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3)

스탕달 이동렬 옮김 민음사

by Andy강성

13장 비치는 양말


소설이란, 길을 따라 들고 다니며
비추는 거울이다.
─ 생 레알


베르지 옛 사원의 아름다운 폐허가 눈에 들어오자, 쥘리앵은 이틀 전부터 자기가 드 레날 부인의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떠나던 날 그 여자는 우리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내게 상기시켰지. 나를 노동자의 자식으로 취급했단 말이야. 전날 밤 내게 손을 맡겼던 일을 후회한다는 표시를 하고 싶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 손은 정말 아름답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 여자의 시선은 또 얼마나 고귀한가!'


드 레날 부인의 요청으로 그는 여행 다녀온 얘기를 간단히 들려주었는데, 그 얘기를 듣는 부인의 몹시 흥분한 태도에 적이 놀랐다. 쥘리앵이 없는 동안 드 레날 부인에게는 산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온갖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병이 났다. 옷차림이 너무 수수하다고 드 레날 씨에게 늘 불평을 듣던 친구가 살이 비치는 양말을 신고 파리에서 가져온 작고 예쁜 구두를 신은 것을 보고, 데르빌르 부인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사흘 전부터 드 레날 부인의 유일한 심심풀이는, 최신 유행의 곱고 얇은 천을 말라서 엘리자를 시켜 여름옷 한 벌을 서둘러 짓게 하는 것이었다. 쥘리앵이 도착한 잠시 후에야 그 옷은 겨우 완성될 수 있었다. 드 레날 부인은 즉시 그 옷을 입었다. 데르빌르 부인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가엾은 것 같으니라고, 사랑을 하고 있구나!' 하고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는 드 레날 부인의 병의 이상스러운 징조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쥘리앵에게 얘기하는 드 레날 부인의 모습을 보았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드 레날 부인은 그가 집을 떠날 것인지 머무를 것인지를 얘기해 주기를 순간순간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쥘리앵은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무서운 마음속 갈등을 겪은 끝에, 드 레날 부인은 마침내 자신의 모든 정열이 배어 있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얘기했다.

"아이들을 떠나 다른 데 가시려는 건 아니죠?"


쥘리앵은 드 레날 부인의 시선과 꺼질 듯한 목소리에 몹시 놀랐다.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오만을 후회하며 이처럼 일시적으로 약해진 순간이 지나가고 내가 떠날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이 여자는 금방 자존심을 회복하겠지. 서로의 처지에 대한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재빨리 쥘리앵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처럼 귀엽고 또 '그처럼 가문이 좋은' 아드님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몹시 마음이 아프지만, 어쩌면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으니까요."

'그처럼 가문이 좋은'(이것은 쥘리앵이 최근에 배운 귀족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였다.)이란 말을 하면서 그는 깊은 반감을 느꼈다. 이 여자의 눈에 나는 가문이 좋은 놈이 못 된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드 레날 부인은 그가 떠날 가능성을 암시하자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쥘리앵이 없는 동안 만찬에 초대되어 베르지에 왔던 베리에르의 친구들은 모두 그녀의 남편이 운 좋게 발굴해 낸 놀라운 청년에 대해 앞 다투어 부인에게 찬사를 했다. 성경을, 그것도 라틴어로 암송한다는 사실에 베리에르의 주민들은 경탄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와도 얘기를 주고받지 않는 쥘리앵은 그런 사실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드 레날 부인이 조금이라도 냉정한 상태여서 쥘리앵에게 그가 얻은 명성을 축하해 주었더라면, 쥘리앵의 자존심도 만족되었을 것이고 부인의 새 옷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만큼 그는 부인에게 다정하고 상냥하게 굴었을 것이다. 자신의 예쁜 새 옷과 쥘리앵이 그 옷을 칭찬해 준 것에 만족한 드 레날 부인은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싶 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더 걸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쥘리앵의 팔을 잡자 힘이 솟기는커녕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던 것이다.


밤이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쥘리앵은 이전의 권리를 행사하여 어여쁜 부인의 팔에 입술을 갖다 대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애인들에게 보였던 푸케의 대담한 행동을 생각하고 있었지 드 레날 부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문이 좋은'이란 말이 아직도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부인이 그의 손을 꼭 쥐었으나 그것이 그에게는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다. 그날 밤 드 레날 부인은 너무나 분명한 표시로 감정을 나타내 보였건만, 그는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부인의 아름다움과 우아함과 신선함에도 거의 무감각했다.


쥘리앵은 저녁 내내 침울했다. 지금까지 그는 운명과 사회에 대해서만 화를 내 왔었다. 그러나 푸케가 안락에 이르는 미천한 방법을 제시해 온 이후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기분이 상했다. 때때로 두 부인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기는 했지만, 온통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쥘리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드 레날 부인의 손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이런 행동은 가련한 부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쥘리앵의 애정이 확실한 것이었다면 아마 그녀의 덕성은 그에게 대항할 힘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원히 그를 잃게 될까 봐 벌벌 떨며 그녀는 솟구치는 정열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의자 등받이에 무심히 올려놓은 쥘리앵의 손을 다시 붙잡고 말았다. 부인의 이런 행동이 이 젊은 야심가를 몽상에서 불쑥 깨어나게 했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이 여자는 이제 나를 멸시할 수 없을 거다. 그렇다면 나는 이 여자의 아름다움을 즐겨야지. 그녀의 애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두 남녀가 지낸 밤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드 레날 부인은 가장 고상한 정신적 쾌감의 황홀함에 도취되었다. 일찍이 사랑을 경험한 교태로운 처녀는 사랑의 흥분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그런 여자는 진정한 정열을 느낄 나이가 되어도 새로운 매력을 알지 못한다. 드 레날 부인은 소설조차 읽은 적이 없었으므로 행복의 뉘앙스 모두가 그녀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녀는 십 년 후에도 지금 이 순간처럼 행복할 것만 같았다. 며칠 전만 해도 그녀를 뒤흔들었던 정조 관념이나 남편에게 충실하겠다는 맹세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었다.


14장 영국제 가위


열여섯 살의 처녀는 얼굴이
장밋빛이었는데도 연지를 칠했다.
─ 폴리도리


쥘리앵에게는 푸케의 제안이 모든 행복을 앗아가는 결과가 되었다. 그는 어떠한 방침도 정할 수가 없었다. 아아! 나는 꿋꿋한 기품이 없는 모양이구나. 나는 나폴레옹의 형편없는 병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집의 여주인과 사랑의 불장난을 하는 것이 일시적인 기분 전환은 되겠지.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푸케의 고백과 성경에서 읽은 얼마 안 되는 사랑 이야기에 따라 그는 상세한 작전 계획을 짰고 그 계획을 기록해 두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살롱에서 드 레날 부인은 잠시 동안 그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당신은 쥘리앵이란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은 없나요?" 부인이 그에게 물었다. 아주 기분 좋은 이런 질문에 우리의 주인공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런 상황은 예상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계획을 세운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쥘리앵의 날카로운 재치가 잘 활용되었을 것이며, 불의의 질문은 그의 통찰력을 더욱더 생기 있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는 어색했고 또 자신의 어색함을 과장해서 생각했다. 그러나 드 레날 부인은 그의 그런 모습을 즉시 용서해 주었다. 부인에게는 그것이 매력 있는 순진함의 결과로 보였던 것이다. 누구나 천재로 여기는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순진한 모습이라고 그녀는 생각해 오고 있었다.

"저 풋내기 가정교사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단 말이야, 저 사람은 늘 생각에 잠겨 있고 정략적으로만 행동하는 것 같아. 엉큼한 사람이야." 데르빌르 부인은 이따금 드레날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쥘리앵은 불행히도 드 레날 부인에게 대답하지 못한 것 때문에 몹시 기분이 상했다. 나와 같은 사나이는 이런 실패를 보상해야만 한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방으로 옮겨 가는 순간을 포착하여 부인에게 키스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그의 행동은 하마터면 사람들 눈에 띌 뻔했다. 그녀는 질겁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분이 상했다. 이런 어리석은 짓은 그녀에게 발르노 씨를 상기시켰다.


드 레날 부인은 그처럼 서투른 동시에 그처럼 대담하기 짝이 없는 그를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건 재주 있는 사람이 사랑할 때의 수줍음일 거야! 그가 내 연적으로부터 지금껏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부인은 마침내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침 식사 후 드 레날 부인은 브레이의 군수 샤르코 드 모지롱 씨의 방문을 접대하러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꽤 높게 설치된 작은 작업대에서 장식 융단 짜는 일을 했다. 데르빌르 부인이 그녀 곁에 있었다. 대낮에 이러한 위치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장화를 신은 제 발을 슬며시 내밀어 드 레날 부인의 예쁜 발을 눌러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인의 살이 비치는 양말과 파리에서 주문해 온 예쁜 구 두가 분명히 멋쟁이 군수의 시선을 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드 레날 부인은 겁에 질렸다. 그녀는 가위와 털실 꾸러미와 바늘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쥘리앵의 동작은 가위가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막으려 한 어설픈 시도로 보일 수 있었다. 다행히 영국산 강철로 만든 그 작은 가위가 부러졌다.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이 좀 더 그녀 가까이에 있지 않았던 것이 유감천만이란 시늉을 했다.


"당신은 가위가 떨어지는 것을 나보다 먼저 보았으니 막았어야 했는데요. 그 대신 열성껏 한다는 게 내게 힘껏 발길질만 하셨군요." 이런 모든 제스처가 군수를 속일 수는 있었으나 데르빌르 부인을 속이지는 못했다.

'이 예쁘장한 소년은 어지간히도 어리석은 태도를 지녔구나!' 데르빌르 부인은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지방 도시의 처세는 이런 종류의 잘못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드 레날 부인은 기회를 잡아 쥘리앵에게 일렀다.

"조심하세요, 부탁이에요." 쥘리앵은 자신의 서투름을 알고 기분이 언짢았다. 그는 '부탁이에요.'라는 말에 화를 내야 할지 어떨지를 혼자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는 어리석게도 이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 교육에 관계된 일이라면 그 여자가 내게 '부탁이에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사랑에 대한 응답에 있어서는 그 여자는 평등을 전제로 해야 한다. '평등'이 없이는 서로 사랑할 수 없거늘…….

그는 며칠 전 데르빌르 부인이 가르쳐 주었던 코르네유의 시구절을 성이 나서 되뇌었다.

사랑은 평등을 이루지
그것을 애써 찾지 않노라.


쥘리앵은 애인도 가져본 적이 없는 주제에 돈 후안 노릇을 해 보겠다고 안달이었기에, 하루 종일 죽도록 어리석은 짓만 되풀이했다. 그의 생각 중 한 가지만이 옳았다. 자기 자신과 드 레날 부인에게 다 같이 싫증이 난 그는, 정원에 나가 어둠 속에서 그녀 곁에 앉아 있어야 할 밤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드 레날 씨에게 사제를 만나러 베리에르에 가겠다고 얘기하고 저녁 식사 후에 출발해서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베리에르에 당도하자 셸랑 사제는 이사 준비에 분주했다. 그는 마침내 면직당하고 보좌 신부 마슬롱이 그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쥘리앵은 선량한 사제의 일을 거들어 주었다. 쥘리앵은 푸케에게 이처럼 부당한 실례를 보고 나니 차라리 성직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 자신의 구원에 유리할 듯하다는 의사를 밝히는 편지를 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직에의 문은 유보해 둔 채로, 만약 그의 정신에서 음울한 신중함이 영웅심을 능가하게 되면 상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이 사제의 면직 사건을 이용해 보려는 자신의 약삭빠른 생각을 기뻐했다.


15장 닭 우는 소리


사랑(amour)을 라틴어로 아모르(amor)라고 한다.
그러니 죽음(mort)은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그리고 그 앞에는 가슴을 물어뜯는(mord) 근심,
슬픔, 눈물, 계략, 죄악, 회한(remords)이 있나니…….
─ 사랑의 문장(紋章)


베리에르에 다녀온 다음 날 저녁 무렵 쥘리앙에게 한 가지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는 대담무쌍하게도 드 레날 부인에게 그 생각을 전했다. 정원에 자리 잡고 앉자마자 어둠이 충분히 내리기도 기다리지 않고,드 레날 부인의 귀에 입을 바짝 갖다 대고서 부인을 끔찍한 곤경에 몰아넣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말했다. "부인, 오늘 밤 2시에 침실로 가겠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하지만 쥘리앵은 자기 청이 받아들여질까 봐 오히려 벌벌 떨었다.


드 레날 부인은 전혀 과장 없이 정말로 분개해서 쥘리앵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에 대답했다. 부인의 짧은 대답에는 경멸이 담겨 있는 듯했다. 아주 나지막하게 말한 그 대답 속에는 '피이' 하는 비웃음이 확실히 섞여 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쥘리앵은 아이들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핑계로 아이들 방에 다녀와서는 드 레날 부인과 멀리 떨어져 데르빌르 부인 곁에 자리 잡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드 레날 부인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제거했다. 그 날 저녁 대화는 심각한 것이었다. 쥘리앵은 머리를 쥐어짜느라고 잠시 침묵을 지킨 것 이외에는 용케 대화를 풀어 나갔다.


자정이 되어 그들이 헤어지게 되었을 때, 비관에 빠진 쥘리앵은 데르빌르 부인이 자기를 경멸하고 있으며 어쩌면 드 레날 부인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몹시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한 쥘리앵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가식과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나날의 삶이 가져다주는 행복에 어린아이처럼 만족하면서 드 레날 부인과 그날그날 살아갈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성관의 시계가 2시를 쳤을 때 그는 몹시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닭 우는 소리가 성 베드로를 깨어나게 했듯이 시계 치는 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 깨웠다.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의 고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인에게 무례한 제안을 했던 그 순간 이후로 그 제안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제안은 얼마나 꼴좋은 대꾸를 받았던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생각했다. 나는 2시에 그녀의 방에 가겠다고 말했지. 농군의 자식인 만큼 나는 미숙하고 거칠지도 모른다. 데르빌르 부인은 내게 그것을 충분히 암시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쥘리앵이 자신의 용기를 자화자찬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여태껏 그가 이보다 고통스러운 일에 스스로 맞서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신을 신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 설사 무슨 계획이 있다손 쳐도 그는 도저히 계획대로 실행할 수 없을 만큼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보다도 훨씬 더 괴로워하면서 마침내 그는 드 레날 부인의 침실로 통하는 작은 복도에 들어섰다.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문 여는 소리가 몸서리쳐질 만큼 무서운 소리로 들렸다. 방에는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드 레날 부인은 질겁하며 침대 밖으로 뛰어내렸다.

'몹쓸 사람!' 그녀가 부르짖었다.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쥘리앵은 그의 허황된 계획들을 다 잊고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역할로 돌아갔다. 이처럼 매력적인 여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 중 최고의 불행으로 보였다. 부인의 꾸짖음에 대해 그는 오직 부인의 발밑에 몸을 내던지고 그녀의 무릎을 얼싸안는 것으로 답할 뿐이었다. 부인이 아주 준엄하게 얘기하자 그는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image.png


몇 시간 후 드 레날 부인 방에서 나올 때 쥘리앵의 심경은, 소설 문체식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나위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불어넣었던 사랑과 부인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빚어낸 뜻밖의 인상 덕분으로, 그의 서툰 재간으로는 도저히 쟁취하지 못할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달콤한 순간에조차도 괴상한 자존심에 사로잡힌 그는 여자들을 정복하는 데 익숙한 사내의 역할을 해내려고 들었다. 그는 자신이 지닌 사랑스러운 점을 망쳐 버리려고 무한히 애쓰는 셈이었다.


그는 자신이 자아낸 황홀함이나 그 황홀함의 강도를 한층 높여주는 회한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끊임없이 의무의 관념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따르기로 한 이상적 모델에서 벗어나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후회를 겪고 영원히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요컨대 쥘리앵을 탁월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눈앞의 행복을 맛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매혹적인 살빛을 가진 열여섯 살의 처녀가 무도회에 가려고 얼굴에 연지를 칠하는 미친 짓을 하는 것과도 같았다.


쥘리앵의 출현에 질겁하여 놀란 드 레날 부인은 뒤이어 더없이 가혹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런데 쥘리앵의 눈물과 절망적인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거부할 것이 없게 되었을 때조차도 그녀는 정말로 화내며 쥘리앵을 멀리 떠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그의 품 안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런 행동에는 어떠한 계획적인 의도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용서의 여지없이 저주받은 여자가 된 것으로 생각했고, 정신없이 쥘리앵을 애무함으로써 지옥의 광경을 가려 보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쥘리앵이 행복을 향락할 줄만 알았더라면, 자기가 유혹한 여인의 불타오르는 듯한 감각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인공의 행복에는 무엇 하나 결핍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떠난 다음에도 부인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황홀감과 아울러 가슴을 찢는 회한과의 싸움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아아! 행복하다는 것, 사랑받는다는 것이 결국 이런 것에 불과한가? 자기 방에 들어서면서 쥘리앵의 머리에 떠오른 첫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오래 갈망하던 것을 막 획득하고 난 다음에 으레 그렇듯이, 그의 마음은 놀라움과 불안한 동요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열병식에서 돌아온 병사처럼 쥘리앵은 자신의 행동을 주의 깊게 세세히 다시 살펴보았다. 나는 자신에 대한 의무를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나는 내 역할을 잘 수행했는가? 그런데 무슨 역할이란 말인가? 여자들을 눈부시게 다루어내는 데 익숙한 사나이의 역할이었다.


16장 이튿날


그는 자기 입술을 그녀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 타래를
뒤로 쓸어내렸다.
─ 『돈 후안』 제1가 170절


쥘리앵의 영예를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드 레날 부인은 너무도 동요하고 너무도 놀란 상태여서, 한순간에 자기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남자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동이 터오는 것을 보자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에게 돌아가 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아! 어쩌나, 남편이 소리라도 들었다면 나는 끝장이에요."


그럴듯한 구절을 만들어낼 여유를 가졌던 쥘리앵에게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올랐다.

"목숨을 아까워하리오?"

"아! 지금 이 순간은 몹시 아까워요! 하지만 당신을 안 것을 후회하지는 않겠어요."

쥘리앵은 일부러 날이 훤히 밝은 다음 대담하게 돌아가는 것이 자기 위엄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경험 있는 남자처럼 보이려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자신의 사소한 행동까지도 면밀히 살피는 끊임없는 주의도 한 가지 이점은 가지고 있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드 레날 부인을 다시 만났을 때 그의 행동은 신중함의 완벽한 표본과도 같았다. 부인으로서는 눈자위까지 빨개지지 않고는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순간이라도 그를 쳐다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동요를 알아챘으나 감추려고 애쓰면 동요가 더 커질 뿐이었다.


쥘리앵은 그녀에게 단 한 번밖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 드 레날 부인은 그의 신중함에 감탄했다. 그러나 곧 뒤이어 그 단 한 번의 눈길이 되풀이되지 않는 것을 보자 불안에 빠졌다. '그이는 벌써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아아! 나는 그이에 비해 너무 늙었다. 열 살이나 연상이니까.'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식당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길에 그녀는 쥘리앵의 손을 꼭 쥐었다. 이처럼 애틋한 사랑의 표시에 놀란 쥘리앵은 정열적인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침 식사 때 그녀의 모습은 아주 아리따워 보였던 것이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매력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다. 그의 시선이 드 레날 부인에게 위안을 주었으나 그녀의 불안감을 모두 걷어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불안감으로 인해 그녀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거의 잊을 수 있었다.


아침 식사 때 남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데르빌르 부인도 마찬 가지인 것은 아니었다. 그날 하루 종일, 대담하고도 신랄한 우정을 지닌 그녀는 드 레날 부인이 겪고 있는 위험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암시하는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얘기했다. 드레날 부인은 쥘리앵과 단둘이만 있고 싶어서 속이 탔다. 그녀는 쥘리앵이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한결같이 부드러운 성품임에도, 그녀는 데르빌르 부인에게 그녀가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지를 몇 번이나 암시할 뻔했다.


image.png


저녁에 정원에 나갔을 때 데르빌르 부인은 드 레날 부인과 쥘리앵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았다. 쥘리앵의 손을 꼭 쥐고 입술에 갖다 댈 기쁨을 달콤하게 상상하던 드 레날 부인은 그에게 한마디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이런 불시의 사고에 그녀는 더욱더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한 가지 후회로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지난밤 경솔하게 자기 방에 온 것에 대해 쥘리앵을 지나치게 꾸짖었기 때문에 이 밤에는 그가 오지 않을까 하여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찍 정원을 떠나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조바심이 나서 쥘리앵의 방문에 와서 귀를 대 보았다. 가슴을 쥐어뜯는 불안과 정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방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런 행동은 그녀에게 최후의 타락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 짓은 이 지방에서 속담으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의 기다림은 고통에 싸인 200년의 세월과도 같았다. 그러나 쥘리앵은 자기가 의무라고 부르는 것에 너무도 충실한 사람이어서 스스로 규정한 것을 한 치도 틀리지 않게 실행했다.


1시를 지자 그는 살며시 자기 방을 빠져나와, 집주인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드 레날 부인 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밤에는 연인 곁에서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수행해야 할 역할을 쉬지 않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었다. 드 레날 부인이 자기 나이에 대 해 얘기한 것이 적이 그의 마음을 놓이게 했다.


"아아! 나는 당신보다 열 살이나 위예요! 어떻게 당신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겠어요!" 그 생각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 속셈 없이 되풀이해서 그렇게 말했다. 쥘리앵은 그런 걱정이라고는 해 보지도 않았지만 나이 차이가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거의 잊을 수 있었다.


자신의 미천한 태생 때문에 하급의 애인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역시 사라졌다. 쥘리앵의 황홀감이 그의 수줍은 연인을 차차 안심시켜 감에 따라, 그녀는 얼마간 행복한 기분과 자기 애인을 판단할 힘을 회복했다. 그날은 전날 밤의 밀회를 승리로 이끌게는 했지만 기쁨으로 만들지는 못했던 그 어색한 태도를 다행히도 그가 거의 지니고 있지 않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쥘리앵은 그 나이의 모든 열정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다. 부인은 확실히 천사처럼 착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부인보다 예쁘지는 못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어떤 역할을 연기하려는 생각은 거의 완전히 잊었다. 마음을 푹 놓는 순간에는 자신의 걱정거리를 부인에게 모두 고백하기까지 했다. 이런 고백은 그가 불어넣은 부인의 정열을 절정에 다다르게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사랑을 받은 행복한 연적은 없는 모양이구나! 드 레날 부인은 더없이 기쁨을 느끼며 혼자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그렇게 애지중지한 초상화에 대해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쥘리앵은 그것이 어떤 남자의 초상화라고 그녀에게 맹세했다. 드 레날 부인이 깊은 생각에 잠길 만큼 냉정해질 때면 그녀는 이러한 행복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그것을 짐작조차 못했던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아! 아직 아름다운 여자로 통할 수 있었던 십 년 전에 그를 알았더라면!' 그녀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쥘리앵은 그런 생각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의 사랑은 아직도 야심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처럼 불행하고 경멸받는 가련한 존재가 그처럼 고귀하고 그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연인의 매력을 바라볼 때의 그의 찬탄과 열광의 표정은 나이 차이를 걱정하는 부인을 얼마간 안심시키기에 이르렀다. 좀 더 세련된 지방에 사는 삼십 대 여자라면 오래전부터 갖고 있을 처세술을 그녀가 조금만 알았더라도, 놀라움과 자존심의 도취가 지속되는 동안만 살아 있는 듯이 보이는 사랑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고 몸서리쳤을 것이다.


야심을 망각하고 있는 순간이면 쥘리앵은 드 레날 부인의 모자와 옷에 대해서까지도 열광하여 감탄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향내를 맡는 즐거움에 물릴 줄을 몰랐다. 그는 거울이 달린 부인의 장롱을 열고는 거기 들어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이며 정돈된 상태를 몇 시간씩이나 감탄하며 쳐다보았다. 그의 연인은 그에게 몸을 기댄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결혼식 전날 결혼 함에 넣는 보석이며 피륙을 넋을 놓고 구경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드 레날 부인은 때때로 생각했다. '얼마나 불덩이 같은 영혼인가! 이런 사람과 함께라면 얼마나 황홀한 삶이겠는가!'


쥘리앵으로서는 여성의 매력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화기(火器)에 이처럼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없었다. 사심 없는 진실한 감탄과 연인의 열광적인 모습이 종종 그에게 허황된 이론을 잊게 해 주었다. 그 허황된 이론 때문에 그는 사랑의 초기에는 그처럼 어색하고 또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습관적인 위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그 귀부인에게 일상의 예의범절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포근해지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연인의 신분이 자기의 신분까지도 높여 주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한편 드 레날 부인은 모든 사람들이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이 천재적인 청년에게 많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가르치는 데서 감미로운 정신적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군수와 발르노 씨까지도 쥘리앵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녀에게는 그 사람들도 바보는 아닌 듯이 보였다.


그러나 데르빌르 부인은 그런 감정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었다. 자기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데 절망하고 문자 그대로 정신이 돌아버린 친구에게는 자기의 분별 있는 충고도 기분을 상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그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베르지를 떠나 버렸다. 드 레날 부인은 눈물을 좀 흘렸지만 곧 자신의 지극한 행복이 더 커진 듯이 느꼈다. 친구가 떠남으로써 거의 온종일을 애인과 단둘이서만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쥘리앵은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게 되면 푸케의 치명적인 제안이 마음을 흔들어 놓기 때문에 더욱더 애인과의 달콤한 관계에 몰두했다. 남을 사랑해 보지도 않았고 누구에게서 사랑을 받은 적도 없는 그는, 이 새로운 생활의 처음 며칠 동안에는 그때까지 자기 생존의 본질이었던 야망을 드 레날 부인에게 고백할 뻔했다. 그는 이상하게 자기 마음을 유혹하는 푸케의 제안에 대해서도 부인과 상의해 보고 싶었으나 하나의 사소한 사건이 일체의 솔직함을 막아 버렸다.


17장 제1부시장


오오, 이 사랑의 봄은
덧없는 사월의 영화(榮華)와 얼마나 흡사한가!
한순간 찬란한 태양 빛을 비추다가,
구름이 모든 것을 하나씩 걷어가 버리나니.
─ 『베로나의 두 신사』


어느 날 저녁 황혼 녘에 쥘리앵은 귀찮은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과수원 깊숙한 곳에서 애인 곁에 앉아 깊은 몽상에 잠겨 있었다. 이처럼 달콤한 순간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인가?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의 마음은 어떤 신분에 정착하는 것의 어려움을 생각하는 데 골몰해 있었다. 그는 소년기를 끝내고 풍요롭지 못한 청년기의 출발을 망쳐 버리는 커다란 불행이 닥쳐오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 부르짖었다. "아아! 나폴레옹은 프랑스 청년들을 위해 하느님이 보내 주신 사람이었다! 누가 그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인가? 나보다는 부자라고 해도 그저 좋은 교육을 받을 정도의 여유가 있을 뿐, 자기 대신 입대할 청년을 사거나 출셋길을 개척할 만한 돈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은 나폴레옹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 가!"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여 말했다.


"숙명적인 그의 기억이 있는 한,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리라!" 그는 갑자기 드 레날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냉정하고 경멸적인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그녀에게는 이런 사고방식이 하인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자기는 매우 부유하다는 생각 속에서 자라난 그녀는 쥘리앵도 마땅히 자기와 같은 생각일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쥘리앵을 생명보다도 훨씬 더 사랑하고 있었으나 금전 문제는 전혀 고려해 보지 않았다.


쥘리앵으로서는 부인의 그런 생각을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재치를 발휘하여, 그 귀부인에게 자기가 방금 한 말은 실상은 재목상을 하는 친구 집에 갔을 때 들은 것이라고 슬쩍 얼버무렸다. 그것은 신앙심 없는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그랬군요! 그런 사람들과는 더는 어울리지 마세요." 드 레날 부인은 아직도 약간 싸늘한 태도로 말하더니, 그 태도는 이내 열렬한 애정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쥘리앵의 마음을 이끌어오던 환상은 부인이 눈살을 찌푸린 것 때문에, 아니 그보다도 자신의 경솔함에 대한 후회 때문에 처음으로 곤경에 봉착했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이 여자는 착하고 온화하며 내게 강한 관심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여자는 적의 진영에서 자라났다. 저들은 특히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나 진로를 개척할 만한 돈이 없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계층을 두려워하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동등한 무기를 들고 싸우게 된다면 저들, 저 귀족들은 어떤 꼴이 될 것인가! 근본적으로는 드 레날 씨도 정직한 편이긴 하지만, 만약 정직하고 선의를 품은 나 같은 인물이 베리에르의 시장이 된다면! 나는 보좌 신부며 바르니 씨며 그들의 모든 간계를 얼마나 멋지게 물리칠 것인가! 베리에르에서는 정의가 승리를 거두련 만! 그들의 재능이란 것이 내게 장애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더듬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날 쥘리앵의 행복은 끝까지 지속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솔직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야망과 싸울 용기가, 그것도 '당장에' 필요했던 것이다.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의 말에 놀랐다. 교육을 잘 받은 하층 계급의 청년들 때문에 로베스피에르 같은 자가 다시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상류 사회 인사들로부터 자주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드 레날 부인의 싸늘한 태도는 꽤 오래 지속되었고 그것이 쥘리앵의 눈에 띈 듯했다. 쥘리앵의 몹쓸 말에 대한 역겨움이 가시자 그녀는 그에게 넌지시 불쾌한 소리를 한 것이 걱정스러웠다. 귀찮은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행복에 잠겨 있을 때면 그렇게도 순결하고 순진한 그녀 의 표정에 그런 걱정이 짙게 드리워졌다.


쥘리앵은 더 이상 마음 놓고 몽상에 잠기지 못했다. 좀 더 침착해지고 사랑하는 마음은 보다 약해진 그는, 자기가 드 레날 부인을 만나러 그녀의 방으로 찾아가는 것은 경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자기 방으로 찾아오는 것이 나을 듯했다.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하인 눈에 띄더라도 부인은 여러 가지 핑계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해결책 역시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는 신학생의 입장으로서는 서점에 주문할 수 없는 책 몇 권을 푸케에게서 받아 두고 있었다. 그것들은 밤에만 펼쳐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부인이 찾아오는 것 때문에 독서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과수원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던 지난밤에도 부인이 찾아올까 봐 마음이 졸여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 책들을 이해하려면 드 레날 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많은 사소한 것들을 부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한 것들을 모르 고서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해도 하층 사회에서 태어난 젊은이의 지성은 곧 발전이 가로막히는 것이다. 지식이 별로 없는 여인에게서 받는 이런 사랑의 교육은 행복한 것이었다.


쥘리앵은 곧바로 오늘날의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2000년 전의 옛날 사회를 그린 이야기나 또는 볼테르와 루이 15세 시대인 불과 육십 년 전 사회를 그린 이야기를 읽어도 그의 정신은 전혀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그의 눈을 가로막던 장막이 걷히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그는 마침내 베리에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브장송의 도지사를 중심으로 이 년 전부터 아주 복잡하게 짜인 음모가 무대의 전면에 드러났다. 그 음모는 파리의 대단히 저명한 인물이 써 보낸 편지에 의해 뒷받침을 받고 있었다. 이 지방 최고의 독실한 신자인 드 무아로 씨를 베리에르 제2 부시장이 아니라 제1부시장으로 선출하는 것이 문제되고 있었다. 대단히 부유한 제조업자가 그의 경쟁자여서, 드 무아로 씨는 한사코 그 경쟁자를 제2부시장 자리로 밀어내야 했다.


마침내 쥘리앵은 이 지방 상류 사회 인사들이 드레날 씨 댁에 모여 만찬을 할 때 얼핏 듣곤 했던 몇 마디 암시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특권 계층은 제1부시장 선택에 몹시 신경 쓰고 있었으나, 나머지 시민과 특히 자유주의자들은 그런 기미를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 문제가 그처럼 중요하게 된 이유는, 누구나 알다시피 베리에르의 대로가 국도가 되어서 그 길을 동쪽으로 3미터 이상 확장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넓혀야 할 길 쪽에 세 채의 집을 가지고 있는 드 무아로 씨가 만약 제1부 시장에 선출되고 뒤이어 드 레날 씨가 국회의원이 될 경우 시장으로 승진하게 된다면, 공도(2월) 위에 나와 있는 집들은 그저 눈에 띄지 않게 살짝 손질이나 하는 식으로 백 년은 버티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드 무아로 씨의 돈독한 신앙심과 청렴함은 익히 알려진 바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융통성 있는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많은 자녀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뒤로 물러나야 할 집들 가운데 아홉 채는 베리에르 일급 명사들의 소유였던 것이다.


쥘리앵의 눈에는 이 음모가 '퐁트누아의 전사(戰史)'보다도 중요해 보였다. 퐁트누아란 지명도 푸케가 보내 준 책에서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저녁에 사제의 집으로 공부하러 다니기 시작한 오 년 전부터 쥘리앵에게 놀라운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하는 학생에게는 신중함과 겸손함이 일차적인 자질이므로, 물어본다는 것이 그에게는 항상 불가능했다.


어느 날 쥘리앵에게 적의를 품은 남편의 하인에게 드 레날 부인이 무슨 분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님, 오늘은 마지막 금요일인데요." 그자는 이상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럼 가 봐요." 드 레날 부인이 말했다.

"그렇군요! 저 사람은 옛날에 교회였다가 최근에 다시 예배 장소가 됐다는 그 건초 창고에 가는 거군요. 그런데 뭘 하러 가는 거죠? 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쥘리앵이 이렇게 물어보았다.


드 레날 부인이 대답했다.

"여자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거기에서는 누구나 너나들이로 지낸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저 하인은 거기서 발르노 씨를 만나게 될 텐데, 그처럼 거만하고 어리석은 발르노 씨도 저 생장이 반말하는 소리를 듣고 화내지 않을뿐더러 생장에게 같은 투로 대답한다는 거예요. 어느 날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이 우리를 참살하지 않도록 우리는 하인 한 명에 20프랑씩 지불한답니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그들은 서로 반대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부인에게 까다롭고 합리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피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쥘리앵이 부인에게서 얻는 행복과 쥘리앵에 대한 부인의 지배력을 무의식 중에 크게 해 주었다. 아주 영리해진 아이들이 곁에 있어서 분별 있는 냉정한 얘기밖에 주고받을 수 없을 때면, 쥘리앵은 사랑에 불타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면서도 더없이 온순한 태도로 부인의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쥘리앵에게 자기 아이들을 대하는 듯한 허물없는 동작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쥘리앵의 천재성에 겁이 날 정도였다. 날이 갈수록 이 젊은 사제에게서 미래의 위대한 인물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듯이 여겨졌다. 그에게서 교황이나 리슐리외* 같은 재상의 모습을 보았다.

“당신이 명성을 떨치는 것을 볼 때까지 내가 살 수 있을까요? 위대한 인물에게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법이에요. 왕정도 종교도 그런 인물을 필요로 해요.” 그녀는 쥘리앵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 아르망 장 뒤 플레시 리슐리외(Armand Jean du Plessis Richelieu, 1585~1642). 루이 13세 시대의 재상으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치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


18장 국왕의 베리에르 행차


여러분은 영혼도 없고 혈관에 피도 흐르지 않는
천민의 시체처럼, 그저 내동댕이쳐지는 것 이외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란 말이오?
─ 주교의 강론, 성 클레망 교회에서


9월 3일 밤 10시, 헌병 한 명이 말을 질주하여 대로를 올라가면서 베리에르 전 주민의 잠을 깨웠다. 그는 국왕 폐하께서 다음 일요일에 행차하신다는 소식을 가져오는 길이었는데,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지사는 의장대를 구성할 것을 허락했는데 그것은 의장대를 구성하라는 요구나 다름없었다. 가능한 모든 호화로움을 펼쳐 보여야 했다. 급보를 전할 사람이 베르지로 파견되었다. 드 레날 씨가 밤중에 당도해 보니 시가지 전체가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누가 의장대를 지휘할 것인가? 드 무아로 씨가 그 지휘를 맡는 것이 철거해야 할 가옥의 이해관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드 레날 씨는 즉시 알아차렸다. 의장대를 지휘한다는 것은 제1부시장 자리의 자격을 얻는 것과도 같았다. 드 무아로 씨의 신앙심은 그 누구와도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흠잡을 나위가 없었으나, 그는 한 번도 말을 타 본 경험이 없었다. 그는 매사에 소심한 서른여섯 살 난 사람이었는데, 낙마와 아울러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시장은 새벽 5시부터 그를 불러오게 했다.

"모든 신사들이 당신을 천거하는 제1부시장 자리에 당신이 이미 앉아 있는 것으로 알고, 나는 당신의 의견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 불행한 도시에서는 공업이 번창 일로에 있고 자유주의파는 백만장자가 되어 권력을 꿈꾸고 있소이다. 자유주의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게 될 거요. 국왕과 왕정과 무엇보다도 성스러운 종교의 이해관계를 생각합시다. 당신은 의장대의 지휘를 누구에게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말에 대한 끔찍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드 무아로 씨는 마침내 순교자처럼 그 영예를 떠맡고 말았다.

"실수 없이 꾸려 가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는 시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칠 년 전 왕자가 이곳에 들렀을 때 착용했던 의장대 제복을 손볼 시간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침 7시에는 드레날 부인이 베르지에서 쥘리앵과 아이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그녀는 자유주의파의 부인들로 응접실이 가득 찬 것을 발견했다. 그 부인들은 당파가 결합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자기 남편이 의장대에 낄 수 있게 시장에게 알선해 줄 것을 드 레날 부인에게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어떤 부인은 만일 자기 남편이 의장대원으로 선출되지 못하면 슬픔으로 파산하고 말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드 레날 부인은 당장에 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녀는 매우 분주해 보였다.


쥘리앵은 부인이 그렇게 동요된 이유를 자기에게 숨기는 것에 놀랐고 또 몹시 화가 났다. 그는 씁쓸한 느낌으로 혼자 생각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자기 집에 국왕을 맞이하게 되는 기쁨 앞에서 이 여자의 사랑은 사그라져 버린 거야. 이 모든 소란이 이 여자를 현혹시킨 거지. 특권 의식이 머리를 어지럽히지 않게 돼야 이 여자는 다시 나를 사랑하겠지.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되자 부인이 더욱 사랑스러워졌다는 것이었다.


실내 장식업자들이 집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는 오랫동안 부인에게 말을 건넬 기회를 노렸으나 허사였다. 마침내 그는 자기 방에서 그의 옷 한 벌을 들 고 나가는 부인과 마주쳤다. 그들 둘만 있었다. 그는 부인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부인은 듣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저런 여자를 사랑하다니 내가 바보지. 저 여자는 야심 때문에 자기 남편만큼이나 미쳐 버린 거야.


사실 그녀는 그 이상으로 미쳐 있었다.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쥘리앵에게 고백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커다란 욕망의 하나는 단 하루라도 쥘리앵이 음울한 검은 옷을 벗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그처럼 기교를 모르는 여인으로서는 정말로 찬탄할 만한 재간을 발휘하여, 부인은 우선 드 무아로 씨에게서 그리고 뒤이어 군수 드 모지롱 씨에게서 쥘리앵이 대여섯 명의 청년을 제치고 의장대원에 임명되도록 허락을 얻어 냈다. 제외된 대여섯 명의 청년은 아주 부유한 공장주의 자제였고 그들 중 적어도 두 명은 모범적인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자기 사륜마차를 빌려주어 그의 노르망디산 준마들을 자랑해 보일 심산이던 발르노 씨도, 그가 가장 미워하는 쥘리앵에게 말 한 필을 빌려주는 데 동의하고 말았다. 그런데 의장대원들은 모두, 칠 년 전에 눈부신 빛을 발휘했던 두 개의 은제 대령 견장이 부착된 그 훌륭한 하늘빛 제복을 가지고 있거나 빌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드 레날 부인은 일부러 멀리 브장송에 사람을 보내어 제복이며 무기며 모자 등 의장대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오게 했다. 그녀는 쥘리앵을, 그리고 시 전체를 놀래 주고 싶었다.


의장대 구성과 시민의 정신적인 채비에 대한 일이 끝나자 시장은 큰 종교의식을 준비해야 했다. 국왕이 시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브레이 르 오에 모셔 둔 성 클레망의 유명한 유골에 참배하지 않고서 베리에르를 지나칠 리 없었다. 많은 성직자들의 참여가 요망되었는데, 그것은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새로 사제가 된 마슬롱 씨는 셸랑 씨의 참석을 한사코 막으려 들었다.


드 레날 씨가 셸랑 사제의 불참은 경솔한 짓이라고 경고해 보아도 헛일이었다. 조상들이 대대로 이 지방 영주였던 드 라 몰 후작이 국왕의 수행원으로 지명되어 있었다. 그는 삼십 년 전부터 셸랑 사제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는 베리에르에 도착하는 대로 셸랑 사제의 안부를 물어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사제가 면직당한 것을 알게 되면, 그는 거느릴 수 있는 수행원들을 모두 데리고 사제가 은거해 있는 작은 집까지 직접 찾아가 볼 사람이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난다면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나는 여기서도 브장송에서도 면목을 잃게 됩니다. 얀세니스트*가 나의 성직자단에 끼어들다니오!" 마슬롱 사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드 레날씨도 만만치 않게 응수했다.

"신부님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나는 베리에르의 행정 기관이 드 라 몰 씨의 모욕을 당하도록 하지는 않겠습니다. 신부님은 그분을 모릅니다. 그 양반은 궁정에서는 점잖게 행동하시지만, 이곳 시골에서는 조롱과 야유의 명수로 그저 재미 삼아 자유주의자들 앞에서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천주교 신학자인 얀센(Jansen)이 창시한 교의를 신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결국 세 차례의 협상 끝에 토요일 밤늦게야 마슬롱 사제의 자존심은 용기로 변한 시장의 두려움 앞에 굴복했다. 노령과 불편한 몸이 허용한다면, 브레이 르 오의 유골 참배 의식에 참석해 주기를 앙청하는 공손한 편지를 셸랑 사제에게 써야 했다. 그는 쥘리앵을 차부제(次副祭) 자격으로 동반하는 초청장을 요구해 받아 냈다.


일요일 아침부터 인근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농부들이 베리에르 거리에 넘쳐흘렀다.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마침내 3시경이 되자 군중 전체가 술렁거렸다. 8킬로미터쯤 떨어진 바위산 위에 커다란 봉홧불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곧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시 소유의 낡은 스페인 포가 연속 발포되면서 이 커다란 사건에 대한 기쁨을 표시했다. 의장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빛나는 제복에 감탄했으며 매 순간마다 조심스럽게 안장 앞테를 잡으려고 쩔쩔매는 드 무아로 씨의 겁먹은 모습은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제9열의 제1기수는 아주 날씬한 미소년이었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질 못했다. 다음 순간, 어떤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분격의 외침과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놀라움의 침묵은 만인의 충격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발르노 씨의 노르망디산 말을 타고 있는 그 청년이 목수의 아들 소렐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마침내 알아보았다.


image.png


모든 이들 사이에서, 특히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시장을 비난하는 함성이 일었다. 사제로 변신한 그 풋내기 노동자 녀석을 제 자식들의 가정교사란 이유로 감히 의장대원으로 지명하다니!

"그 신사들이 천민 출신인 저 건방진 어린 녀석을 단단히 혼내줘야 할 거예요."

귀족 사회의 대화는 더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귀부인들은 그런 터무니없는 처사를 시장 단독으로 했겠냐고 수군거렸다. 사람들은 시장이 비천한 태생을 멸시한다는 것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무성한 화제의 대상이 되어 있는 동안, 쥘리앵은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천성적으로 대담한 그는 이 산간 도시 대부분의 젊은이들보다 훌륭하게 말을 탔다. 그는 여자들의 눈에서 자기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의 견장은 새것이었기 때문에 더 반짝였다. 그가 탄 말은 연방 뒷발로 일어섰고 그의 기쁨은 끝 간 데를 몰랐다.


그보다 행복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시청의 창문을 통해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뒤이어 사륜마차에 올라탄 그 여인은 다른 길로 빠른 속도로 우회하여, 마침 쥘리앵의 말이 대열 밖으로 뛰쳐나오는 순간에 도착해서는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떨었다. 이윽고 그녀의 사륜마차는 다른 성문을 통해 전속력으로 빠져나와 국왕이 통과할 도로에 접어들어, 영광의 먼지가 날리는 가운데에 서 이십 보가량 간격을 두고 의장대를 뒤따를 수 있었다.


폐하는 그날을 위해 모든 진홍빛 커튼을 동원하여 장식한 아름다운 신축 교회에서 마차를 내렸다. 국왕은 오찬을 들고 성 클레망의 유명한 유골에 참배하기 위해 곧 마차에 다시 오를 예정이었다. 국왕이 교회에 당도하자마자 쥘리앵은 드 레날 씨 댁으로 말을 달렸다. 거기에서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아름다운 하늘빛 제복이며 칼이며 견장을 벗어 놓고 초라한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다시 말에 올라 잠시 후에는 아주 아름다운 언덕 꼭대기에 있는 브레이 르 오에 당도했다.


쥘리앵은 셸랑 사제 곁으로 갔다. 사제는 그를 몹시 꾸짖고는 수단과 중백의(中白衣)를 내주었다. 그는 재빨리 그것을 걸쳐 입고 아그드의 젊은 주교를 만나러 가는 셸랑 사제를 뒤따랐다. 주교는 드 라 몰 씨의 조카로 최근에 임명받은 사람이었는데, 국왕에게 유골을 참배하도록 하는 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주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성직자단은 초조했다. 그들은 옛 사원의 어두운 고딕식 회랑에서 그들의 지휘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1789년 이전에 스물네 명의 참사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옛 브레이 르 오 참사회를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서 스물네 명의 사제가 소집되어 있었다. 45분 동안이나 주교의 젊은 나이를 한탄하고 난 후에 사제들은, 사제장이 주교에게 찾아가서 국왕이 곧 당도하실 테니 내진(內陣)으로 나와 달라고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장자인 셸랑 씨가 사제장으로 추대되어 있었다. 쥘리앵에 대해 기분이 언짢았음에도 셸랑 사제는 그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주교의 접견실에 당도하자, 으리으리한 복장을 한 시종들은 주교께서는 면회를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노사제에게 겨우 한마디 응대해 줄 뿐이었다. 셸랑 사제가 자기는 고귀한 브레이 르 오 참사회의 사제장 자격으로 어느 때라도 제식을 맡은 주교를 면회할 권리가 있다고 설명하자 시종들은 코웃음을 쳤다.


시종들의 건방진 태도에 오만한 쥘리앵은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는 문이란 문은 닥치는 대로 뒤흔들어 가며 옛 사원의 방들을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아주 조그만 문 하나를 세차게 밀어붙이고 그는 검은 복장에 목걸이를 단 주교의 하인들이 모여 서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황급한 그의 태도를 보자 하인들은 그를 주교가 부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통과하게 내버려 두었다.


몇 걸음 더 나아가자 검은 떡갈나무로 벽을 친 몹시 어둡고 커다란 고딕식 홀이 나왔다. 첨두(尖頭) 형의 창문들은 하나만 빼놓고 모두 벽돌로 막혀 있었다. 벽돌 공사의 거침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훌륭한 옛 소목 세공과는 한심한 대조를 이루었다. 대담공 샤를 공작이 어떤 죄의 속죄를 위해 1470년경에 건축하게 했다는, 부르고뉴의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 홀의 양 벽은 화려하게 조각한 나무 판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칠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아직도 새하얀 벽토와 벌거숭이 벽돌 때문에 품위가 훼손되긴 했지만, 그 우수에 찬 장엄함은 쥘리앵을 감동시켰다. 그는 조용히 멈춰 섰다. 홀의 반대편 끝,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단 하나의 창문 곁에서 그는 마호가니로 틀을 끼운 움직이는 거울 하나를 보았다. 보랏빛 옷과 레이스 장식이 달린 중백의 를 입었으나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젊은 사람 하나가 거울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는 단 하나의 창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 젊은 사람을 쳐다보면서 앞으로 나가 홀을 천천히 가로질러 갔다. 젊은 사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되풀이해 서 천천히 축복을 주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쥘리앵은 그의 노한 표정을 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레이스 장식이 달린 중백의의 화려함에 놀란 쥘리앵은 으리으리한 거울의 몇 보 앞에 서 무의식적으로 멈춰 섰다.


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내 의무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홀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그는 그 사람이 던져 올 퉁명스러운 대꾸에 미리부터 마음이 언짢아졌다. 거울 속으로 쥘리앵이 다가오는 것을 본 젊은이는 몸을 돌리더니, 순식간에 노한 표정을 버리고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자! 마침내 준비가 되었소?"


쥘리앵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 젊은이가 자기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그는 젊은이의 가슴에서 주교가 패용하는 십자가를 보았다. 그 사람이 아그드의 주교였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기껏 나보다 예닐곱 살 연상일 텐데……!' 쥘리앵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박차가 부끄러워졌다.

"예하, 저는 참사회 사제장 셸랑 씨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그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분에 대한 천거는 나도 잘 받았소." 주교는 쥘리앵을 점점 황홀하게 하는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미안하게 됐소이다. 나는 당신을 주교관을 가져오는 사람으로 오인했으니. 파리에서 포장을 잘못해서 위쪽의 은제 장식이 못 쓰게 망가졌어요. 그대로 쓰자니 꼴불견이겠고 해서. 그런데 아직도 오질 않는군!" 젊은 주교는 우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예하, 허락해 주신다면 소인이 주교관을 찾아오겠습니다." 쥘리앵의 아름다운 눈이 효력을 발휘했다.

"그럼 가 보시오. 곧 필요한데……. 참사회 여러분을 기다리게 해서 유감입니다." 주교는 매력적인 정중함을 내보이며 대답했다. 홀 중앙에 도달했을 때 그는 주교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주교는 다시 축복 주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대체 저게 무슨 뜻일까? 아마도 곧 거행될 의식에 필요한 종교적 연습이겠지. 쥘리앵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가 하인들이 모여 있는 방에 당도해 보니 주교관은 그들 손에 있었다. 그들은 쥘리앵의 위압적인 눈초리에 굴복하여 무심코 그에게 주교관을 내주었다.


그는 주교관을 들고 가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홀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걸어갔다. 주교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주교는 지친 오른손으로 아직도 이따금씩 축복을 주고 있었다. 쥘리앵은 주교가 관을 쓰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주교는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아! 잘 맞는 것 같군. 좀 물러서서 봐주겠소?" 그는 만족한 빛으로 쥘리앵에게 말했다.

그런 다음 주교는 빠른 걸음으로 홀 중앙까지 나아가더니, 천천히 거울로 다가가면서 또다시 노한 표정을 띠고 엄숙하게 축복을 주는 것이었다.


"국왕께서는 늘 엄숙하고 존경받는 성직자들을 대해 오셨죠. 나는 특히 내 나이 때문에, 경박한 태도를 보이고 싶지는 않소." 주교는 또다시 축복을 주면서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주교가 말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다 되었소. 가서 사제장과 참사회에게 알려 주시오." 곧 뒤이어 셸랑 씨가 나이 많은 두 사제를 대동하고 으리으리하게 조각된 커다란 문을 통해 들어왔다. 쥘리앵은 여태껏 그 문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일행의 맨 끝에 머물게 되어, 성직자들의 어깨너머로만 겨우 주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교는 천천히 홀을 가로질러 갔다. 그가 문턱에 다다랐을 때 사제들은 행진 대열을 지었다. 잠깐 혼란이 있은 다음 대열은 「시편」을 노래하며 행진하기 시작했다. 주교는 셸랑 씨와 아주 연로한 다른 한 사제를 양편에 거느리고 대열의 맨 끝에서 걸어갔다. 쥘리앵은 셸랑 사제의 수행원으로서 주교의 바로 옆으로 끼어들었다. 그들은 브레이 르 오 사원의 복도를 따라갔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는데도 복도는 어둡고 눅눅했다. 일행은 마침내 회랑의 문에 도착했다.


쥘리앵은 그처럼 아름다운 의식에 감탄하여 정신이 얼떨떨했다. 주교의 젊은 나이로 인해 깨어난 야망과, 그 고위 성직자의 예민한 감성과 미묘한 예절이 그의 마음을 들끓어 오르게 했다. 대열은 옆문을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무시무시한 소리가 그 둥근 옛 천장을 진동시켰다. 그것은 또다시 울려 퍼진 대포 소리였다. 그러나 이 감탄할 만한 소리는 더 이상 쥘리앵에게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제는 나폴레옹이나 군인의 영예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아그드의 주교라니! 그의 수입은 얼마나 될까? 아마 이삼십만 프랑은 되겠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주교 예하의 시종들이 찬란한 천개(天蓋)를 들고 나타났다. 셸랑 씨가 거기에 달린 막대기 하나를 잡았으나 실제로 그걸 떠받친 것은 쥘리앵이었다. 주교는 천개 밑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사실상 늙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우리 주인공의 감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재주가 있으면 못할 것이 없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국왕이 들어왔다. 쥘리앵은 다행히도 국왕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주교는 국왕 폐하에 대해 황공하여 약간 동요한 듯한 뉘앙스를 잊지 않은 채, 은근히 감동시키는 어조로 강론을 했다.


주교의 강론과 왕의 답사가 끝난 다음 국왕 폐하는 천개 밑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폐하께서는 제단 옆의 방석 위에 경건하게 꿇어앉았다. 성가대석은 성직자석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직자석은 바닥에서 두 계단 높이에 마련되어 있었다.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추기경의 옷자락을 받드는 사람처럼 쥘리앵은 셸랑 사제 밑의 마지막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러한 하루는 과격파 신문 100호가 해낸 일을 무산시키기에 족한 것이다.


정말로 몰두하여 기도를 올리는 국왕에게서 쥘리앵은 불과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재치에 넘치는 시선을 가진 자그마한 사람을 눈여겨보았다. 그 사람은 수가 거의 놓이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옷 위에 푸른 하늘빛 훈장을 두르고 있었다. 그는, 쥘리앵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금색 자수가 수놓인 옷을 입은 많은 다른 귀족들보다도 가까이에서 왕을 시중들고 있었다. 쥘리앵은 잠시 후 그 사람이 드 라 몰 씨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태도는 오만하고 불손하게까지 보였다.


쥘리앵은 혼자 생각했다. 이 후작은 우리 멋진 주교처럼 예의 바르지는 못할 것이다. 아아! 성직자의 신분은 얼마나 사람을 온화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런데 국왕께서는 유골에 참배하러 오셨는데, 나는 유골을 전혀 볼 수가 없구나. 성 클레망은 어디에 모셔져 있는가? 곁에 있는 젊은 성직자 한 사람이 그 존귀한 유골은 건물 위쪽의 '촛불이 타고 있는 예배당'에 안치되어 있다고 쥘리앵에게 가르쳐주었다. 쥘리앵은 그곳이 어딘지 몰라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그 말뜻을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더욱더 주의를 기울였다.


군주가 방문할 경우에는 참사회원들이 주교를 수행하지 않는 것이 예법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촛불이 타고 있는 예배당으로 행진하기 시작했을 때 아그드의 주교는 셸랑 사제를 불렀다. 쥘리앵도 감히 셸랑 사제를 뒤따라갔다. 긴 층계를 오른 다음 일행은 아주 조그만 문 앞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 고딕식 문들은 으리으리하게 금박이 칠해져 있었다. 금박은 엊그제 해놓은 듯 눈부셔 보였다.


문 앞에는 베리에르에서 가장 명문에 속하는 집안의 딸들인 스물네 명의 처녀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모여 있었다. 문을 열기 전에 주교는 그 아리따운 처녀들 가운 데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교가 큰 소리로 기도를 올리는 동안, 처녀들은 그의 아름다운 레이스며 우아한 태도며 그처럼 젊고도 온화한 그의 얼굴에 충분히 감탄할 여유가 없었던 듯이 보였다. 이 광경은 우리의 주인공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이성마저도 잃게 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작은 예배당은 불빛으로 타오르는 듯 보였다. 꽃다발을 사이에 두고 여덟 줄로 나뉘어 정렬된 1000개 이상의 촛불이 제단 위에 켜 있었다. 순수한 향의 그윽한 냄새가 성전의 문에서 소용돌이쳐 흘러나왔다. 새로 금박을 칠 한 예배당은 매우 작기는 했지만 대단히 높았다. 제단 위에 켜 있는 4미터 이상이 나 되는 촛불들이 쥘리앵의 눈길을 끌었다. 처녀들은 감탄의 외침을 억제하지 못했다. 예배당의 작은 입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스물네 명의 처녀와 두 명의 사제와 쥘리앵뿐이었다.


뒤이어 드 라 몰 씨와 시종장만을 대동하고 국왕이 도착했다. 호위병들까지도 받들어총의 자세로 무릎을 꿇고 밖에 머물러 있었다. 폐하는 기도대 위에 털썩 몸을 내던지듯이 꿇어앉았다. 금박을 칠한 문에 바짝 몸을 기대고 있던 쥘리앵은 이때 한 처녀의 맨살이 드러난 팔 밑으로 성 클레망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얼핏 보았다. 성 클레망은 젊은 로마 병사의 복장을 하고 제단 밑에 누워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목에는 지금도 피가 흘러내리는 듯한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가위 신기라 할 만한 예술가의 솜씨였다.


사방 40킬로미터에 걸친 모든 마을에서 울리는 종소리만이 은은하게 들리는 깊은 정적 속에서 짤막한 기도를 올리고 난 다음, 아그드의 주교는 국왕에게 강론의 허락을 청했다. 그는 매우 감동적인 짤막한 강론을 했다. 말은 단순했지만 그 효과는 더욱더 뚜렷한 것이었다.


"젊은 기독교 신자들이여, 여러분은 지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국왕 한 분이 전능하시고 두려우신 천주님의 종복들 앞에 무릎 꿇고 알현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피가 흐르는 성 클레망의 상처를 통해 보았듯이, 이 지상에서는 약하고 박해받고 학살당하는 천주님의 종복들이 하늘나라에서는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젊은 기독교 신자들이여, 여러분은 오늘을 영원히 기억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불경(不敬)을 증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저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그러나 선량하신 천주님께 영원히 충실해야 합니다." 이 말을 하고 주교는 위엄 있게 일어섰다.

"여러분은 내게 그것을 약속하겠습니까?" 그는 영감을 받은 듯한 모습으로 팔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약속합니다." 처녀들은 눈물을 쏟으며 대답했다.
"나는 두려우신 천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바입니다." 주교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이와 같이 덧붙여 말했다. 그러고서 의식은 끝났다.


폐하는 예배당 안까지 자신을 수행했던 아가씨들에게 붉은 리본을 착용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 리본에는 '불경을 증오하라, 항상 천주를 찬미하라.'라는 어구가 수놓여 있었다. 드라 몰 씨는 농부들에게 포도주만 병을 나누어 주었다. 저녁이 되자, 베리에르의 자유주의자들은 왕당파 사람들보다 백배 이상이나 휘황찬란하게 그들의 집을 밝힐 이유를 찾아냈다. 떠나기 전에 국왕은 드 무아로 씨를 방문했다.


19장 생각은 괴로움을 낳나니


기괴한 일상사가 정열이 낳는
진정한 불행을 우리 눈에 띄지 않게 한다.
─ 바르나브


드 라 몰 씨가 들었던 방에 본래 있던 대로 가구를 옮겨 놓다가 쥘리앵은 넷으로 접은 아주 빳빳한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첫 면 아래쪽에 '드라 몰 후작 각하, 프랑스 귀족원 의원, 왕실 시종 무관…… 귀하.'라고 적혀 있는, 형편없는 글씨로 쓰인 한 통의 청원서였다.

후작님,
소인은 일생을 종교적 원칙으로 살아왔습니다. 지난 93년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포위 공격 때, 소인은 리옹에서 포탄 세례를 받은 바 있습니다. 소인은 성체 배령을 이행하며 일요일마다 교구의 성당에 나가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소인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93년에도 부활절의 의무를 거른 적이 없습니다. 소인의 식모는(혁명 전에는 소인도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만) 금요일마다 소재일(小齋日)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소인은 베리에르에서 일반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만, 응당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감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행렬 때 소인은 신부님과 시장님 옆에서 천개 밑을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중요 행사 때면 소인은 소인의 비용으로 큰 초를 사서 들기도 합니다. 소인의 재산 증명서는 파리의 재무성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소인은 삼가 후작님께 베리에르 복권 판매 소장 직을 청원하는 바입니다. 현 소장은 중병으로 와병 중인 데다가 선거 때마 다 자유주의파에 투표하는 자이므로 조만간 그 자리가 비게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운운
드 숄랭


이 청원서의 여백에는 드 무아로라는 서명과 함께 난외(欄外)에 기록한 추천문이 쓰여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제 소인은 이 청원을 올리는 자에 대해 말씀드리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운운.

이 숄랭 같은 바보 녀석도 개척해야 할 길을 내게 보여 주는 셈이구나. 쥘리앵은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국왕이 베리에르를 다녀간 후 일주일 동안은 수많은 거짓말, 어리석은 해석, 우스꽝스러운 논의가 난무했다. 국왕, 아그드의 주교, 드 라 몰 후작, 포도주 만 병, 말에서 떨어진 가련한 무아로(그는 훈장을 타게 될 것을 기대하고 낙마한 후 한 달 동안은 두문분출했다.) 등등이 계속 화제에 올랐다.


목수의 아들인 쥘리앵 소렐을 의장대에 끼워 넣은 것은 터무니없이 부당한 조치라고들 말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침 저녁으로 카페에 모여 평등을 설교하기에 목이 쉬는 부유한 날염직 제조업 자들의 수작이 들어 볼 만했다. 드 레날 부인이란 오만한 여자가 그런 가증스러운 짓을 한 장본인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꼬마 사제 소렐의 아름다운 눈이며 싱싱한 볼을 보면 나머지 것은 말 안 해도 다 알 만하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베르지로 돌아온 후 얼마 안 되어, 막내인 스타니슬라스 크사비에가 병에 걸려 열이 올랐다. 드 레날 부인은 갑자기 무서운 회한에 빠졌다.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지속적으로 가책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는지 기적적으로 깨달은 듯 보였다. 마음속 깊이까지 종교적인 성격이었는데도, 그녀는 지금껏 하느님이 보시기에 자기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었다.


image.png


쥘리앵은 이치에 맞는 말은 무엇이건 그녀를 진정시키기는커녕 역정만 돋울 뿐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그녀는 그런 말은 악마의 소리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쥘리앵 자신도 어린 스타니슬라스를 매우 귀여워했으므로 그 애의 병세에 관한 얘기를 더 자주 하게 되었다. 병세는 곧 중태가 되었다. 드 레날 부인은 끊임없는 회 한으로 잠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완강히 침묵을 지켰다. 만약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그것은 하느님과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제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그 고통은 오직 제게만 털어놓으세요. 아직도 저를 사랑하신다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말한다고 우리 스타니슬라스의 열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둘만 있게 되자 쥘리앵은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위로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부인은, 질투심 많은 하느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쥘리앵을 미워하든가 아니면 자기 아들이 죽는 꼴을 볼 수밖에 없다는 강박 관념에 빠져 있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애인을 증오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더 괴로웠다.


"내 곁을 떠나세요, 제발 이 집에서 나가 주세요. 당신이 여기 있기 때문에 내 아들이 죽는 거예요." 어느 날 그녀는 쥘리앵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덧붙이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제게 벌을 내리시는 거예요. 당연한 일이죠. 하느님의 공정하심을 찬양해야죠. 나는 끔찍한 죄를 지었어요. 그런데도 후회도 않고 살아왔으니! 그건 하느님이 나를 버리시는 첫 번째 신호였어요. 나는 이중으로 벌을 받아야만 해요." 쥘리앵은 깊은 감동을 느꼈다. 부인의 말에는 위선도 과장도 들어 있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아이의 병이 위독해졌다. 새벽 2시경 드 레날 씨가 아들을 보러 왔다. 고열에 시달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이는 제 아버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갑자기 부인이 남편의 발밑에 꿇어 엎드렸다. 쥘리앵은 부인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영원히 파멸에 빠지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도 이런 이상한 행동에 드 레날 씨는 역정을 냈다.

"자, 자, 그만해 두라고. 그가 나가면서 말했다.


"아녜요, 제 말을 들어 보세요." 부인은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남편을 붙잡으려고 애쓰면서 부르짖었다. "사실을 모두 말씀드리겠어요. 아들을 죽게 만든 건 저란 말이에요. 저는 그 애에게 생명을 주고는 지금 그것을 도로 빼앗는 거예요. 하늘이 제게 벌을 내리고 있어요. 하느님이 보시기에 저는 살인죄를 범한 죄인이에요. 저는 파멸당하고 모욕당해야 마땅해요. 그렇게 돼야만 주님의 진노가 가라앉으실지 모르겠어요."


드 레날 씨가 좀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진상을 이해했을 것이다.

"헛된 공상이야!" 그는 자기 무릎을 부둥켜안으려는 부인을 밀치면서 소리 질렀다.

"그런 건 모두 헛된 공상이라니까! 쥘리앵, 날이 밝는 대로 의사를 부르게 하시오."

그러고는 자리 되돌아갔다. 드 레날 부인은 부축하려는 쥘리앵을 발작적인 몸짓으로 뿌리치면서, 반쯤 기절한 상태로 무릎을 꿇었다.


쥘리앵은 놀라서 어쩔 줄 몰랐다. 이것이 간통이란 것이구나! 간사한 사제들의 얘기가 옳단 말인가! 하고많은 죄를 저지르는 주제에 그들이 어찌 죄의 참뜻을 안단 말인가? 참 괴상한 일이다……!

쥘리앵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드 레날 씨가 물러간 후 20분 동안이나 쥘리앵은 사랑하는 여인이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로 아이의 작은 침대에 머리를 기댄 채 꼼짝 않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 다. 여기, 탁월한 천성을 타고난 여인이 나를 알았기 때문에 한없는 불행에 빠져 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시간은 살같이 빨리 흘러간다. 나는 이 여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여기서는 더 이상 내가 문제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과 그들의 하잘것없는 허식이 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이 여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녀를 떠난다? 그러나 그것은 끔찍한 고통 속에 그녀를 홀로 남겨두는 것이 된다. 저 허수아비 같은 남편은 이 여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만 끼칠 것이다. 그 상스러운 작자는 아내에게 거친 말이나 퍼부어 댈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정신이 나가 창문으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이 여인을 혼자 내버려 두고 주의 깊게 돌보지 않으면 그녀는 남편에게 모든 걸 고백해 버릴 것이다.

부인이 가져올 많은 유산에도 불구하고 이 작자가 소동을 벌이게 될지 또 누가 알겠는가. 어쩌나! 부인은 모든 걸 말해 버릴지도 몰라, 그 망할 놈의 마슬롱 사제에게. 녀석은 여섯 살짜리 막내 아이의 병을 핑계 삼아 요새 늘 이 집에 죽치고 있거든. 무슨 꿍꿍이속이 있을 거다. 괴로움과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부인은 인간이 어떤 것인지 모조리 잊고서 오직 사제에게만 기대고 있으니 낭패지.


"가세요!" 별안간 눈을 번쩍 뜨며 드 레날 부인이 그에게 외쳤다.

"당신을 도울 길을 알 수만 있다면 나는 골백번이라도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쥘리앵이 대답했다. "내 사랑하는 천사, 나 때문에 불행에 빠진 것을 알고서 당신 곁을 떠난다면 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내 괴로움쯤은 문제도 안 됩니다. 그래요. 사랑하는 분이여, 나는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떠나면, 당신은 주인 양반께 모든 걸 털어놓고 파멸할 겁니다. 치욕스럽게도 집에서 쫓겨날 것을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잘못을 모두 당신에게만 뒤집어씌울 겁니다. 당신은 그 치욕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테고……."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예요." 그녀는 벌떡 일어서면서 울부짖었다.

"나는 고통받겠어요, 차라리 잘된 일이죠. 그러나 나는 치욕을 자청하는 거예요, 나는 진흙탕 속에 뛰어드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아마 내 아들을 구할 수 있겠지요. 모든 사람에게 당하는 치욕이야말로 공공연한 회개가 아니겠어요?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내 굴욕을 받아들이시고 내 아들을 돌려주시겠지요!"

"나도 벌을 받게 해 주세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라도 들어갈까요? 그곳의 고행 생활이 당신 하느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킬 수도 있겠지요…… 아아! 어찌 스타니슬라스의 병을 내가 대신 앓을 수는 없단 말인가……."


"오! 당신도 그 애를 사랑하는군요!" 드 레날 부인은 몸을 일으켜 그의 품에 뛰어들면서 외쳤다.

"오, 둘도 없는 내 친구! 오, 왜 당신이 스타니슬라스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이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당신을 남매간처럼 사랑하게 해 주시겠습니까? 이것이 유일하게 분별 있는 속죄의 길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의 노여움도 진정시킬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동생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녀는 몸을 일으켜 쥘리앵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얼싸안고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외쳤다. 쥘리앵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부인의 발아래 쓰러지며 말했다.

"저는 복종하겠습니다, 당신이 무슨 명령을 해도 저는 복종하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제가 떠나 버리면, 당신은 주인 양반께 모든 걸 다 말씀하실 테고 그러면 당신은 주인 양반과 함께 파멸이에요. 제가 남아 있는다면, 당신은 저 때문에 아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고통을 견디지 못할 거고요. 제가 떠나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시험해 보시겠어요? 원하신다면 일주일쯤 떠나 있으면서 우리의 죗값을 치러 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없는 동안 주인 양반께 아무 말도 않겠다고 맹세해 주세요."


그녀는 약속했다. 쥘리앵은 집을 떠났으나 이틀 만에 다시 불려 왔다.

"당신 없이는 약속을 지킬 수가 없어요. 당신이 항상 곁에 있어 입을 다물라는 명령의 눈초리를 보내 주지 않으면 나는 남편에게 말해 버리고 말 거예요. 이 끔찍한 생활의 한 시간 한 시간이 하루처럼 지루해 보여요." 마침내 하늘은 이 불행한 어머니를 가엾게 여겼다. 스타니슬라스는 조금씩 위험 한 고비를 벗어났다.


그러나 맹목의 열정은 깨어져서, 이성을 되찾은 부인은 자기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 그녀는 다시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없었다. 회한 만이 남아 있었다. 그 회한은 그처럼 성실한 영혼에는 응당 깃들게 마련인 그런 성격의 회한이었다. 그녀의 삶은 천국인 동시에 지옥이기도 했다. 쥘리앵이 눈에 띄지 않을 때는 지옥이었고 그의 앞에 있을 때는 천국이었다.


"나는 이제 아무런 환상도 품고 있지 않아요." 사랑에 온통 몸을 내맡기고 있는 순간에도 그녀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주받았어요, 돌이킬 길 없이 저주받았어요. 당신은 젊어요. 당신은 내 유혹에 지고 만 거예요. 하늘도 당신은 용서해 줄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저주받았어요. 확실한 표시로 나는 그것을 알아요. 두려워요. 그렇지만 나는 속으로는 전혀 참회하고 있지 않나 봐요. 그럴 기회가 되면 또다시 죄를 저지를 지도 모를 거예요. 다만 이승에 살아 있는 동안만은, 그리고 자식들에게만은 하늘이 벌을 내리지 마시기를 빌뿐이에요. 죽어서 죄지은 이상의 벌을 받더라도 말 이죠."


또 어떤 때는 이렇게 부르짖기도 했다. "나의 쥘리앵, 적어도 당신은 행복하시죠? 내 사랑이 모자라지는 않나요?" 무엇보다도 희생이 따르는 사랑을 필요로 해 온 쥘리앵의 번민에 찬 자존심과 의심도, 이처럼 크고 이처럼 확실하며 시시각각으로 행해지는 희생을 보고서는 굴 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드 레날 부인을 사모했다.


부인이 귀족이고 내가 노동자의 자식이라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인은 진정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부인 곁에서 정부 역할을 하는 하인 격은 아닌 것이다. 일단 의심이 사라지자 쥘리앵은 사랑의 온갖 광기와 아울러 견딜 수 없는 불안에 빠졌다.


자기의 사랑을 의심하는 눈치를 보고 부인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함께 지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동안이라도 당신을 아주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어요! 서둘러야 해요. 내일이면 나는 당신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만약 하늘이 나 대신 아이들을 빼앗아 가기라도 한다면 아이들을 죽인 것은 내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살아갈 수는 없을 거예요. 나는 그런 불행을 당하고는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이와 같은 커다란 정신적 위기는 쥘리앵과 그의 연인을 결합시키는 감정의 성격을 일변시켰다.


그 후로 그들의 행복은 훨씬 숭고한 성격을 띠었고 그들의 가슴을 태우는 불길도 더 강렬해졌다. 그들은 미친 듯한 환희를 맛보았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면 그들의 행복은 더욱 커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쥘리앵이 자기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 레날 부인의 유일한 걱정거리였던 그들 사랑의 초기와는 달 리, 그들은 그 달콤한 평화로움, 그늘 없는 환희, 용이한 행복을 더 이상 되찾을 수 없었다. 이제 그들의 행복에는 때때로 죄의 그림자가 얽혀 드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그지없이 평온해 보이는 행복의 순간에도 드 레날 부인은 경련을 일으켜 쥘리앵의 손을 그러쥐고 갑자기 부르짖는 것이었다. "아! 어쩌나! 지옥이 보여요. 이 무슨 끔찍한 고통인가! 내게는 그것도 당연하지만." 그러면서 그녀는 벽에 달라붙는 담쟁이덩굴처럼 쥘리앵을 바짝 끌어안았다. 쥘리앵은 이 불안에 떠는 영혼을 진정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그녀는 쥘리앵의 손을 부여잡고 키스로 뒤덮곤 했다. 그러다가도 다시 우울한 몽상에 빠 져 외치는 것이었다.


"지옥, 지옥이 내게는 은총일지도 몰라. 나는 아직은 이분과 함께 지상에서 얼마 동안 지내게 되겠지. 그러나 이승에서부터 지옥에 떨어져, 아 이들이 죽게 된다면……. 하지만 그런 대가를 치러야 내 죄가 용서를 받을지도 몰라... 아아! 제발 그런 대가로 저를 용서하지는 마소서. 이 가엾은 아이들은 주님을 거스른 적이 없나이다. 저, 저만이 죄를 지었나이다. 저는 제 남편이 아닌 남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엘리자 양은 작은 소송 사건이 있어 베리에르에 갔다. 거기에서 그녀는 발르노 씨가 쥘리앵에게 몹시 감정이 상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도 가정교사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발르노 씨에게 자주 쥘리앵의 일을 고자질했다. 그녀는 어느 날 발르노 씨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저는 쫓겨날 거예요……!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주인들은 모두 한패가 되니까요……. 불쌍한 하인들은 비밀을 털어놓으면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는 법이죠……."


비밀을 누설할 때면 상투적으로 따르는 이런 말이 나오자, 호기심으로 초조해진 발르노 씨는 서론을 줄이도록 유도했고, 결국 그녀로부터 자기의 자만심에 심한 상처를 입히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이 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그 여자가, 불행히도 사람들 눈에 띄어 모두 다 알 정도로 자기가 육 년 동안이나 추파를 던졌지만 몇 번씩이나 모욕감에 자기 얼굴을 붉히게 했던 그렇게 오만한 그 여자가, 가정교사로 꾸민 풋내기 노동자 녀석을 정부로 삼았다니!'

"그런데 쥘리앵 선생은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마님을 정복했다고요. 마님한테도 그 쌀쌀맞은 태도를 버리지 않았거든요." 하녀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덧붙였다.


엘리자는 시골 별장에 가서야 사태를 확실히 알았지만, 그 관계가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앙심을 품고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때 그이가 저와의 결혼을 거절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그런데도 저는 바보같이 드 레날 부인께 상의하러 가서, 가정교사에게 말 좀 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지 뭐예요."


바로 그날 저녁 드레날 씨는 시내에서 오는 신문과 함께 긴 익명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는 자기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세세히 고하는 내용이었다. 쥘리앵은 그가 푸르스름한 종이 위에 쓰인 그 편지를 읽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자기에게 험상궂은 눈길을 보내는 것을 알아챘다. 저녁 내내 시장은 마음의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쥘리앵이 부르고뉴 지방 명문가의 족보에 대해 물어보며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20장 익명의 편지


불장난을 너무 구속하지 말지라.
더없이 엄숙한 맹세도 혈관에 타오르는 불길에는
한 오라기 지푸라기와도 같으니.
─ 『템페스트』


자정 무렵 응접실을 떠날 때 쥘리앵은 기회를 잡아 연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만나지 맙시다. 남편께서 의심하고 있어요. 그 양반이 아까 한숨을 내쉬며 읽던 그 두툼한 편지는 익명의 편지가 틀림없어요."


다행히 쥘리앵은 자기 방을 열쇠로 잠가 두었다. 드 레날 부인은 그 경고가 자기를 만나지 않으려는 핑계가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분별력을 잃고 정해진 시간이 되자 그의 방문 앞으로 왔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쥘리앵은 즉시 램프 불을 껐다. 방문을 열려고 애쓰는 기색이었다. 드 레날 부인일까, 아니면 질투에 사로잡힌 남편일까?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쥘리앵을 따르는 식모아이가 그에게 책 한 권을 가져왔다. 겉장에는 이탈리아어로 '130페이지를 읽어 보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쥘리앵은 그런 경솔함에 전율을 느끼며 130페이지를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눈물에 젖고 철자법이 엉망인, 황급히 갈겨쓴 다음과 같은 편지가 핀으로 꽂혀 있었다. 평소에 드 레날 부인의 철자법은 아주 정확한 편이었다. 쥘리앵은 그런 세세한 점에 감동하여 가공할 만한 경솔함을 약간 잊을 수 있었다.


오늘 밤 당신은 나를 만나지 않으려 하셨죠?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죠? 내 광기가, 내 후회가 싫증 나신 거죠, 나쁜 사람? 내가 파멸하길 바라시나요? 그렇다면 쉬운 방법 하나를 가르쳐 드리죠. 이 편지를 들고 가서 모든 베리에르 사람들에게, 차라리 발르노 씨 한 사람에게 보여 주세요. 그 사람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아니 그런 모독의 언사가 아니라 당신을 숭배한다고 말하세요. 나는 생명과 영혼을 당신에게 바쳤다고 말하세요. 당신은 내가 그 이상의 것을 바쳤다는 것을 알고 있죠?

하지만 발르노 씨 같은 사람이 어찌 자기희생의 참뜻을 알겠어요? 그러니 그에게 말하세요, 그를 화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말하세요. 나는 모든 악인들을 무시한다고 말이죠. 내게 단 한 가지 불행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내 생명을 붙들어 주는 사람의 변심을 보게 되는 불행이라고.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 생명을 희생으로 바치고 자식들을 위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몰라요!

사랑하는 이여! 만약 익명의 편지가 왔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밉살스러운 사람에게서 온 걸 거예요. 그자는 거친 목소리로, 말 타는 얘기로, 그 꼴불견의 거드름으로, 또 자기의 모든 장점을 늘어놓아 가며 육 년 동안이나 나를 따라다녔어요. 익명의 편지가 정말 왔을까요? 몹쓸 사람, 내가 당신과 의논하려 한 것은 바로 그 문제였어요. 하지만 당신의 처사가 옳았어요. 당신을 품 안에 껴안고서는(어쩌면 그것이 마지막 포옹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혼자 있는 것처럼 이렇게 냉정하게 얘기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익명의 편지가 왔건 안 왔건, 내일 나도 역시 익명의 편지를 한 통 받았다고 남편에게 얘기하겠어요. 그리고 즉시 당신에게 얼마간의 금액을 지불하고 어떤 점잖은 구실을 붙여 지체 없이 당신을 가족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하겠어요. 우리는 보름 동안, 어쩌면 한 달 동안 헤어져 있게 될 거예요! 가세요, 당신도 나만큼 괴롭겠지요. 그렇지만 이것이 그 익명 편지의 영향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남편이 나에 관해 그런 편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아! 전에 나는 얼마나 마음 편히 그런 것을 웃어넘겼던가!

내 행동의 목적은 그 편지가 발르노 씨에게서 온 것이라고 남편이 믿게 하려는 거예요. 그 사람이 편지를 써 보낸 장본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어요. 집을 떠나게 되면 꼭 베리에르에 가서 자리를 잡으세요. 나는 남편을 보름쯤 이곳에 머물게 해서, 남편과 나 사이에 아무런 불화가 없다는 것을 바보 같은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겠어요. 일단 베리에르에 가 있게 되면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자유주의자들과도 잘 어울리도록 하세요. 나는 부인들이 모두 당신과 교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발르노 씨와 불화하지 말고 언젠가 벼르던 대로 그를 혼내 주지도 마세요. 반대로 그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세요. 당신이 발르노 씨 집이나 또는 다른 어느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갈지 모른다고 베리에르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것이 요점이에요. 그러면 남편은 결코 참지 못할 거예요. 혹 남편이 그렇게 하도록 작정하더라도, 적어도 당신은 베리에르에 머물테고 나는 이따금 당신을 만날 수 있겠지요. 당신을 몹시 따르는 아이들도 당신을 보러 가겠지요. 아아!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을까요……? 나는 모르겠어요…….

일단 당신이 내게 익명의 편지 한 통을 마련해 주세요. 인내심과 가위를 준비하세요. 그리고 다음에 쓰여 있는 대로 책에서 단어들을 오려 내세요. 그런 다음 동봉한 푸른 종이에 풀로 붙이세요. 그 종이는 발르노 씨에게서 온 것이에요. 당신 방이 수색당할지도 모르니까 오려 낸 책장들은 태워 버리세요. 책 속에 완전한 단어가 없다 해도 인내심을 갖고 한 자 한 자 오려서 맞춰 보세요. 당신의 수고를 덜기 위해 익명의 편지는 아주 짧게 만들었어요.


익명의 편지 초안
부인,
당신의 행실은 속속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당신의 행실을 바로잡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에 대해 남아 있는 우정으로 충고하는 바이니, 그 시골뜨기 아이와 완전히 손을 끊으시오. 만약 당신이 그 일을 해낼 만큼 현명하다면, 당신 남편은 자기에게 온 편지 내용이 거짓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남편은 속고 말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비밀을 쥐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오. 가엾은 여인이여, 두려움을 느끼시오. 이제 내 앞으로 똑바로 걸어와야만 합니다.


이 편지에 들어 있는 말(그것이 수용소장의 말투라는 것을 알아보시겠어요?)을 다 오려 붙이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세요.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갈 테니까요. 나는 이웃 마을에 갔다가 당황한 얼굴을 하고 돌아오겠어요. 결국 나는 대경실색한 얼굴로 어떤 낯선 사람이 건네줬다고 말하면서 그 편지를 남편에게 보이겠어요.

당신은 아이들과 함께 숲속 길로 산책 나가서 점심 식사 때나 돌아오세요. 바위 꼭대기에서 바라보면 비둘기장의 탑이 보일 거예요. 우리 일이 잘 진행되면 거기에 흰 손수건을 걸어 놓을게요. 반대의 경우엔 아무 표적도 없을 거예요.

무정한 사람, 당신은 산책 나가기 전에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줄 방법을 찾아내시겠죠?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신하세요. 우리가 끝내 헤어지게 되면 나는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요. 아! 이 순간 나는 당신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요. 당신을 잃을지도 모르는 이 찰나에, 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래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이 편지를 다시 읽어 볼 시간도 없군요. 당신의 품에 안겨 지낸 행복한 나날을 생각하면 생명을 지불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생명보다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건 당신도 알고 계시죠?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