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 이동렬 옮김 민음사
《적과 흑》(프랑스어: Le Rouge et le Noir, 영어: The Red and the Black)은 1830년에 출판된 '스탕달(Stendhal)'의 장편소설로서, 당시 현실적으로 일어난 형사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쓰여졌다. 작은 마을의 야심 많은 청년 줄리앙이 돈 많은 정부(情婦)를 총으로 쏜 죄로 처형된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대담하고도 독창적인 유럽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제목의 '적(赤)'은 군복을 '흑(黑)'은 사제복을 표현했는데, 이것은 소설 속에서 줄리앙 소렐이 동경하거나 추구했던 두 직업으로, 나폴레옹 이후의 사회에 사는 평민들은 사실상 수도사가 되는 것 이외에는 출세의 길이 없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한다.
*1827년 프랑스에서 실제로 발생한 '앙투안 베르테' 사건(Affaire Antoine Berthet)
《적과 흑》은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문학 작품들의 기본적 요소들을 스탕달 특유의 다성적(polyphonique)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적과 흑》은 관습, 제도, 신분의 차별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리스의 〈페드라(Phaedra)> 신화로부터 루소의 《신 엘로이즈》,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 콩스탕의 《아돌프》 등은 실연한 모든 인간의 심금을 울려 왔다. 줄리앙, 레날 부인, 마틸드를 통해 이루어지는 애증의 문맥은 이 뿌리 깊은 낭만적 영혼이 피운 또 다른 꽃이다.
또 《적과 흑>은 돌아서면 변하는 권력과 계층의 덧없는 명멸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폴레옹 실각 후, 귀족들이 다시 정권을 잡은 왕정복고 시대(1814~1830)를 배경으로 줄리앙과 그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은 변화에 대한 불안과 기대를 반복 하며 이기적인 음모와 도전을 시도한다. 특히 진정으로 신적 섭리를 실현하려는 성직자와 세속적 출세를 지향하는 위선적 성직자들의 대립은 바로 오늘날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그러진 영웅' 줄리앙 소렐은 첫눈에 발자크의 《인간 희극》의 중심인물인 출세 지상주의자 '긴 이빨을 가진 젊은 늑대' 라스티냐크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줄리앙은 야심과 타산의 고정 관념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부르주아 악마가 아니다. 출세를 위해 레날 부인을 유혹하려던 그는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면서 변한다. 《적과 흑》이 작가의 냉철한 시선에 의해 인물들이 전형화되는 사실주의 작품으로 결정될 수 없는 까닭이 거기 있다. 독자들은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 주위에 고뇌하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하고, 변해가는 살아 있는 줄리앙 소렐을 발견하며 동질감을 느낀다. 줄리앙 소렐은 19세기 전반에 돌연변이처럼 태어난 21세기 현대인이다.
그러나 니체가 스탕달을 '내 생애에 만난 가장 아름다운 우연들 중의 하나' 라고 찬탄한 까닭은 이 모든 요소들을 놀라운 하나의 교향곡으로 엮어낸 그의 탁월한 심리 묘사에 있다. 여성 심리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 때문만이 아니다. 감방에서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기다리며, 고해를 거부하며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다가 다음 순간 다시 죽음의 두려움에 떠는 줄리앙의 내면 묘사는 빅토르 위고가 쓴 《사형수 최후의 날》에 나오는 나,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 사르트르의 《벽》에 나오는 파블로를 종합한다. 니체가 스탕달을 "프랑스 심리학자들 중 최고의 최고"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황의조 (홍익대 불문과 교수)
스탕달(Stendhal, 본명은 마리 앙리 벨, Marie-Henri Beyle, 1783년~1842년)은 프랑스 왕국 도피네 지역의 중심지 그르노블에서 고등법원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나 어린 시절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고, 이후 아버지의 교육 방침에 따라 고전 학문과 종교적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열렬한 왕당파였고, 가정교사는 예수회 신부였다. 이런 보수적인 가정 분위기에 질린 스탕달은 계몽주의자이자 자유주의적인 지식인 외조부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정부가 제도를 바꾸고, 시류를 틈타 외조부는 '그레노블 상트랄'이란 학교를 세웠는데, 스탕달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명문 에콜 폴리테크닉에 진학하려고 파리로 상경했으나 성공하지 못한다. 파리 상경 후 1년 뒤인 1800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군대에 입대해 이탈리아 원정군 장교로 밀라노로 가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원정군에 참여하면서 예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웠으며, 특히 이탈리아 문학과 음악, 미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의 세계관과 창작 활동에 영향을 남겼다.
군 복무 이후에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서 극작가가 되기 위해 수련을 쌓았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이 계속되면서 다시 육군성에 들어가 참사원 서기관의 직책에 오르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참전했다.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에는 공직 생활을 이어갔지만, 정치적 격변과 보수화된 분위기 속에서 점차 공직에서 멀어졌다. 그는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문학적 활동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810년대에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오가며 문학과 미술, 음악에 관한 평론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스탕달'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주제의 저술을 통해 점차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초기 저작들은 여행기와 평론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1820년대에는 파리에서 소설 집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1827년 《아르망스(Armance)》를 발표하며 장편소설에 도전하였고, 이후 문학 활동에 전념하였다.
1830년, 그는 대표작인 《적과 흑》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 사회적 변화와 젊은 주인공의 야망을 다룬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비록 발표 당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후 그의 주요 업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혁명이 발생한 이후 신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 주재 영사로 발령받았지만 업무보다는 주로 사교계 출입에 열중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1839년에 또 다른 대표작인 《파르마의 수도원(La Chartreuse de Parme)》을 발표하였고,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창작 활동을 계속하다가, 1842년 3월 뇌출혈로 인해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후 이탈리아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겼던 그의 바람에 따라 몽마르트 묘지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밀라노 사람 앙리 벨, 썼노라, 사랑했노라, 살았노라” (Arrigo Beyle, Milanese: scrisse, amo, visse)”이라는 묘비명이 적혀졌다.
[스탕달에 대한 평가와 영향]
스탕달의 전기작가들은 그의 성격과 그가 종사한 직업의 다양한 측면을 묘사하면서, 끊임없이 '실패'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그는 연인으로도 실패했고, 군인으로도 실패했으며, 작가라는 천직에서도 실패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비평가들이 그를 발자크·플로베르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 인정하고 있으며,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리얼리즘과 심리소설의 중요한 선구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적과 흑》과 《파르마의 수도원》은 젊은 주인공의 야망, 사랑, 좌절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 구조와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였다. 두 작품은 당대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지만, 이후 사실주의 문학과 심리 묘사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특히 그는 인물의 내적 독백과 갈등을 서술하는 기법을 통해 후대 작가들에게 새로운 소설적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스탕달의 작품은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과 러시아 문학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같은 러시아 작가들은 그의 심리적 사실주의 기법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프랑스의 플로베르와 프루스트 또한 그의 내면 묘사 방식을 발전시켜 자신들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이처럼 스탕달의 서술 방식은 사실주의에서 현대 심리 소설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출처: 나무위키]
1부
진실, 씁쓸한 진실 - 당통
수천 명을 함께 넣어봐라,
좀 덜 사악한 자들을.
그렇다고 감옥 안이 즐거울 것이랴.
- 홉스
베리에르라는 작은 도시는 프랑슈콩테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로 통할 만하다. 붉은 기와를 얹은 뾰족한 지붕의 하얀 집들이 언덕의 비탈에 늘어서 있으며, 무성한 밤나무 수풀은 그 언덕의 작은 굴곡을 드러내 보인다. 두(Doubs)강은 옛날에 스페인 사람들이 건축했으나 이제는 폐허가 된 그 도시의 요새 수백 미터 밑을 흐르고 있다.
베리에르의 북쪽은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것은 쥐라 산맥의 한 지맥이다. 베라산의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은 10월의 첫 추위가 시작되자마자 눈으로 덮인다. 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급류는 두강에 뛰어들기 전에 베리에르를 가로질러 흐르면서 많은 제재소에 동력을 제공한다.
제재소는 아주 단순한 공업 형태지만, 부르주아라기보다는 농부에 가까운 주민의 대부분은 이 제재소 덕분에 꽤 유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이 작은 도시를 부유하게 해 준 것은, 나폴레옹이 실각한 이후로 베리에르의 거의 모든 집들의 현관을 개축하게 할 만큼 보편적인 유족함을 가져다준 것은 '뮐루즈'라고 불리는 날염(捺染)된 피륙의 제조였다.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무시무시해 보이는 기계의 시끄러운 소리에 귀가 멍멍해지게 된다. 포도(鋪道)를 뒤흔드는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많은 수의 육중한 쇠망치가 급류의 수력으로 움직이는 바퀴에 의해 들어 올려진다. 그 쇠망치 하나하나는 매일 수천 개의 못을 만들어 낸다.
베리에르에 들어서면서, 대로를 오르는 사람들의 귀를 멍멍하게 하는 그 훌륭한 못 공장이 누구의 소유냐고 여행자가 묻는다면, 사람들은 느릿느릿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저어, 그건 시장님 것입지요."
두강 기슭에서부터 언덕의 정상 근처까지 오르막으로 되어 있는 베리에르의 그 대로에 여행자가 잠시 머무르게되면, 그는 십중팔구 분주하고 거만한 태도의 키가 큰 사내가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 모두들 재빨리 모자를 벗고 인사한다. 그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며, 회색 양복을 입고 있다. 여러 개의 훈장을 받은 바 있는 이 사내는 넓은 이마와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데, 얼굴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편협하고 비창조적인 모습과 뒤섞인 자족과 자만의 태도에 파리에서 온 여행자는 곧 기분이 상하게 된다. 그 사내의 재능이란 꾸어 준 돈은 빈틈없이 받아 내고, 자기가 빚을 지고 있을 때는 가능한 한 늦게 갚는 것이 고작임을 마침내 느끼게 되는 것이다.
베리에르의 시장 드 레날 씨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엄숙한 걸음걸이로 길을 건넌 다음 시청으로 들어가 여행자의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여행자가 산책을 계속한다면, 백 보쯤 위에서 상당히 아름다운 외관의 집 한 채와 그 집에 붙어 있는 철책을 통해 훌륭한 정원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너머로는 눈을 한껏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부르고뉴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지평선이 펼쳐진다.
그 집이 드 레날 씨의 소유라는 것을 여행자는 알게 된다. 베리에르의 시장은 그의 큰 못 공장에서 거두어들인 이득으로 지금 막 완공 중인, 다듬은 돌로 된 이 아름다운 저택을 세웠다. 그의 가문은 스페인계의 오랜 가문이라고 하며,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루이 14세의 정복 훨씬 이전부터 이 고장에 정착했다고 한다.
1815년에 그는 베리에르의 시장이 되었다. 시장은 오만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육 년 전에 드 레날 씨의 정원의 네 번째 테라스 벽의 자리를 그 제재소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억세고 고집 센 늙은 소렐과 많은 협상을 벌여야 했다. 소렐이 제재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기 위해 많은 금화를 셈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제재소를 움직이는 공공 하천으로 말하자면, 드 레날 씨는 파리의 신임을 이용해 그 하천의 물줄기를 돌려도 된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이러한 혜택은 182X 년의 선거 후에 이루어졌다.
그는 500쯤 아래의 두강 기슭에 1아르팡(면적 단위로 약 1에이커)당 4아르팡씩의 땅을 소렐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 위치가 그의 전나무 판자 사업에 훨씬 유리했는데도, 소렐 영감(부유해진 이후로 사람들은 그를 소렐 영감이라고 불렀다)은 그의 이웃을 부추기는 초조함과 지주의 기벽으로부터 6000프랑의 금액을 뜯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베리에르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벽을 쌓으면서도, 봄이면 파리에 가기 위해 쥐라의 협곡을 지나는 석공들이 이탈리아로부터 들여오는 설계법을 채택하지 않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 그러한 혁신을 채택하여 벽을 쌓는 경솔한 자는 영원히 멍청이라는 평판을 받을 것인데, 이는 프랑슈콩테 지방에서 존경심을 배분하는 분별 있고 절제 있는 인사들에게 영영 신임을 잃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실상 그 분별 있는 인사라는 사람들이 그곳에서는 '더없이 따분한 횡포'를 부리고 있다. 파리라고 불리는 대공화국에서 살아 본 사람에게 소도시에서의 거주가 견딜 수 없는 일인 것도 횡포라는 그 고약스러운 단어 때문이다. 여론(여론은 또 무슨 오라질 여론이란 말인가!)의 압제는 아메리카 합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소도시들에서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지위! 이보시오,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바보들은 존경하고 어린애들은 경탄하고 부자들은 부러워하고 현자들은 멸시하는데.
- 바르나브
두강 줄기 삼십여 미터 위에 있는 언덕을 따라 만든 산책로에는 거대한 축대가 꼭 필요했는데, 이것은 행정가로서의 드 레날 씨의 명성을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 산책로는 훌륭한 위치 덕분에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의 하나를 굽어볼 수 있다. 그러나 봄마다 빗물에 고랑이 패고 웅덩이가 생겨서 산책로를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누구나 느끼던 이러한 불편은 높이 6미터에 길이 30 내지 40투아즈(옛 길이 단위로, 1투아즈는 약 1.949미터)리의 축대를 축조함으로써, 드 레날 씨로 하여금 그의 행정을 불후의 것으로 만들 다행스러운 필요성에 봉착하게 했다.
전전 내무 장관은 베리에르의 산책로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씨가 먹히지 않아서, 드 레날 씨는 그 축대의 난간을 만들기 위해 세 번이나 파리를 오가야 했다. 이제 그 축대의 난간은 지상 1미터 위로 솟아 있다. 그리고 모든 전, 현직 장관들에게 도전이라도 하듯이 지금 그 난간은 다듬은 석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푸르스름한 아름다운 잿빛의 그 큰 돌 더미에 가슴을 기대고 서서 전날 떠나온 파리 무도회의 회상에 잠겨, 얼마나 여러 번 나는 두강 계곡을 바라보았던가! 그 너머 강 왼편 기슭으로는 대여섯 개의 계곡이 구불구불 펼쳐지고 그 계곡 밑으로 작은 개울들이 환히 눈에 들어온다. 그 개울들이 폭포를 이루며 쏟아져 내리다가 두강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이 산간 지방의 햇볕은 몹시 뜨겁다. 햇볕이 직선으로 내리쬘 때는 그 테라스 위에서 장려한 플라타너스의 그늘이 여행자의 몽상을 보호해 준다. 플라타너스의 빠른 성장과 푸른빛을 띤 아름다운 녹음은 시장이 거대한 축대 뒤에 만들어 놓은 매립지 덕분이다. 시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책로의 너비를 1.8미터 이상이나 확장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급진 왕당파이고 내가 자유주의자라 해도 이 점에 대해서는 나는 그를 찬양한다.) 그러기에 시장과 베리에르의 유복한 빈민 수용소장 발르노 씨의 견해로는 이 테라스야말로 생제르맹앙레의 테라스와 비견될 만한 것이다.
나로서는 '피델리테 산책로'에 대해 꼭 한 가지 지적할 점이 있다. 그 공식 명칭이 열다섯 내지 스무 군데나 대리석 판 위에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드 레날 씨에게 훈장을 하나 더 타게 해 주었다. '피델리테 산책로'에 대해 내가 비난하고 싶은 것은 무성한 플라타너스를 폐부까지 전지(剪枝)해 버리는 당국의 야만스러운 방식이다.
플라타너스는 볼품없는 야채처럼 낮고 둥글납작하게 윗부분을 다듬는 대신 영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람한 형태로 자라게 내버려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의지는 전제적이어서 시 소유의 모든 나무들은 일 년에 두 번씩 무자비하게 전지당했다. 과장이 있긴 하지만, 이 고장의 자유주의자들은 보좌 신부 마슬롱이 전지된 나뭇가지들을 자기 소유로 삼게 된 이후부터 더욱더 무자비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젊은 성직자는 셸랑 사제와 부근의 몇몇 주임 사제들을 감시하기 위해 몇 년 전 브장송으로부터 파견되어 온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원정군에 복무하다가 퇴역해 베리에르에 은거하던 한 늙은 군의관(시장의 견해에 의하면 그는 생존 시 자코뱅파인 동시에 보나파르티스트였다)이 어느 날 시장에게 그 아름다운 나무들의 정기적인 절단에 대해 항의를 감행했다.
그러자 드 레날 씨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수훈자인 군의관에게 말할 때 어울리는 위엄 있는 뉘앙스를 띠고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늘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늘을 만들기 위해 '나의' 나무들을 전지하는 것입니다. 유용한 호두나무처럼 '수입을 가져오지 않을' 때는, 나무란 다른 것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입을 가져온다는 것', 그것은 바로 베리에르에서 모든 것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말이다. 그 한마디 말은 주민 4분의 3 이상의 습관적인 생각을 대변한다. '수입을 가져온다는 것'이, 당신에게 그토록 아름다워 보이던 이 소도시에서 모든 것을 결정 짓는 이유인 것이다.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드레날 씨는 부인과 팔짱을 끼고 '피델리테 산책로'를 거닐고 있었다. 엄숙한 태도로 얘기하는 남편의 말에 줄곧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서도, 드 레날 부인의 눈길은 어린 세 아들의 동작을 불안스럽게 뒤쫓고 있었다. 열한 살쯤 됐을 듯한 큰 아이는 자주 난간으 로 다가가 올라가려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면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돌프라는 이름을 불렀고, 아이는 제 야심적인 계획을 포기하곤 했다. 드 레날 부인은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아직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 파리에서 온 신사란 자는 후회하게 될걸." 평소보다 창백한 낯빛을 하고 기분 상한 태도로 드 레날 씨가 말했다. "나도 궁정에 친구들이 없는 것은 아니거든……." 베리에르의 시장이 그토록 밉살스러워 하는 '파리에서 온 신사'란 아페르 씨로, 이틀 전에 베리에르의 감옥과 빈민 수용소뿐만 아니라 시장과 인근의 모모한 지주들이 무료로 운영하는 병원에까지 뚫고 들어가서 살펴보는 수단을 찾아낸 사람이었다.
드 레날 부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양심적으로 일하시는데 그가 당신에게 어떤 해를 끼칠 수 있겠어요?"
"그자는 오직 비난을 퍼붓기 위해 온 거요. 자유주의파 신문에다가 기사를 써 댈 거란 말이야."”
"당신은 자유주의파 신문은 읽지 않잖아요."
"그렇지만 그런 과격파 기사의 소문이 들려오거든. 그 따위 것들이 우리의 주의를 산만케 해서 좋은 일을 못 하게 방해한단 말이오. 나는 사제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소."
덕성스럽고 책략을 부리지 않는 사제는 마을의 신(神)이다.
- 플뢰리
팔순의 노인이지만 이 산간 지방의 신선한 대기 덕분으로 건강하며 강철 같은 성격을 지닌 베리에르의 사제는 어느 시간이든 감옥과 병원은 물론 빈민 수용소까지 방문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한다. 파리로부터 사제 앞으로 소개장을 가지고 온 아페르 씨가 이 야릇한 소도시에 도착한 것은 현명하게도 아침 6시 정각이었다. 그는 도착 즉시 사제관으로 갔다.
프랑스 귀족원 의원이며 이 지방의 가장 부유한 지주인 드라 몰 후작이 자기에게 쓴 소개장을 읽으면서 셸랑 사제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늙었고 이곳에서는 나를 아껴 주고 있으니 그들도 감히 어쩌지는 못하겠지!' 하고 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다소 위험하기는 하나 훌륭한 행동을 하려는 기쁨을 나타내는 성스러운 불길로 반짝이는 눈으로, 그는 갑자기 파리의 신사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와 함께 가십시다, 선생. 그런데 간수와 특히 빈민 수용소의 감시인들이 있는 앞에서는 당신이 보는 것에 대해 어떤 의견도 표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페르 씨는 자기가 용기 있는 인물과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존경할 만한 사제를 따라서 감옥과 병원과 빈민 수용소를 방문하고 많은 질문을 했는데, 이상스러운 답변을 들었는데도 조금도 비난의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이 방문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사제는 아페르 씨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으나 그는 편지 쓸 것이 있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이 너그러운 동반자를 더 이상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후 3시경 그들은 빈민 수용소의 시찰을 마치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다. 그곳 문간에서 다리가 휘고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나 되는 거인 같은 간수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천박한 얼굴은 두려움 때문에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사제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아아! 신부님, 같이 계시는 신사는 아페르 씨가 아닌가요?"
"아무려면 무슨 상관이오?" 사제가 말했다.
"아페르 씨를 감옥에 들이지 말라는 분명한 명령을 어제부터 받고 있는뎁쇼. 밤새껏 말을 달려온 헌병이 지사님의 명령을 전달했지요."
"누아루 씨, 나와 함께 계신 이 여행자는 아페르 씨가 맞소. 하지만 나는 밤낮 어느 시간이든 원하는 사람과 함께 감옥에 들어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예, 신부님." 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매질이 두려워 억지로 복종하는 불도그처럼 고개를 숙이고 덧붙였다. "하지만 신부님, 저는 처자가 딸린 몸이랍니다. 고자질을 당하면 쫓겨 날 판이라고요. 먹고살 길이란 이 자리밖에 없는뎁쇼."
"내 자리를 잃으면 나도 마찬가지로 딱할 거요." 선량한 사제는 점점 흥분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보통 차이가 아니지요! 신부님, 신부님은 800프랑의 연 수입이 있는 양지바른 좋은 땅을 갖고 계신 걸 다들 알고 있는데요……." 간수가 격렬하게 대답했다.
각양각색으로 설명이 붙고 과장되어서, 이틀 전부터 소도시 베리에르의 모든 증오 섞인 정열을 뒤흔들어 놓은 사건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이 사건이 지금 드 레날 씨가 자기 부인과 주고 받는 대화의 주제가 되고 있었다. 그날 아침 그는 빈민 수용소장 발르노 씨를 대동하고 격렬한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사제의 집에 다녀온 길이었다. 셸랑 씨는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다. 그는 그들이 퍼붓는 말이 뜻하는 바를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러분! 나는 나이 여든이 되어 이 근방에서 쫓겨나는 세 번째 사제가 되겠소. 내가 이곳에 온 것이 오십육 년이나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나는 거의 모든 주민에게 영세를 주었습니다. 매일같이 젊은이들의 혼배 성사를 집전하고 있지만 그들의 조부들도 이전에 내가 결혼시켰어요. 베리에르는 내 집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낯선 사람을 보며 혼자 생각했지요. '파리에서 온 그 사람은 실제로 자유주의자일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자는 대단히 많으니까. 그러나 그가 우리의 가난한 사람들과 우리의 죄수들에게 어떤 해를 끼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이오."
드 레날 씨와 특히 빈민 수용소장인 발르노 씨의 비난이 점점 거세지자 노사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여러분, 나를 면직시키시오. 그래도 나는 역시 이 고장에서 살 거요. 내가 사십팔 년 전에 800프랑의 연수(年收)를 산출하는 밭을 상속받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소. 나는 그 수입으로 살 거요. 여러분, 나는 내 직책에서 전혀 여축을 얻지 못하는데, 어쩌면 그 때문에 그 직책을 잃게 된다는 말을 들어도 겁나지 않는 모양이오."
드레날 씨는 부인과 대단히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온 그 신사가 죄수들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겠어요?"라고 부인이 머뭇거리며 되풀이한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벌컥 화를 내려는 참인데, 부인이 외침 소리를 냈다. 반대편 포도밭 위로 벽이 6미터 이상이나 되는 높이에 솟아 있는데도 둘째 아들이 그 테라스 벽 난간에 기어올라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을 놀라게 해 떨어뜨릴까 봐 겁나서 드 레날 부인은 아들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제 용맹에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던 아이는 어머니를 쳐다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알고는 산책로로 뛰어내려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그는 몹시 꾸중을 들었다. 이 작은 사건이 대화의 흐름을 바꾸게 했다.
"나는 제재소 집 아들 소렐을 꼭 우리 집에 데려다 두고 싶소." 드 레날 씨가 말했다.
"우리가 다루기에는 너무 힘들어지기 시작한 아이들을 그 사람이 돌볼 거요. 그는 젊은 성직자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라틴어를 잘한다니 아이들 공부를 진전시킬 테고, 사제 말로는 성격도 견실하다고 합디다. 그에게 300프랑의 급료와 식사를 제공하겠소.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탄 그 늙은 군의관의 귀염둥이 노릇을 해서, 난 그의 품성에 얼마간 의심을 갖기도 했소. 그자는 실제로는 자유주의 자들 편의 비밀 염탐꾼이었을지도 모르오. 그는 부오나파르테의 모든 이탈리아 전투에 참전하고서도 당시 제정에는 반대 서명을 했었다는 얘기요. 그 자유주의자가 소렐의 아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고, 가져온 책을 많이 물려주었다고 합디다. 그러니 나는 그 목수의 아들을 우리 애들 곁에 데려올 생각은 꿈에도 안 했소.
그런데 우리가 완전히 사이가 벌어지게 된 그 일이 있기 바로 전날, 사제가 내게 말하기를 그 소렐은 신학교에 들어갈 계획으로 삼 년 전부터 신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거요. 그러니 그는 자유주의자가 아니고 라틴어 학도지." 드레날 씨는 눈치를 살피는 태도로 아내를 쳐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이런 조치는 여러 가지로 합당한 것이오. 발르노가 사륜마차를 끌 노르망디산 말 두 필을 사 가지고 우쭐거리고 있거든. 하지만 그자도 아이들에게 가정 교사는 못 대고 있소."
"그 사람이 가정 교사를 빼앗아 갈 수도 있겠네요."
아내의 기발한 생각에 미소로 감사를 표하면서 드 레날 씨가 말했다.
"당신, 내 계획에 찬성하는 거지? 자, 그러면 결정됐소."
"아이, 여보! 빨리도 결정하시는군요."
"그건 내 성격이 단호하기 때문이오. 사제도 그 점을 똑똑히 보았지. 아무것도 숨기지 맙시다. 우리는 이곳에서 자유주의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요. 나는 '드 레날 씨의 자제들이 그들의 가정 교사'의 인솔하에 산책 나가는 것을 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거요. 그 모습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겠지. 내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시절에 가정 교사를 두었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소. 가정 교사를 두면 100에퀴*의 돈이 들겠지만 그건 우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으로 쳐야 할 거요." * 옛 화폐 단위로 1에퀴는 5프랑에 해당한다.
이 갑작스러운 결정은 드 레날 부인을 깊은 상념에 잠기게 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날씬한 여인으로, 이 산간 지방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고장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어딘지 순박한 태도와 젊음이 엿보이는 거동을 드러내고 있었다. 파리 사람의 눈에는, 순진함과 생기로 가득 찬 이러 한 꾸밈없는 매력이 달콤한 쾌락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드 레날 부인은 자신이 그런 종류의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면 몹시 부끄러워할 것이다. 교태라든가 가식 같은 것이 그녀의 마음에 스며든 적은 결코 없었다. 부유한 수용소장 발르노 씨가 그녀에게 추파를 보낸 적이 있었지만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해서 그녀의 미덕을 더욱 빛나게 했다. 발르노 씨는 혈색 좋은 얼굴에 검은 구레나룻을 무성하게 기른 건장한 젊은이로, 시골에서 호남 이라고 불리는 거칠고 뻔뻔스러우며 소란스러운 남자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몹시 변덕스러운 성격 같지만 실은 매우 수줍은 드 레날 부인은 발르노 씨의 끊임 없는 소란과 시끄러운 목소리가 특히 질색이었다. 베리에르에서 사람들이 향락이라고 부르는 것을 멀리한 까닭에 그녀는 자신의 가문에 지나치게 긍지를 느낀다는 평판을 받기도 했다. 남편에 대해 전혀 책략을 부릴 줄 몰라 파리나 브장송에서 오는 예쁜 모자를 살 기회도 다 놓쳐 버리는 만큼, 그곳 부인들의 눈에는 그녀가 바보로 비치고 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겠다.
아름다운 자기 정원을 홀로 거닐도록 놔두기만 한다면 그녀는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을 판단하거나 남편에게 싫증 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순진한 영혼이었다. 남편과 아내 사이가 자기들 이상으로 원만한 관계도 없을 거라고 혼자 속으로 생각할 뿐이었 다. 그녀는 드 레날 씨가 아이들에 관한 계획을 얘기할 때면 특히 좋았다. 그는 큰아들은 군인으로 둘째는 법관으로 막내는 성직자로 만들 작정이었다. 요컨대 그녀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남자들 가운데서 드 레날 씨가 가장 싫지 않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에 대한 이와 같은 생각은 그럴 만한 것이기도 했다. 아저씨로부터 물려받은 대여섯 개의 농담을 구사할 줄 아는 덕분에 베리에르의 시장은 재사(才士)라는 평판과 아울러 특히 점잖다는 평판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저씨 늙은 드 레날 대위는 혁명 전에 오를레앙 공작의 보병 연대에 근무했던 사람으로 파리에 올라가면 공작의 살롱에 출입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드 몽테송 부인, 유명한 드 장리스 부인, 팔레루아얄의 창시자인 뒤크레스트 씨 등을 만난 적이 있었다. 드 레날 씨가 얘기하는 일화에는 이러한 인물들이 너무나 자주 출현하곤 했 다. 그러나 얘기하기에 몹시 미묘한 이러한 추억담은 그에게 점차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서, 오를레앙가에 관계되는 일화는 이제 아주 중요한 경우에만 반복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는 돈 얘기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단히 정중한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베리에르에서 가장 귀족적인 인물로 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처럼 된 것이 내 잘못이란 말인가?
- 마키아벨리
내 마누라는 정말로 머리가 좋단 말이야! 하고 이튿날 새벽 6시에 소렐 영감의 제재소로 내려가면서 베리에르 시장은 혼자 생각했다. 내게 걸맞는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얘기를 꺼내기는 했지만, 라틴어에는 날고 긴다는 그 어린 사제 소렐을 내가 데려오지 않으면 쉼 없이 설쳐 대는 수용소장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 그를 가로채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거든.
그자가 얼마나 자만에 찬 어조로 제 자식들의 가정 교사 얘기를 떠벌릴 것인가……! 그 가정 교사가 일단 우리 집에 오게 되면 수단*을 입을까? 이러한 의문에 골똘해 있던 드 레날 씨는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에 가까운 농부의 모습을 멀리서 보았다. 이 이른 새벽부터 두강 줄기를 따라 예선도(曳船道) 위에 부려 놓은 재목의 치수를 열심히 재고 있는 듯이 보였다. 농부는 시장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별로 달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그의 재목이 거기 부려져 길을 막고 있는 것은 규정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 카톨릭 성직자가 입는 긴 옷
그 사람이 바로 소렐 영감이었는데, 그는 드 레날 씨가 자기 아들 쥘리앵에 대해 해온 야릇한 제안에 매우 놀라는 한편 몹시 만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산간 지방 주민들이 교묘하게 속마음을 위장하는, 그 불만에 찬 침울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시장의 말을 들었다. 스페인 지배 시대의 노예였던 그들은 아직도 이집트 농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외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소렐은 우선 자기가 외우고 있는 모든 인사말을 길게 암송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의 외모에 천성적으로 배어 있는 허위와 사기성이 비치는 태도를 배가시키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서 쓸데없는 소리를 반복하고 있는 동안에도, 늙은 농부의 활발한 정신은 이처럼 중요한 인물이 자기의 건달 아들을 집에 데려가겠다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쥘리앵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런데 드 레날 씨가 그런 아들에게 숙식은 물론 의복까지 곁들여 주면서 연 300프랑이라는 예기치 못한 보수를 제안해 온 것이다. 마지막 의복에 관한 건은 소렐 영감이 갑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비상한 수완을 발휘해서, 드 레날 씨가 즉석에서 허락한 것 이었다.
그런 요구는 시장을 놀라게 했다. 소렐은 당연히 내 제안에 만족하고 기뻐해야 할 텐데도 그렇지 않으니, 누군가 다른 편에서도 제안해 온 것이 분명하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 제안을 한 것은 발르노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드레날 씨는 즉시 결정을 짓자고 소렐을 재촉했으나 허사였다. 교활한 늙은 농부는 완강히 거부했다. 일단 자기 아들과 상의해 보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수력 제재소는 강가에 있는 헛간 같은 건물이다. 지붕은 네 개의 굵은 나무 기둥 위에 걸쳐 있는 뼈대로 떠받쳐져 있다. 건물 한가운데 2, 3미터 높이에 톱이 있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데, 단순한 기계 장치가 그 톱을 향해 목재를 밀어 넣는다. 강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바퀴 하나가 이 이중의 기계 장치, 즉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톱과 톱을 향해 목재를 천천히 밀어 넣어 판자로 잘려 나오게 만드는 장치를 움직인다.
소렐 영감은 공장에 다가가서 벼락 치는 소리로 쥘리앵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거인 같은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육중한 도끼를 들고서 제재소로 날라 갈 전나무 둥치를 네모나게 다듬고 있는 모습만 보였다. 목재에 그어 놓은 검은색 선을 정확히 따라가면서 그들이 도끼를 내리찍을 때마다 커다란 나뭇조각들이 떨어져 나왔다. 그들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렐 영감은 건물 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쥘리앵이 지키고 있어야 할 톱 옆 자리에서 아들을 찾았으나 헛일이었다.
그는 1, 2미터 위 대들보에 말 타듯 걸터 앉아 있는 쥘리앵의 모습을 얼핏 보았다. 모든 기계 장치의 작동을 조심스럽게 감시하는 대신에 쥘리앵은 책을 읽고 있었다. 늙은 소렐에게 그보다 심사가 뒤틀리는 일은 없었다. 형들과는 달리 육체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쥘리앵의 호리호리한 몸매는 어쩌면 참아 줄 수도 있겠으나, 그 책 읽는 버르장머리는 밉살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소렐 영감 자신은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그는 두세 번 쥘리앵을 불러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톱의 소음 이상으로 젊은이가 책에다 쏟고 있는 주의력이 부친의 무서운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렐 영감은 마침내 톱에 잘리고 있는 목재 위로 민첩하게 뛰어올라, 거기서부터 지붕을 받치고 있는 가로놓인 대들보로 올라갔다. 그는 쥘리앵이 들고 있던 책을 세차게 내리쳐 개울로 날려 보냈다. 쥘리앵의 머리로 날아든. 마찬가지로 세찬 두 번째 주먹질은 그가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그는 3. 4미터 아래서 작동 중인 기계의 지렛대 가운데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뻔했으나 아버지의 왼손이 떨어지려는 그를 붙들었다.
"이 게으름뱅이 높아! 톱은 지켜보지 않고 밤낮없이 못된 책이나 읽고 자빠졌느냐? 책은 저녁에 신부 집에 가서 얼쩡거릴 때나 읽어라, 제기랄." 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얼얼했지만 쥘리앵은 톱 옆의 제자리로 다가갔다. 그는 육체적인 아픔보다는 좋아하는 책을 잃은 것이 슬퍼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내려와라 못된 놈아, 할 말이 있단 말이다." 기계의 소음 때문에 쥘리앵은 또다시 그 명령을 듣지 못했다.
내려와 있던 아버지는 다시 기계 위로 올라가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아서, 호두를 터는 긴 장대를 가지고 와 그것으로 쥘리앵의 어깨를 후려쳤다. 쥘리앵이 땅에 내려서자마자 늙은 소렐은 그를 거칠게 몰아 대면서 집 쪽으로 밀고 갔다. 아버지가 내게 무슨 짓을 할지 알겠는가! 하고 젊은이는 속으로 생각했 다. 지나는 길에 그는 책이 떨어진 개울을 슬프게 쳐다보았다. 그 책은 그가 무엇보다도 아끼는 『세인트헬레나의 기록』”이었다.
그는 붉은 뺨을 하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는 열아홉 정도의 키가 자그마한 젊은이였는데, 겉으로는 약해 보였으며 선이 고르지는 않으나 섬세한 얼굴과 매부리코를 하고 있었다. 조용할 때는 깊은 생각과 열정을 나타내 보이는 커다란 검은 눈이 이 순간에는 더없이 사나운 증오의 표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래쪽으로 내려온 짙은 밤색의 머리칼은 이마를 좁아 보이게 했으며 성난 순간에는 고약한 모습을 띠게 했다.
인간의 수많은 다양한 용모 가운데서 이보다 인상적인 특성으로 두드러지는 용모도 아마 없을 것이다. 날렵하고도 짜임새 있는 몸매는 힘보다는 경쾌함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극도로 사색적인 그의 태도와 지나친 창백함은 그의 아버지에게 그가 살아남지 못하거나 살더라도 가족의 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쳤다. 하지만 그의 예쁜 용모가 처녀들 사이에서 다정한 목소리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약한 존재로 모두에게 멸시받는 쥘리앵은 어느 날인가 플라타너스 문제로 시장에게 감히 항의한 바 있는 그 늙은 군의관을 숭배했다. 그 외과 의사는 때때로 소렐 영감에게 쥘리앵의 품값을 지불하면서 그에게 라틴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가 역사라고 알고 있는 것은 1796년의 이탈리아 전투에 대한 얘기가 전부였다. 그는 죽으면서 쥘리앵에게 자신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반급(半給) 연금의 미불금과 삼사십 권의 책을 물려주었는데, 그 책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시장의 신임으로 물줄기를 돌린 공공 하천에 막 떨어져 버린 책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쥘리앵은 아버지의 억센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아채는 것을 느꼈다. 그는 또 몇 대 얻어맞을 것을 예상하며 벌벌 떨었다.
"거짓말 말고 바른 대로 대답해라." 아버지는 어린아이의 손이 납으로 만든 장난감 병정을 돌리듯 그를 돌려 세우면서, 늙은 농부의 거친 목소리로 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눈물이 그렁 거리는 쥘리앵의 커다란 검은 눈은 그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늙은 목수의 심술궂고 작은 잿빛 눈과 마주쳤다.
그는 어물어물 사건을 수습했다.
- 엔니우스
"거짓말 말고 바른대로 대답해라. 어디서 드 레날 부인을 알게 됐고 언제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느냐?"
"나는 말을 건 적이 없어요, 그 부인은 교회에서밖에는 못 봤고요." 쥘리앵이 대답했다.
"뻔뻔스러운 놈아, 하지만 너는 그 여자를 쳐다보았던 게지?"
"아녜요! 저는 교회에서 하느님밖에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또다시 따귀를 얻어 맞는 것을 피하기에 알맞다고 생각되는 위선적인 태도를 지으며 쥘리앵이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엔 뭔가가 있어." 심술궂은 농부는 대답하고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넌 신부인지 누군지를 용케 구워삶아서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됐다. 가서 보따리를 꾸려라, 드레날 씨 집에 데리고 갈 테니. 너는 그 집 아이들의 가정 교사가 된단 말이다."
"그 대가로 뭘 받게 되죠?"
"밥과 옷과 300프랑의 보수다."
"나는 하인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이놈아, 누가 하인이 된다고 말하더냐? 내 아들이 하인이 되게 놔둘 성싶으냐?"
"하지만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죠?"
이 질문은 늙은 소렐을 당황하게 했다. 그는 얘기를 하다 보면 어떤 실수를 저지를지 모르겠다고 느꼈다. 그는 쥘리앵에게 화를 버럭 내고 먹는 것밖에는 모른다고 몰아세우면서 욕설을 퍼붓고는, 그를 떠나 다른 아들들과 상의하러 갔다.
쥘리앵은 곧 각자의 도끼에 몸을 기대고 서서 의논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오랫동안 그들을 바라본 다음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쥘리앵은 제재소의 반대편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꿔 놓은 이 예기치 않은 통고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했으나 좀처럼 신중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의 상상력은 드 레날 씨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보게 될 이런저런 것을 그려 보는 데 온통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처지에 떨어지느니 차라리 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 하고 그는 혼자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게 강요하겠지.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다. 15프랑 8수의 저축금이 있으니 오늘 밤 도망쳐 버리자. 헌병에게 들킬 염려가 없는 샛길로 가면 이틀이면 브장송에 도착할 것이다. 거기서 병졸로 입대하든지, 필요하다면 스위스로 건너가자. 그러나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출세도 없고 야망도 끝장이지.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그 훌륭한 사제의 신분도 못 갖게 되겠지.
하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대한 이러한 혐오감은 쥘리앵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출세하기 위해서라면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도 해냈을 것이다. 그는 그런 불쾌감을 루소의 『고백록』에서 끌어냈다. 그 책은 그의 상상력이 세상을 그려 볼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유일한 책이었다. 『대군회보집(大軍回報集)』과 『세인트헬레나의 기록』이 그의 코란을 보충해 주고 있었다. 그는 이 세 저작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했을 것이다. 늙은 군의관의 한마디 말에 의해, 그는 세상의 다른 책들은 모두 거짓이며 사기꾼들이 이득을 위해 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불같은 영혼의 소유자인 쥘리앵은 흔히 어리석음과 연결되어 있기가 십상인 놀라운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장래 자신의 운명이 노사제 셸랑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쥘리앵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라틴어 『신약 성서』를 모두 암기했으며 또한 드 메스트르 씨의 『교황론』도 외고 있었으나, 그 어느 것도 별로 믿지는 않았다.
다음 날 이른 시간에 드 레날 씨는 늙은 소렐을 불렀다. 소렐은 한두 시간을 기다리게 한 끝에 문간에서부터 인사말과 함께 수많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마침내 나타났다. 갖가지 이의를 늘어놓은 끝에 소렐은 자기 아들이 주인 내외와 함께 식사를 하고 손님이 많은 날에는 아이들과 딴 방에서 식사를 들게 될 것임을 알아차렸다. 시장에게서 정말로 서둘러 대는 모습을 간파해 감에 따라 점점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우고 싶어진 소렐은 자기 아들이 거처할 방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아주 깨끗하게 꾸민 커다란 방이었는데 벌써 세 자녀의 침대를 옮기느라 분주했다.
이러한 상황은 늙은 농부에게 한줄기 섬광과도 같았다. 그는 곧 확신에 차서 자기 아들에게 줄 옷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드 레날 씨는 서랍을 열고 100프랑을 꺼냈다.
"이 돈으로 당신 아들에게 뒤랑 씨 양복점에 가서 검은 양복 한 벌을 맞추라고 하시오."
"댁에서 그 애를 데려갈 때도 그 검은 양복은 그 애 것이 되겠지요?"
갑자기 예의도 망각해 버린 농부가 말했다.
"물론이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일만 합의하면 되겠습니다. 그 애에게 주실 돈 말씀입니다만."
소렐은 질질 끄는 어조로 말했다.
"뭐라고!" 드 레날 씨는 분개해서 외쳤다. "어제 벌써 합의하지 않았소. 나는 300프랑을 주 겠소. 그 액수는 많은 것이고 어쩌면 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시장님의 제안이었죠,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만서도." 늙은 소렐은 더욱더 느릿느릿 말했다. 그러고는 프랑슈콩테 지방의 농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놀랍기 그지없을 천재적인 힘으로 드레날 씨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다른 데 더 나은 자리를 찾아봐야 겠는데요."
이 말에 시장의 안색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침착함을 회복했다. 한마디 말도 되는대로 내뱉은 것 없이 족히 두어 시간이나 교묘한 대화를 나눈 끝에, 마침내 농부의 교활함이 먹고살기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부유한 사람의 교활함을 이겼다. 쥘리앵의 새로운 생활을 규정할 많은 조문이 확정되었다. 그의 봉급이 400프랑으로 결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월 초하루에 선불로 지불하도록 타결되었던 것이다.
드 레날 씨는 모든 협상에서 자기가 해 낸 역할을 아내에게 얘기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당신에게 맡긴 100프랑을 돌려주시오. 뒤랑 씨는 내게 갚을 돈이 좀 있소. 내가 당신 아들을 데리고 가서 검은 양복을 맞추게 하겠소." 시장이 기분 상한 어조로 말했다.
이 호된 대응에 부딪히자 소렐은 다시 조심스럽게 공손한 어투로 돌아갔다. 인사치레는 족히 15분은 걸렸다.
마침내 더 이상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자 소렐은 물러갔다. 그의 마지막 경의의 표현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났다.
"아들놈을 성(城)으로 올려 보내겠습니다."
시장의 주민들이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할 때면 시장 댁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자기 공장으로 돌아온 소렐은 아들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경계심을 품은 쥘리앵은 한밤중에 집을 나가고 없었다. 자기 책들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려 했던 것이다. 그는 베리에르를 굽어보는 높은 산간에 살고 있는 친구인 푸케라는 이름의 젊은 재목 상인의 집에 모든 것을 옮겨 놓고 오는 길이었다.
그가 다시 나타나자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못된 게으름뱅이 녀석아, 여러 해 전부터 네게 외상으로 먹여 준 밥값을 갚을 만큼의 떳떳한 마음씨가 네놈에게 있는지는 하느님이나 아실 게다. 네 누더기를 꾸려가지고 시장님 댁으로 가거라." 쥘리앵은 얻어맞지 않은 것에 놀라서 서둘러 출발했다.
그러나 무서운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발걸음을 늦췄다. 그는 교회에 들르는 것이 그의 위선에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위선이란 이 단어가 여러분에게는 놀라운가? 이 끔찍한 말에 다다르기 전에 시골 청년의 영혼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다란 흰 망토를 걸치고 긴 검은색 갈기를 늘어뜨린 투구를 쓰고서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제6용기병 연대의 병사들이 자기 아버지 집 창살에 말을 매는 모습을 본 이후로, 쥘리앵은 군인의 신분에 열광했다. 나중에는 늙은 군의관이 들려주는 로디 교(橋) 전투며 아르콜 전투며 리볼리 전투의 얘기를 황홀하게 들었다. 그는 노인이 자기 훈장을 바라볼 때의 불타는 듯한 눈길도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쥘리앵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베리에르에는 그처럼 작은 도시로서는 장엄하다고 일컬을 수 있는 교회가 건축되기 시작했다. 특히 네 개의 대리석 원주의 모습은 쥘리앵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이 대리석 기둥들은 치안 판사와 젊은 보좌 신부(브장송에서 파견된 이 보좌 신부는 수도회의 첩자로 알려져 있었다)사이에 치열한 알력을 야기함으로써 그 고장에서 유명해졌다. 치안 판사는 자리를 빼앗길 지경에 이르렀다. 어쨌든 사람들이 떠드는 얘기로는 그러했다.
거의 이 주일마다 브장송에 가서 주교 각하를 알현한다는 사제와 그가 감히 분쟁을 벌이지 않았는가? 그러는 사이에 다수 가족의 가장인 치안 판사는 부당해 보이는 판결을 몇 건 내렸다. 이 판결들은 모두 〈입헌 신문〉을 읽는 주민들에게 불리하게 내린 것이었다. 결국 집권파가 승리한 것이다. 3프랑 내지 5프랑의 벌금에 불과한 재판이긴 했지만, 그 소액 벌금의 하나를 쥘리앵의 대부인 못 장사를 하는 사람이 물게 되었다. 그 사람은 화가 나서 이렇게 외쳤다. "이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치안 판사는 이십 년 이상이나 정직한 사람으로 통해 왔는데!" 쥘리앵의 친구인 군의관은 이미 죽은 뒤였다.
쥘리앵은 갑자기 나폴레옹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사제가 되겠다는 계획을 선포했고, 이후부터는 사제가 빌려준 라틴어 성경을 암송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그의 모습을 부친의 제재소에서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쥘리앵의 학업의 진척에 경탄한 그 선량한 노인은 그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데 저녁 시간을 내내 보내곤 했다. 쥘리앵은 사제 앞에서는 경건한 감정만을 나타내 보였다. 출세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골백번이고 죽음을 택하겠노라는 불굴의 결심이 그처럼 창백하고 부드러운 소녀 같은 얼굴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쥘리앵에게 출세한다는 것은 우선 베리에르를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자기 고향이 질색이었다. 고향에서 눈에 띄는 모든 것은 그의 상상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는 열광의 순간을 경험하곤 했다. 그럴 때면 어느 날엔가 자기는 파리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소개되고, 어떤 빛나는 행동에 의해 그녀들의 관심을 끌 수 있으리란 감미로운 공상에 잠기곤 했다.
아직 가난했던 시절에도 찬란한 드 보아르네 부인의 사랑을 받 았던 보나파르트처럼 자기라고 왜 그런 여인 중 하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인가? 여러 해 전부터, 쥘리앵이 재산도 없는 일개 무명의 중위였던 보나파르트가 검의 힘으로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지낸 시간은 아마 한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이 생각은 스스로 엄청난 것으로 여기는 불행으로부터 그를 위로해 주었으며 그 생각이 들 때면 그의 기쁨이 배가되었다.
교회의 건축과 치안 판사의 판결이 갑자기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에게 떠오른 한 생각이 몇 주일 동안 그를 미친 듯한 상태로 만들어 놓았으며, 마침내 그 생각은 정열적인 영혼이 스스로 처음 찾아냈다고 자부하는 개념의 온갖 힘을 발휘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보나파르트가 유명해졌을 때는 프랑스가 외적의 침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군사적 공훈이 필요했고 또 인기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마흔 살 난 사제들이 십만 프랑의 연봉, 즉 나폴레옹 사단의 유명한 장군들의 연봉보다 세 배나 더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보좌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지금껏 그토록 분별 있고 정직하였으며 또 그처럼 나이가 많은 치안 판사가 서른 살짜리 젊은 보좌 신부의 비위를 거스를까 두려워 치욕을 감수하지 않는가. 사제가 되어야겠다.'
그가 새로운 신앙심에 파묻혀 지내던 중(그때 쥘리앵은 이미 이 년 전부터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한번은 그의 영혼을 불태우는 정열의 갑작스러운 분출 때문에 자신의 본심을 노출하고 말았다. 셀랑 씨 댁에서 있었던 사제들의 만찬회 석상에서 그 선량한 사제가 동료들에게 쥘리앵을 기린아로 소개한 참이었는데, 그는 그만 나폴레옹을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오른팔을 가슴에 비끄러매고서, 전나무 등치를 옮기다가 삐었다고 말하면서 두 달 동안이나 팔을 그렇게 불편한 위치에 묶고 다녔다. 이런 체형(體刑)을 스스로 가한 다음에야 그는 자신을 용서했다. 작은 짐 보퉁이를 팔 밑에 끼고 베리에르의 웅장한 교회로 들어가고 있는 젊은이는 이런 사람이었다. 열아홉이었지만, 약한 모습의 이 청년은 남들이 보면 기껏해야 열일곱 정도쯤 돼 보였을 것이다.
교회 안은 어둡고 고적했다. 마침 축제가 있어서 교회의 모든 유리창에는 진홍빛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때문에 햇빛을 받자 더없이 장엄하고 종교적인 성격의 현란한 빛의 효과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쥘리앵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교회 안에 홀로 있는 그는 가장 훌륭한 외양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 의자에는 드 레날 씨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기도대 위에서 쥘리앵은 읽어달라는 듯이 펼쳐져 있는 인쇄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거기로 눈길을 돌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다.
'브장송에서 처형당한 루이 장렐의 최후 순간과 처형의 상보(詳報)…….?
종이쪽지는 찢겨 있었다. 뒷면에는 '첫걸음'이란 한 행의 처음 단어가 눈에 띄었다.
'누가 이런 쪽지를 갖다 놓았을까?' 하고 쥘리앵은 생각했다. "가엾은 사람 같으니라고, 그의 이름은 내 이름과 끝 글자가 같구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여 말했다. 그러고는 그 종이를 구겨 버렸다.
그는 일어서서 드 레날 씨의 집을 향해 재빨리 걸어갔다. 그 장한 결심에도 불구하고 이십 보쯤 앞에 드 레날 씨의 집이 눈에 띄자마자 그는 억제할 수 없는 소심증에 사로잡혔다. 철책 문은 열려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으리으리해 보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 집에 그가 도착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뒤흔들린 사람은 쥘리앵만이 아니었다. 그의 역할 때문에 자기와 자기 자녀들 사이에 끊임없이 끼어들 그 낯선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극도로 소심한 드 레날 부인도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들이 자기 침실에서 잠을 자는 데 습관이 들어 있었다.
그날 아침 아이들의 작은 침대를 가정 교사의 거처로 옮겨 놓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는 눈물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막내아들 스타니슬라스 크사비에의 침대만이라도 다시 자기 침실로 옮겨놔 달라고 남편에게 졸라 보았으나 헛일이었다.
드 레날 부인에게는 여인의 섬세함이 극단적인 데까지 나아가 있었다. 그걸 위해 자기 아들들을 때리기까지 할 야만스러운 언어인 라틴어를 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자기 아이들을 야단칠 임무를 떠맡은 더벅머리의 천박한 인간에 대한 더없이 불쾌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