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 이동렬 옮김 민음사
아아, 잘못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약함 탓이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 『십이야』
어린아이같이 즐거움을 느끼며 쥘리앵은 한 시간 동안 단어들을 짜 맞추었다. 방에서 나오는 길에 그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어머니를 만났다. 부인은 태연하고 용감하게 편지를 받았는데, 그 침착성에 쥘리앵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풀이 충분히 말랐어요?" 부인이 그에게 물었다.
회한에 미치다시피 되었던 여자가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하지만 부인이 이처럼 그의 마음에 든 적은 일찍이 없었던 듯했다.
"이 일이 잘못 돌아가면 나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거예요. 이 물건을 산속 어딘가에 묻어 두세요. 언젠가는 이것이 내 유일한 재산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녀는 한결같은 침착함을 보이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녀는 금과 얼마간의 다이아몬드로 가득 찬 붉은 모로코 가죽 제품의 유리 뚜껑이 달린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제 떠나세요." 그녀가 말했다.
드 레날 씨의 고민
익명의 편지를 펼쳐본 순간부터 드 레날 씨는 끔찍한 상태에 빠졌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1816년에 자칫 결투를 벌일 뻔한 이후로 이처럼 동요한 적은 없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편지를 살펴보았다. 이것은 여자의 필적이 아닌가?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베리에르의 여자들을 모두 머리에 떠올려 보았으나, 딱히 누구를 의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남자가 이 편지를 구술했을까? 그렇다면 그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불확실했다. 그가 아는 남자들은 대부분 그를 질투하거나 미워하는 편이었다.
'그럼 아내와 의논해 봐야겠군.' 그는 안락의자에서 일어서면서 평소 습관대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특히 경계해야 할 사람이 아내가 아닌가! 지금 이 순간에는 마누라가 내 적인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그는 손으로 이마를 치며 문득 생각했다. 노여움으로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지방에서 실질적인 지혜의 전부로 여기고 있는 메마른 감정의 당연한 대가겠지만, 드 레날 씨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두 남자도 전에는 그의 가장 친밀한 친구들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정말로 불행에 빠져서도 조언을 구할 친구 하나 없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나! 아, 팔코, 뒤크로!' 그는 쓰라리게 울부짖었다. 그것은 1814년에 그가 거만하게 멀리해 버린 어릴 적 두 친구의 이름이었다. 때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때로는 주위의 모든 사람에 대해 열화 같은 분노를 느끼며 그는 참혹한 하룻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내의 행동을 엿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루이즈와의 생활에 익숙해 있다. 아내는 내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내일 내가 자유의 몸이 되어 다시 결혼한다 해도 루이즈를 대신할 만한 여자는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아내가 결백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만족을 느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중상모략을 당했던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단호한 성격을 보여야 할 필요성에 봉착하지도 않고 사태가 잘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발작적인 발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며 다시 부르짖었다. '뭐라고! 그 여자가 제 정부 놈과 함께 나를 비웃고 있다면 내가 가난뱅이 거지처럼 그것을 참아야 한단 말인가? 그들이 샤르미에(그 사람은 이 지방에서 아내에게 속아 넘어간 남편의 대명사와 같은 존 재이다.)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가? 그의 이름이 나오면 모두들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지 않던가? 아! 샤르미에! 샤르미에 드 베르나르 말이지! 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오명을 씌운 사내의 이름까지 덧붙여서 그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 다른 순간에는 드 레날 씨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내게는 딸이 없다. 그러니 어미를 어떻게 벌해도 아이들의 장래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 풋내기 시골 놈과 여편네를 현장에서 붙들어 연놈을 함께 죽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사건의 비극성 때문에 웃음거리를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생각에 그는 솔깃 해졌다. 형법은 내 편이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수도회와 배심원 친구들이 나를 구해 줄 것이다. 그는 예리한 사냥칼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그러나 피를 흘린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 뻔뻔스러운 가정교사 놈을 사정없이 몽둥이찜질해서 내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베리에르는 물론 현 내 전체에서 얼마나 요란한 가십거리가 되랴! 나처럼 가문 좋고 지위 있는 사람은 모든 천민에게 미움받게 마련이거든. 파리의 그 무서운 신문들에 내 이름이 실릴지도 모른다. 오 맙소사! 무슨 파탄인가! 유서 깊은 드 레날의 가명(家名)이 웃음거리의 진흙탕 속에 빠지다니……. 여행이라도 할라치면 성을 바꿔야 할 판이다. 뭐라고! 나의 명예와 세력의 원천인 이 성을 버린다고! 그 무슨 비참한 꼴인가!
아내를 죽이지 않고 모욕을 주어 내쫓는다면 브장송의 제 아주머니에게 가겠지. 그 아주머니는 전 재산을 물려줄 테고 아내는 쥘리앵과 함께 파리에 가서 살겠지. 그러면 베리에르에 소문이 퍼질 테고 나는 또다시 아내에게 속은 놈 취급을 받을 게 아닌가. 이 불행한 사내는 그때 램프 불이 희미해진 것을 보고 날이 새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그는 시원한 바람을 쐬려고 정원으로 나갔다. 이 순간 그는 사건을 요란하게 만들지 않기로 거의 마음을 굳혔다. 사건이 터지면 특히 베리에르의 친구란 작자들이 기뻐 날뛸 것이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정원을 산책하니 얼마간 마음이 진정되었다. 아니다, 나는 결코 아내와 헤어지지는 않겠다. 아내는 내게 너무도 유용하거든.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내가 없는 집안을 생각해 보니 몸서리가 쳐졌다.
이때 대단히 분별 있는 생각 하나가 그에게 떠올랐다. 만약 아내를 그대로 집에 두면 언젠가 아내를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고, 그러면 나는 아내의 허물을 책망하게 될 것이다. 아내는 자존심이 강하니까 우리 사이는 틀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아내가 상속을 받기 전에 일어나고 말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 아닌가! 아내는 아이들을 사랑하니까 결국 아이들한테 돌아오게 되겠지. 하지만 나는 끝내 웃음거리가 되고 말 거다. '저런, 저 친구는 제 계집에게도 복수를 못 했지!' 사람들은 이렇게 지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의심을 품은 것으로 그치고 아무것도 진상을 밝히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나는 두 손을 동여매고 앉아, 나중에도 아내에게 한마디 질책도 못할 것이 아닌가. 다음 순간 드 레날 씨는 상처받은 허영심을 되찾고, 베리에르의 신사 클럽이나 카지노의 당구장에서 어떤 수다쟁이가 아내에게 속은 남편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내기를 중단시키면서 시시덕거리는 그 모든 짓거리를 끈질기게 생각했다. 이 순간에는 그런 농담이 그에게 얼마나 잔인한 것으로 비쳤던가!
아아! 왜 아내가 죽기라도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 텐데! 내가 홀아비 신세라도 되었다면! 그러면 파리의 상류 사교계에 가서 반년쯤 지낼 수도 있으련만! 홀아비 생활에 대한 생각으로 잠시 행복에 빠졌다가, 그의 상상력은 다시 진상을 밝히는 방법에 관한 것으로 되돌아갔다.
자정이 되어 모두들 잠든 뒤에 쥘리앵의 방문 앞에 살짝 겨를 뿌려 놓으면 어떨까? 이튿날 아침 날이 밝으면 발자국 흔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깜찍스러운 엘리자란 계집아이가 알아챌 테니까 안 된다. 내가 질투한다고 집 안에 곧 소문이 퍼지고 말 것이다. 그는 화가 나서 부르짖었다.
카지노에서 떠도는 한 얘기에 의하면, 어떤 남편은 아내와 정부의 방문에 머리카락 한 올을 봉인처럼 양초로 붙여놓음으로써 자신이 당한 불운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망설인 끝에 그에게는 그 방법이 자신의 운명을 밝히는 최선책으로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그 방법을 실행할 것인가를 궁리하고 있는데, 오솔길 모퉁이에서 차라리 죽기를 바랐던 아내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두 번째 익명의 편지
그녀는 베르지의 교회에 미사를 올리러 갔다가 마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가 굳게 믿는 전설에 의하면, 현재 사용하는 그 조그만 교회는 옛 베르지 영주의 성에 딸린 예배당이었다고 한다. 그 교회에 기도드리러 가려고 할 때마다 그 전설은 드 레날 부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사냥터에서 우연한 사고처럼 꾸며 쥘리앵을 죽이고서는 저녁에 자기에게 죽은 쥘리앵의 심장을 먹이는 상상에 줄곧 시달렸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운명은 저 양반이 내 얘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운명의 15분 간이 지난 다음에는 다시는 저이에게 말을 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현명한 사람은 못 된다. 그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을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운명은 내 수완에도 달려 있다. 분노로 눈이 멀어 사물의 반쪽밖에는 보 지 못하는 이 변덕스러운 사람의 생각을 조종하는 기술에도 달려 있는 것이다. 아 아! 내게는 재능과 냉정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디서 그걸 얻을 것인가?
그녀는 정원에 들어서며 멀리서 남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겉봉을 뜯기는 했으나 접혀 있는 편지 한 장을 남편에게 내밀었다. 그는 편지를 펴보지도 않고 미친 듯한 눈길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이 가증스러운 걸 좀 보세요. 공증인 집 뜰 뒤를 지나오는데, 당신을 잘 알고 당신에게 은혜를 입기도 했다는 어떤 인상 나쁜 사람이 제게 이걸 내미는 거예요.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그 쥘리앵 선생을 지체 없이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드 레날 부인은 좀 때 이르게 그 말을 서둘러 해 버렸다. 그 말을 해야 한다는 끔찍한 생각에서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 말에 남편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기쁨에 사로잡혔다.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남편의 모습에서 그녀는 쥘리앵의 추측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뚜렷한 불행 앞에서도 번민에 빠지지 않다니, 그는 얼마나 비상한 인간인가! 얼마나 완벽한 기민함인가! 나중에 그는 무엇인들 되지 못할 것인가? 아아! 그렇지만 성공하면 나를 잊게 될 거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 잠깐 동안의 감탄이 그녀의 동요를 완전히 가라앉혔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쾌재를 불렀다. '나도 쥘리앵에 못지않아.' 그녀는 남모를 달콤한 쾌감을 느끼며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언질을 주기가 두려웠던지 드 레날 씨는 아무 말 없이 조작된 그 두 번째 익명의 편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푸르스름한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오려 붙인 것이었다. 별의별 수단으로 나를 조롱하려 드는군. 드 레날 씨는 기진맥진하여 혼자 중얼거렸다. 또다시 이런 모욕이야, 늘 여편네 때문이잖아! 그는 아내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을 뻔했으나 브장송에서 올 아내의 유산을 생각하고 가까스로 참았다. 무언가에 분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 그는 두 번째 익명 편지의 종이를 와락 구겨 버리고는 다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좀 마음이 가라앉아 다시 아내 곁으로 갔다.
"쥘리앵을 돌려보내기로 결정해야겠어요." 남편이 곁에 오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그는 결국 노동자의 아들에 불과해요. 돈을 좀 주어 보상하면 돼요. 그런데다 그 사람은 영리하니까 쉽게 일자리를 찾을 거예요. 발르노 씨 댁이나 드 모지롱 군 수 댁 같은 데 말이에요. 그분들도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은 영락없는 바보 같은 소리만 하는군." 드 레날 씨가 무서운 목소리로 외쳤다.
"여자에게서 무슨 분별을 기대하겠나? 이치에 닿는 일에는 그저 막무가내니. 그래서야 어찌 뭔가를 좀 알겠소? 무사태평이고 게을러 빠져 가지고 열심히 나비나 쫓아다니고 있으니 원. 집 안에 이런 허수아비들만 들끓으니 고민이지……!" 드 레날 부인은 그가 말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는 오랫동안 지껄였다. 이 지방 말투로 하면, 그는 분을 삭이고 있었다.
"여보세요, 저는 명예를 훼손당한 여자로서, 다시 말해 가장 소중한 것을 훼손당한 여자로서 말하는 거예요." 이윽고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드 레날 부인은 이 고통스러운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냉정함을 지켰다. 쥘리앵과 한 지붕 밑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이 대화에 달려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맹목적인 분노를 조종하기에 가장 알맞다고 여겨지는 생각을 찾고 있었다. 남편이 퍼붓는 모욕적인 언사에는 무감각했다. 그녀는 그 소리는 듣지도 않고 쥘리앵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만족할까?
"우리가 친절을 다해 주었고 선물도 준 그 애송이 촌뜨기에겐 죄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런 모욕을 당하기는 처음이에요……." 이윽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보세요! 이 추악한 쪽지를 읽었을 때 그 사람 아니면 내가 집을 나가야겠다고 작정했어요."
"당신은 소란을 떨어 나와 당신을 다 같이 창피스럽게 만들려고 그러오?"
"당신의 행정 수완 덕분에 당신과 가족과 시가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을 사람들이 대체로 시샘하는 것은 사실이죠……. 그렇다면 쥘리앵더러 당신에게 휴가를 청해서 한 달쯤 그 산속의 재목 상인 집에나 가 있으라고 하겠어요. 애송이 노동자에겐 아주 어울리는 친구겠죠."
"당신은 잠자코 있으라고." 드 레날 씨가 상당히 가라앉은 태도로 대꾸했다. "내가 무엇보다도 요구하는 것은 그 작자와 얘기하지 말라는 거요. 당신이 괜히 화풀이를 해서 나와 그자의 사이만 틀어지게 만들 거요. 그 꼬마 선생이 얼마나 영악한 지는 당신도 알지 않소?"
"그 젊은이는 눈치가 없어요. 당신이 아는 대로 그 사람이 지식이 많은지는 몰라도, 알고 보면 진짜 농사꾼에 불과하다고요." 드 레날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엘리자와 발르노
"그 사람이 엘리자와의 결혼을 거절한 후로는 좀처럼 그를 좋게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건 편안히 살 수 있는 확실한 길이었는데. 엘리자가 때때로 발르노 씨를 남몰래 방문한다는 것이 거절의 구실이 되기는 했지만."
"뭐라고, 쥘리앵이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소?" 드 레날 씨가 눈썹을 곧추세우고 말했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녜요. 그는 늘상 성직에 대한 소명만을 운운하니까요. 하지만 엘리자의 은밀한 방문을 자기도 모르지는 않는다고 넌지시 암시하더군요."
"그런데 나,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어……. 뭐라고! 엘리자와 발르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여보, 그건 벌써 오래전 얘기예요. 그리고 무슨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웃으면서 얘기했다. "당신의 좋은 친구 발르노와 저 사이에 플라토닉한 가벼운 사랑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베리에르에 소문이 도는 것을 발르노 씨가 기분 좋아하던 시절의 얘기니까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소만, 당신은 내게 아무 말도 안 했단 말이오." 드 레날 씨는 화가 나서 머리를 치면서 하나하나 새로운 발견을 해내듯 걸음을 옮기며 외쳤다.
발르노의 편지
"우리와 친한 수용소장이 허세를 좀 부렸다고 해서 두 친구분 사이를 틀어지게 할 필요가 있었겠어요? 사교계의 여자치고 그 사람의 재치 있고 좀 은근하기까지 한 편지 몇 통씩을 안 받아본 여자가 있는 줄 아세요?"
"그자가 당신에게도 편지를 써 보냈단 말이오?"
"많이 보냈어요."
"당장 그걸 보여 줘. 이건 명령이야." 드 레날 씨는 위세를 부리며 말했다.
"그 편지 때문에 수용소장과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어요?" 드 레날 부인이 아주 엄숙하게 말했다.
"싸우건 안 싸우건, 그자에게서 고아원을 뺏을 수는 있지. 하지만 난 그 편지를 당장 봐야겠소. 그게 어디 있지?" 그는 화를 내며 계속 말했다.
"제 책상 서랍에 있어요. 그러나 열쇠를 드리지는 않겠어요."
"내가 그걸 못 부술 줄 아나." 그는 아내의 방으로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그는 나뭇결이 소용돌이 꼴인 값비싼 마호가니 책상을 정말 쇠꼬챙이로 부숴 버렸다. 그것은 파리에서 사 온 것으로, 얼룩이 진 것 같아 보이면 그가 옷자락으로 닦아 주며 소중히 여기던 가구였다.
드 레날 부인은 비둘기장까지 120개의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그녀는 작은 창문의 쇠창살에 흰 손수건 한 귀퉁이를 비끄러맸다. 그녀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산의 숲 쪽을 바라보았다. 무성한 너도밤나무 아래서 쥘리앵은 아마 이 행복한 신호를 엿보고 있겠지.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단조로운 매미의 울음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을 저주했다. 그 귀찮은 소리만 없다면 큰 바위에서 쥘리앵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것이 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편은 노발대발해 있었다. 그는 대수롭지도 않은 발르노 씨의 편지 구절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었다. 그런 구절이 이처럼 흥분 상태에서 읽힌다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남편의 고함 소리가 터지는 사이에 틈을 타서 드 레날 부인은 슬쩍 한마디 비쳤다.
"여전히 같은 생각이지만 쥘리앵을 얼마 동안 떠나 있게 하는 게 좋겠어요. 라틴어에 대한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 사람은 결국 상스럽기 일쑤고 눈치 없는 농사꾼이에요. 매일같이 제 딴에는 그게 예의라고 생각하는지, 저한테 조잡하고 과장된 찬사를 늘어놓거든요. 무슨 소설에서 외워 둔 것이겠지만……."
"그자는 소설은 안 읽어." 드 레날 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건 확실한 얘기야!"
"그럼, 그런 우스꽝스러운 찬사를 그 사람이 만들어 내는 거군요. 그렇다면 더욱 나빠요. 그 사람은 베리에르에서도 그런 어조로 내 얘기를 했겠군요……." 드 레날 부인은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진 않다손 쳐도 엘리자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했을 거예요. 그건 발르노 씨 앞에서 말한 거나 거의 마찬가지 결과지만." 드레날 씨는 여태껏 볼 수 없던 모습으로, 방 안이 흔들릴 정도로 책상을 꽝 내리치며 외쳤다.
"그랬구나! 인쇄된 익명의 편지와 발르노의 편지는 똑같은 종이에 쓴 것이군."
'드디어……!' 드 레날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이 발견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고, 한마디도 덧붙일 용기가 없는 듯 멀리 응접실 구석의 의자에 가서 주저앉았다. 이제 싸움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익명 편지의 작성자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따지러 가겠다는 드 레날 씨를 말리느라고 몹시 애를 먹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발르노 씨와 싸운다는 건 터무니없이 서툰 짓이라는 걸 왜 못 느끼세요? 당신이 시기를 당하는 게 누구 잘못이에요? 당신 재능 때문이라고요. 당신의 현명한 행정, 멋진 건축, 제가 가져온 지참금, 많이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착하신 제 아주머니께 기대할 수 있는 막대한 유산, 이런 것들이 당신을 베리에르의 첫째가는 인물로 만들어 놓았어요."
"당신은 가문을 잊고 있군." 드 레날 씨는 살짝 미소마저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 지방에서 가장 저명한 귀족의 한 분이에요. 드 레날 부인은 부랴부랴 덧붙였다. "만약 국왕 폐하께서 자유자재로 가문에 따라 대우하실 수 있다면 당신은 귀족원에 참여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이런 위치에 있으시면서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를 일을 하시려는 거예요? 그따위 익명의 편지 문제로! 그리고 1816년의 검거 사건에 당신이 공헌했다는 것도 기억하세요. 지붕 위로 도망쳤던 그 사람도……."
"당신은 나를 생각해 줄 줄도 모르고 나에 대한 우정도 없군. 그리고 나는 귀족원 의원이었던 적도 없어……!"
지난 기억 때문에 생겨난 씁쓸한 기분으로 드 레날 씨가 외쳤다. 드 레날 부인이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저는 당신보다도 부자가 될 거예요. 그리고 전 십이 년 전부터 당신의 아내였어요. 저는 발언권이 있어야 마땅해요. 특히 오늘 일에 있어서는 그래요. 만약 당신이 저보다 쥘리앵 선생을 좋아한다면 저는 아주머니 댁에 가서 겨울을 나겠어요." 그녀는 분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며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이 말은 희한한 효과를 발휘했다. 거기에는 공손한 가운데 단호함이 깃들어 있어, 드 레날 씨로 하여금 결심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이런 일대 연극 장면이 벌어지는 동안, 드 레날 부인은 십이 년 동안이나 자기의 반려였던 남자의 뚜렷한 불행에 대해 한두 번 동정심을 느낄 뻔했다. 그러나 진짜 정열이란 이기적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이 전날 받은 익명의 편지 얘기를 꺼낼 것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얘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드 레날 부인은 자기의 운명을 쥐고 있는 남편이 그 편지에서 어떤 암시를 받았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시골에서는 남편의 의견이 절대적이다. 남편이 돈을 주지 않으면 아내는 하루에 십오 푼을 받는 여직공의 신세로 떨어지고 만다. 그래도 선량한 사람들은 그 여직공을 고용하기를 꺼린다. 주인의 복수는 피비린내 나는 무서운 것이지만, 일견 군대식의 관대한 면도 있다. 단 검의 일격이 모든 것을 끝장내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대중의 공공연한 멸시라는 타격으로 남편이 아내를 죽인다. 아내에게 모든 살롱의 출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방으로 되돌아오자 드 레날 부인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되살아났다. 그녀는 자기 방이 어질러진 것에 기분이 상했다. 그녀의 예쁘고 작은 상자들의 자물쇠가 모두 부서져 있었다. 바닥에 깐 조각 나무 몇 개는 뜯어 젖혀져 있었다. 남편이 나한테 너무했지 뭐야! 자기도 그처럼 아끼던 이 채색한 나무 바닥을 이 꼴로 망쳐 놓다니. 이건 뭐 완전히 망가졌잖아!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난폭한 광경을 대하자 남편에게 너무 빨리 승리를 얻은 것에 대한 마지막 죄책감마저도 금방 사라지는 것이었다.
점심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조금 전에 쥘리앵이 아이들과 함께 돌아왔다. 하인들이 물러간 다음 디저트를 들 때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에게 아주 냉담하게 말했다.
"선생이 베리에르에 가서 이 주일쯤 지내고 싶다고 하셨는데 드 레날 씨가 휴가를 허락하시겠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놀릴 수는 없으니 매일 숙제한 것을 선생에게 보내겠어요. 고쳐 주세요."
"나는 일주일 이상 허락할 수 없소." 드 레날 씨가 아주 거슬리는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쥘리앵은 그의 표정에서 몹시 동요한 사람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보았다.
응접실에서 잠시 둘만 있게 되었을 때 쥘리앵이 부인에게 얘기했다.
"주인 양반께서 아직 방침을 정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드 레날 부인은 아침부터 자기가 한 일을 모두 그에게 재빨리 얘기했다.
"자세한 얘기는 오늘 밤에." 그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여자의 사악함이라! 대체 어떤 본능 때문에 여자는 남자를 속이는 것일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사랑 때문에 눈을 뜬 동시에 눈이 먼 것 같군요." 그는 좀 냉랭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당신의 행동은 감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저녁에 만나는 것이 조심스러운 일일까요? 이 집 안에는 적이 우글거립니다. 엘리자가 제게 품고 있는 강한 증오심을 좀 생각해 보세요."
"그 증오심은 나에 대한 당신의 그 강한 무관심과 아주 흡사하군요."
"무관심하다고 해도 저는 제가 빠뜨린 위험에서 당신을 구해 내야 합니다. 만약 드 레날 씨가 우연히 엘리자에게 말을 걸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주인 양반이 무장을 하고서 제 방에 숨어 있지 말라는 법도 없고......"
"뭐라고요! 용기마저 없군요!" 드 레날 부인은 귀족의 딸다운 오만함을 보이며 말했다.
쥘리앵은 여전히 냉정하게 말했다.
"비굴하게 제 용기를 운위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천한 짓입니다. 세상이 사실대로 판단하게 내버려 두겠어요." 그러나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덧붙였다.
"제가 얼마나 당신께 집착하고 있는지, 또 그 쓰라린 이별이 있기 전에 당신과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을 갖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인간에게 말이 주어진 것은
생각을 숨기기 위해서이다.
─ R. P. 말라그리다
베리에르에 당도하자마자 쥘리앵은 드 레날 부인에 대한 자신의 부당함을 자책했다. 만약 부인이 나약해서 드 레날 씨와의 연극에서 실패했다면 나는 부인을 하잘것없는 여자로 경멸했을 것이다! 부인은 외교관처럼 능란하게 일을 처리해 냈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적인 패배자에게 동정을 느꼈거든. 내 행동에는 부르주아적인 쩨쩨함이 배어 있단 말이야. 드 레날 씨가 남성이라는 것 때문에 내 허영심이 상처받은 것이지! 나도 고귀하고 거대한 그 남성 동업 조합의 영광스러운 일원이란 말이지! 나는 바보에 불과해.
셸랑 씨는 면직당해 사제관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이 지방에서 가장 저명한 자유주의자들이 앞 다투어 제공한 거처를 모두 거절했다. 그가 세든 방 두 개는 책으로 뒤덮여 있었다. 쥘리앵은 자기 아버지 집에 가서 전나무 판자 열두어 장을 얻어 책장을 만들어 가지고 셸랑 씨의 책을 정돈해 꽂아 놓았다.
"나는 자네가 세속적인 허영심으로 타락해 버린 줄로만 알았네. 자네에게 많은 적을 만든, 그 의장대원의 화려한 제복을 입었던 유치한 짓도 이제 완전히 씻긴 셈이지." 노사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드 레날 씨는 쥘리앵에게 자기 집에 머물라고 지시해 놓았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도착한 사흘 후, 드 모지롱 군수가 쥘리앵의 방까지 찾아왔다. 사람들의 사악한 면모라든지, 가련한 프랑스가 처한 위험 등등에 관한 쓸데없는 객설과 푸념을 두어 시간이나 늘어놓은 다음에야, 쥘리앵은 마침내 그 방문의 본래 목적이 꼬리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보았다.
반쯤 면직 상태에 있는 가련한 가정교사가 미래의 지사님을 정중하게 전송하려 할 때, 드 모지롱 씨는 어버이같이 온정이 넘치는 태도로 쥘리앵을 품에 끌어안더니, 드 레날 씨 댁을 떠나 어떤 관리의 댁으로 갈 의향이 없느냐고 제안했다. 그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 800프랑의 연봉을 받게 되는데, 매달 지급받는 것이 아니라(그건 고상한 방식이 못 된다고 말했다.) 삼 개월 치씩, 그것도 선불로 지급받는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 반 전부터 지루하게 기다리던 쥘리앵이 말할 차례가 되었다. 그의 대답은 완벽했으며 무엇보다도 주교의 교서(敎書)처럼 긴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암시하고 있었으나 분명한 언질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드 레 날 씨에 대한 존경과 베리에르 시민에 대한 경의와 탁월한 군수에 대한 감사가 동 시에 들어 있었다. 쥘리앵이 자기보다도 위선적인 데 놀란 군수는 무언가 분명한 얘기를 끌어내 보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
신이 난 쥘리앵은 드 모지롱 씨가 나가자마자 쥘리앵은 미친놈처럼 웃어 대기 시작했다. 자신의 위선적인 변을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그는 드 레날 씨에게 9페이지나 되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는 그 편지에서 자기가 받은 제안을 모두 보고하고 겸손하게 드 레날 씨의 충고를 청했다. 그 교활한 작자는 제안을 한 자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겠다! 그건 내가 베리에르로 쫓겨 온 것을 제 익명 투서의 결과로 알고 있는 발르노 씨 그 사람일 것이다.
편지를 발송하고 나서 쥘리앵은 맑게 갠 가을날 아침 6시에 사냥감이 풍성한 들판으로 나서는 사냥꾼처럼 만족한 기분으로 셸랑 씨에게 조언을 청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러나 사제 댁에 이르기도 전에 하늘이 그에게 또다시 기쁨을 마련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발르노 씨와 마주쳤다. 그는 자기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노라고 발르노 씨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다음과 같은 얘기였다.
자기처럼 가난한 청년은 하늘이 마음속에 심어 주신 소명감에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할 것이지만, 이 천한 세상에서는 소명감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자면 그리고 많은 박식한 동료 성직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되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 브장송의 신학교에 들어가 이 년쯤 보내야 할 텐데 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저축이 불가결한데, 저축을 하자면 600프랑을 다달이 나눠 받아 써 버리는 것보다 800프랑을 삼 개월마다 나눠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를 드 레날가의 아이들 곁에 있게 하고, 무엇보다도 그 아이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갖게 한 것은 다른 아이들을 위해 그들의 교육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하늘의 계시가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는 화려한 제복을 차려입은 발르노 씨의 하인을 만났다. 그 사람은 그날 오찬회의 초대장을 들고 쥘리앵을 찾아온 시내를 헤매던 차였다. 쥘리앵은 그자의 집에 가본 적이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는 경범 재판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서 발르노를 몽둥이로 두들겨 패 줄 방법만을 궁리하고 있었다. 오찬회는 1시로 정해져 있었지만 쥘리앵은 12시 30분부터 수용소장의 서재에 나타나는 것이 더 정중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류철 더미에 둘러싸여 잔뜩 위엄 을 빼고 있는 수용소장을 만났다.
쥘리앵은 발르노 부인께 소개받는 영광을 요청했다. 부인은 화장하는 중이어서 그를 맞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대신 그는 수용소장이 몸치장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뒤이어 그들은 발르노 부인의 방으로 건너갔다. 발르노 부인은 눈에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들을 쥘리앵에게 소개했다. 베리에르에서 가장 유력한 여인 중 하나인 이 부인은 남자같이 큰 얼굴을 하고 있는데, 성대한 의식을 위해 그 얼굴에 연지 칠을 해 놓았다. 부인은 그 얼굴에 온통 모성애를 드러내 보였다.
쥘리앵은 드 레날 부인을 생각했다. 그의 의심 많은 천성은 대조에 의해 상기되는 그런 종류의 추억에는 민감한 편이 아니었으나, 그러나 이때만은 그 대조에 눈 물이 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런 기분은 수용소장 집을 둘러보고 난 뒤 더욱더 커졌다. 주인은 그에게 집 안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던 것이다. 집 안의 모든 것이 화려하고 새것이었다. 주인은 가구마다 그 값을 쥘리앵에게 얘기했다. 그러나 쥘리앵은 거기에서 훔친 돈 냄새가 나는, 어떤 천박한 면모를 보는 것이었다.
세무관, 간접세 징수관, 헌병 장교, 두세 명의 다른 관리가 아내를 데리고 당도했다. 몇몇 부유한 자유주의자들도 뒤따라왔다. 오찬이 시작되었다. 그때 유행가 가락이 띄엄띄엄 들려왔는데, 수용자 하나가 부르는 그 노랫소리는 사실상 좀 상스러운 것이었다. 발르노 씨가 화려한 제복을 입은 하인 한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하인이 사라지자 곧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때 하인 하나가 초록빛 잔에 따른 라인산 포도주를 쥘리앵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발르노 부인은 그 포도주가 산지 가격으로 한 병당 9프랑이나 나간다는 것을 쥘리앵에게 설명하는 주의를 잊지 않았다. 쥘리앵은 초록빛 잔을 든 채 발르노 씨에게 말했다.
“이제 그 못된 노래를 부르지 않는군요.”
“아무렴! 그렇고 말고요. 거지들을 잠자코 있게 했으니까요.” 소장이 의기양양해하며 대답했다.
쥘리앵에게는 이 말이 너무 지독하게 들렸다. 그는 자기 처지에 맞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아직 거기에 어울리는 심정은 지니지 못했다. 그렇게 자주 위선을 행해 왔음에도, 그는 굵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초록빛 잔으로 애써 눈물을 감췄다. 그러나 라인산 포도주를 찬양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노래 부르는 것도 금지하다니! 오 하느님! 당신께서 이런 일을 참으시다니! 그는 혼자 속으로 부르짖었다. 다행히 아무도 그의 이런 좋지 않은 연민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세무관이 왕 당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 노래의 후렴을 합창하느라고 떠들썩한 가운데 쥘리앵의 양심은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네가 도달하려는 더러운 행운이란 이런 꼴이다. 너는 이런 조건에서, 이런 무리와 어울려야만 그 행운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너는 2만 프랑짜리 지위를 얻을지 모른다. 그러나 목구멍이 메도록 고기를 처먹는 동안 가엾은 죄수에게 노래 부르는 것까지 금지시켜야만 할 것이다. 너는 죄수의 빈약한 양식에서 도둑질한 돈으로 오찬을 낼 것이다. 하지만 네가 식사하는 동안 죄수는 더욱더 불행해질 것이다! 오 나폴레옹이여! 전투의 위험으로 행운을 개척하던 당신의 시대는 얼마나 좋았던가. 그런데 비열하게도 불쌍한 사람의 고통을 가중시키게 되다니!
그때 쥘리앵은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번개같이 머리에 떠올랐다. 잠자코 공상에나 잠기라고 그가 이 상류 사회의 오찬에 초대된 것은 아니었다. 은퇴한 날염직 제조업자로서 브장송과 위제스 아카데미의 통신 회원인 사람이 식탁 반대편 끝에서 쥘리앵에게 말을 걸어, 소문대로 『신약 성서』 연구에서의 쥘리앵의 놀라운 성과가 사실인지 물었다.
갑자기 좌중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두 아카데미의 그 박식한 회원 손에는 마술에 의한 것이기라도 하듯 라틴어 성경 한 권이 나타났다. 쥘리앵이 대답하자, 그는 되는대로 한 라틴어 구절의 절반쯤을 읽었다. 쥘리앵이 그 뒤를 암송했다. 그의 기억력은 틀림없었다. 좌중은 끝나가는 오찬회의 떠들썩한 열정을 가지고 이 기적을 찬양했다. 쥘리앵은 부인들의 상기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몇몇은 반반한 편이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세무관의 아내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세무관의 아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실은 부인들 앞에서 오랫동안 라틴어를 말하는 것이 좀 겸연쩍습니다. 뤼비뇨 선생님(두 아카데미 회원 중 한 명의 이름이었다.)께서 아무 데나 라틴어로 한 구절을 읽어 주신 다면, 그다음을 라틴어로 계속하는 대신에 즉석에서 번역해 보겠습니다." 이 두 번째 시도는 그의 영예를 절정에 이르게 했다.
거기에는 몇몇 부유한 자유주의자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장학금을 탈 수 있는 자녀들을 둔 행복한 아버지로 최근의 전도회 이후 갑자기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쥘리앵을 평판으로만 알고 있던 이 사람들은 이제 그의 가장 소란스러운 찬미자들이 되었다. 이 바보들은 저희들이 이해도 못 하는 이 성경 문투를 듣는 데 언제쯤 싫증을 낼 것인가? 쥘리앵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은 생소함 때문에 그 성경 문투가 재미있었고 웃어 대며 좋아했다. 그러나 쥘리앵은 싫증이 났다.
6시를 치자 그는 엄숙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음 날 셸랑 사제 앞에서 암송하기 위해 공부했던 리고리오의 새로운 신학 한 장에 관해 얘기했다. 그러고는 유쾌한 어조로 한마디 덧붙여 말했다.
"남에게 암송을 시키거나 스스로 암송하는 것이 저의 직분이니까요." 모두들 시시덕거리며 그를 찬양했다. 이런 것이 베리에르에서 통용되는 재치였다. 쥘리앵은 벌써 일어서 있었다. 예절을 잊고 모두들 그를 따라 일어섰다. 이것이 천재의 지배력이라는 것이다.
쥘리앵은 떠나기 전에 너덧 건의 오찬 초대를 받았다. "이 청년은 현의 명예지요." 아주 유쾌한 기분이 된 회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다. 그들은 쥘리앵이 파리에 올라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시의 기금에서 학비를 대는 것에 대해 투표를 하자는 얘기까지도 했다. 이런 경솔한 생각으로 식당이 떠들썩한 동안 쥘리앵은 재빨리 대문에 이르렀다. "아! 상놈들! 상놈들!" 그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기쁨을 만끽하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서너 번 계속 부르짖었다.
하지만 드 레날 부인의 지시에 따라 같은 종류의 몇몇 오찬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쥘리앵은 인기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의장대원의 제복을 입었던 일을 용서해 주었다. 아니 오히려 그 경솔했던 일이 그가 성공을 거둔 진정한 원인이었다. 이 박학한 젊은이를 얻는 싸움에서 드 레날 씨와 수용소장 중 누가 이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곧 베리에르 장안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 두 인물은 마슬롱 씨와 함께 삼두 정치를 형성하고 여러 해 전부터 베리에르 시를 마음대로 휘둘러왔다. 사람들은 시장을 시기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원망했다. 그러나 어쨌든 시장은 귀족이었고 따라서 우월하게 태어난 사람이었다. 반면에 발르노 씨의 부친은 아들에게 채 600프랑의 연 수입도 물려주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젊었을 때 그는 푸르스름한 사과 빛의 형편없는 옷을 입고 사람들의 동정을 샀는데, 이제는 노르망디산 말이며 그의 모든 번영으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는 누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것 같아 놀라서 잠이 깼다. 시내로 나들이 나온 드 레날 부인이었다. 데리고 온 토끼 한 마리를 보살피는 아이들을 뒤에 남겨 둔 채, 부인은 계단을 한꺼번에 네 개씩이나 뛰어 올라와 아이들보다 한 걸음 먼저 쥘리앵 방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지없이 즐거운 순간이었으나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선생에게 보여 주려고 토끼를 안고 아이들이 당도하자 드 레날 부인은 자취를 감췄다.
"당신네 귀족들이 자존심이 강한 것은 당연해요." 그는 자기가 겪었던 오찬회 얘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그럼, 당신은 이제 인기인이 되었군요!" 쥘리앵을 만날 때마다 연지를 발랐다는 발르노 부인 일을 생각하면서 드 레날 부인은 깔거리며 덧붙였다. "그 부인은 당신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거예요."
아침 식사는 더없이 즐거웠다. 아이들이 있는 것이 표면상으로는 방해가 되는 듯했으나 사실은 모두의 기쁨을 더해 주었다. 아이들은 발르노 집에서 200프랑을 더 내겠다는 제안이 있었다는 사실을 하인들을 통해 들었다.
식사 도중에 아직도 핼쑥한 스타니슬라스 크사비에가 제 은식기와 찻잔의 값을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건 왜 묻지?"
"이걸 팔아서 쥘리앵 선생님께 드리려고요. 그러면 선생님이 우리 집에 계셔도 속은 사람이 안 되니까요."
쥘리앵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 아이를 포옹했다. 드 레날 부인도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아이들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느라고 그녀는 쥘리앵에게 몸을 약간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드 레날 씨였다. 그의 엄격하고 불만스러운 얼굴은 그의 출현으로 사라진 상쾌한 기쁨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드 레날 부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부인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느꼈다. 쥘리앵이 입을 열어, 아주 큰 소리로 스타니슬라스가 팔고 싶다던 은잔 얘기를 시장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얘기가 환영받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금전적 이해관계 이상의 것이 있었다. 의혹을 키우는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없는 동안 자기 가족이 행복에 잠겨 있는 기색은 강한 허영심에 지배되는 사내에게는 불쾌한 일이었다. 쥘리앵이 얼마나 친절하게 아이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일깨워 주었는가를 아내가 칭찬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 그래! 알았다고. 그는 내 아이들에게 나를 밉살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거군. 나보다도 몇 배나 더 아이들의 호감을 사는 것도 그에게는 뭐 쉬운 일이겠지. 사실은 내가 이 집주인인데 말이야!"
드 레날 부인은 자기에 대한 남편의 태도 변화를 쉬지 않고 살폈다. 조금 전까지는 열두어 시간쯤 쥘리앵과 함께 지낼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시내에서 사야 할 물건이 많아서 점심 식사는 꼭 카바레에서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해도 그녀는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 누구나 그 말을 입에 올릴 때면 즐거워하는 그 카바레라는 단 한마디 말에 아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드레날 씨는 처음에 들른 양품점에 아내를 남겨 놓고 몇 군데를 방문하러 가 버렸다. 그는 아침보다 더 침울해져서 돌아왔다. 자기와 쥘리앵이 온 장안의 관심사가 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실상 사람들 사이의 그 모욕적인 화제를 그에게 눈치채게 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시장이 사람들에게 되풀이해 들은 얘기란 단지, 쥘리앵이 600프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머물러 있을 것인지 아니면 수용소장이 제안한 800프랑을 받아들일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사교계 석상에서 드 레날 씨와 마주친 수용소장은 쌀쌀한 태도를 지었다. 그런 행동에도 능란함이 결여되어 있지는 않았다. 시골에서는 경솔한 언동이 별로 없다. 그곳에는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드물기 때문에 일단 그런 일이 벌어지면 끝장을 보게 마련인 것이다. 발르노 씨는 뻔뻔스럽고 야비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1815년 이후 그의 의기양양한 생활은 그런 알량한 기질을 더욱 조장했다.
사실 그는 말하자면 드 레날 씨의 명령하에서 베리에르에 군림해 온 셈이었다. 그러나 훨씬 더 활동적이며 아무것에도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고 무슨 일에나 끼어들며 끊임없이 오가고, 모욕을 곧 잊어버리고 아무런 개인적인 주장이라곤 없는 그는 마침내 성직자 세력의 눈에 시장과 비등한 신임을 얻기에 이르렀다.
어찌 보면 발르노 씨는 그 고장의 식료 잡화 상인들에게 가서는 '너희 중 제일 바보 두 사람만 골라다오.'라고 말하고, 법조인들에게는 '제일 무식한 사람 둘만 지적해 다오.'라고 말하 고, 의사들에게는 '제일 엉터리 둘만 지명해 다오.'라고 말한 다음, 각 직업에서 가장 뻔뻔스러운 자들을 규합하여 '함께 군림하자.'라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들의 방식이 드 레날 씨의 기분에는 거슬렸다. 그러나 발르노의 야비성은 무엇에도 기분이 상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의 한가운데서도 발르노 씨는 만인이 자기에게 진상을 지적해 올 것을 잘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항하여 건방지고 뻔뻔스러운 태도로 자신을 방어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아페르 씨의 방문에 겁을 먹게 된 이후로 그의 활동은 배가되었다. 그는 브장송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배달부가 올 때마다 몇 통씩 편지를 써 보냈으며, 저녁 어스름에 그의 집에 들르는 낯선 사람들 편에도 편지를 보냈다. 노사제 셸랑을 면직시킨 것은 그의 실책인지도 몰랐다. 이런 앙심 깊은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는 신앙심이 깊은 몇몇 가문 좋은 부인네들에게 아주 사악한 인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가 도움을 받고 난 후로는 드 프릴레 르 부주교에게 완전히 매이는 신세가 되어 그에게서 기묘한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익명의 투서를 쓰며 즐거워했을 때의 그의 정략적 위치는 이상과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난처하게도 그의 아내는 쥘리앵을 자기 집에 데려오고 싶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녀의 허영심은 그 문제로 안달이 나 있었다.
이러한 처지에서 발르노 씨는 전날의 동맹자인 드 레날 씨와 일대 결전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레날 씨가 그에게 심한 말을 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드 레날 씨가 브장송과 파리에까지도 편지를 낼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장관의 사촌이란 자가 갑자기 베리에르에 나타나 빈민 수용소를 가로챌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발르노 씨는 자유주의자들과 가까워질 궁리를 했다. 쥘리앵이 암송을 했던 오찬회에 자유주의자가 몇 명 초대되었 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시장에 대항할 강력한 지지를 마련해 두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선거가 있게 될 경우, 득표의 결과가 나쁘면 수용소를 맡지 못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었다. 정치의 이면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드 레날 부인은 팔짱을 끼고 상점을 돌아다니는 동안 쥘리앵에게 그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얘기하면서 점차 피델리테 산책로 쪽으로 이끌려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베르지에서와 거의 마찬가지로 조용한 몇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발르노 씨는 옛 보호자에 대해 대담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와의 결정적인 장면은 회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날은 그런 책략이 성공하기는 했으나 시장의 기분을 더욱더 상하게 해 놓은 나머지, 카바레에 들어설 때 드 레날 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반대로 그의 아이들은 이보다 즐겁고 쾌활할 수가 없었다. 이 대조에 그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다. "꼴을 보니 나는 꼭 귀찮은 존재라도 되는 것 같군!" 그는 음식점에 들어서면서 일부러 위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대답 대신 아내는 그를 따로 끌고 가서 쥘리앵을 멀리 보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행복한 몇 시간을 보낸 덕택으로 그녀는 이 주일 전부터 생각해 온 행동 방침을 실천하기에 필요한 마음의 여유와 단호함을 되찾았던 것이다. 가련한 베리에르 시장을 속속들이 뒤흔들어 놓은 것은, 돈에 대한 그의 집착을 온 장안이 공공연히 비웃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발르노 씨는 도둑놈처럼 돈 씀씀이가 헤펐던 반면에, 성 조제프 신도회며 성모 수도회며 성체 수도회 등등을 위한 최근 대 여섯 차례의 기부금 모금에서 그는 화려하기보다는 신중한 방식으로 처신했던 것이다. 기부금 모금 수도사들의 장부에 교묘하게도 기부금 액수에 따라 정리되어 있는 베리에르 및 인근 지방 명사들 명단에서, 드레날 씨 이름이 마지막 줄에 나타난 것이 한 번만이 아니었다. 그가 그것을 코웃음 쳐보았자 헛일이었다. 성직자들은 기부금 건을 농담으로 넘기지는 않는 것이다.
한 해 내내 으스대며 누리던 쾌락도
잠깐 동안에 사라져버리는 수가 있다.
- 카스티
우리는 이 왜소한 인간을 하찮은 두려움에 떨도록 내버려 두자. 그는 비굴한 하인 근성의 인간이 필요했는데, 왜 기개 있는 인물을 자기 집에 들여놓았단 말인가? 그는 자기 사람을 고를 줄도 몰랐단 말인가? 권세 있고 문벌 좋은 사람이 기개 있는 인물을 만나면, 그를 죽이든가 추방하든가 감금하든가 아니면 심한 모욕을 가해서 상대방이 어리석게도 분에 못 이겨 죽게 만드는 것이 19세기의 보편적인 움직임이다.
여기서는 우연히도 고통당하는 것이 아직 기개 있는 인물 쪽이 아니다. 프랑스의 소도시나 뉴욕처럼 정부를 선거로 구성하는 곳의 커다란 불행은 드 레날 씨 같은 사람들의 존재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구 2만 명쯤의 도시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여론을 만드는데, 자치권을 가진 고장의 여론은 무서운 것이다.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에게는 불행이 내리는 것이다!
점심을 먹자 그들은 곧 베르지로 떠났다. 그러나 이틀 만에 쥘리앵은 온 가족이 다시 베리에르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드 레날 부인이 자기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기색을 눈치채고 몹시 놀랐다.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는 남편과 하던 얘기를 중단하더니 그가 자리를 비켜 주기를 바라는 기색이었다. 쥘리앵은 두 번 다시 그런 눈치 없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는 쌀쌀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드 레날 부인도 그것을 알아챘지만 애써 설명을 구하지도 않았다. 쥘리앵은 혼자 생각했다. 부인이 내 후계자를 들이려는 것인가? 그저께까지만 해도 그렇게 친밀한 태도더니만! 하지만 귀부인들이란 그렇게 행동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집에 돌아가 파면장을 받을 대신에게 전에 없이 친절을 베푸는 왕처럼 말이지.
쥘리앵은 자기가 다가가면 갑자기 중단되곤 하는 부부의 대화에 베리에르 시 소유의 커다란 건물이 자주 오르내리는 것을 주목했다. 그 건물은 낡았지만 넓고 편안한 시설로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의 교회 맞은편에 있었다. 그 집과 새 애인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겠는가? 쥘리앵은 이렇게 생각했다. 침울한 기분에 빠져서 그는 프랑수아 1세의 아름다운 시구 절을 되어 보았다. 드 레날 부인이 그에게 가르쳐 준 지 한 달도 채 안 된 터여서 그 시구는 아주 새로운 듯이 보였다. 그때 그들은 얼마나 많은 맹세와 애무로 이 시구 하나하나를 부인 했던가!
여자의 마음은 자주 변하나니
그걸 믿는 자는 어리석을지라.
드 레날 씨는 역마차로 브장송을 향해 떠났다. 이 여행은 두 시간 만에 결정된 것인데, 그는 몹시 괴로워 보였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회색 종이로 포장한 커다란 꾸러미 하나를 책상 위에 내던졌다.
"이것이 그 빌어먹을 용건이오." 그가 아내에게 내뱉었다.
한 시간 후 쥘리앵은 광고 붙이는 사람이 그 커다란 꾸러미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서둘러 그 사람을 따라 나갔다. 첫 길모퉁이에서 비밀을 알아낼 수 있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커다란 솔로 광고에 풀칠하고 있는 광고 붙이는 사람 뒤에 서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광고의 게시가 끝나자 쥘리앵의 호기심에 찬 눈에 띈 것은, 드 레날 부부의 대화 중에 그토록 자주 언급되던 그 커다란 낡은 건물을 공개 입찰로 임대한다는 아주 자세한 안내문이었다. 임대차의 입찰은 다음 날 오후 2시 시청 홀에서 열려, 세 번째 촛불이 꺼질 때까지의 최고 입찰가로 결정한다는 공고였다. 쥘리은 아주 실망했다. 기간이 촉박해 보였다. 그 시간에 어떻게 모든 경쟁자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데다가 그 광고는 십오일 전으로 날짜가 박혀 있었다. 쥘리앵은 세 군데서나 광고를 전부 되풀이해 읽어 보았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임대할 건물에 가 보았다. 문지기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옆 사람에게 무언가 숨기는 듯한 태도로 얘기하고 있었다.
"흥! 헛수고야. 마슬롱 씨가 그 사람에게 300프랑에 차지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일세. 시장이 반대하다가 드 프릴레르 부주교님한테 주교관으로 호출당했거든." 쥘리앵이 온 것이 그 두 친구를 몹시 방해한 듯 그들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쥘리앵은 임대차 입찰 현장에 가 보았다. 어둑어둑한 홀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이상한 태도로 서로를 훑어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눈길이 한 테이블에 붙박여 있었다. 그 테이블 위 주석 쟁반에 놓인 세 개의 초 도막에 불이 켜 있었다. 입찰 계원이 소리쳤다.
"자 여러분, 300프랑입니다!"
"300프랑이라! 그건 너무 심하군." 한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쥘리앵은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 건물은 800프랑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내가 값을 올려 보겠어."
"그건 누워서 침 뱉기야. 마슬롱 씨, 발르노 씨, 주교, 무시무시한 드 프릴레르 부주교, 또 그 패거리 전부와 등을 돌리고서 자네가 얻는 것이 무엇이겠나?"
"320프랑." 먼저 사람이 외쳤다.
"바보 같은 녀석!" 옆 사람의 대꾸였다. 그러고는 쥘리앵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바로 저기 시장의 밀정이 있단 말이야."
쥘리앵은 그 말을 응징하려고 홱 돌아다봤다. 그러나 그 두 프랑슈테 지방 사내는 쥘리앵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냉정함을 보고 쥘리앵도 냉정을 되찾았다. 그 순간 마지막 촛불이 꺼졌다. 계원은 그 건물의 임대가 향후 구 년간 모 현청의 과장인 드 생지로 씨에게 330프랑에 낙찰되었다고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시장이 홀을 나가자마자 공론이 시작되었다.
"그로조의 경솔한 짓이 시에 30프랑을 보태 줬구먼."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드 생지로 씨가 그로조에게 앙갚음을 할걸. 그로조 혼 좀 날거야." 다른 사람이 대꾸했다.
쥘리앵의 왼편에 있던 뚱뚱한 사내가 끼어들었다.
"치사한 짓이군! 나라면 800프랑이라도 내고서 내 공장을 차리겠어. 그래도 싼 셈이지." 자유주의자인 젊은 공장주가 대꾸했다.
"흥! 드 생지로 씨는 수도회 회원이 아니던가요? 그 사람의 자식 네 명이 장학금까지 타지 않았어요? 한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베리에르 시는 그 사람 봉급에다가 500프랑의 추가금을 줘야 하는 판이군요. 그게 문제의 전부죠."
"시장이 그걸 막을 수 없었다니! 하긴 시장도 일찍부터 급진 왕당파니까. 그러나 시민의 재산을 도둑질하는 사람은 아닌데." 세 번째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대꾸했다.
"시장이 도둑질하지 않는다고? 그렇지, 훔쳐 먹는 건 비둘기라니까. 그건 모두 시의 금고 속으로 들어가 연말에 분배되겠지. 그런데 저기 소렐의 아들이 있구려. 자, 갑시다."
쥘리앵은 아주 기분이 상해서 돌아왔다. 드 레날 부인도 몹시 우울한 기색이었다.
"입찰하는 데 갔다 오셨군요?" 그녀가 쥘리앵에게 말했다.
"예, 부인. 영광스럽게도 저를 시장님의 밀정으로들 여기더군요."
"그이는 내 말대로 여행이나 하시는 건데."
이때 드 레날 씨가 나타났다. 그는 몹시 침울해 있었다. 식사도 말 한마디 없이 진행되었 다. 드레날 씨는 쥘리앵에게 아이들과 함께 베르지로 가라고 지시했다. 울적한 여행이었다.
드 레날 부인이 애써 남편을 위로했다. "여보, 당신은 그런 일쯤 대범하게 넘겨야 해요."
그날 저녁 그들은 난로 주위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것은 더없이 화목한 가정에서도 때때로 볼 수 있는 쓸쓸한 한때였다. 이때 어린아이 하나가 기쁜 듯이 소리쳤다. "누가 벨을 울려요! 누가 벨을 울려!"
"제기랄! 감사하다는 핑계로 드 생지로 씨가 귀찮게 굴려고 왔다면, 그 작자에게 따끔하게 말해 줘야지. 이건 너무해." 시장이 소리쳤다. "그자가 신세진 건 발르노지. 나는 괜히 체면만 깎였다고. 그 못된 과격파 신문들이 이 사건을 알아채서 나를 가십감으로 삼으면 어쩐다지?"
이때 검은 구레나룻을 기른 대단한 멋쟁이 한 사람이 하인을 따라 들어왔다.
"시장님, 저는 시뇨르 제로니모라는 사람입니다. 나폴리 대사관에 있는 드 보지 씨가 보내는 편지 한 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흐레 전 제가 떠날 때 시장님께 써 준 편지입니다." 시뇨르 제로니모는 드 레날 부인을 쳐다보면서 쾌활한 태도로 덧붙여 말했다. "부인, 부인의 사촌인 드 보베지 씨는 제 친한 친구인데, 부인께서 이탈리아어를 아신다고 말하더군요."
그 나폴리 사람의 쾌활함이 울적한 저녁을 아주 유쾌한 저녁으로 바꾸어놓았다. 드 레날 부인은 그에게 꼭 야식을 대접하고 싶어했다. 부인은 집 안 전체를 부산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날 하루 동안에 두 번이나 밀정이란 말을 들은 쥘리앵의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 주려고 한 것이다.
시뇨르 제로니모는 유명한 가수로 상류 사회에 드나드는 사람이었지만 대단히 쾌활했다. 이제 프랑스에서는 이 두 가지 성질이 양립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야식이 끝나자 그는 드 레날 부인과 함께 짧은 이중창을 불렀다. 그는 즐거운 얘기를 들려주었다.
새벽 1시가 되어 쥘리앵이 아이들에게 가서 자자고 말하자 아이들은 싫다고 아우성쳤다.
"더 얘기해 줘요." 맏이가 말했다.
"이건 내 얘긴데요, 도련님." 제로니모 씨가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팔 년 전 일인데, 나는 나폴리 음악원의 어린 학생이었지요. 지금 당신 나이쯤 됐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베리에르 시의 훌륭한 시장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영광은 못 가졌어요." 이 말을 듣자 드 레날 씨는 한숨을 짓고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이들에게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그의 이탈리아 억양을 좀 과장하면서 젊은 성악가는 계속해서 얘기했다.
"진가렐리 선생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극히 엄한 선생님이었어요. 그래서 음악원 학생들은 그분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항상 자기를 좋아하는 듯이 행동하기를 바라셨어요.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학교를 빠져나갔지요. 산카를리노 소극장에 가서 멋진 음악을 듣곤 했어요. 그런데 아래층 뒷자리의 입장료 8수를 어떻게 모아야 할 지 아득하기만 했어요. 막대한 금액이니까요." 이렇게 말하고서 그가 아이들을 쳐다보자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산카를리노의 지배인 지오반노네 씨가 우연히 내 노래를 듣게 되 었어요. 내가 열여섯 살 때였지요. '이 아이는 보물이다.' 그분은 내 노래를 듣고 이렇게 말했어요.
'이 친구야, 나와 계약하지 않겠나?' 그분이 내게 말하는 거예요.
'얼마를 주시겠습니까?' 내가 물었죠.
'한 달에 40듀카씩 주겠네.' 여러분, 그건 160프랑이나 되는 돈이에요. 하늘이 활짝 열리는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어떻게 엄한 진가렐리 선생님의 외출 허락을 얻어내죠?' 내가 지오반노네 씨에게 물었어요.
'라시아 파레 아 메'라고 그분이 대답하는 거예요."
"내게 맡겨라'라는 뜻이죠!" 맏이가 외쳤다.
바로 맞았어요, 꼬마 도련님. '우선 계약 절차를 밟아두자.' 지오반노네 씨가 내게 말했어요. 나는 서명했죠. 그러자 그분은 내게 3듀카를 주었어요. 그다음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주었어요.
이튿날 나는 무서운 진가렐리 선생님께 면회 신청을 했어요. 선생님의 늙은 하인이 안내해 줬지요.
'이 못된 녀석아, 내게 무슨 볼일이냐?' 진가렐리 선생님이 호령하는 거예요.
'선생님, 저는 잘못을 뉘우칩니다. 앞으로는 철책을 넘어 음악원을 빠져나가지 않겠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나는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렸죠.
'내가 들어 본 최고의 베이스 목소리를 망칠 염려만 없다면 네놈을 가둬 두고 이 주일 동안 빵과 물만 먹이련만, 이 망나니 녀석아.' 나는 다시 말했죠.
'선생님, 저는 이제 전교의 모범생이 되겠습니다. 크레데테 아 메*('저를 믿어 주세요'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그런데 한 가지 부탁 드릴 게 있어요. 누가 와서 저한테 밖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하면 거절해 주십시오. 제발 허락할 수 없다고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어떤 자가 너같이 못된 놈을 원한단 말이냐? 네가 음악원을 떠나게 허락할 줄 아느냐? 네놈이 나를 놀릴 작정이냐? 썩 꺼져 버려! 마른 빵과 감방을 조심해라, 이놈아!' 선생님은 내 엉덩이를 걷어차려 하면서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어요.
한 시간 후에 지오반노네 씨가 선생님을 찾아왔어요. 그분은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제 행운을 이루도록 요청드리러 왔습니다. 제로니모를 저한테 주십시오. 우리 극장에서 노래 부르게 말씀입니다. 그리고 올 겨울에는 제 딸과 결혼시키겠습니다.'
'그 엉터리 녀석을 무엇에 쓰려고요? 안 됩니다. 그 애를 줄 수 없어요. 게다가 내가 동의 한다 해도 그 애는 결코 음악원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방금 내게 맹세했으니까요.' 진가렐리 선생님의 대답이었지요.
'문제되는 것이 본인의 의사뿐이라면, 카르타 칸타!*(‘서류가 증명합니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여기 그의 서명이 있습니다.' 지오반 노네 씨는 주머니에서 계약서를 꺼내면서 엄숙하게 말했어요.
그러자 진가렐리 선생님은 노발대발해서 벨을 울려댔지요. '제로니모를 음악원에서 쫓아 내라!' 그분은 펄펄 뛰며 소리 질렀어요. 그래서 나는 퇴학당했지요.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말이죠. 바로 그날 저녁 나는 「델 몰티플리코」란 곡을 불렀어요. 어릿광대가 결혼하려고 결혼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손가락으로 꼽아 보는데, 매번 그 계산이 엇갈린다는 내용의 노래지요."
"아! 그 곡을 우리에게 좀 불러 주세요." 드 레날 부인이 말했다.
제로니모는 노래를 불렀다. 모두들 너무 웃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시뇨르 제로니모는 훌륭한 태도와 친절함과 쾌활함으로 온 가족을 매료시키고 새벽 2시에야 자러 갔다.
다음 날 드 레날 씨 부처는 그가 프랑스 궁정에서 필요로 하는 소개장을 써 주었다.
이렇듯 도처에 거짓투성이구나. 쥘리앵은 생각에 잠겼다. 시뇨르 제로니모는 6만 프랑쯤 번 후 런던으로 가겠지. 산카를리노 극장 지배인의 처세술이 아니었다면 그의 기막힌 목소리도 아마 십 년 후에나 세상에 알려져 찬양받았겠지……. 나로서는 레날보다는 제로니모 같은 사람이 되는 편이 낫겠다. 그는 사회에서 높은 명예를 차지하지는 못하겠지만 오늘 같은 입찰의 비애를 맛보지는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의 생활은 즐거운 것이다.
베리에르의 드 레날 씨 집에서 혼자 쓸쓸히 지냈던 몇 주일간이 행복한 시기였다는 사실이 쥘리앵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초대받아 간 식사 때만 역겨움과 우울한 상념에 마주쳤던 것이다. 그 쓸쓸한 집 안에서는 아무 방해 없이 읽고 쓰고 생각할 수 있지 않았던가? 천한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을 살펴야 할 잔인한 필요성 때문에 순간순간 자신의 찬란한 꿈에 서 벗어나지 않아도 좋았고, 더구나 위선적인 말과 행동으로 그 마음을 속일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행복이란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일까……? 이처럼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엘리자 양과 결혼할 수 있고 푸케의 동업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가파른 산을 기어오른 여행자만이 산꼭대기에 앉아 휴식하는 완전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항상 쉬라고 강요당한다면 그것이 행복일 것인가?
드 레날 부인의 정신 상태는 불길한 생각을 품는 데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도 그녀는 쥘리앵에게 입찰 사건의 내용을 모두 말해 버렸다. 그 사람은 내 모든 맹세를 잊게 만드는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편이 위험에 처한 것을 보면 그녀는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자기 생명이라도 바쳤을 것이다. 그녀는 용감한 행동의 가능성을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범죄를 저지른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회한에 빠지는, 고결하고도 공상적인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갑자기 미망인이 되어 쥘리앵과 결혼할 수 있게 된다면 맛볼, 극도의 행복에 대한 환상을 쫓아 버릴 수 없는 암담한 날들도 있었다.
쥘리앵은 드 레날 씨보다 훨씬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가 엄격하고 공정하게 대했어도 아이들 역시 그를 존경했다. 쥘리앵과 결혼하게 되면 베르지의 정다운 나무 그늘을 떠나야 하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만인을 경탄시킨 교육을 자식들에게 계속 시키면서 파리에서 사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아이들, 그녀 자신, 쥘리앵 모두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만 같았다.
19세기의 결혼이 그렇듯이 결혼의 결과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결혼에 앞서 사랑이 싹텄을 경우 결혼 생활의 권태가 그 사랑을 송두리째 뽑아 버린다.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결혼이 온갖 조용한 기쁨에 대한 깊은 권태를 불러오게 마련이라고 철학자는 얘기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랑에 대한 갈구로 기울어지지 않는 여자는 메마른 넋의 소유자뿐이라고
나로서는 이런 철학자의 고찰로 드 레날 부인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베리에르 사람들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온 장안의 관심은 그녀의 연애 사건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 중대한 사건 때문에 베리에르 사람들은 그해 가을을 평소보다 심심치 않게 보냈다.
가을과 겨울의 일부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 베르지의 숲을 떠나야 했다. 베리에르의 상류 사교계는 자기들의 맹렬한 비난이 드레날 씨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데 대해 분개하기 시작했다. 채 일주일도 못 되어 그런 종류의 사명을 수행하는 기쁨으로 평소의 엄숙함을 보상하려 하는 근엄한 사람들은, 더없이 신중한 어법을 사용해서 드 레날 씨에게 가장 잔인한 의혹을 암시했다.
매사에 신중한 발르노 씨는 여자가 다섯이나 있는 아주 존경받는 명문 가정에 엘리자를 소개했다. 겨울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까 봐 염려되어, 엘리자는 시장 댁에서 받던 급료의 약 3분의 2만을 그 가정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 처녀는 쥘리앵의 연애 사건을 상세히 고자질하기 위해 물러난 셸랑 사제와 새로운 사제에게 동시에 고해하러 다니겠다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베리에르에 도착한 다음 날 셸랑 사제는 새벽 6시부터 쥘리앵을 불렀다. 사제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네.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바이며, 필요하다면 명령이라도 하겠네. 사흘 안에 브장송의 신학교로 가든지, 아니면 언제든 자네에게 훌륭한 운명을 개척해 줄 채비가 되어 있는 자네 친구 푸케의 집으로 떠나라고 요구하는 바일세. 자네를 위해 모든 걸 예상해 보았고 모든 궁리를 해 보았지만, 떠나는 길밖에는 없네. 그리고 일 년 안에는 베리에르에 돌아오지 말게."
쥘리앵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자기의 부친은 아닌 셸랑 씨가 자기를 위해 취해 준 조치를 자신의 명예의 손상으로 여겨야 할지 어떨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젊은이쯤 쉽게 설득할 것으로 생각한 셀랑 씨는 여러 가지로 타일렀다. 더할 나위 없이 겸손한 태도와 표정을 짓고 쥘리앵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사제 댁을 나온 그는 드 레날 부인에게 알리러 달려갔다. 부인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남편이 그녀에게 꽤 솔직하게 얘기를 털어놓은 길이었다. 선천적으로 나약한 성격인 데다가 브장송으로부터 올 유산에 대한 전망도 곁들여져서, 드 레날 씨는 아내가 완전히 순결하다고 생각하기로 작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베리에르의 여론이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음을 아내에게 고백한 것이었다. 여론은 잘못된 것으로 질투하는 사람들이 오도한 것이다. 그러나 대체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이 발르노 씨의 제안을 받아들여 베리에르에 머물 수도 있으리란 환상을 잠시 품어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지난해와 같이 단순하고 소심한 여인이 아니었다. 숙명적인 열정과 회한이 그녀의 눈을 뜨게 했던 것이다. 남편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적어도 일시적이나마 쥘리앵과 헤어지는 것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괴로움을 느꼈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쥘리앵은 다시 그의 야심 찬 계획에 빠질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그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데 나는 이렇게 부자구나! 내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 쓸모도 없이! 그는 나를 잊게 되겠지. 그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니 어떤 여자의 사랑을 받을 테고 그이 또한 사랑하게 되겠지. 아아! 나는 불행한 여자……. 내가 무엇을 원망할 수 있으랴? 하늘은 공정하시다. 나는 죄를 막을 만한 힘이 없었으니. 그이가 내 판단력을 마비시켰어. 돈으로 엘리자를 매수하는 일쯤 아주 수월한 일이었는데 나는 잠시라도 그런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으니. 미친 듯한 사랑의 꿈에 자나 깨나 사로잡혀 있었지 뭐야. 나는 이제 파멸이구나.'
드 레날 부인에게 떠나야겠다는 무서운 소식을 알리면서 쥘리앵은 한 가지 사실에 놀랐다. 부인이 아무런 이기적인 반대도 제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분명히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굳은 마음이 필요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자기 머리칼 한 줌을 잘라 냈다.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가 죽더라도 아이들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아이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 주세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나면 귀족은 모두 참살당할 거예요. 애들 아버지는 지붕 위에서 죽음을 당한 그 농부 때문에 망명길에 오를지도 몰라요. 가족을 돌봐 주세요…… 당신 손을 잡게 해 주세요. 잘 가요, 쥘리앵! 여기서는 이게 마지막 순간이에요. 이 큰 희생을 치르고 나면 나도 공공연히 내 평판을 회복할 용기를 갖고 싶어요." 쥘리앵은 절망적인 광경을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간단한 이별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니, 저는 이런 식으로 작별 인사를 받을 수는 없어요. 저는 떠나겠습니다. 모두들 그걸 원하고 부인까지도 그걸 원하시니까요. 그러나 떠난 후 사흘째 되는 날 밤에 당신을 만나러 오겠습니다."
드 레날 부인의 생활은 일변했다. 쥘리앵 스스로 그녀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해냈으니, 쥘리앵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견딜 수 없는 괴로움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강렬한 기쁨으로 변했다. 애인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확신이 마지막 순간의 모든 비통함을 없애 주는 것이었다. 이 순간부터 드 레날 부인의 행동은 그녀의 용모처럼 고상하고 단호하며, 완전무결하게 합당한 것이 되었다.
잠시 후에 드 레날 씨가 돌아와 마침내 두 달 전에 받았던 익명의 편지 얘기를 아내에게 꺼냈다.
"그걸 카지노에 들고 가서 고약한 발르노 녀석이 보냈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 줘야겠어. 거지꼴이던 녀석을 끌어올려 베리에르에서도 제일 부유한 부르주아의 하나로 만들어 준 게 나인데 말이야. 그 녀석에게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고 녀석과 결투하겠어. 이건 너무 지나 치단 말이야."
'이런, 내가 과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와 거의 동시에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틀림없이 말릴 수 있는 이 결투를 말리지 않는다면 나는 내 남편의 살해자가 될 것이다.'
그녀가 남편의 허영심을 이처럼 교묘하게 조종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두 시간 가까이 걸려 그것도 한결같이 남편 스스로 분별을 찾게 함으로써, 그녀는 남편이 어느 때보다도 발르노 씨와 친하게 지내야 할 것과 나아가 엘리자를 다시 집에 불러들이는 것에 동의하게 했 다. 드 레날 부인이 자기의 온갖 불행의 원인인 그 계집아이를 다시 대할 결심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쥘리앵이 해낸 것이었다.
서너 차례나 망설인 끝에 드 레날 씨는 마침내 경제적인 관점에서 아주 고통스러운 생각에 스스로 도달했다. 그것은, 베리에르 전체가 그 얘기로 들끓고 있는 판국에 쥘리앵이 발르노 씨 집 가정 교사로 베리에르에 머문다는 것은 자기에게 더할 나위 없이 불쾌한 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빈민 수용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명백히 쥘리앵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반면에 드 레날 씨의 명예를 위해서는 쥘리앵이 베리에르를 떠나 브장송이나 디 종의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쥘리앵에게 그런 결심을 시 킬 것인가? 그리고 그는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당장 돈을 치러야 하는 것을 알게 되자 드 레날 씨는 자기 아내 이상으로 절망에 빠졌다. 남편과 그런 얘기를 나눈 후 드 레날 부인은 마치 인생살이에 지쳐 흰독말풀의 독을 삼킨 용감한 사내와도 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다. 그런 사내는, 말하자면 용수철의 힘으로 자동으로 움직이는 듯한 상태일 뿐 만사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이 14세는 죽어 가면서 '내가 왕이었을 때'라고 말했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 아닌가!
다음 날 새벽에 드 레날 씨는 익명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모욕적인 언사로 쓰인 것이었다. 그의 처지를 겨냥한 더없이 야비한 말이 행마다 눈에 띄었다. 그것은 어떤 저질의 시샘하는 자가 쓴 것이었다. 이 편지를 보자 다시 발르노 씨와 결투할 생각이 날 만큼 그는 곧 대담해졌다. 그는 혼자 집을 나와 총기상에 가서 피스톨을 사 즉석에서 총알을 장전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폴레옹 황제의 엄격한 행정이 재현된다 해도 사실 나 자신은 한 푼도 횡령했다고 비난받을 일이 없다. 나는 기껏 눈감아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 결백을 증명하는 서류들을 책상에 간직하고 있다. 드 레날 부인은 남편의 차디찬 분노에 겁이 났다. 그녀는 자기가 과부가 된다는,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그 치명적인 생각을 남편에게 비쳐 봤다. 그녀는 문을 잠그고 남편과 함 께 방 안에 들어앉았다. 몇 시간 동안이나 남편을 설득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새로 온 익명의 편지에 그는 마음을 결정한 것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발르노 씨의 따귀를 때리겠다는 용기를, 일 년간의 신학교 비용으로 쥘리앵에게 600프랑을 제공하겠다는 용기로 바꾸어 놓는 데 성공했다. 드 레날 씨는 자기 집에 가정 교사를 들여놓겠다는 치명적인 생각을 해냈던 날을 수없이 저주하면서 익명의 편지를 잊을 수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약간 위안을 받았다. 젊은이의 공상적인 생각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좀 더 적은 금액으로 발르노 씨의 제안을 거부하도록 유도한다는 생각이었다.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이 자기 남편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수용소장이 공공연히 제안한 800프랑짜리 자리를 희생하는 것이므로, 아무 부끄럼 없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고 쥘리앵을 설득하는 데 남편을 설득하는 이상으로 무진 애를 먹었다.
쥘리앵은 한결같이 항변했다.
"하지만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잠시도 하지 않았어요. 댁에서 점잖은 생활이 몸에 배어서 그런 사람들의 상스러움은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의 필요성이 그 강철 같은 손으로 쥘리앵의 의지를 꺾었다. 그래도 그의 자존심은 베리에르 시장이 제공한 금액을 차용으로 받아들이고 오 년 후에 이자를 합쳐 상환한다는 증서를 써 줄 생각을 하게 했다. 드레날 부인은 여전히 수천 프랑을 산의 작은 동굴 속에 숨겨 두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화를 내며 거절할 것을 잘 알면서도 떨면서 그에게 그 돈을 가지라고 말했다.
"우리 사랑의 추억을 더럽히고 싶으세요?" 쥘리앵이 말했다.
마침내 쥘리앵은 베리에르를 떠났다. 드 레날 씨는 몹시 행복했다. 그에게 돈을 받을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자, 쥘리앵에게는 그 희생이 너무 심한 듯해 보였다. 그는 돈을 깨끗이 거절하고 말았다. 드 레날 씨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쥘리앵의 목에 매달렸다. 쥘리앵이 그에게 품행 증서를 써 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감격에 넘쳐서 쥘리앵의 행실을 격찬할 훌륭한 용어를 찾아내지 못할 정도였다. 우리의 주인공은 5루이의 저축금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한 액수를 또 푸케에게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는 매우 감동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랑을 남겨 둔 베리에르에서 4킬로미터 떨어져 왔을 때, 그는 브장송과 같은 군사적인 대도시를 보게 된다는 행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흘간의 짧은 이별 동안 드 레날 부인은 사랑의 더없이 잔인한 기만에 속고 있었다. 그녀의 생활은 견딜 만했다. 그 생활과 극도의 불행 사이에는 쥘리앵과 함께할 마지막 해후가 있 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해후까지 남아 있는 시간을 매 분마다 헤아려 보고 있었다. 마침내 사흘째 밤이 되자 그녀는 멀리에서 약속한 신호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위험을 통과한 끝에 쥘리앵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이 순간부터 그녀는 한 가지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애인의 열성에 응답하기는커녕 그녀는 겨우 숨을 쉬는 송장과도 같았다. 그녀가 가까스로 쥘리앵을 사랑한다고 말할라치면 거의 반대의 뜻으로 들릴 정도로 어색한 표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한 이별이라는 잔인한 생각에서 그녀를 헤어나게 할 수 없었다. 의심 많은 쥘리앵은 한순간 자기가 벌써 잊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 뜻으로 가시 돋친 말을 해도, 그녀는 그저 말없이 굵은 눈물을 흘리며 발작적으로 손을 꼭 쥐는 것으로 응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보고 당신을 믿으란 말이에요? 단순한 친구 사이인 데르빌르 부인에게도 당신은 백배는 더 진정한 애정을 보일 수 있을 거예요." 쥘리앵은 애인의 생기 없는 항변에 이렇게 대꾸했다.
화석처럼 굳은 드 레날 부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보다 불행할 수는 없을 거예요……. 차라리 죽고 싶어요…….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아요……."
이것이 부인에게서 쥘리앵이 들을 수 있는 가장 긴 답변이었다.
날이 새기 시작하여 쥘리앵의 출발이 불가피해졌을 때는 드 레날 부인의 눈물도 완전히 말랐다. 그녀는 말없이, 쥘리앵의 키스에도 키스로 응하지 않은 채 그가 창문에 밧줄을 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쥘리앵이 이렇게 말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대로 되었군요. 이제부터 당신은 회한 없이 살게 될 겁니다. 아이들이 조금만 아파도 벌써 죽은 듯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죠."
"당신이 스타니슬라스를 포옹할 수 없어서 섭섭해요." 그녀는 생기 없이 이렇게 말할 뿐 쥘리앵은 마침내 이 산송장의 열기 없는 포옹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몇 킬로미터의 길을 가는 동안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심정은 비통했다. 산을 넘어 서기 전, 베리에르 교회의 종루가 보이는 동안 그는 자주 뒤를 돌아다보았다.
시끄러운 소리, 바삐 돌아가는 사람들!
스무 살의 머릿속에 떠도는 하고많은 장래의 포부!
사랑에 대한 놀라운 방심!
- 바르나브
마침내 멀리 산마루에서 검은 성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브장송의 성채였다. 이곳을 수비하는 연대에 소위로 임관되어 이 고귀한 전쟁 도시에 온 것이라면 내 처지가 얼마나 다를 것이랴!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브장송은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용기 있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넘치는 도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개 시골뜨기에 불과한 쥘리앵으로서는 명사들에게 접근할 아무런 수단도 없었다.
그는 푸케의 집에서 평상복을 한 벌 빌려 입었는데, 그 복장을 하고 도개교를 건넜다. 1674년 포위전의 역사로 머리가 가득 찬 그는 신학교에 갇히기 전에 성벽과 성채를 구 경하고 싶었다. 그는 두세 번 보초들에게 붙들릴 뻔했다. 해마다 12프랑 내지 15프랑어치의 건초를 팔아먹기 위해 군대가 교묘하게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해 놓은 장소에 발을 들여 놓았던 것이다.
큰길가에 있는 커다란 카페 앞을 지나게 되었을 때까지 몇 시간 동안 그는 성벽의 높이며 호의 깊이며 대포의 무서운 모습 등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놀라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거대한 두 문짝에 큰 글씨로 쓰인 카페라는 말을 읽어 보아도 소용없었다. 도대체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애써 소심증을 억누르고 감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삼사십 보나 되는 길이에 천장 높이가 줄잡아 6미터는 되어 보이는 홀이었다. 그날은 모든 것이 그에게 마술처럼만 보였다.
두 패가 당구를 치고 있었다. 보이들이 큰 소리로 점수를 외쳐 댔다. 경기자들은 구경꾼으로 붐비는 당구대 주위를 돌고 있었다. 모두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담배 연기의 물결이 푸른 빛 구름처럼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 사나이들의 커다란 키, 둥근 어깨, 묵직한 거동, 무성한 구레나룻, 그들을 감싼 기다란 프록코트 등 모든 것이 쥘리앵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난로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작은 꾸러미를 팔 밑에 끼고 왕의 아름다운 흰 석고상을 쳐다보는 이 젊은 시골 신사의 매력적인 얼굴을 카운터의 아가씨가 벌써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인 데다가 카페에 어울리는 치장을 한 프랑슈콩테 지방 출신의 이 아가씨는 쥘리앵에게만 들리게 하려는 작은 목소리로 벌써 두 번이나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부르고 있었다. 쥘리앵은 아주 다정하고 커다란 푸른 두 눈과 마주쳤다. 그제야 그는 그 아가씨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온 것을 알아챘다.
그는 마치 적을 향해 행진하듯이 카운터의 예쁜 처녀에게로 힘차게 다가갔다. 이 같은 격렬한 동작에 그의 꾸러미가 떨어졌다. 열다섯 살이면 벌써 의젓한 태도로 카페에 드나들 줄 아는 파리의 중학생들에게 우리의 이 시골뜨기는 얼마나 가련한 생각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그러나 열다섯 살에 그렇게 잘 훈련된 그런 아이들은 열여덟이 되면 그만 평범해지고 만다. 시골에서 보게 되는 정열이 깃든 수줍음은 때때로 자신을 극복하게 하고 의지의 힘을 길러 주는 것이다. 자기에게 일부러 말을 걸어 준 몹시 아름다운 처녀에게 다가가면서, 수줍음을 극복한 나머지 대담해진 쥘리앵은 저 여자에게 사실대로 얘기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부인, 저는 브장송에 처음 왔습니다. 돈을 지불할 테니 빵 하나와 커피 한 잔을 주셨으면 합니다."
아가씨는 빙그레 웃음을 짓더니 이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이 예쁜 청년에게 당구 치는 사람들이 빈정거리고 농을 건네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면 이 청년은 겁먹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 내 곁에 앉으세요." 그녀는 홀로 튀어나온 커다란 마호가니 카운터에 거의 다 가려져 있는 대리석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는 카운터 밖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것은 그녀의 뛰어난 몸매를 과시할 기회가 되었다. 쥘리앵의 시선이 끌렸다. 그의 생각이 모두 바뀌었다. 아름다운 아가씨는 그의 앞에 잔 하나와 설탕과 작은 빵 한 조각을 갖다 놓았다. 그녀는 커피를 가져오라고 보이를 부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보이가 오면 쥘리앵과 단둘이 마주 있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쥘리앵은 생각에 잠겨 이 쾌활한 금발 미인과 때때로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추억을 비교해 보았다. 자기가 이 여인의 열성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생각에 수줍음을 거의 잊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아가씨는 즉시 쥘리앵의 시선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파이프 연기 때문에 기침이 나시죠. 내일 아침 8시 전에 식사하러 오세요. 그때는 거의 저 혼자 있거든요."
"당신 이름이 뭐죠?" 쥘리앵은 행복한 수줍음에서 나오는 다정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아망다 비네라고 해요."
"한 시간 후에 이것만 한 조그만 꾸러미를 당신에게 보내도 좋겠어요?" 아망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는 감시받고 있어요. 당신이 요구하는 일은 저를 위태롭게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가서 카드에 제 주소를 써 올 테니 당신 꾸러미를 제게 보내세요."
"저는 쥘리앵 소렐이라고 하는데, 브장송에는 친척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런 줄 알았어요. 법률 학교에 들어가려고 오셨지요?" 그녀가 기쁜 듯이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아요. 신학교에 들어가려는 겁니다." 쥘리앵이 대답했다.
아망다의 표정에는 더할 수 없는 실망의 빛이 나타났다. 그녀는 보이를 불렀다. 이제 용기가 났던 것이다. 보이는 쥘리앵을 쳐다보지도 않고 잔에 커피를 따랐다.
아망다는 카운터에서 돈을 받고 있었다. 쥘리앵은 감히 말을 걸 수 있었던 것이 자랑스러웠다.
"당신만 좋으시다면 나는 당신의 사촌이라고 말하겠어요." 쥘리앵은 갑자기 안심한 듯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담대한 태도가 아망다의 마음에 들었다. 이 사람은 보잘것없는 청년은 아닌가 보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누가 카운터에 다가오나 하고 눈길로 살피고 있었으므로, 쥘리앵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재빨리 그에게 말했다.
"저는 디종 근처 장리스 출신이에요. 당신도 역시 장리스 출신이며 제 어머니의 사촌이 된다고 말하세요."
"틀림없이 그렇게 하겠어요."
"여름이면 매주 목요일 5시에 신학생들이 이곳 카페 앞을 지나가요."
"만약 제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제가 지나갈 때 손에 오랑캐꽃 한 다발을 들고 계세요." 아망다는 놀란 태도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보고 쥘리앵의 용기는 무모함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몹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좀 나지막이 말씀하세요." 그녀가 질겁한 태도로 말했다.
쥘리앵은 베르지에서 읽었던, 파질이 되어 한 권만 남은 「신 엘로이즈」*의 구절들을 기억해 낼 생각을 했다. 그의 기억력이 잘 들어주었다. 10분 전부터 그는 황홀해하는 아망다 양에게 「신 엘로이즈」를 암송하다시피 하면서 자신의 용감함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아름다운 프랑슈콩테 출신 여인이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을 띠었다. 그녀의 애인 하나가 카페 문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루소의 서간체 소설.
그자는 휘파람을 불면서 어깨를 거들먹거리는 걸음으로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는 쥘리앵을 째려보았다. 이 순간 늘 극단으로 치닫는 쥘리앵의 상상력은 결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쥘리앵은 얼굴이 핼쑥해지더니 찻잔을 밀어놓고서 단호한 표정을 띠고 연적을 주의 깊게 노려봤다. 이 연적이 허물없는 태도로 카운터 위에서 브랜디 한 잔을 따르느라고 고개를 숙였을 때, 아망다는 쥘리앵에게 노려보지 말라고 눈짓으로 타일렀다.
그는 거기에 따랐지만 2분 동안 앞으로 닥쳐올 일만을 생각하면서, 얼굴이 핼쑥해져서는 단호한 태도로 꼼짝 않고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 순간 그의 모습은 정말로 훌륭했다. 연적은 쥘리앵의 눈초리에 놀랐다. 그는 브랜디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켜더니, 아망다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는 두 손을 두터운 프록코트 옆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씨근거리며 쥘리앵을 노려본 채 당구대로 다가갔다. 쥘리앵은 격노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모욕을 가하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그는 작은 꾸러미를 내려놓고 최대한 건들거리는 태도를 짓고서 당구대 쪽으로 걸어갔다.
'브장송에 도착하자마자 결투를 벌인다면 성직자의 생애도 끝장이다.' 조심성이 마음속에서 이렇게 속삭였으나 소용없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무례한 놈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다.' 아망다는 그의 용기를 보았다. 그 모습은 그의 순진한 태도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프록코트를 입은 커다란 청년보다 쥘리앵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길을 지나가는 어떤 사람을 눈으로 쫓는 듯한 시늉을 지으며 재빨리 쥘리앵과 당구대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 신사를 노려보지 마세요. 그분은 저의 형부예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오? 저 사람이 나를 노려보았는데."
"저를 난처하게 하실 작정이세요? 그분이 당신을 쳐다보았는지도 몰라요. 어쩌면 당신에게 말을 걸러 올지도 모르고요. 저는 그분에게 당신이 제 어머니의 친척이며 장리스 출신이라고 말했어요. 그분도 프랑슈콩테 사람인데, 부르고뉴 가도의 돌르읍 저편까지도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하고 싶은 얘기를 나누세요."
쥘리앵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카운터를 맡아 보는 여자다운 상상력으로 많은 거짓말을 꾸며 대면서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분이 당신을 쳐다본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누구냐고 저한테 물었을 때뿐이죠. 그는 누구에게나 버릇없이 구는 사람이에요. 당신을 모욕하려고 한 것은 아녜요." 쥘리앵의 눈길은 그녀의 형부라고 하는 사내를 뒤쫓고 있었다.
그 사내가 두 당구대 중 먼 쪽의 당구대에서 내기 당구 표 하나를 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쥘리앵은 "내가 한번 해 보지" 하고 위협적인 어조로 외치는 그 사내의 굵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아망다 양의 뒤를 힘차게 지나쳐 당구대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아망다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먼저 제게 셈을 치르세요."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맞는 말이야. 내가 돈을 내지 않고 나갈까 봐 겁나는 모양이군.' 쥘리앵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망다도 쥘리앵만큼이나 동요하고 있었고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녀는 쥘리앵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느릿느릿 잔돈을 내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거듭 말했다.
"즉시 카페를 나가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싫어질 거예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아주 좋아해요."
쥘리앵은 결국 카페를 나왔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서 나왔다. 나 역시 씨근덕거리며 가서 그 상스러운 녀석을 노려보는 것이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는 이런 생각을 거듭했다. 이런 불안감이 카페 앞 거리에 그를 한 시간이나 붙들어 놓았다. 그는 그 작자가 나오는가 하고 눈이 빠져라 쳐다보았다. 그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쥘리앵은 그 자리를 떠났다.
브장송에 온 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는 벌써 한 가지 후회거리를 얻었다. 전에 늙은 군의관은 신경통을 앓고 있었는데도 그에게 검술을 약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그것이 쥘리앵의 분노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기술의 전부였다. 그러나 쥘리앵이 상대방의 따귀를 갈기는 것 외의 방법으로 화풀이를 할 줄 알았더라면 그 곤경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주먹다짐이 벌어졌다면 육중한 몸집의 상대방이 그를 때려눕히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보호자도 없고 돈도 없는 나처럼 가련한 존재에게는 신학교나 감옥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어떤 여관에 내 평상복을 맡겨 놓고 검은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 몇 시간 동안이라도 신학교에서 외출할 일이 생기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멋지게 아망다 양과 재회할 수 있 는 것이다. 쥘리앵은 이렇게 생각했다.
근사한 생각이기는 했다. 그러나 많은 여관 앞을 지 나왔건만, 쥘리앵은 어느 여관에도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침내 대사(大使) 호텔이란 곳 앞을 두 번째로 지나가다가 그의 불안한 눈길이 한 뚱뚱한 여자의 눈길과 마주치게 되었다. 아직 꽤 젊은 편이며 혈색도 좋고 쾌활하고 행복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는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자기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렇게 하세요. 젊은 사제 양반. 내가 당신 평상복을 맡아 두고 때때로 먼지도 털겠어요. 이런 철에는 나사 옷을 손질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좋지 않아요." 대사 호텔 여주인이 말했다. 그녀는 열쇠를 하나 빼 들고 몸소 쥘리앵을 방으로 안내하면서, 맡기는 물건을 메모에 써 놓으라고 일렀다.
"소렐 사제님, 당신은 참 혈색이 좋으시군요." 그가 부엌으로 내려오자 뚱뚱한 여주인이 말했다. "내가 좋은 점심을 차려 드리죠."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누구에게나 50수씩 받지만 당신에게는 20수만 받겠어요. 당신의 작은 주머니를 아껴야 할 테니까요."
"저는 10루이를 갖고 있습니다." 쥘리앵이 약간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쉬잇!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마음씨 좋은 여주인이 놀란 태도로 말했다. "브장송에는 불한당이 아주 많아요. 그런 돈쯤 감쪽같이 털어갈 거예요. 특히 카페에는 들어가지 마세요, 불한당이 들끓으니까요."
"정말 그래요!" 그 말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쥘리앵은 이렇게 대꾸했다.
"내 집에만 오세요. 커피도 끓여 드릴 테니까요. 여기에 오면 언제든 친구 하나와 20수짜리 맛있는 식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러기를 바라요. 자, 식탁으로 오세요. 내가 직접 차려 드릴 테니까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나가면 저는 곧장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거든요." 쥘리앵이 그녀에게 말했다.
마음씨 착한 아주머니는 쥘리앵의 호주머니에 먹을 것을 가득 채워 준 후에야 그를 떠나게 했다. 마침내 쥘리앵은 무서운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주인은 문밖에서 그에게 길을 가르쳐주었다.
<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