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 이동렬 옮김 민음사
내가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면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활력과 매력에 찬 드 레날 부인이 정원으로 난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그때 대문 곁에서 젊은 농부의 얼굴이 얼핏 눈에 띄었다. 그 얼굴은 몹시 창백하고 막 운 듯한, 아직 어린아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는 새하얀 셔츠를 입었고 보랏빛 나사의 아주 깨끗한 윗도리를 팔 밑에 끼고 있었다.
대문에 멈춰 서서 감히 초인종을 누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그 가련한 사람이 그녀는 가엾어졌다. 가정 교사가 온다는 사실이 불러일으킨 울적한 심사도 잠시 잊고 드 레날 부인은 그에게 다가갔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쥘리앵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귀 가까이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소스라쳐 놀랐다. “이봐요, 어떻게 온 거지?”
쥘리앵은 얼른 돌아섰다. 그러고는 드 레날 부인의 우아한 맵시로 가득 찬 시선에 놀라서 수줍음을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었다. 뒤이어 그녀의 아름다움에 얼이 빠져서 그는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조차 잊었다. 드 레날 부인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저는 댁의 가정 교사로 왔습니다.” 눈물을 흘린 것이 부끄러워 애써 눈물을 닦으면서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쥘리앵은 그처럼 옷을 잘 차려입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특히 그토록 눈부신 살결을 지닌 여인이 다정한 태도로 자기에게 말을 걸어 준 적이 없었다. 드 레날 부인은 처음에는 그렇게 창백하다가 이제는 빨갛게 달아오른 그 젊은 농부의 뺨에 맺힌 커다란 눈물방울을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앳된 처녀와도 같은 터무니없는 쾌활함을 보이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비웃는 것이었다. 그녀의 행복감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아이들을 꾸짖고 매질하러 올 더럽고 형편없는 매무새의 사제로 상상했던 가정 교사가 바로 이 사람이라니!
“그런데 선생께서 라틴어를 하시나요?”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선생이란 말이 쥘리앵에게는 너무도 놀라워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습니다, 부인.” 그는 수줍게 대답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수줍은 듯 뒤따라 들어오던 쥘리앵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렇듯 훌륭한 집을 보고 놀라는 그의 모습이 드 레날 부인의 눈에는 또 하나의 매력으로 비쳤다. 그녀는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특히 가정 교사란 검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신뢰감으로 행복에 넘쳐 있던 그녀는 혹시 사람을 오인한 것이나 아닐까 몹시 두려워서 다시 한번 멈춰 서서 말했다.
“그런데, 선생께서 라틴어를 하신다는 게 사실인가요?”
이 말은 쥘리앵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조금 전부터 그가 잠겨 있던 매혹을 사라지게 했다.
“그렇습니다, 부인. 저는 신부님만큼 라틴어를 알고 있고, 때로는 신부님보다 잘 안다고 그분께서 말씀해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냉정한 태도를 지으려고 애쓰면서 대답했다.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이 몹시 사나운 표정이 된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가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이 배운 것을 모르더라도, 처음 며칠은 아이들을 때리지 말아 주세요.”
“아무 염려 마세요, 부인. 저는 매사에 부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선생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그녀는 쥘리앵에게 물었다.
“곧 열아홉이 됩니다.” 드 레날 부인은 이제 완전히 마음을 놓고 말했다.
“우리 큰아들은 열한 살입니다. 당신과는 거의 친구라고 해도 좋을 나이죠. 그러니 알아듣게 타일러 주세요. 한번은 애 아버지가 그 애를 때리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그 애가 일주일 동안이나 앓아눕지 않겠어요. 아주 살짝 때린 정도였는데도 말이죠.”
“선생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그녀는 쥘리앵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매료돼 버린 우아함과 다정한 어조를 띠고 말했다.
“제 이름은 쥘리앵 소렐입니다, 부인. 저는 난생처음 낯선 집에 들어오게 돼서 떨리기만 합니다. 처음에는 많은 일을 너그럽게 보아주세요. 저는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도 다녀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친척이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인 군의와 셸랑 신부님 이외에는 다른 사람과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형들은 언제나 저를 때리기만 했지요. 형들이 저를 나쁘게 말하더라도 그 얘기는 믿지 마세요.”
이렇게 긴 얘기를 하는 동안 마음이 가라앉은 쥘리앵은 드 레날 부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흠잡을 데 없는 우아한 매력, 그것이 성격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또 당사자가 그 매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때의 그 우아한 매력의 효과를 부인은 십분 보여 주고 있었다.
“부인, 저는 결코 아드님들을 때리지 않겠습니다. 하느님 앞에 맹세하지요.”
이 말을 하면서 그는 감히 부인의 손을 잡아 자기 입술로 가져갔다. 그녀는 이 행동에 놀랐으며, 생각해 보니 화가 나기도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을 책망했다. 자기가 빨리 화내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말소리를 듣고 드 레날 씨가 자기 서재에서 나와 결혼식 주례처럼 엄숙하게 쥘리앵에게 말했다.
“아이들과 만나기 전에 당신과 얘기할 것이 있소.”
그는 쥘리앵을 방에 들어오게 한 다음 나가려는 부인을 붙들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엄숙하게 자리에 앉았다.
“당신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을 신부님에게서 들었소. 여기서는 모두들 당신에게 정중하게 대할 것이고, 당신이 마음에 들게 일해 준다면 나중에 당신이 자리 잡는 데도 도움을 줄 생각이오. 그 대신 이제부터는 당신이 친척이나 친구들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겠소. 그들의 언동은 우리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여기 첫 달 치 봉급 36프랑이 있소. 하지만 이 돈을 당신 부친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어야겠소.”
"그런데 선생, 당신이 평복 차림으로 아이들과 만나는 것은 좋지 않겠소. 하인들이 선생을 보았소?”
드 레날 씨는 아내에게 물었다. “아니요, 여보.” 그녀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태도로 대답했다.
“마침 잘됐소. 이것을 입으시오.” 그는 놀란 젊은이에게 자기 프록코트 한 벌을 내주며 말했다.
“이제 뒤랑 씨네 나사점(羅紗店)으로 갑시다.”
한 시간여가 지난 후 드 레날 씨가 온몸을 검은 옷으로 단장한 새 가정 교사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그는 아내가 아직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쥘리앵이 나타나자 안도감을 느꼈다. 그를 찬찬히 살펴봄으로써 그에 대한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쥘리앵으로서는 전혀 그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운명이나 타인에 대해 극도로 경계심을 갖고 있는 쥘리앵이었지만 이 순간 그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드 레날 부인의 냉랭한 태도를 알아챘다. 그녀의 손에 감히 키스했던 것에 대해 화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좋은 옷을 입게 되어 우쭐해진데다가 기쁨을 감추느라고 너무나 애쓴 나머지, 그의 모든 동작에는 급작스럽고 미친 듯한 태도가 엿보였다. 드 레날 부인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선생, 우리 아이들과 하인들의 존경을 받으려면 좀 엄숙한 태도를 가지시오.” 드 레날 씨가 그에게 말했다.
“새 옷을 입으니 거북한 듯합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 방에 가서 혼자 있고 싶습니다.”
“이 신출내기가 당신에겐 어떻게 보이오?” 드 레날 씨가 아내에게 물었다.
분명히 까닭도 모르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드 레날 부인은 남편에게 본심을 숨겼다.
“마음에 들진 않아요. 당신의 친절이 그를 건방지게 만들어 한 달도 채 안 돼 내보내게 될지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내보내도록 합시다. 우리가 100프랑 남짓 손해를 보게 되겠지. 그렇지만 드 레날 씨 자식들에게 가정 교사가 딸려 있다는 것을 아는 데 베리에르 장안이 익숙해질 거요."
새로운 가정 교사가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갖가지 질문을 퍼부어 댔다. 마침내 쥘리앵이 나타났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엄숙하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잘못된 표현일 것이고 그는 차라리 엄숙의 화신 같았다. 아이들에게 소개되자 그는 드 레날 씨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태도로 그들에게 얘기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러 여기 왔습니다.” 쥘리앵은 연설을 끝맺으며 말했다.
“여러분은 학과를 암송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겠죠? 여기 성경이 있습니다.” 그는 검은색 장정이 된 32절형 작은 책 한 권을 그들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이것은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신약’이라고 하는 부분이에요. 나는 앞으로 여러분에게 자주 암송을 시킬 생각인데, 오늘은 먼저 나에게 암송시켜 보세요.”
맏이인 아돌프가 책을 집어 들었다.
“아무 데나 되는대로 책을 펼쳐 보세요.” 쥘리앵이 계속해서 말했다. “어디든 별행(別行)의 첫 마디만 말해 주세요. 그러면 나는 우리 모두의 행동 지침인 이 성스러운 책을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외워 보이겠어요.”
아돌프가 책을 펴들고 한마디를 읽자, 쥘리앵은 프랑스어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 페이지 전체를 암송했다. 드 레날 씨는 의기양양하게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부모가 놀라는 모습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인들까지 여전히 문턱을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쥘리앵은 이 시험을 더 연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타니슬라스 크사비에 군도 내게 성경의 한 구절을 지적해 줘야 해요.” 그는 아이들 중 막내에게 말했다.
어린 스타니슬라스가 우쭐해져서 한 행의 첫 마디를 겨우 겨우 읽어 내자 쥘리앵은 그 페이지 전체를 외웠다. 마침 노르망디산 준마를 소유하고 있는 발르노 씨와 군수인 샤르코 드 모지롱 씨가 들어왔다. 이 장면은 쥘리앵에게 선생이란 칭호를 붙이기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인들도 감히 그 칭호를 거부하려 들지 못했다.
그날 저녁 베리에르의 주민들은 그 비범한 인물을 보러 드 레날 씨 집으로 쇄도했다. 쥘리앵은 거리감을 두는 우울한 태도로 모두에게 답했다. 그의 명성은 삽시간에 퍼져서 며칠 후, 누군가가 그를 빼앗아 갈까 두려워진 드 레날 씨는 이 년간의 계약에 서명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안 됩니다.” 쥘리앵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시장님께서 저를 내보내신다면 저는 나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장님께서는 아무 의무도 지지 않고 저만 묶어 매는 계약은 공평하지 않으니, 거절합니다.”
하지만 쥘리앵이 너무나 잘 처신했기 때문에, 그가 도착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드 레날 씨까지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사제는 드 레날 씨나 발르노 씨와는 사이가 벌어져서, 이제 나폴레옹에 대한 쥘리앵의 옛 열정을 누설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어쩌다 나폴레옹의 얘기를 할 때면 혐오감을 나타내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감정을 상하게 함으로써만
감정을 건드릴 수 있다.
─ 한 현대인
아이들은 그를 숭배했으나 그는 아이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든 그는 마음 쓰지 않았다. 냉정하고 올바르고 태연하며, 또한 그가 옴으로써 집 안의 권태가 어느 정도 일소되었기 때문에 사랑받는 그는 훌륭한 가정 교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받아들여진 상류 사회에 대해 증오감과 혐오감밖에는 느끼지 않았다.
한번은 성 루이 축일에 발르노 씨가 드 레날 씨 댁에서 혼자 떠들어 대고 있었다. 쥘리앵은 본심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정원으로 달아났다. 빈민의 복지를 관리하게 된 이후로 명백히 제 재산을 두세 배나 불린 자에 대한 경의와 치사한 존경의 꼴이라니! 아아! 짐승만도 못한 놈! 더러운 놈! 아버지와 형들과 가족 전체에게 미움받는 나 또한 일종의 고아가 아니고 무엇이랴.
성 루이 축일 며칠 전 피델리테 산책로를 굽어보는 벨베데르라고 불리는 작은 숲 속에서, 성무일과서(聖務日課書)를 외며 혼자 산책하던 쥘리앵은 멀리서 오고 있는 두 형을 보고는 피하려고 애썼으나 피할 수가 없었다. 동생의 멋진 검은 옷이며 더없이 깨끗한 태도며 자기들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 때문에 질투심으로 눈이 뒤집힌 이 거친 노동자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할 정도로 쥘리앵을 두들겨 팼다. 발르노 씨와 군수와 함께 산책하던 드 레날 부인은 우연히 그 작은 숲에 이르렀다.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쥘리앵을 보고 그녀는 그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충격의 표시는 너무도 엄청나서 발르노 씨에게 질투심을 일으킬 정도였다.
쥘리앵은 너무 일찍부터 경계심을 품었다. 그는 드 레날 부인이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그 아름다움 때문에 그녀를 미워했다. 그녀가 자기의 출세를 가로막을지도 모를 최초의 암초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처음 만나던 날 그녀의 손에 키스했던 황홀감을 잊기 위해 되도록 그녀와 적게 얘기했다.
드 레날 부인의 하녀 엘리자는 어쩔 수 없이 젊은 가정 교사에게 반하게 되었다. 그녀는 안주인에게 자주 가정 교사 얘기를 했다. 어느 날 그는 그 하인이 엘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꾀죄죄한 가정 교사가 집 안에 들어온 이후로 너는 나와 말도 하지 않는 거냐?” 쥘리앵은 이런 욕설을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미소년의 본능으로 자신의 몸치장에 더욱 신경을 썼다.
쥘리앵은 속옷이 몇 벌 안 되어 집 밖에서 자주 빨도록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작은 일 때문에 엘리자를 필요로 했다. 이걸 보고 드 레날 부인은 그에게 속옷을 선물하자고 남편에게 얘기했다.
“무슨 어리석은 소리요!” 남편은 대꾸했다. “우리 마음에도 꼭 들고 우리에게 잘 봉사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다 하다니! 그가 소홀해져서 성의를 북돋아 줘야 할 때나 선물을 하는 거지.”
점차로 그녀는 쥘리앵에게 결핍되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동정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아무런 인생 경험도 없었고 굳이 남들과 얘기하려 하지도 않았다. 상속녀의 신분으로, 그녀는 예수회파에 적대적인 프랑스인들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에 불타는 광신적인 예수 성심회의 수녀들 사이에서 자라났던 것이다. 드 레날 부인은 수녀원에서 배웠던 것을 모두 불합리한 것으로 여기고 곧 망각해 버릴 만큼 분별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자리를 어떤 것으로도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쥘리앵이 올 때까지 그녀는 자기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가져 왔다. 아이들의 사소한 질병, 괴로움, 작은 기쁨만이 브장송의 성심 수녀원에 있을 때 하느님을 경배한 경험밖에 없는 이 영혼의 모든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자기 아들 중 하나가 열이라도 오를라치면 그녀는 그 아이가 죽기라도 하듯 타격을 받는 것이었다. 결혼 초에는 남편에게 털어놓고 얘기도 해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남편은 여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시시한 격언을 늘어놓으며 너털웃음을 짓거나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친구인 데르빌르 부인에게조차도 이런 종류의 괴로움을 얘기하기에는 너무나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남자란 모두 자기 남편이나 발르노 씨나 샤르코 드 모지롱 군수와 같다고 막연히 상상했다. 상스러움, 금전이나 지위나 훈장의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모든 것에 대한 짐승 같은 무감각,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일체의 논의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심 같은 것이, 그녀에게는 장화를 신거나 펠트 모자를 쓰는 것처럼 남성에게는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던 것이다.
나이 어린 시골뜨기 쥘리앵의 성공은 거기에서 연유되었다. 이 고상하고도 자존심 강한 영혼과의 교감 속에서 그녀는 새로움이 갖는 매력의 감미롭고 찬란한 기쁨을 발견했던 것이다. 드 레날 부인은 자기가 고쳐 줄 수 있었던 쥘리앵의 거친 태도와 또 하나의 매력으로 보이는 그의 극도의 무지를 진작부터 용서해 주었다. 너그러움, 영혼의 고귀성, 인간미 같은 것이 그녀에게는 점차로 이 젊은 사제에게만 존재하는 듯이 보였다. 이러한 미덕이 고상하게 타고난 영혼에 불러일으키는 모든 공감과 찬탄을 그녀는 오직 그 한 사람에게서만 느꼈다.
젊은 가정 교사의 가난을 생각하면서 드 레날 부인은 종종 눈물을 지을 정도로 측은해했다. 어느 날 쥘리앵은 정말로 울고 있는 부인을 보았다. “부인,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부인이 대답했다. “Mon ami, 아이들을 불러 주세요, 함께 산책이나 하러 가죠.”
그녀는 쥘리앵의 팔을 잡더니 이상하게 여겨지는 태도로 기대어 왔다. 그녀가 ‘몽 아미’라고 그를 불러 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이들 공부도 썩 잘되고……. 아주 놀라울 정도죠……. 그래서, 감사의 표시로 선생이 작은 선물을 받아 주었으면 하는데요. 내의를 살 약간의 돈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더욱더 얼굴을 붉히며 덧붙여 말하려다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이런 얘기를 남편에게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하잘것없는 사람이지만 저열한 인간은 아닙니다, 부인.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쥘리앵은 화가 나서 눈을 번득이며 멈춰 서서는 몸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
“제 금전 문제에 관해 무엇이건 드 레날 씨께 감추는 것이 있다면 저는 하인만도 못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힐책이 있자 드 레날 부인은 얼굴이 파리해져 몸을 떨었다. 양편 어느 쪽에서도 대화를 이을 구실을 찾지 못한 채 산책은 끝이 났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뜻하지 않게 쥘리앵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것을 보상한다는 구실로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게 그를 보살폈다. 쥘리앵의 오만한 마음속에서는 드 레날 부인에 대한 사랑이 점점 불가능해졌다. 부자들이란 다 그런 거지. 사람을 모욕해 놓고는, 꼴불견의 야릇한 짓을 함으로써 모든 걸 보상할 수 있다고 믿는단 말이야! 쥘리앵은 혼자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여태껏 쥘리앵이 변함없이 처해 있던 정신 상태는 베리에르의 시장 댁에서도 되풀이되었다. 그곳에서도 자기 아버지의 제재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마음속 깊이 경멸했으며 또한 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재미있는 점은, 이처럼 자부심이 강하면서도 그들이 하는 얘기를 그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이었다.
여태껏 그가 솔직히 마음을 터놓고 얘기해 본 사람은 늙은 군의밖에는 없었다. 군의가 지니고 있는 약간의 개념은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 전투나 외과 의술에 관계된 것이었다. 드 레날 부인이 아이들의 교육과 관계없는 대화를 해 보려고 처음으로 시도했을 때 그는 대번에 외과 수술 얘기를 끄집어냈다.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제발 그만두라고 간청했다.
쥘리앵은 그 밖에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드 레날 부인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단둘만 있게 되자마자 그들 사이에는 야릇한 침묵이 감도는 것이었 다. 그러나 응접실에서는 쥘리앵이 아무리 겸허한 태도를 짓고 있어도, 그녀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그 누구에 비해서도 지적으로 우월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한편 잠시라도 단둘이서만 있게 되면 그녀는 쥘리앵이 눈에 띄게 당황해하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것이 불안했다. 여성으로서의 본능이 그 당황함이 전혀 다정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로 일체의 다정다감한 면모는 지방의 풍속에서 엄격히 추방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쫓겨날까 봐 두려워했다. 사기꾼들은 수도회 속에서 뒷받침을 구했고 위선이 자유주의 계층에까지 만연했다. 권태는 더 심해졌다. 독서와 농사 이외에 다른 즐거움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신앙심 깊은 아주머니의 부유한 상속녀로 열여섯 살에 문벌 좋은 귀족과 결혼한 드 레날 부인은, 연애 비슷한 것이라고는 여태껏 경험한 적은 물론 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우연히 읽어 본 몇 권 안 되는 소설 속에 그려진 것과 같은 연애는 예외거나 아니면 완전히 본래의 속성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순진함 덕분에 드 레날 부인은 끊임없이 쥘리앵에게 정신이 사로잡혀 완전히 행복에 젖어 있으면서도, 조금도 자책의 감정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억제하기에 더욱더 깊은 한숨이,
훔치기에 더욱더 감미로운 훔쳐봄이,
죄지은 것도 없건만 타오르는 홍조(紅潮)가
있었노라.
─ 『돈 후안』 제1가 74절
그녀의 성격과 현재의 행복에 기인한 드 레날 부인의 천사 같은 부드러움도 하녀 엘리자에 생각이 미칠 때만은 약간 흔들리는 것이었다. 유산을 좀 물려받게 된 이 여자아이는 셸랑 사제에게 고해하러 가서는 쥘리앵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도를 고백했다. 사제는 제자의 행운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그 제의가 자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쥘리앵이 단호한 태도로 말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사제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사제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얘기했다.
"이보게, 자네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경계하게. 오직 자네의 소명감 때문에 부족할 것 없는 이 행운을 물리친다면 자네의 소명감을 치하할 일이네만. 내가 베리에르의 사제 직을 맡은 지 오십육 년이 됐지만, 모든 조짐으로 미루어 곧 면직될 것 같네. 마음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800프랑의 연수입이 있네. 이런 자세한 것을 얘기하는 이유는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성직자 생활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함일세.
그러나 우리의 직분에서는 선택을 해야만 하네. 이 세상에서 행운을 이루느냐 아니면 저 세상에서 그러느냐 하는 문제지, 그 중간책이란 없네. 가서 깊이 생각해 보고 사흘 후에 다시 와서 결정적인 답을 주게. 자네 성격의 밑바탕에는 어두운 격정이 엿보이는 것 같아 걱정이네. 자네의 재주는 전도유망하다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선량한 사제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덧붙여 말했다.
"이 얘기를 해야겠네만, 성직자가 될 경우 나는 자네의 구원이 염려되는 바일세."
사흘 후 쥘리앵은 첫날부터 내세웠어야 마땅했을 구실을 찾아냈다. 그 구실이란 '중상'이었다. 제삼자를 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드릴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처음에는 청혼을 거절했었다고 그는 사제에게 몹시 주저하면서 고백했다. 그것은 엘리자의 행실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셸랑 사제는 쥘리앵의 태도에서 젊은 수도자들을 북돋우는 열정과는 판이한 아주 세속적인 어떤 열정을 발견하고는 그를 타일렀다.
"이보게, 소명감 없는 성직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존경받고 학식 있는 시골의 훌륭한 시민이 되게."
드 레날 부인은 자기 하녀가 새로 재산을 얻었는데도 더 행복해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녀는 하녀가 끊임없이 사제 댁에 갔다가는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오곤 하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엘리자는 부인에게 결혼 얘기를 꺼냈다. 드 레날 부인은 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일종의 열병 같은 상태에 빠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하녀나 쥘리앵이 눈에 띌 때만 살아 있는 듯이 느꼈다. 그녀는 이들 한 쌍과, 이들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드 레날 부인은 자기가 정신을 잃어간다고 정말로 믿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그렇게 얘기하고 마침내는 몸져누웠다. 바로 그날 저녁 부인은 하녀가 자기 시중을 들면서 울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 무렵 엘리자가 몹시 미워서 방금도 막 핀잔을 준 참이었다. 그녀는 엘리자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엘리자는 더 심하게 울어 대면서, 마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자기의 불행을 다 털어놓겠다고 말했다.
"얘기해 봐." 드 레날 부인이 대답했다.
"그이가 저를 거절해요. 나쁜 사람들이 제 얘기를 안 좋게 했나 봐요. 그이는 그런 얘기를 믿고 있어요."
"누가 너를 거절한다고?" 드 레날 부인이 숨이 막힐 듯한 상태로 물었다.
"쥘리앵 씨가 아니고 누구겠어요, 마님?" 하녀는 흐느껴 울면서 대답했다. "신부님도 그이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셨어요. 결국 쥘리앵 씨의 아버지도 목수지 별거겠어요. 그이도 마님 댁에 오기 전엔 어떻게 벌어먹고 살았는데요?" 드 레날 부인에게는 더 이상 들리지가 않았다. 행복에 넘쳐서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쥘리앵이 결심을 번복할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확언을 그녀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드 레날 부인은 자기 연적을 변호했으나, 쥘리앵이 엘리자의 구혼과 재산을 한 시간 동안이나 줄곧 거절하는 것을 보고는 감미로운 쾌감을 느꼈다. 쥘리앵은 점차로 어색한 답변에서 벗어나 드 레날 부인의 현명한 대변에 재치 있게 대답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그렇게 여러 날 동안 절망에 시달린 끝에 자기 마음에 넘쳐흐르는 행복의 격류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방에서 기력을 회복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녀는 심한 동요를 겪었던 것이다.
'내가 쥘리앵에게 연정을 품은 것일까?' 이윽고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다른 때 같으면 회한과 심한 불안을 일으켰을 이런 깨달음이 지금은 그저 야릇 하나 대단치 않은 정경처럼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모든 일을 겪고 나서 기진맥진 해진 그녀의 마음은 정열을 돌볼 기력이 더 이상 없었다.
드 레날 부인은 일을 하려고 했으나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생각보다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무엇이든 나쁘게 받아들이기에는 그녀는 너무도 행복에 겨워 있었다.
궁정 귀족의 습관을 모방하기에 급급한 드 레날 씨는 따뜻한 봄 날씨가 시작되 자마자 베르지의 별장으로 옮겨 가 살았다. 옛 고딕식 성당의 아름다운 폐허에서 몇백 보 떨어진 곳에 드 레날 씨는 낡은 성관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성관에는 네 개의 탑이 솟아 있었고, 해마다 두 번씩 전지해 주는 마로니에 나무를 심은 산책로와 회양목으로 가장자리를 둘러 튈르리 공원식으로 꾸민 정원이 있었다.
드 레날 부인에게는 이 시골 풍경이 새롭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황홀할 정도로 감탄에 빠졌다. 고양된 감정이 그녀에게 재치와 결단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베르지에 도착한 다음다음 날 드 레날 씨가 시청의 업무 때문에 시내로 돌아가고 나서 부인은 자신의 돈으로 인부들을 샀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이슬에 신발을 적시지 않고서도 산책할 수 있도록, 과수원 안과 커다란 호두나무 밑을 순환하는 모래를 깐 작은 길을 만드는 게 좋겠다고 쥘리앵이 제안했던 것이다. 이 제안은 꺼낸 지 스물네 시간도 안 돼서 실행에 옮겨졌다.
드 레날 부인은 아이들과 함께 과수원을 뛰어다니며 나비를 쫓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그들은 환히 비치는 망사로 커다란 나비 채를 만들어 불쌍한 '인시류'를 잡아 댔다. 인시류란 괴상한 명칭은 쥘리앵이 드 레날 부인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녀는 고다르 씨의 훌륭한 저작을 브장송에서 주문해 왔는데, 쥘리앵은 그것을 읽고 불쌍한 동물의 기이한 습속을 그녀에게 얘기해 주곤 했다. 그들은 쥘리앵이 만든 커다란 마분지 판에 나비를 사정없이 핀으로 꽂아 놓았다. 드 레날 부인과 쥘리앵 사이에는 마침내 대화의 주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처럼 활동적이고 분주하고 쾌활한 생활은 일거리가 넘쳐나는 엘리자 양을 빼고는 모두의 기분에 맞았다. 베리에르에 무도회가 있는 사육제 때도 부인이 몸치장 에 이렇게 신경 쓴 적은 없었다고 엘리자는 투덜거렸다. 부인은 하루에도 두세 번 씩 옷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눈부신 살 결을 지닌 드 레날 부인은 팔과 가슴을 많이 드러내는 옷을 골라 입었다. 그녀는 몸매가 썩 빼어났고 그런 옷차림이 기막히게 어울렸다.
그녀는 친척 간인 한 젊은 부인을 베르지에 데리고 왔다. 결혼한 후 그녀는 옛날 성심 수녀원 시절의 친구였던 데르빌르 부인과 점차 친해졌다. 그녀는 친척인 드 레날 부인의 어리석은 생각에 대해 몹시 웃어 댔다.
"나 혼자서라면 전혀 그런 생각을 못 했을 거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파리에서라면 기발한 것으로 여겨졌을 뜻밖의 생각을 해내도, 드 레날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을 때면 바보짓 같아 그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데르빌르 부인이 있으면 용기가 나는 것이었다
한편 쥘리앵은 이 시골에 머무르게 된 이후로, 나비를 쫓아다니는 것을 제자들 만큼이나 즐거워하며 어린아이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도 속박당하고 간교한 책략을 부려야 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져 혼자 있게 되자, 그는 본능적으로 드 레날 부인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이 산간 지대에서 그의 나이에는 생생하게 느끼게 마련인 생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데르빌르 부인이 도착하자마자 쥘리앵은 그녀가 전부터 알던 친구처럼 여겨졌다. 그는 부인에게 큰 호두나무 아래 새로 만든 산책로 끝에서 보이는 전망을 서둘러 소개했다. 거기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시작되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떡갈나무 숲에 둘러싸인 웅장한 낭떠러지에 곧 당도하게 된다. 쥘리앵은, 두 친구를 그 깎아지른 듯한 암벽 꼭대기로 안내하여 그녀들이 그 장관을 찬탄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나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기분이야." 데르빌르 부인이 말했다.
무더위가 닥쳤다. 그들은 집 근처에 있는 커다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저녁나절을 보내는 습관이 들었다. 어느 날 저녁 쥘리앵은 활발하게 얘기를 진행했다. 그는 젊은 여인들에게 유창하게 얘기하는 즐거움을 달콤하게 향유하고 있었다. 손짓을 하다가 그는 정원에 놓아둔 색칠한 나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드 레날 부인의 손을 건드렸다. 부인은 재빨리 손을 피했다. 그러나 쥘리앵은 자기가 건드릴 때 그 손이 피하지 않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수행해야 할 의무감과, 그 의무를 달성하지 못하면 웃음거리가 되거나 그보다도 열등의식에 시달리게 되리라는 생각이 졸지에 그의 마음속의 즐거움을 모두 사라지게 했다.
게랭 씨가 그린 디동*(Dido,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티르의 왕녀),
매력적인 스케치.
─ 스트롬베크
다음 날 드 레날 부인을 만났을 때 쥘리앵의 눈초리는 이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당장에 싸워야 할 적처럼 그녀를 훑어보았다. 전날과는 너무도 판이한 그런 눈초리를 대하자 드 레날 부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기는 그에게 잘 대해 주었는데 그는 잔뜩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데르빌르 부인이 있어서 쥘리앵은 말을 적게 하는 대신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에 더 골몰 할 수 있었다. 그날 하루 종일 그가 한 유일한 일은 그의 영혼을 단련시켜 주는 계시받은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을 굳건히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아이들 수업을 많이 단축했다. 드 레날 부인이 나타나서 그의 명예를 돌보아야 할 일이 다시 상기되었을 때, 그는 그 저녁에야말로 그녀의 손이 자기 손안에 꼭 머물러 있게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해가 지고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자 쥘리앵의 가슴은 이상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밤이 되었다. 그 밤이 몹시 깜깜할 것임을 알고 쥘리앵은 가슴을 짓누르던 엄청난 짐이 떨어져 나간 듯 기쁨을 느꼈다. 무더운 바람에 날리는 두꺼운 구름을 머금은 하늘은 폭풍우를 예고하는 듯이 보였다. 두 여인은 아주 늦게까지 산책을 했다. 그 여인들이 그날 저녁에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쥘리앵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민감한 영혼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기쁨을 증가시켜 줄 듯해 보이는 날씨를 그녀들은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드 레날 부인이 쥘리앵 곁에 앉고 데르빌르 부인은 자기 친구 곁에 앉았다. 쥘리앵은 감행하려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화는 활기를 잃어갔다.
내게 닥칠 첫 번째 결투에서 나는 이처럼 벌벌 떨며 비참해질 것인가? 쥘리앵은 혼자 뇌까렸다. 자신과 타인에 대해 모두 지나친 의심을 품고 있는 그는 자기의 마음 상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의 괘종시계가 막 9시 45분을 울렸으나 그는 아직 아무것도 감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비겁함에 분개한 쥘리앵은 이렇게 되었다. 10시가 울리는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오늘 밤에 실행하겠다고 종일토록 다짐했던 것을 실행하고야 말겠다. 그러지 못하면 내 방에 올라가 머리를 쏘아 죽고 말아야지. 지나친 흥분으로 정신이 나간 듯한 기대와 초조의 마지막 순간이 지나고 머리 위의 시계에 서 10시가 울렸다. 그 숙명적인 종소리 하나하나는 그의 가슴속에도 울려 퍼져 육체적인 동 요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10시를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가 아직 울려 퍼지고 있을 때 마침내 그는 손을 내밀어 드 레날 부인의 손을 잡았다. 부인은 즉시 손을 뺐다. 쥘리앵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다시 그 손을 잡았다. 그 자신이 몹시 흥분해 있었는데도 그는 부인의 손이 얼음같이 차가운 것에 놀랐다. 그는 발작적인 힘을 기울여 그 손을 꼭 쥐었다. 부인은 손을 빼내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썼으나 마침내 그 손은 쥘리앵의 손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행복으로 넘쳐흘렀다. 드 레날 부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끔찍한 고통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데르빌르 부인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무슨 얘기든 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컸다. 반대로 드 레날 부인의 목소리는 지나친 동요를 드러내고 있어서, 데르빌르 부인은 그녀가 아프다고 생각하고는 집으로 들어가자고 제의했다. 쥘리앵은 위험을 느꼈다. 만약 드 레날 부인이 응접실로 들어가 버린다면 나는 종일 겪었던 끔찍한 상태에 다시 빠지고 말 것이다. 내 기득권으로 여기기에는 너무 잠시 동안만 이 손을 잡은 것이다.
데르빌르 부인이 응접실로 들어가자는 제의를 되풀이하는 순간 쥘리앵은 그에게 맡겨진 손을 세게 쥐었다.
벌써 일어서고 있던 드 레날 부인은 다시 주저앉으며 꺼져 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좀 아픈 것 같기는 하지만 바람을 쐬는 편이 나을 듯해." 이 말은 그 순간 절정에 달해 있던 쥘리앵의 행복감을 확고하게 해 주었다. 그는 가장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얘기를 시작했다. 얘기를 듣는 두 여인에게 그는 가장 매력 있는 남자로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저녁에는, 감동에 차고 과장된 그의 언변이 늘 그를 어린아이처럼 서툴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여기던 데르빌르 부인의 마음에 들었다. 쥘리앵에게 손을 잡힌 드 레날 부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정도였다. 이 고장 전설에 따르면 대담공 샤를*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그 우람한 보리수 밑에서 지낸 몇 시간이, 드 레날 부인에게는 행복한 한때였다.
* 샤를 르 테메레르(Charles le Téméraire, 1433~1477). 부르고뉴의 마지막 공작으로 몇 차례 왕권에 도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쥘리앵은 그에게 매우 안도감을 주었을 한 가지 상황을 미처 알 아차리지 못했다. 데르빌르 부인이 바람결에 발밑으로 쓰러진 꽃병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을 도우려고 일어선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에게서 손을 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앉자 마자 마치 그들 사이에 이미 약속된 일이기라도 하듯, 부인은 별다른 거리낌 없이 자기 손을 쥘리앵에게 맡겼던 것이다.
자정이 울린 지 오래였다. 마침내 정원을 떠나야 했다. 그들은 서로 헤어졌다. 사랑의 행복에 도취되어 아무것도 돌볼 겨를이 없는 드 레날 부인은 자신을 거의 책망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행복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하루 종일 소심함과 자존심이 마음속에서 벌였던 싸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쥘리앵은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그는 5시에 잠이 깼다. 그는 드 레날 부인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만약 부인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마음이 쓰라렸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무, 영웅적인 의무'를 수행했을 따름이었다. 이런 느낌으로 행복에 찬 그는 방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자기가 숭배하는 영웅의 무훈담을 새로운 즐거움을 가지고 탐독했다. 아침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을 때는 『대군회보집」을 읽느라고 전날 밤의 승리도 모두 잊고 있었다.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하고 응접실로 내려 가면서 그는 가벼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가 만날 것으로 기대했던 달콤함에 찬 시선 대신 그는 드 레날 씨의 험한 얼굴과 마주쳤다. 두 시간 전에 베리에르에서 도착한 드 레날 씨는 쥘리앵이 아침나절 내내 아이들을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성을 내면서 그것을 남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거드름 피우는 사내보다 더 꼴불견인 것은 없었다. 남편의 퉁명스러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드 레날 부인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쥘리앵으로서는 너무도 황홀감에 빠져 있었고 지난 몇 시간 동안 그의 눈앞에서 전개된 위대한 무훈에 아직도 너무 골똘해 있어서, 처음에는 드레날 씨가 그에게 퍼붓는 거친 말을 듣는 데까지 자기 관심을 끌어내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윽고 쥘리앵이 불쑥 한 마디 내뱉었다. "전 아팠습니다."
이 대꾸의 어조는 베리에르 시장보다 훨씬 무딘 사람이라도 기분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그는 당장에 쥘리앵을 내쫓음으로써 거기에 응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에 있어서는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격언을 생각하고서 겨우 억제했다. 하지만 드 레날 씨의 불만은 여전히 거친 말로 폭발 하여 점점 쥘리앵을 화나게 했다. 드레날 부인은 눈물이 솟구칠 지경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쥘리앵더러 산책을 나가게 팔을 빌려 달라고 청하고는, 다정하게 그에게 몸을 기댔다. 드 레날 부인이 뭐라고 얘기해도 쥘리앵은 나직이 이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부자란 다 그런 거지요!"
드 레날 씨는 그들 가까이에서 걷고 있었다. 그가 있는 것이 쥘리앵의 화를 더 돋우었다. 그는 갑자기 드 레날 부인이 유난스럽게 자기 팔에 기대어 오는 것을 알 아챘다. 그는 이 동작이 질색이었다. 그는 난폭하게 부인을 밀어젖히고 팔을 빼냈다.
난생처음으로 드 레날 부인은 남편에 대해 일종의 복수심 같은 것을 느꼈다. 쥘리앵은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이 폭발하려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드레날 씨는 정원사를 불러서 가시나무 다발로 망가진 과수원 울타리를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산책이 끝날 때까지 쥘리앵은 두 여인이 보여 준 친절에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드 레날 씨가 멀어지자마자 두 여인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각각 쥘리앵의 팔을 잡았다.
'도대체 뭔가!' 그는 혼자 뇌까렸다.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500프랑의 연봉조차 주지 않으면서! 아아! 집어치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런 격렬한 생각에 골몰해 있는 그는 간간이 두 여인의 친절한 말소리를 알아 듣게 되면 그것이 의미 없고 어리석고 나약한, 요컨대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져 불쾌했다. 억지로라도 얘기를 해야 했고 또 대화에 활기를 띠게 하려고 애쓴 나머지, 드 레날 부인은 남편이 소작인 한 사람과 옥수숫대 거래 문제로 베리에르에서 왔다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이 고장에서는 침대 매트를 옥수숫대로 채워 넣었다.)
"남편은 우리에게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정원사와 하인을 데리고 집 안의 매트를 갈아 넣느라고 바쁠 테니까요. 아침에는 2층의 침대에 모두 옥수숫대를 넣었는데 이제 3층 차례예요." 드 레날 부인은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러자 쥘리앵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는 이상한 태도로 드 레날 부인을 따로 데리고 갔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부인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인이 죽도록 저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부인도 아시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만 저는 초상화를 한 장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 침대 매트 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쥘리앵이 드레날 부인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듣자 이번에는 드 레날 부인이 창백해졌다.
"지금 이 순간에는 부인만이 제 방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시침 떼고 창문에서 제일 가까운 매트 모서리를 뒤져 보세요. 거기에 검고 반들반들한 작은 마분지 상자가 있을 거예요."
"거기에 초상화가 들어 있다고!" 드 레날 부인은 겨우 몸을 가누며 말했다.
쥘리앵은 그녀의 낙담한 표정을 눈치채고 즉시 그것을 이용했다.
"두 번째 부탁을 드려야겠는데, 제발 그 초상화를 보지 말아 주십시오. 그건 제 비밀입니다."
"그건 비밀이라고요." 드 레날 부인이 꺼져 가는 목소리로 반복했다.
그러나 재산을 뽐내고 이해관계에만 밝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났다 해도, 사랑을 하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벌써 너그러움이 넘치고 있었다. 지독히 타격을 받고 서도 드 레날 부인은 더없이 순수한 헌신의 태도로 쥘리앵의 심부름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녀는 죽음을 맞으러 가기라도 하듯 하얗게 질려서 성관의 3층으로 올라갔다. 바로 쥘리앵의 방 안에서 남편이 하인에게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아이들 방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침대 자락을 들어 올리고 손가락의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세차게 매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작은 아픔에도 대단히 민감한 편이었지만, 손을 집어넣자마자 매끄러운 마분지 상자의 감촉이 와 닿았기 때문에 아픈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상자를 집어 들고 달려 나갔다.
남편에게 들킬 염려에서 벗어나자마자 그 상자가 일으키는 전율로 그녀는 까무러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쥘리앵은 사랑을 하고 있고 나는 지금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초상화를 들고 있는 것이구나! 드 레날 부인은 그 방 응접실 의자에 앉아 질투심의 온갖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 쥘리앵이 나타나더니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상자를 빼앗아 들고는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그는 거기서 불을 피우고 즉시 그것을 태워 버렸다. 그는 정신 나간 듯 얼굴이 창백했다. 그는 막 겪은 위험의 정도를 과장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위 찬탈자를 공공연히 증오하는 사람의 집에서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숨기고 있는 것이 발각되다니! 더구나 그처럼 지독한 왕당파이며 또 그토록 성나 있는 드 레날 씨에게 발견되다니! 경솔하기 짝이 없게 초상화 뒷면 백지에는 내 손으로 글귀까지 적어 놓았으렷다! 내 나폴레옹 숭배 열을 의심할 여지 없이 드러내는 글귀를! 그 숭배의 열정 하나하나에는 날짜까지 적혀 있지 않은가! 내 평판은 모두 순식간에 무너지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불타는 상자를 바라보며 쥘리앵은 이렇게 생각했다.
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피로와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누그러졌다. 드 레날 부인과 마주치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어느 때보다도 진정한 마음으로 키스했다. 그녀는 행복해서 얼굴을 붉혔으나 거의 동시에 질투심으로 화가 치밀어 쥘리앵을 뿌리쳤다. 조금 전에 상처받았던 쥘리앵의 자존심이 이 순간에는 아주 맹목적으로 변했다. 드 레날 부인이 그저 하나의 돈 많은 여자로만 보였던 것이다. 그는 경멸적으로 부인의 손을 팽개치고 멀리 가 버렸다.
그는 정원으로 가서 깊은 상념에 잠긴 채 오락가락했다. 곧 그의 입술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시간을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처럼 태연히 산책하고 있구나! 아이들을 돌보지 않다니! 그는 아이들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막내 아이의 재롱이 그의 쓰라린 괴로움을 약간 진정시켜 주었다. 이 아이는 아직은 나를 멸시하지 않는다, 하고 쥘리앵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처럼 괴로움이 사그라지는 것은 또 다른 나약함이라고 자책했다. 이 아이들은 어제 사 온 어린 사냥개를 쓰다듬듯이 내 비위를 맞추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열이란 그 비밀스러움으로 인해
드러나게 마련이니
아무리 숨겨봐도 헛된 일일지라.
마치 가장 어두운 하늘이 가장 무서운
비바람을 예고하듯…….
─ 『돈 후안』 제1가 73절
성관의 모든 방을 다 돌아본 드 레날 씨는 하인들에게 매트를 들게 한 다음 함께 아이들 방으로 돌아왔다. 그 사람이 불쑥 들어온 것은 가득 찬 물병을 넘쳐흐르게 만드는 마지막 물방울처럼 쥘리앵의 울화통을 터뜨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평소보다 더 창백하고 더 어두운 얼굴로 그는 드 레날 씨를 향해 돌진했다. 드 레날 씨는 주춤 멈춰 서더니 하인들을 쳐다보았다.
쥘리앵이 말을 꺼냈다.
"시장님은 저 말고 다른 어떤 가정 교사가 아이들을 이만큼 가르쳐 낼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신다면, 어떻게 제가 아이들을 소홀히 한다고 질책하실 수 있는 겁니까?"
겁을 먹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드 레날 씨는 이 풋내기 시골뜨기가 당돌하게 대드는 품으로 보아, 그가 어떤 유리한 제안을 받아 자기 집을 떠나려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말을 해 나가면서 더욱더 화가 복받친 쥘리앵은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시장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흥분한 걸 보니 정말 유감이오." 드 레날 씨는 약간 더듬거리면서 대꾸했다. 하인들이 십여 보 떨어진 곳에서 침대를 정돈하고 있었다.
"제게 필요한 건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아까 제게 주신 창피를 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부인들 앞에서 말입니다." 쥘리앵은 제정신이 아닌 듯 퍼부어댔다.
드 레날 씨 눈에는 발르노 씨 집에 자리 잡은 쥘리앵의 모습이 선히 떠 오르는 듯했다.
"좋소! 선생, 당신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지. 모레부터 매달 50프랑씩 주기로 하겠소." 이윽고 드 레날 씨는 한숨을 내쉬면서, 더없이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으려고 외과 의사를 부르기라도 한 사람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쥘리앵은 어이가 없고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처럼 비열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사과란 기껏 이런 것이구나, 입을 딱 벌리고 이 장면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아이들은 정원으로 달려 나가서, 쥘리앵 선생이 몹시 화를 냈으며 그렇지만 그가 매달 50프랑씩 받게 됐다고 어머니에게 얘기했다.
잠시 후 쥘리앵은 다시 드 레날 씨와 마주쳤다.
"저는 셸랑 신부님께 고해할 것이 있습니다. 몇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드 레날 씨는 더할 나위 없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하시지. 하루 종일도 괜찮고 내일까지도 좋소. 가는 데는 정원사의 말을 이용하시고.”
녀석이 발르노에게 답을 하러 가는구나. 드 레날 씨는 생각했다. 녀석은 내게 아무런 약속 도 하지 않았으렷다. 하지만 이 풋내기에게 머리를 식힐 여유를 좀 줘야겠지.
쥘리앵은 재빨리 빠져나와 큰 숲 속으로 올라갔다. 그 숲을 통해 베르지에서 베리에르로 갈 수 있다. 그는 셸랑 사제 댁에 그다지 빨리 도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 다른 위선의 장면을 억지로 연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자기 마음속을 분명히 헤아려 보고, 그 마음을 뒤흔든 온갖 감정을 따져 볼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나는 전투에서 이겼다!' 숲 속에 접어들어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지자마자 그는 중얼거렸다.
이 한마디 말이 그의 모든 처지를 아름답게 채색한 듯 마음이 어느 정도 평온해졌다.
나는 매달 50프랑의 보수를 받게 되었다. 드레날 씨는 상당히 겁먹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겁을 먹는 것일까? 한 시간 전만 해도 그가 분노에 복받쳐 대들었던 그 운 좋고 권세 있는 사내를 두렵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노라니 쥘리앵의 마음은 아주 명랑해졌다. 쥘리앵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의 그늘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염소 치는 사람들만이 이용하는, 보일락 말락 하는 좁은 오솔길로 해서 거대한 바위 위에 올랐다.
그곳이야말로 분명히 세상 모든 사람들과 격리된 곳이었다. 자기 몸이 자리하고 있는 이 위치는 그에게 미소가 떠오르게 했다. 이 위치는 그가 정신적으로 도달하고자 열망하는 위치를 그려 보여 주고 있었다. 쥘리앵은, 그를 뒤흔든 증오는 그것이 난폭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느꼈다. 까닭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그에게 더없이 큰 희생을 강요 했다. 일 년에 50에퀴 이상이라니! 하루에 승리를 두 번 거둔 것이다. 두 번째 승리는 자랑이 못 된다.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하지만, 괴로운 탐색은 내일로 미뤄 두자.
그러나 줄리아의 싸늘함에는 아직 부드러움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작은 손은 가볍게 떨면서
그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은은하게 떨리는
가벼운 감촉, 그것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너무도 가벼운 감촉을 뒤에 남기고.
─ 『돈 후안』 제1가 71절
어쨌든 쥘리앵은 베리에르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제관을 나오는 길에는 운 좋게 발르노 씨와 마주쳤다. 그는 발르노 씨에게 봉급이 오르게 되었다고 서둘러 얘기했다. 베르지에 돌아온 쥘리앵은 밤이 이슥해서야 정원으로 내려갔다. 그날 저녁 정원으로 들어서면서 쥘리앵은 아름다운 두 부인의 생각에만 마음을 쓰기로 작정했다. 부인들은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드 레날 부인 곁의 늘 앉던 자리에 자리 잡았다. 곧 짙은 어둠이 깔렸다. 그는 한참 전부터 자기 곁 의자 등받이 위에 기대 있던 하얀 손을 잡으려 했다. 부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화가 난 듯 그에게서 손을 빼고 말았다.
그때 드 레날 씨가 다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쥘리앵에게는 아직도 아침나절의 거친 말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이 작자가 있는 바로 앞에서 그 아내의 손을 잡는 것이, 온갖 특권을 누리는 이 작자를 조롱하는 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쥘리앵은 이런 생각을 했다. 좋다, 그렇게 하고 말겠다. 그에게 그토록 멸시당한 내가 아닌가.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잠시 지닐 수 있었던 쥘리앵의 태연함은 이 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는 다른 생각은 전혀 못하고 그저 드 레날 부인이 자기에게 손을 맡겨 주기만을 안타깝게 갈망했다.
드 레날 씨는 성이 나서 정치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베리에르의 공업인 두세 명이 확실히 그보다 부자가 되어 선거에서 그를 골탕 먹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르빌르 부인은 그 얘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연설에 역정이 난 쥘리앵은 제 의자를 드 레날 부인 의자에 가까이 가져갔다. 어둠이 모든 움직임을 가려 주고 있었다. 그는 살이 드러나 있는 부인의 고운 팔 곁에 제 손을 바싹 가져갔다. 쥘리앵은 당황하여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그 고운 팔에 뺨을 가져가 대담하게도 입술을 댔다.
드 레날 부인은 전율했다. 남편이 서너 발짝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녀는 쥘리앵에게 서둘러 손을 내주고는 동시에 그를 약간 떠밀었다. 드 레날 씨가 부자가 되어가는 자코뱅파의 시시한 인간들에게 계속 욕설을 퍼붓는 동안 쥘리앵은 자기에게 맡겨진 손에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어쨌든 드 레날 부인에게는 그것이 열정적인 키스로 보였다. 하지만 이 가엾은 여 인은 부지불식간에 사랑하게 된 이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치명적인 증거를 그 날 낮에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쥘리앵이 없는 동안 내내 그녀는 극도의 불행에 사로잡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나! 내가 사랑을 하다니!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결혼한 여자인 내가 사랑에 빠지다니!'
그러나 잠시도 쥘리앵을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런 암담한 열정을 내 남편에게는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걸. 실상 그 사람은 나를 존경하는 아이에 불과할 뿐인데! 이런 열정은 일시적인 거야. 그 젊은이에게 내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이 남편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드 레날 씨는 나와 쥘리앵이 나누는 공상적인 것에 대한 얘기에는 진력을 낼 거야. 그이는 자기 사업만 생각하는데. 쥘리앵에게 주려고 내가 그이한테서 빼앗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그녀는 그의 말소리를 듣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자기 곁에 앉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두 주일 전부터 그녀를 유혹한다기보다는 놀라게 하는 매혹적인 행복에 휩쓸려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뜻밖의 일이었다. 하 지만 잠시 후에는 쥘리앵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모든 잘못도 깨끗이 사라진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질겁했다. 그러고는 쥘리앵에게서 손을 빼냈다.
이전에는 결코 받아 본 적이 없는 정열에 가득 찬 키스를 받고서 그녀는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갑자기 잊어버렸다. 뒤이어 그녀의 눈에는 쥘리앵이 아무 잘못 도 없는 것으로 비쳤다. 의혹의 소산인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끝나고 여태껏 꿈조차 꾸 어 본 적이 없는 행복이 출현하자, 그녀는 사랑의 황홀과 주체할 수 없는 쾌활함에 빠져 들었다. 부자가 된 공업인들을 못 잊어 하는 베리에르 시장을 제외하고는, 그날 밤은 모두에게 매력적이었다.
쥘리앵은 음침한 야심도 실행하기 어려운 계획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난생처음 그는 아름다움의 힘에 이끌려 들어갔다. 그의 성격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어렴풋하고 달콤한 몽상에 빠져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손을 부드럽게 애무하면서, 그는 가벼운 밤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수 나뭇잎의 살랑거리는 소리며 멀리 두강의 물방앗간에서 들려 오는 개 짖는 소리를 넋 놓고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감동은 즐거움이었지 정열은 아니었다. 자기 방으로 들어오면서 그는 좋아하는 책을 다시 읽는다는 한 가지 행복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책을 곧 내려 놓았다. 나폴레옹의 승리를 곰곰이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승리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 그 거만한 신사 나리의 자만심을 납작하게 짓눌러 주어야 한다. 그것이 나폴레옹의 진면목인 것이다. 내 친구 푸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사흘간의 휴가를 요청해야겠다. 만약 거절한다면 계약을 파기하든지 말든지 양자택 일을 하라고 하지. 하지만 그자는 굴복하고 말걸.
드 레날 부인은 눈을 감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때까지는 진정으로 살아온 것 같지가 않았다. 쥘리앵이 자기 손에 불같은 키스를 퍼붓는 것을 느끼던 순간의 행복에서 그녀는 헤어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간통이라는 끔찍한 말이 그녀에게 떠올랐다. 더없이 추잡한 방탕이, 관능적 사랑이란 개념에 안겨 줄 수 있는 역겨운 모든 것이 그녀의 상상에 무더기로 떠올랐다. 그런 생각은 쥘리앵에 관해서, 또 그에 대한 사랑의 행복에 관해서 그녀가 품고 있던 다정하고도 신성한 이미지를 흐려 놓으려 했다.
그녀는 쥘리앵을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렵다고 자기 남편에게 고백할까 하는 생각도 한순간 해 보았다. 그것은 쥘리앵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이전에 자기가 결혼하기 전 아주머니에게서 들은 교훈을 기억 속에 떠올렸다. 그것은, 여하튼 일종의 주인인 남편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위험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괴로워 손을 뒤틀었다.
드 레날 부인은 아무런 인생 경험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 정신이 말짱하여 분별력을 온전히 행사할 때조차도, 하느님 앞에 죄를 짓는 것과 모든 사람의 요란스러운 경멸을 공공연히 받는 것 사이에서 아무런 차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간통과 그 죄에 뒤따르게 마련인 (그녀의 생각으로는 그러했다.) 온갖 치욕에 대한 끔찍한 관념이 잠시 잠잠해지고 전처럼 결백하게 쥘리앵과 살아나가는 감미로움에 생각이 미치면, 그녀는 또 쥘리앵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무서운 생각에 휩쓸려 드는 것이었다.
드 레날 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함을 쳤다. 그 소리에 하녀가 깨어났다. 그녀는 갑자기 침대 곁에 불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엘리자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게 너냐?" 그녀는 정신없이 소리쳤다. 드 레날 부인은 자신의 경솔함을 깨달았다.
"열이 나고 정신이 좀 어지러우니 내 곁에 있어 다오." 부인은 하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몽 사몽 상태에서 잃었던 분별력이 다시 회복되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하녀의 시선에서 벗어 나려고 그녀는 하녀에게 신문을 읽게 했다. 《코티디엔》지의 긴 기사를 읽는 하녀의 단조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을 다시 만나면 냉정하게 대하겠다는 덕성스러운 결심을 했다.
파리에서는 우아한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반면,
시골에서는 기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 시에예스
이튿날 드 레날 부인이 눈에 띄기도 전인 아침 5시에 쥘리앵은 그녀의 남편에게서 사흘간의 휴가를 얻어 냈다. 뜻하지 않게 쥘리앵은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그녀의 고운 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정원으로 내려가 오랫동안 드 레날 부인을 기다렸다. 만약 쥘리앵이 그녀를 사랑했더라면 2층의 반쯤 닫힌 덧문 뒤에서 이마를 유리에 대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쥘리앵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은 결심을 했는데도 그녀는 마침내 정원에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평소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생기 있는 홍조가 떠올랐다. 이 순진한 여인은 분명히 마음이 동요되어 있었다. 그 천사 같은 얼굴에 매력을 주던, 삶의 온갖 비속한 이해타산을 초월한 듯한 오묘한 고요의 표정이 거북함과 노여움의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쥘리앵은 부랴부랴 그녀에게 다가갔다. 서둘러 걸치고 나온 숄 밑에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아름다운 팔을 그는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밤사이 흥분으로 온갖 감각에 민감해진 살빛을 아침의 신선한 대기가 더욱 빛나게 해 주는 듯 보였다. 겸허하고 감동적이면서도 하층 계 급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사려 깊은 모습을 띠고 있는 부인의 아름다움은, 쥘리앵이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영혼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듯이 여겨졌다.
그의 탐욕스러운 시선에 와 닿은 부인의 매력에 감탄한 나머지 넋이 나간 쥘리앵은, 부인에게서 기대했던 다정한 응대에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런 만큼 그는 부인이 그에게 의도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얼음 처럼 차가운 태도에 더욱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태도에서는 자기를 제 위치로 되돌려 놓으려는 의사를 엿볼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입술에 떠올랐던 기쁨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사회에서의, 특히 고귀하고 부유한 상속녀의 눈에 비친 자신의 위치를 상기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에는 오만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만이 나타났다. 그는 이처럼 창피스러운 응대를 받으려고 한 시간 이상이나 출발을 지연시킨 데 대해 분통이 터졌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자뿐이다. 돌은 무거우니까 떨어지는 것이다. 쥘리앵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을 것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돈 때문에 저자들에게 내 영혼을 파는 습관이 들었단 말인가? 내가 저자들과 나 자신의 존경을 받고자 한다면, 남들의 부와 거래하는 것은 내 가난일 뿐 내 영혼은 그들의 무례와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 그들의 경멸이나 호의의 하찮은 표시가 와 닿기에는 너무도 높은 천구(X)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젊은 가정 교사의 마음에 이런 감정이 떼 지어 밀어닥치는 동안 그의 변하기 쉬운 표정은 고통받는 자존심과 사나움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자 드 레날 부인은 혼란에 빠졌다. 그녀가 그에게 내보이고자 했던 정숙한 냉정함은 관심의 표정으로, 쥘리앵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서 일어난 관심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침에 주고받게 마련인 건강이며 그날의 날씨에 대한 쓸데없는 말이 끝나자 두 사람 모두 말문이 막혔다.
쥘리앵은 자기가 그녀와의 우정 관계를 얼마나 신뢰하지 않는지 드 레날 부인에게 보여줄 방법을 재빨리 찾아냈다. 그는 떠나려는 짧은 여행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만 꾸벅하고 자리를 떴다. 전날에는 그렇게도 상냥하던 시선에서 음울한 오만의 표정을 보고 어쩔 줄 몰라하며 그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큰아들이 정원으로 달려 나와 어머니를 포옹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놀게 됐어요. 쥘리앵 선생님이 여행을 떠나시거든요." 이 말을 듣자 드 레날 부인은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덕성 때문에 괴로웠고 나약함 때문에 더욱더 괴로웠다.
이 새로운 사건이 부인의 상상력을 온통 사로잡았다. 무서운 밤을 지새우며 얻은 정숙한 결심도 다 허물어져 버렸다. 이제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애인에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 문제였던 것이다. 어쨌든 아침 식사 자리에는 나타나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드 레날 씨와 데르빌르 부인은 쥘리앵이 떠난 것에 대한 얘기만 했다.
베리에르 시장은 쥘리앵이 휴가를 요청하는 단호한 어조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것이었다.
"그 어린 시골뜨기가 아마 누군가의 제안을 받은 모양이야. 제안을 한 자가 발르노 씨라 해도 연간 600프랑을 지불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약간 낙심할걸. 어제 베리에르에서 생각 좀 하게 사흘만 말미를 달라고 요청했을 거야.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그 꼬마 선생이 내게 답변을 하지 않으려고 산으로 떠났단 말이야. 건방지게 구는 한심한 노동자 녀석과 담판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니, 이 무슨 기막힌 꼴이람!"
한편 드 레날 부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남편은 자기가 얼마나 쥘리앵을 기분 나쁘게 했는 지는 모르고 그가 우리에게서 떠날 거라고만 생각하니,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아아! 모든 것이 끝장이구나!'
혼자 울기라도 하려고, 그리고 데르빌르 부인이 묻는 것에 대답하기가 싫어서, 그녀는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자리에 누웠다. 드레날 씨는 늘 하는 얘기를 되풀이했다.
"여자란 노상 그렇단 말이야. 그 복잡한 기계에는 언제고 고장난 곳이 있거든." 그는 빈정거리며 사라졌다.
드 레날 부인이 우연히 빠져 든 무서운 정열의 더할 나위 없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쥘리앵은 산간 지방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쾌활하게 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베르지 북쪽의 큰 산맥을 넘어야 했다. 그가 접어든 오솔길은 웅장한 너도밤나 무 숲 사이로 점점 가팔라지면서, 북쪽으로 두강 계곡을 그려 보이는 험준한 산비탈로 그칠 줄 모르고 구불구불 뻗어 있었다.
마침내 그는 큰 산의 꼭대기에 다다랐다. 젊은 목재상인 친구 푸케가 살고 있는 쓸쓸한 골짜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산꼭대기 옆을 지나는 지름길을 택해야 했다. 쥘리앵은 푸케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서둘러 만날 필요가 없었다. 산꼭대기를 덮고 있는 벌거숭이 바위 더미 사이에 맹금처럼 몸을 숨기고 있는 그는 누구든 다가오는 사람을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거의 수직으로 뻗은 바위 비탈 가운데서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뛰어가서 그 은신처 속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기쁨으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는 자기 사상을 마음껏 기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네모난 돌이 책상 구실을 해주었다. 그의 펜은 나는 듯이 움직여 나갔다. 주위의 아무것도 그의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보졸레의 먼 산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밤을 지새워서 안 될 것이 무엇이랴? 나는 빵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나는 자유롭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유라는 그 거창한 말소리가 울리자 그의 마음은 흥분되었다. 그의 위선 때문에 푸케의 집에서조차도 그는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 동굴 안에서 두 손 에 머리를 기대고 갖가지 공상과 자유의 행복에 흥분한 쥘리앵은 그의 생애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사방이 깊은 어둠에 잠겼다. 푸케가 사는 촌락까지는 아직도 8킬로미터는 더 내려가야 했 다. 작은 동굴을 떠나기 전에 쥘리앵은 불을 켜서 자기가 기록한 것을 조심스럽게 태워 버렸다. 그는 새벽 1시에 문을 두드려서 친구를 몹시 놀라게 했다. 푸케는 금전 출납부 기록에 열 중해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억센 표정에 긴 코를 가진 아주 못생긴 젊은이였으나, 그런 흉 한 모습에는 착한 마음씨가 감추어져 있었다.
"이렇게 돌연히 나타나다니, 드 레날 씨와 다투기라도 했나?" 쥘리앵은 전날 일을 대강 그에게 얘기했다.
푸케가 그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있게나. 자네는 드 레날 씨, 발르노 씨, 모지롱 군수, 셀랑 사제 같은 사람들을 잘 알고 그들의 약삭빠른 성격도 훤히 이해하지 않나. 그러니 자네는 경매를 요리하는 데 꼭 맞는단 말일세. 나보다 산술도 잘 알고 하니 내 회계를 맡아주게. 나는 장사에서 큰 벌이를 한다네.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도 없고, 동업자로 누군가를 채용했다가 사기꾼한테 걸려들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해서 매일 좋은 돈벌이를 놓치곤 한단 말이야. 내 동업자가 돼서 일해 보세."
이 제안은 쥘리앵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의 열정에 방해가 됐던 것이다. 푸케는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친구가 호머의 서사시에 출현하는 영웅들처럼 손수 밤참을 마련하여 먹는 동안, 그는 쥘리앵에게 장부를 내보이며 목재 장사가 얼마나 유리한가를 증명해 보였다. 푸케는 쥘리앵의 지식과 성격을 더없이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윽고 전나무 판자로 만든 작은 방에 혼자 있게 되자 쥘리앵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여기서 몇천 프랑의 돈을 벌어서, 나중에 프랑스를 지배하는 추세에 따라 유리한 조건으로 군인이나 성직자의 직업으로 재출발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금씩 저축을 해가면 사소한 금전상의 곤란은 면하게 되겠지. 그러나 푸케는 결혼을 포기했으면서도 고독은 불행한 것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다. 그가 동업 자금도 없는 동업자를 구하는 것은,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동료를 만들려는 속셈이 분명하다.
내가 친구를 저버릴 수 있을 것인가? 쥘리앵은 불쾌한 기분으로 혼자 부르짖었다. 동정심을 일체 갖지 않고 위선을 행하는 것을 자기 구원의 일상적인 수단으로 삼던 이 사나이도 이번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조그만 흠이라도 잡힐 일은 차마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쥘리앵은 갑자기 마음이 밝아졌다. 거절할 이유를 찾아냈던 것이다. 뭐라고! 칠팔 년을 비겁하게 낭비한다고! 그러면 나는 스물여덟 살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나이에 보나파르트는 그의 가장 위대한 일들을 해냈다!
이튿날 아침 쥘리앵은 착한 푸케에게, 제단에 서야 할 성직에 대한 소명 때문에 동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극히 냉정하게 대답했다. 푸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자네가 좋다면 일 년에 4000프랑씩 주기로 하겠네. 그런데 자네는 자네를 구두에 묻은 흙만큼도 여기지 않는 그 레날 씨 집으로 돌아가겠단 말인가! 자네가 200루이의 돈을 거머쥐게 된다면 신학교에 못 들어갈 이유가 뭐겠나? 내가 이 고장 최고의 사제직을 자네에게 얻어 줄 책임을 지겠네." 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쥘리앵의 소명 의식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푸케는 마침내 이 친구가 좀 돌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사흘째 되던 날 쥘리앵은 큰 산의 바위 사이에서 하루를 지내려고 꼭두새벽에 친구와 헤어져 나왔다. 그는 작은 동굴을 되찾아 갔으나 이제 마음의 평화는 얻을 수 없었다. 친구의 제안이 마음의 평화를 앗아 갔던 것이다. 그는 헤라클레스처럼 선과 악 사이가 아니라, 확실한 안락의 비속성과 청춘의 모든 영웅적 꿈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진정한 단호함은 없는 모양이구나. 그것이 그를 가장 괴롭히는 의혹이었다. 밥벌이를 하느라고 팔 년쯤 보내고 나면 비범한 일을 수행케 하는 그 숭고한 정력이 내게서 빠져나갈까 봐 두려워하고 있으니, 나는 아무래도 위대한 인물이 될 재목은 못 되는 가 보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