의 급함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는 것을 익히 보았다. 그는 곤란한 역경 속에서도 희망과 활력을 잃지 않고, 순조로운 흐름 속에서도 겸손하고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벨리사리우스도 말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의 반목으로 불행한 삶을 보내다가(횡령 혐의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두 눈을 멀게 했다는 이야기도 퍼졌다고 한다) 565년 3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565년 11월 유스티니아누스도 세상을 떠나면서 몇 년 후 이탈리아는 다시 랑고바르디족에게 도로 빼앗가게 되었으며, 이후 동로마제국 역시 강성해진 이슬람세력에 의해 영토를 차례로 빼앗기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 나라가 망할 때는 마지막까지 이를 지켜내려는 충신들과 개인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를 모함하는 간신들 그리고 그러한 간신의 모략에 쉽게 넘어가는 무능한 황제들의 안타깝고 답답한 이야기들이 항상 드라마틱한 갈등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시오노 나나미 역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서로마 제국 마지막 순간까지 이를 지키려던 최후의 로마인 스틸리코와 아이티우스 그리고 약간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 내며 드라마틱하게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스틸리코 이야기를 읽으면서, 유비에게 유선을 부탁받으면서 유선의 능력이 부족하면 직접 황제가 되어 달라는 유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의리를 지켜 촉나라를 지키려했던 제갈량의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홀로 마지막까지 온 몸으로 로마를 지켜내면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와의 약속과 로마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였지만 결국 기득권층의 욕심과 로마 카톨릭의 배타성 그리고 권력 다툼으로 인해 로마를 지켜내지 못한 스틸리코의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스틸리코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았다면 과연 서로마는 멸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격동하는 로마 말기의 풍랑 속에서 스틸리코 혼자의 힘만으로는 그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유구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인간은 단지 그때그때 자신에게 처한 상황에 최선을 다해 나갈 뿐이고 그 결과는 후일 후손들이나 역사가들이 평가할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고 나니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미래에 대해 너무 믿지 말고 오늘에 최선을 다해라)” 문구가 다시 한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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