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 이동렬 옮김 민음사
83상팀* 짜리 점심 식사가 삼백서른여섯,
38상팀짜리 저녁 식사가 삼백서른여섯,
몇몇 사람에게는 코코아 한 잔씩.
이런 청부로야 벌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 브장송의 발르노 * 상팀은 과거 프랑스 보조 화폐 단위
멀리 문 위에 달린, 금박을 입힌 무쇠 십자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다가섰다.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여기가 바로 지상의 지옥이구나. 나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겠지! 마침내 그는 벨을 울리기로 결심했다. 벨 소리는 인적 없는 장소에서처럼 울려 퍼졌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검은 옷을 입은 창백한 사람이 나타나 그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쥘리앵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이 문지기는 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흘낏 바라보고 나서 쥘리앵이 그 신앙심에 절은 기다란 얼굴에서 추측할 수 있었던 유일한 감정이란, 천국에 관한 것이 아닌 한 모든 얘기에 대한 철저한 경멸이었다. 쥘리앵은 가슴이 두근거려 떨리는 목소리로 신학교 교장인 피라르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한마디 말도 없이 자기를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들은 나무 난간이 달린 널따란 층계를 통해 3층까지 올라갔다. 묘지에 세워 놓는 것과 같이 검은색 칠을 한 커다란 나무 십자가가 달린 작은 문이 가까스로 열렸다. 문지기는 말 한마디 없이 쥘리앵에게 다가오라는 신호를 했다. 사방의 벽은 역시 흰색이었다. 그러나 가구는 없었다. 다만 문 근처 구석에 흰 나무 침대 하나, 짚 의자 두 개, 전나무 판자로 만든 쿠션 없는 작은 안락의자 하나가 쥘리앵의 눈에 얼핏 띄었을 뿐이었다.
피라르 사제와의 첫 만남
방의 반 대편 끝, 더러운 꽃병들이 놓여 있고 노랗게 바랜 창유리를 끼운 작은 창문 곁에, 누더기 같은 수단을 걸친 한 사람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쥘리앵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작고 네모난 종이쪽지 무더기에서 종잇장을 하나씩 집어 들고는 거기에 몇 자씩 적은 다음 책상 위에 늘어놓고 있었다. 글씨를 쓰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두 뺨과 하얀 이마 사이에는 아무리 용감한 자라도 겁에 질리게 할 듯한 작고 까만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고, 넓은 이마 주위에는 칠흑처럼 새까맣고 무성한 머리털이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좀 가까이 다가오지 않겠나?" 이윽고 그 사내가 기다리다 못해 말했다.
쥘리앵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네모난 종이쪽지가 쌓여 있는 작은 나무 책상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이름은?" "쥘리앵 소렐입니다."
"자네는 많이 늦었군." 그는 또다시 무서운 눈길로 쥘리앵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쥘리앵은 그 시선을 견뎌 낼 수가 없었다. 그는 허공으로 손을 뻗치더니, 마룻바닥에 가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쥘리앵이 눈을 뜰 수 있게 되었을 때 붉은 얼굴의 사나이는 계속해서 글씨를 쓰고 있었다.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있겠나?"
"예, 선생님." 쥘리앵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반쯤 일어서서,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린 그의 전나무 책상 서랍에서 성급하게 편지 한 통을 찾았다.
"셀랑 사제가 내게 자네를 추천하셨네. 그분은 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사제고 덕성스러운 분이며 나와는 삼십 년 전부터 친구로 지내고 있지."
"아! 그러면 선생님이 피라르 선생님이시군요." 쥘리앵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신학교 교장은 성난 듯이 그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입가의 근육이 무의식적으로 씰룩거리더니 그의 작은 눈에 한층 더 광채가 돌았다. 먹이를 삼키는 기쁨을 미리 맛보는 호랑이의 표정과도 같았다.
"셀랑 사제의 편지는 짤막해." 그는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인텔리겐티 파우카.*(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요즘 사람들은 짧게 쓸 줄을 모르거든." 그리고 소리 내어 편지를 읽었다.
"약 이십 년 전에 제가 영세를 준 이 본당의 쥘리앵 소렐을 당신에게 천거합니다. 부유한 재목 상인의 아들이지만 부친은 그에게 한 푼도 주지 않습니다. 쥘리앵은 장래 성직에서 훌륭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기억력과 이해력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며 생각도 깊은 편입니다. 그의 천직이 영속적일 것인지? 천직에 성실할 것인지?"
"성실이라!" 피라르 사제는 쥘리앵을 쳐다보며 놀란 표정으로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이제 덜 몰인정스러웠다. 성실이라!" 그는 목소리를 낮춰 다시 반복하더니 계속해서 편지를 읽었다.
"쥘리앵 소렐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주셨으면 하고 청하는 바입니다. 그는 필요한 시험을 거쳐 장학금을 받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신학을 약간 가르친 바 있습니다. 보쉬에, 아르노, 플뢰리 같은 분들의 옛 신학 말입니다. 이 학생이 당신께 적합하지 않으면 돌려보내 주십시오. 당신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빈민 수용소장이 그에게 아이들 가정교사로 연 800프랑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호로 저의 내면은 평안합니다. 그 무서운 타격에도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건강을 빕니다."
"나는 이곳에 가장 성스러운 일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321명의 학생을 데리고 있네." 피라르 사제가 악의 없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중 겨우 일고여덟 명만이 셸랑 사제같이 훌륭한 분에게 추천받았네. 그러나 내 보호는 특별한 대우를 하자는 것이 아니네. 엄격하게 주의를 기울여 악덕으로부터 막아 주자는 것일 뿐이야."
"로퀘리스네 린구암 라티남?"* 그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피라르 사제가 말했다.
"이타, 파테르 옵티메."** 쥘리앵이 제정신을 약간 회복하고 대답했다.
* 자네 라틴어를 할 줄 아는가? ** 네, 존경하는 교부님.
대화는 라틴어로 계속되었다. 사제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쥘리앵은 다소 냉정을 회복했다. 피라르 사제는 쥘리앵의 신학 실력을 시험해 보고 그의 박학함에 놀랐다. 특히 성서에 관해 질문했을 때 피라르 사제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교부들의 교리에 관해 질문이 미치자 그는 쥘리앵이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보나벤투라, 성 바 실리우스 등등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라르 사제는 생각했다. '정말로 이것이 내가 셸랑에게 줄곧 비난했던 그 프로테스탄트적인 치명적 경향이군. 성서만을 깊이, 지나치게 깊이 알고 있단 말이야.' 피라르 사제는 계속 생각에 잠겼다. '성서에 관한 이런 끝없는 이론은 결국 어디로 귀착되는가? 개인적 성찰, 끔찍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이끌리지 않는가? 이런 무분별한 학문에만 열중하며 그런 경향을 보상할 수 있는 교부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다니.'
그러나 교황의 권위에 관해 쥘리앵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을 때 신학교 교장의 놀라움은 끝이 없었다. 옛 프랑스 교회의 몇 가지 준칙 정도를 답변하리라고 기대했는데, 이 젊은이는 드 메스트르 씨의 저서 전부를 암송했던 것이다. 셸랑이란 사람은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것을 조롱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이 청년에게 그 저서를 보여 줬단 말인가? 피라르 사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대담하고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다. 그러나 코르푸스 데빌레.* 교장은 중얼거렸다.
"자주 그렇게 쓰러지나?" 그는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을 가리키며 쥘리앵에게 프랑스어로 물었다.
"난생처음입니다. 문지기 얼굴을 보고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습니다."
쥘리앵은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피라르 사제는 거의 미소를 띤 표정이었다.
* 몸이 허약하군.
"만약 자네가 셸랑 사제 같은 분에게 추천받지 않았다면 나도 자네가 익숙해 있을 세속의 공허한 언어로 얘기할 걸세. 자네가 청원하는 전액 장학금은 세상에서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이라네. 그러나 오십육 년간이나 사도의 노고를 치러온 셸랑 사제 같은 분이 신학교에서 장학금 하나 얻어 줄 수 없다면 그건 말이 안 되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피라르 사제는 자기의 허가 없이는 어떠한 단체나 비밀 수도회에도 가입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말씀에 따를 것을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쥘리앵은 신사의 활달한 감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쥘리앵 소렐을 103호실로 안내해 주시오." 피라르 사제가 문지기에게 말했다.
103호실에 도착해 보니, 그것은 건물 맨 위층에 있는 사방 2.5미터 정도의 작은 방이었다. 쥘리앵은 그 방의 창문이 성벽 쪽으로 나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성벽 너머로는 두강이 시내와 경계를 지어 놓은 아름다운 벌판이 보였다. 그는 창문 곁 의자에 앉아 곧 깊은 잠에 빠졌다. 그는 저녁 식사 종소리도 예배 종소리도 전혀 듣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햇빛이 스며들어 깨어보니, 그는 마룻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는 이 지상에 혼자뿐이다.
나를 생각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아는 출세한 자들은 모두 나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뻔뻔스러움과 냉혹함을 갖춘 자들이다.
나의 무르고 착한 천성 때문에 그들은 나를 미워한다.
아! 머지않아 나는 굶주림 때문에, 아니면 그처럼 냉혹한 인간들을 보아야 하는
슬픔 때문에 죽고 말 것이다.
─ 영
쥘리앵은 서둘러 옷에 솔질을 하고 밑으로 내려갔다. 시간에 늦어 있었다. 조교가 호되게 그를 야단쳤다. 변명을 하는 대신 쥘리앵은 두 팔을 가슴 위에 대고 후회하는 태도로 말했다.
"페카비, 파테르 옵티메"* 이 출발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신학생 가운데 능란한 패들은 이 청년이 자기들의 직업적인 요소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교부님.
며칠 후 쥘리앵은 고해 사제를 한 명 선택해야 했다. 그는 사제들의 명부를 받았다.
'이런! 나를 뭘로 아는 건가?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는가 보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피라르 사제를 선택했다. 첫날부터 그의 친구를 자처하고 나선 베리에르 출신의 나이 어린 신학생 하나가, 부교장인 카스타네드 사제를 택하는 편이 더 신중했을 거라고 그에게 알려 주었다.
"카스타네드 사제는 얀세니스트란 의심을 받고 있는 피라르 사제의 적수거든."
스스로 신중하다고 자부하는 우리 주인공의 처음 행동들은 고해 사제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모두 경솔한 짓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현실로 착각하면서 스스로 완벽한 위선자라고 자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거동에 만족해하면서 쥘리앵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세 명만이 눈에 띄는 재능으로 두드러져 보였는데, 특히 샤젤이란 이름의 청년이 그러했다. 그러나 쥘리앵은 그들과는 서먹함을 느꼈고 그들도 쥘리앵에 대해 그러했다. 나머지는 하루 종일 반복해 외는 라틴어 단어의 뜻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무리였다.
볼테르 이래로 프랑스 교회는 서적이 교회의 진정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교회가 보기에는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나 그레구아르(Henri Grégoire)처럼 탁월한 인간이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누가 막을 것인가! 전전긍긍하는 교회는 유일한 구원의 기회라도 되는 듯이 교황에게 매달린다. 오직 교황만이 개인적 성찰을 마비시키고, 그 궁전의 호화로운 종교 의식으로 세상 사람들의 지치고 병든 정신에 강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그의 눈에는 매우 거짓된 것으로 보이지만 성직자에게는 매우 유용한 여러 가지 지식을 재빨리 배웠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아무런 다른 할 일이 없는 듯이 여겨졌던 것이다. 도대체 나는 이 지상에서 완전히 잊혀졌단 말인가?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피라르 씨가 디종의 소인이 찍힌 편지를 몇 통 받아 불에 던져버린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 젊은이가 사랑한 여인은 다행히 신앙심이 없는 여자는 아닌가 보군.' 피라르 사제는 편지를 보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피라르 사제는 눈물로 반쯤은 지워지다시피 한 편지 한 통을 열었다. 그것은 마지막 고별 편지였다. 그 편지는 쥘리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마침내 하늘은 제게 미워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셨어요. 제게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인 제 잘못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제 잘못 자체를 미워하게 말입니다. 희생은 치러졌어요. 보시다시피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마땅히 의무를 지고 있으며, 또 당신이 그렇게 사랑해 주신 아이들의 구원이 제게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공정하시고 두려우신 하느님도 어미의 죄를 아이들에게 벌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쥘리앵. 모든 사람에게 올바르게 대하세요."
이 편지의 말미는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글씨가 흐려져 있었다. 디종의 주소가 적혀 있었으나 쥘리앵이 답장을 하지 말든지, 답장을 하더라도 덕성을 회복한 부인이 얼굴을 붉히지 않고 들을 수 있는 말을 써 줄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오전, 푸케가 갑자기 그의 방에 나타났다.
"드디어 들어오게 됐군. 나는 자네를 보려고 브장송에 다섯 차례나 왔었다네. 나는 자네가 나오는 걸 알려고 신학교 문간에 파수꾼을 다 세워 놨다네. 도대체 왜 그렇게 외출을 않는 건가?"
"그것도 다 사서 하는 시련인걸 뭐."
"자네 많이 변한 것 같네. 드디어 자네를 보는군. 5프랑짜리 은화 두 닢을 쥐여 주고 나서 내가 여태껏 바보에 불과했다는 것을 막 알게 됐다네. 처음 왔을 때 그걸 집어 주는 건데 말이야."
이야기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다가 푸케가 다음 얘기를 꺼내자 쥘리앵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가르친 애들의 어머니가 굉장한 신앙심에 빠져 있다는 걸 아나?" 푸케는 거리낌 없는 태도로 말했다. 푸케는 부지불식간에 쥘리앵의 가장 소중한 관심을 멋대로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순례라도 떠날 것 같다는 소문이야. 오랫동안 가련한 셸랑 사제를 염탐해 온 마슬롱 사제는 톡톡히 망신당한 셈이지. 드 레날 부인은 그 사람은 상대하려 하지 않고, 디종이나 브장송으로 고해하러 다닌다는 거야."
"부인이 브장송에도 온다고?" 쥘리앵은 얼굴이 빨개져서 물었다.
신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쥘리앵의 행동은 허위의 연속이었다. 그는 세부적인 일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신학교의 능란한 패들은 세부적인 일만을 중요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벌써 '자유사상가' 취급을 받고 있었다. 동료들이 보기에 그는 '권위'와 모범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한다'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쥘리앵은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완전히 새로운 성격을 빚어내려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제 드디어 진짜 적들에 둘러싸여 죽을 때까지 내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는 또다시 생각했다. '순간순간마다 이처럼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헤라클레스의 고역을 무색하게 할 만한 것이다. 현대의 헤라클레스는 식스트 5세라고 할 만하다. 그는 팔팔하고 오만한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았던 마흔 명의 추기경을 십오 년 동안이나 계속 겸손을 가장하여 속여 왔던 것이다.'
쥘리앵은 분통을 터뜨리며 계속 생각했다. 여기서는 학식도 아무 쓸모가 없다! 아아! 나의 유일한 장점은 빠른 학습 진도와 그런 허튼소리들을 기억하는 것에 불과했다. 일단 잘못을 깨닫자, 전에는 죽도록 지루했던 일주일에 다섯 차례씩 하는 묵주 기도라든가 성당에서의 찬송가 등등 금욕적인 신앙의 긴 수련이 쥘리앵에게 더없이 흥미로운 행위의 시간이 되었다.
쥘리앵은 우선 '논 쿨파'(순수한 경지, non culpa)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걸음걸이라든지 팔이나 눈을 움직이는 태도 등이 전혀 세속의 냄새를 풍기지는 않지만, 아직 내세의 관념과 이승의 '순수 허무'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 주지는 않는, 말하자면 젊은 신학도에 어울리는 경지인 것이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노력한 후에도 쥘리앵은 아직 '생각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큰 축제일이면 신학생들의 식탁에는 양배추 절임과 함께 소시지가 나왔다. 쥘리앵의 곁에서 식사하는 학생들은 쥘리앵이 그런 기쁨에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았다. 그것이 그의 으뜸가는 죄악의 하나였다. 동료들은 그것을 가장 어리석은 위선의 가증스러운 특징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저 부르주아 자식을 보라! 저 거만한 자식을 보라! 저 녀석은 양배추 절임과 소시지를 곁들인 최고의 음식을 멸시하는 척하고 있다! 흥, 고약한 놈 같으니! 건방진 자식! 저주받을 놈!
하루는 교리 수업 중에 피라르 사제가 쥘리앵을 불렀다. 쥘리앵은 교장에게서 신학교에 처음 들어오던 날과 같은 무서운 태도를 발견했다.
"이 트럼프 패에 적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봐라." 교장은 집어삼킬 듯이 그를 노려 보면서 말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쥘리앵의 눈에 들어왔다.
"아다 비네, 라 지라프 카페에서, 8시 전에. 장리스 출신이며 내 어머니의 사촌이라고 말할 것.'
피라르 사제의 무서운 눈초리를 견뎌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쥘리앵은 그의 이마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제가 이곳에 들어오던 날, 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밀고와 온갖 종류의 심술궂음이 가득 찬 장소라고 셸랑 사제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동료들 간에 염탐과 밀고가 장려되고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젊은 성직자들에게 인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속세와 그 허영에 대한 혐오를 불어넣기 위해서 하느님도 그것을 원하신다는 것이었죠."
"내게 무슨 말을 꾸며 대려는 거냐, 이 못된 녀석아!" 피라르 사제가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쥘리앵은 냉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브장송에 도착한 날 정오경에 저는 배가 고파서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제 마음은 그처럼 세속적인 곳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곳이 여관보다는 점심 값이 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가게의 여주인인 듯한 부인이 신출내기 같은 제 태도를 보고 동정해 주었습니다. 브장송에는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 당신이 걱정이군요, 하고 그 부인이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면 내게 도움을 청하고 8시 전에 우리 카페로 전갈을 보내세요, 라고 했습니다. 신학교의 문지기들이 심부름을 거절하거든 당신은 내 친척이고 장리스 태생이라고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수다를 조사해서 사실을 밝히겠다." 피라르 사제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방 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외쳤다. "네 방으로 돌아가 있어!" 사제는 쥘리앵을 따라와서 그를 방에 넣고 밖에서 열쇠를 잠갔다. 쥘리앵은 자기 가방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 가방 맨 밑에 바로 문제의 쪽지를 숨겨 두었던 것이다.
내가 눈이 멀어서 지내는 동안, 카스타네드 씨가 친절하게도 내게 번번이 제안했던 외출 허가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이었지. 이제야 그 친절의 이유를 알겠다. 나는 어리석게도 옷을 바꿔 입고 아름다운 아망다를 만나러 갈 뻔하지 않았는가. 그랬으면 파멸이었지. 그런 식으로 정보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그것을 밀고하는 수단을 쓴 것이로군.
두 시간 후에 교장은 그를 다시 불렀다. 교장은 좀 누그러진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진 않았더군. 그러나 이런 주소를 적어 둔다는 것은 경솔한 짓으로, 자네는 그 중대성을 모르고 있네. 하지만 십 년 후에 그것이 자네에게 큰 해를 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야."
오호라!
현대는 언약의 궤이니라.
거기에 손대는 자는 재앙을 입을지니라.
─ 디드로
이때가 쥘리앵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기였다. 브장송에 주둔하는 어느 멋진 연대에 입대하는 것도 그에게는 아주 수월한 일이었으련만! 그는 라틴어 선생이 될 수도 있었다. 그저 구명도생(苟命徒生)이나 해 가는 데에는 무슨 돈이 그리 필요했으랴! 그러나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영광의 길은 없으며 그가 상상하는 미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카스타네드 사제의 종교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올렸다. 그날 카스타네드 사제는 중노동과 부모의 가난으로 잔뜩 겁먹은 젊은 농부들에게, 그처럼 무서워 보이는 정부라는 것도 지상에서 천주의 대행자인 교황의 위임에 의해서만 실제적이고 정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했다.
"경건한 생활과 복종을 통해서 교황의 은총에 합당한 사람이 되시오. 그분의 손안에 든 지팡이처럼 되시오. 그러면 제군은 일체의 통제에서 벗어나 제군이 우두머리로 지배할 훌륭한 자리를 얻을 것이오. 봉급의 3분의 1은 정부가 지급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제군의 포교로 모인 신자들이 지급하는 종신의 자리 말이오."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카스타네드 씨는 교정에서 발을 멈추고, 자기를 빙 둘러싼 학생들에게 말했다.
"지위의 가치도 사람의 가치 나름이라는 얘기는 바로 사제를 두고 일컫는 것이지. 자네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나는 사제의 부수입이 여러 도시보다도 좋은 산골의 교구를 여럿 알고 있다네. 신자들이 바치는 거세한 수탉이며 달걀이며 신선한 버터며 수많은 자질구레한 선물을 계산에 넣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의 현금 수입이 있다는 거야. 거기서는 사제가 이론의 여지없이 제일인자란 말이야. 사제가 초대받지 않는 연회란 있을 수 없지."
다른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신학생들도 특별한 효력을 발휘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런 왜소한 출세 수단의 결과를 과장하는 것이었다. 피라르 사제가 듣지 않는 것이 확실할 때면 그들은 목소리를 낮추어서, 교황이 프랑스의 모든 지사와 시장을 직접 임명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 것은, 프랑스의 국왕을 교회의 맏아들로 지명함으로써 교황이 그에게 그런 일을 위임했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쥘리앵은 바로 그런 때야말로 드 메스트르 씨의 『교황론』을 이용하여 자신을 인식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재난이었다. 그는 동료들의 의견을 그들 자신보다 잘 설명함으로써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모든 훌륭한 논법이란 사람들의 기분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쥘리앵의 뛰어난 화술은 그에게 또 하나의 죄가 되었다. 쥘리앵에 대해 생각을 거듭한 끝에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마르틴 루터'라는 별명을 붙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감동해 있었다.
사방에 휘장이 쳐 있고 신자들이 정성껏 모래를 깔아놓은
고딕식 건물이 늘어선 좁다란 거리거리에 하느님이
강림하신 듯이 보였다.
- 영
쥘리앵이 자신을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자로 보이게 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허사로, 그들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그는 그들과는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선생들은 모두 수많은 사람 중에서 뽑힌 총명한 사람들인데 어찌 나의 겸손을 좋아하지 않을까? 단 한 사람만이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에 속아 넘어갈 만큼 사람이 좋아 보였다.
그는 성당의 의식을 주재하는 샤 베르나르 사제로 십오 년 전부터 성당의 참사원 자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참사원 자리를 기다리면서 그는 신학교에서 설교술을 가르쳤다. 신학교 분위기에 아직 눈을 뜨기 전에 쥘리앵은 그 강의에서 줄곧 일등을 차지하곤 했다. 그런 연유로 샤 사제는 쥘리앵에게 호감을 보였고, 강의가 끝나면 즐겨 그의 팔을 잡고 정원을 몇 바퀴 돌곤 했다. 그때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가? ' 쥘리앵은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는 샤 사제가 몇 시간 동안이나 성당이 소유하고 있는 장식물 얘기를 늘어놓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에는 장례용 장식물 이외에도 장식 줄이 붙은 제복이 열일곱 벌이나 있다는 것이었다. 또 뤼방프레 노부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이가 아흔 살이나 된 그 부인은 칠십여 년 전부터 금으로 수놓은 뛰어난 리옹제 옷감으로 지은 혼례복을 간직해 왔다. 샤 사제는 발걸음을 딱 멈추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이보게, 그 옷감에는 금사(金絲)가 하도 많이 들어 있어서 세워 놓으면 똑바로 서 있는다는 걸 좀 생각해 보게. 브장송에서는 노부인의 유언으로 성당의 보물이, 대축제용 장포 제의료 대여섯 벌 말고도 상제의가 열 벌 이상 늘어날 것으로 믿고들 있다네. 그뿐만이 아닐세. 나는 부인이 도금한 멋진 은 촛대 여덟 개를 우리에게 남겨줄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 촛대들은 부르고뉴 공인 대담공 샤를이 이탈리아에서 사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뤼방프레 부인의 선조 한 분이 그의 총신이었지."
어느 날 저녁 무술 시간 도중에 쥘리앵은 피라르 사제 방에 불려 갔다. 교장은 쥘리앵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일이 성체 축일일세. 샤 베르나르 사제님이 성당을 장식하는 데 가서 시키는 대로 하게."
피라르 사제는 그를 다시 불러 세우더니 동정 어린 태도로 부연했다.
"이 기회를 타서 시내를 돌아다니든지 말든지는 군이 잘 알아서 하게."
"인케도 페르 이그네스."* 쥘리앵이 대답했다.
* 제게는 숨은 적들이 있습니다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쥘리앵은 눈을 내리깔고 성당으로 갔다. 자신의 소중한 성당 문간에 나와 있는 샤 베르나르 사제가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뚱뚱한 사제는 명랑하고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날 그는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쥘리앵이 눈에 띄자 그는 멀리서부터 소리쳤다.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잘 왔네. 오늘 일은 오래 걸리고 힘들 거야. 뭘 좀 먹고 기운을 차려 두세."
일이 힘들 것이라는 샤 사제의 말은 사실 그대로였다. 전날 성당에 큰 장례식이 있어서 아무것도 준비해 놓을 수가 없었다. 오전 중으로 세 개의 신자석을 이루는 고딕식 기둥을 모두 9미터 높이까지 붉은 천으로 감아올려야 하는 것이었다. 주교는 파리에서 우편 마차 편으로 네 명의 융단업자를 불러왔지만 그들만으로는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쥘리앵은 브장송의 융단 업자들을 지휘하는 일을 맡았다. 샤 사제는 사다리에서 사다리로 나는 듯 뛰어다니는 쥘리앵의 모습을 넋을 잃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주 제단 위 천개에 다섯 개의 거대한 깃털 다발을 다는 것이 문제였다. 감실 위의 천개 중심부까지 다다르기 위해서는 12미터나 높이의 낡은 목제 코니스 위를 걸어가야 했다. 그렇게도 부산스럽던 파리 융단업자들도 논쟁만 벌였지, 올라가지를 않았다. 쥘리앵이 깃털 다발을 집어 들고 사다리를 성큼성큼 올라가 화관 모양 장식 위에 깃털 다발을 맵시 있게 꽂아놓았다. 그가 사다리에서 내려오자 사제는 그를 얼싸안았다.
"옵티메,*(멋지다) 주교 각하께 이걸 말씀드리겠어." 착한 사제가 외쳤다.
대미사의 삼성창이 울리자 쥘리앵은 주교를 뒤쫓아 장엄한 행렬을 따라가려고 중백의를 입으려 했다.
"이 사람아, 도둑을 지켜야지, 도둑을! 그 생각을 못 하고 있군." 샤 사제가 외쳤다.
"행렬이 곧 떠나면 성당은 텅 빌 걸세. 자네와 내가 지켜야 하네. 기둥 밑을 감은 저 아름다운 장식 줄을 한 치라도 잃게 되면 참말로 큰일이지. 그것도 드 뤼방프레 부인의 선물이라네. 부인의 증조부인 유명한 백작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 이보게, 저건 순금이야." 사제는 분명히 흥분한 태도로 쥘리앵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제가 말을 마치자 11시 45분이 되었다. 곧 성당의 종소리가 들렸다. 종소리는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힘차고 장엄한 종소리에 쥘리앵은 감동하였다. 그의 상상력은 이제 지상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향 냄새와, 성 요한으로 분장한 어린이들이 성체 안치대 앞에 뿌리는 장미 꽃잎 냄새가 쥘리앵을 결정적으로 흥분에 빠져 들게 했다. 그 장엄한 종소리는 50상팀의 임금을 받는 스무 명의 일꾼이 열대여섯 명 정도의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노동이란 생각을 쥘리앵에게 불러일으켰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한 날씨에 유지들이 앞 다투어 설치한 화려한 휴게소에서 쉬어 가면서 행렬이 브장송 시내를 천천히 돌아다니는 동안, 성당은 깊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고요와 깊은 적막과 긴 홀의 시원함이 쥘리앵의 몽상을 더욱 감미롭게 해 주었다. 건물의 다른 편을 지키는 샤 사제에게 몽상을 방해당할 염려는 조금도 없었다. 자기에게 감시를 맡긴 북쪽 측면을 천천히 거닐고 있는 육체로부터 그의 마음은 거의 유리되어 있었다. 고해실에는 신앙심 깊은 몇몇 여신도만이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더욱더 평온한 심정이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훌륭한 옷차림을 한 두 여인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는 방심 상태에서 반쯤 깨어났다. 한 여인은 고해실에, 다른 여인은 바로 옆의 의자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막연한 의무감에서였든지 아니면 고상하면서도 단순한 그 부인들의 차림새에 이끌려서였든지 간에, 그는 그 고해실 안에 사제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두 여인을 자세히 보려고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이 깊은 정적 속에서 울리는 쥘리앵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고해실에 꿇어앉아 있던 여인이 고개를 약간 돌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작게 비명을 지르고 정신을 잃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그 부인은 기운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곁에 있던 그녀의 친구가 부축하려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쥘리앵은 뒤로 넘어진 부인의 어깨를 보았다. 그에게는 친숙한 드 레날 부인의 머리 칼을 알아보았을 때의 그의 놀라움이라니! 바로 드 레날 부인이었다.
부인의 머리를 떠받쳐서 완전히 쓰러지지 않게 한 부인은 데르빌르 부인이었다. 쥘리앵은 허겁지겁 내달았다. 쥘리앵이 두 여인을 떠받치지 않았다면 드 레날 부인이 넘어지는 바람에 그녀의 친구까지 쓰러질 뻔했다. 창백한 드 레날 부인의 얼굴은 완전히 무표정한 채로 어깨 위에 축 늘어졌다. 쥘리앵은 데르빌르 부인을 거들어 그 매력적인 얼굴을 짚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놓았다. 그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있었다.
데르빌르 부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알아보았다.
"저리 가세요. 비키세요!" 데르빌르 부인은 격노한 어조로 말했다. "특히 이 사람이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하게 하세요. 당신을 보면 정말로 몸서리가 쳐질 거예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도 행복했던 사람이! 당신 행동은 끔찍해요. 저리 가세요. 염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멀리 피하세요."
데르빌르 부인이 너무도 단호하게 말했으며 또 그 순간에 마음이 몹시 약해져 있었으므로 그는 자리를 피했다. 저 여자는 항상 나를 미워했지. 쥘리앵은 데르빌르 부인을 생각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행렬의 맨 앞에 선 사제들이 콧소리로 흥얼거리는 찬송가 소리가 성당 안에 울렸다. 행렬이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샤 베르나르 사제가 몇 번이나 쥘리앵을 불렀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이윽고 사제는 기둥 뒤에서 넋 나간 사람처럼 숨어 있는 쥘리앵을 발견하고 그의 팔을 잡았다. 사제는 그를 주교에게 소개하려고 했다.
"자네 몸이 좋질 않구먼. 과로한 거야." 얼굴이 핼쑥한 데다 거의 걸음을 옮길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쥘리앵을 보고 사제는 그를 주교에게 소개하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게. 내가 또 기회를 찾아낼 테니까." 사제가 쥘리앵에게 말했다.
그는 자기 시대를 알았고
자기 지방을 알아서
이제 부자가 되었다.
─ 『선구자』
성당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쥘리앵이 아직도 깊은 몽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엄격한 피라르 사제가 그를 불렀다.
"샤 베르나르 사제님이 내게 자네를 칭찬하는 편지를 쓰셨더군. 자네는 여태껏 마음 쓰는 것이 착하고 관대하기도 했네. 머리는 뛰어난 편이었고. 요컨대 자네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섬광과 같은 재질이 보이네. 나는 십오 년간이나 일해 온 이 학교를 곧 떠날 듯한 전망이네. 떠나기 전에 자네를 위해 뭔가 해 주고 싶네. 자네 방에서 발견된 아다 비네의 주소에 근거한 밀고만 없었던들 나는 두 달 전에 이 일을 했을 것이네. 자네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자네를 「신약」과 「구약」의 복습 교사로 임명하네."
쥘리앵은 감사하는 마음에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천주께 감사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좀 더 진실한 충동에 이끌렸다. 그는 피라르 사제에게 다가가 사제의 손을 잡고 자기 입술을 갖다 댔다.
"이게 무슨 짓인가?" 교장은 화난 태도로 소리쳤다.
하지만 쥘리앵의 눈은 그의 행동 이상의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피라르 사제는 오래전부터 섬세한 감정과는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처럼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쥘리앵에게 기울인 주의가 교장의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는 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나는 네게 애착을 느꼈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임을 하느님도 아시겠지. 나는 공정해야 하며 누구한테도 애증의 감정을 지녀서는 안 되는 것인데. 네 일생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너에게는 천박한 인간의 기분을 거스르는 무언가가 있는 듯해. 시기와 중상이 너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한 가지 치유책밖에 없어, 천주님께만 의지하도록. 천주 님은 네 자부심을 벌하시기 위해서 미움받을 필요성을 네게 주신 거야. 행동이 순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만이 네게 주어진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야. 불굴의 정신으로 진실에만 매달린다면 머지않아 너의 적들도 당황하게 될 거야."
쥘리앵이 다정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너무나 오래간만이라서 마음이 여려진 것도 당연했다. 그는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피라르 사제는 팔을 펼쳐 그를 끌어안았다. 이 순간은 그들 둘 모두에게 감미로운 순간이었다.
쥘리앵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이 승진은 그가 얻은 최초의 것이었다.
이제 쥘리앵은 다른 신학생들보다 한 시간 늦게 거의 혼자서 식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정원의 열쇠 하나를 가지게 되어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정원을 산책할 수 있었다. 참으로 놀랍게도 쥘리앵은 자기가 전보다 미움을 덜 받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증오심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특히 그에게 배우게 된 나이 어린 학우들이 그랬는데, 쥘리앵은 그들을 대단히 정중하게 대해 주었다. 점차 그는 자신의 옹호자들도 얻게 되었다.
마침 사냥철이었다. 푸케는 쥘리앵의 친척이 보내는 듯이 해서 사슴 한 마리와 멧돼지 한 마리를 신학교에 보낼 생각을 했다. 죽은 짐승들은 부엌과 식당 사이의 통로에 놓여 있었다.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신학생들은 거기에서 모두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완전히 죽은 것인데도 나이 어린 신학생들은 멧돼지에 겁을 냈다. 그들은 멧돼지의 어금니를 만져 보기도 했다. 일주일 동안은 온통 그 얘기뿐이었다.
신학교의 정원을 혼자 산책하다가 쥘리앵은 담장을 수리하는 미장이들이 주고받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그런데 나도 나가야 할 판이야. 또 징집이 있다니까."
"그 사람 시대가 좋았지! 미장이가 장교도 되고 장군도 되었으니까. 우리가 보았지 않나."
"한번 나가 보시지! 지금 군대에 가는 건 비렁뱅이뿐이라니까. 돈푼이나 있는 놈은 집에 처박히고."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세 번째 미장이가 물었다.
"그따위 소문을 퍼뜨리는 건 부자 놈들이라구! 부자들은 그 사람을 무서워하잖아."
"세상 많이 달라졌어, 그 시대엔 만사가 잘되어 나갔는데! 그 사람 장군들이 배반했다면서! 들고일어나야 해!"
이런 대화를 듣고 쥘리앵은 얼마간 위안을 받았다. 그 자리를 떠나면서는 한숨을 내쉬며 되었다.
민중이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왕이여!
시험 때가 다가왔다. 쥘리앵은 시험관에게 뛰어나게 답변했다. 샤젤까지도 자신의 모든 실력을 발휘하느라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역연했다. 시험 첫날 유명한 프릴레르 부주교가 임명한 시험관들은, 피라르 사제의 애제자로 알려진 쥘리앵 소렐이 맡아 놓고 일등 아니면 적어도 이등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난처해졌다. 신학교에서는 쥘리앵이 전체 성적 1위를 차지하리라는 것이 내기에 걸려 있었다. 일등을 하면 주교 각하와 식사를 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부들에 관한 시험이 끝나 갈 무렵 능란한 시험관 하나가 쥘리앵에게 호라티우스와 베르길리우스와 다른 세속적인 작가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넋을 잃고서 어떤 장소에 서 있는지도 망각하고, 시험관의 거듭되는 질문에 따라 호라티우스의 오드 여러 편을 암송하면서 열성적으로 설명을 곁들였다. 이십여 분 동안이나 낚싯밥에 걸려들게 내버려 둔 다음 시험관은 갑자기 안면을 바꾸고서, 그런 세속적인 공부에 시간을 낭비해서 무용하고 범죄적인 생각을 머릿속에 채워 넣었다고 쥘리앵을 호되게 나무랐다.
아무리 신학교라고 해도 시험관의 이런 술책은 더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드 프릴레르 사제는 그 강력한 손으로 쥘리앵의 이름 옆에 198등이란 숫자를 적어 넣었다. 이 능란한 인물은 브장송에 수도회 망을 교묘하게 조직해 놓고 있어서, 그가 파리로 띄우는 우편물은 판사며 지사며 수비대 장성들까지 벌벌 떨게 만드는 판이었다. 그는 쥘리앵의 성적을 떨어뜨려 그의 적인 얀세니스트 피라르를 괴롭히는 것을 기뻐했다. 십 년 전부터 그는 피라르 사제에게서 신학교 교장 직을 뺏는 것을 자신의 큰 사명으로 여겨왔다.
피라르 사제는, 성실하고 경건하고 술책을 부리지 않으며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모욕과 증오를 받으면 그것을 가슴 깊이 느끼는 까다로운 기질을 그에게 부여함으로써 하늘은 노여움을 표시한 모양이었다. 그는 시험의 결과를 알리는 공식 통지서를 받고서 자기가 신학교의 영예로 생각하는 제자의 이름 옆에 198이란 숫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보자 일주일 동안이나 앓아누웠다. 그는 쥘리앵이 분노도 복수의 계획도 낙심도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몹시 기뻐했다.
500프랑이 든 편지
몇 주일 후 쥘리앵은 편지 한 통을 받고 소스라쳐 놀랐다. 그 편지에는 파리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마침내 드 레날 부인이 약속을 기억해 낸 모양이구나. 쥘리앵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의 친척을 자처하는, 폴 소렐이라고 서명한 사람이 그에게 500프랑짜리 환어음을 보 내왔던 것이다. 만약 쥘리앵이 훌륭한 라틴 작가들을 계속해서 성과 있게 공부한다면, 같은 액수를 매년 그에게 송금해 주겠다고 덧붙이고 있었다.
레날 부인이야, 그분의 호의지! 부인이 나를 위로해 주려는 거야. 그런데 왜 다정한 말이 한마디도 없을까? 그는 이 편지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친구인 데르빌르 부인에게 조종받는 드 레날 부인은 깊은 회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자신의 생활이 뒤엎어진, 그 야릇한 사람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주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그에게 편지 쓰는 것은 삼가고 있었다.
신학교식 언어로 얘기한다면 우리는 이 500프랑의 송금에서 하나의 기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드 프릴레르 씨 바로 그 사람을 이용하여 쥘리앵에게 그런 선물을 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십이 년 전에 드 프릴레르 사제는 아주 조그만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 브장송에 도착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그 가방 속에 그의 전 재산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현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주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번창해 가는 도중에 그는 어떤 토지의 반을 샀는데, 그 토지의 나머지 반은 상속 재산으로 드 라 몰 씨에게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그 두 인물 사이에 일대 소송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파리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궁정에 세력 있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데도, 드 라 몰 후작은 지사의 임면권을 좌지우지한다는 부주교에 대항하여 브장송에서 싸우는 것이 위험한 일임을 느꼈다. 드 프릴레르 사제는 1심 판결에서 승소한 일주일 후 몸소 주교 예하의 사륜마차를 타고서 자기 변호사에게 레지옹 도 뇌르 훈장을 가져다주었다. 상대편의 대담한 태도에 약간 어안이 벙벙해진 드 라 몰 씨는 자기 변호사들의 사기를 죽일까 봐 염려되어 셀랑 사제에게 충고를 부탁했다. 그러자 셸랑 사제는 그에게 피라르 씨를 소개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우리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이 시기까지 여러 해 계속되어 오고 있었다. 피라르 사제는 이 사건에 자신의 열정적인 성격을 쏟아부어 관여했다. 후작의 변호사들과 끊임없이 만나며 소송건을 연구한 끝에 후작의 입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전능한 부주교에 맞서 공공연히 드 라 몰 후작의 옹호자가 되었다. 부주교는 보잘것없는 얀세니스트의 그와 같은 불손함에 몹시 화를 냈다.
드 프릴레르 사제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늘어놓곤 했다.
"그렇게 권세가 좋다는 그 궁정 귀족의 꼬락서니를 좀 보시오! 드라 몰 씨는 브장송의 제 심부름꾼에게 보잘것없는 훈장 하나 보내 주지 못했을뿐더러, 그자를 보기 좋게 쫓겨나게 만들 거요. 그런데도 그 귀족원 의원 나리는 한 주일도 거르지 않고 법무 대신의 살롱에 출입하며 자기의 청색 훈장을 과시한다는 소문이니."
피라르 사제의 정력적인 활동이 있었으며 드라 몰 씨가 여전히 법무 대신 및 법무성 관료들과 친밀한 사이였는데도, 육 년간이나 애쓴 끝에 그가 해낼 수 있었던 일은 고작 소송에서 완전히 패하지 않은 정도였다. 둘이 함께 정열적으로 관여해 온 사건으로 말미암아 피라르 사제와 줄곧 서신 왕래를 갖게 된 후작은 마침내 사제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사회적 지위의 현격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서신은 점차 친밀한 어조를 띠어 갔다.
피라르 사제는 갖가지 모욕을 당한 나머지 마침내 자신이 사직하지 않을 수 없노라고 후작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쥘리앵을 대상으로 한 치사한 술책에 격분한 사제는 그 얘기도 후작에게 써 보냈던 것이다. 후작은 피라르 사제에게 소송 사건의 비용을 보상하려 했지만 사제는 우편 요금의 환불조차 받으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후작은 사제의 애제자에게 500프랑을 송금해 줄 생각을 해냈던 것이다. 드 라 몰 씨는 손수 그 송금의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쓰노라니 사제 생각이 떠올랐다.
어느 날 피라르 사제는 작은 쪽지 한 장을 받았다. 그 쪽지에는 급한 일로 만나고자 하니, 브장송 교외의 한 여관으로 지체 없이 들러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는 짤막한 것이었다.
"시골의 온갖 번잡함을 버리시고 파리로 오셔서 평온한 바람을 쐬시기를 앙망합니다. 제 마차를 보내 드립니다. 마차는 사제님께서 결정하실 때까지 나흘 동안 기다리라고 지시해 두었습니다. 저는 오는 화요일까지 파리에서 사제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사제님을 위해 파리 근교의 한 좋은 사제구를 준비해 두었사오니, 부디 응낙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제님을 뵌 적은 없으나, 미래의 사제님의 교구민 중 가장 부유하며 또한 사제님을 흠모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드 라 몰 후작인 저 자신입니다."
그는 사흘 후로 드 라 몰씨의 집사와 약속 날짜를 정하고, 사십팔 시간 동안 그는 주저와 망설임에 시달렸다. 그러나 마침내 드 라 몰 씨에게 편지를 쓰고 주교 예하께 보내는 편지도 한 통 작성했다. 그것은 성직자의 문체로 쓰인 걸작이라 할 만한 것으로 약간 긴 편지였다. 이 편지는 온갖 중대한 문제에 관한 불평을 열거했을뿐더러, 육 년 동안이나 인종하며 견뎌 온 끝에 피라르 사제로 하여금 교구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자질구레하고 추악한 박해들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이 편지를 다 쓰자 그는 다른 신학생들처럼 저녁 8시부터 벌써 잠자리에 들어 있는 쥘리앵을 깨웠다.
"자네, 주교관이 어디 있는지 알지?" 피라르 사제가 완벽한 라틴어로 쥘리앵에게 말했다.
"이 편지를 주교 예하께 갖다 드리게. 나는 자네를 이리 떼 속으로 보낸다는 것을 숨김없이 말해 두겠네.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자네를 심문하는 자는 아마도 자네를 해칠 수 있다면 정말로 기뻐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 두게. 자네와 헤어지기 전에 이런 경험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네. 사실은 자네가 들고 가는 이 편지는 내 사임서니까."
쥘리앵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이 정직한 분이 떠나고 나면 성심회파는 내 지위를 박탈하고 나를 내쫓을지도 모른다. 신중함이 이런 생각을 해내도 아무 소용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를 당황하게 한 것은, 공손하게 한마디 말씀드리고 싶은데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학교를 관리하시고도 조금도 여축이 없으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제게 600프랑이 있습니다만……."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고마운 말이네만," 전 교장은 냉담하게 말했다. "주교관으로 가게, 시간이 늦었어."
주교와의 만남
우연히도 그날 저녁 주교관 응접실의 당직은 드 프릴레르 사제였다. 주교는 지사 관저에서 만찬을 드시는 중이었다. 그래서 쥘리앵이 편지를 건넨 사람은 바로 드 프릴레르 사제였지만,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쥘리앵은 주교 앞으로 된 편지를 그 사제가 감히 뜯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주교의 잘생긴 얼굴에는 강한 기쁨과 함께 놀라움의 표정이 떠오르더니, 더욱더 엄숙해졌다.
그때 갑자기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화려한 복장을 한 하인이 재빨리 지나갔다. 쥘리앵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주교의 십자가를 가슴에 단 자그마한 노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몸을 엎드려 경의를 표했다. 주교는 그에게 마음씨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지나갔다. 미남 사제가 주교를 뒤따라갔다. 쥘리앵은 응접실에 혼자 남아 그곳의 경건한 장엄함을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었다.
"영리한 눈초리를 한 그 신학생이 누구지? 지나올 때 본 것 같은데." 주교가 말했다. "내 규칙에 따라 신학생들은 이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 학생은 중대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예하의 교구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얀세니스트가 사직원을 냈습니다. 그 무서운 피라르 사제가 드디어 처지를 깨달은 것이지요."
주교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래! 하지만 그만한 후임자를 구하기는 어려울걸. 자네에게 그 사람의 가치를 보여 주기 위해 내일 저녁 식사엔 그를 초대해야겠어."
"그리고 후임자를 들이기 전에 현직자가 어떻게 떠나는지를 좀 알아보기로 하세. 그 신학생을 불러 주게. 진실은 어린아이의 말 속에 있게 마련이니까." 쥘리앵은 주교에게 불려 갔다. 주교는 피라르 씨 얘기를 하기 전에 쥘리앵의 학업에 관해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교는 교리에 관해 문답을 좀 해 보고는 매우 놀랐다. 뒤이어 그는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키케로 등 고전 문학에 관한 얘기를 꺼냈는데, 그 자신이 뛰어난 고전 연구가인 주교는 쥘리앵의 답변에 몹시 기뻐했다. 마침내 주교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보다 훌륭히 공부하기는 어려울 걸세." 그러자 쥘리앵이 말했다.
"예하, 예하의 신학교에는 저 이상으로 예하의 칭찬을 들을 만한 학생이 197명이나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연유인고?" 그 숫자에 놀란 주교가 말했다.
"예하께 말씀드리는 것은 공식적인 증거에 의한 것입니다. 신학교의 학년말 시험에서, 지금 예하의 칭찬을 받은 동일한 주제에 관해 정확히 대답했다고 해서 저는 198등을 했습니다.
"아아! 피라르 사제의 애제자가 자네였군." 주교는 드 프릴레르 사제를 쳐다보면서 웃으며 소리쳤다.
"이보게, 자네를 이리 보내려고 깨우더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예하. 제가 신학교에서 혼자 외출해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성체 축일 날 샤 베르나르 사제님을 도와 성당 장식을 하러 갈 때였습니다."
"옵티메." 주교가 말했다. "천개 위에 깃털 다발을 다느라고 그처럼 용기를 발휘한 것이 자네였단 말이지?"
그날 밤에 점점 기분이 좋아진 주교는 잠시 교회사 얘기를 꺼냈는데, 그는 쥘리앵이 쥘리앵이 타키투스에 관해서는 이름조차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작가의 책은 신학교 도서관에는 없었다고 쥘리앵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주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교는 쾌활하게 말했다.
"마침 아주 잘됐네. 뜻하지 않게 즐거운 저녁 시간을 마련해 준 군에게 고마움을 표할 방법이 없나 하고 궁리하고 있었는데, 이런 선물이 종규에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자네에게 타키투스 저서 한 질을 주고 싶네."
주교는 화려한 장정이 된 책 여덟 권을 가져오게 하더니, 첫째 권 제목 밑에 손수 라틴어로 쥘리앵 소렐에게 주는 헌사를 썼다. 주교는 자신의 뛰어난 라틴어 지식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때까지의 대화와는 판이하게 엄숙한 어조로 쥘리앵에게 말했다.
"이보게, 앞으로 군이 분별 있게 처신한다면, 군은 주교관에서 400킬로미터 내에 있는 내 교구 중 최상의 주임 사제 직을 얻게 될 것이네. 하지만 분별 있게 처신해야 하네."
12시가 울리자 쥘리앵은 깜짝 놀라 책을 들고 주교관을 나왔다. 주교 예하는 피라르 사제에 관해서는 쥘리앵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쥘리앵은 주교처럼 자연스러운 위엄과 세련된 태도가 조화된 모습은 상상도 못 했다. 쥘리앵은 초조하게 자기를 기다리는 침울한 피라르 사제를 보고는 두 사람의 대조에 몹시 놀랐다.
"퀴드 티비 디크세룬트? 멀리서 쥘리앵이 눈에 띄자마자 사제는 큰 소리로 외쳤다.
* 그들이 자네에게 뭐라고 말하던가?
쥘리앵이 라틴어로 번역하느라고 약간 머뭇거리자, 신학교의 전 교장은 엄숙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프랑스어로 말하게. 주교의 말씀을 조금도 덧붙이거나 빼지 말고 그대로 옮겨 보란 말이야."
그러고는 금박을 칠한 책의 단면이 질색인 듯이 호화판 타키투스 저작의 책장을 넘기면서 중얼거렸다.
"주교가 젊은 신학생에게 참 이상한 선물을 하는군!"
아주 상세한 보고를 들은 다음 사제가 자기 애제자에게 방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을 때 시계는 2시를 쳤다.
"주교 예하의 헌사가 적힌 타키투스 저작의 첫 권은 여기 놔두고 가게. 그 라틴어 헌사는 내가 떠난 다음 이 학교에서 자네의 피뢰침 역할을 해 줄 걸세. 에리트 티비, 필리 미, 수케소르 메우스 탄쿠암 레오 퀘렌스 데보레트."*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 내 후임자는 자네를 잡아먹으려고 드는 성난 사자와도 같을 테니까.
다음 날 아침 쥘리앵은 동료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태도에서 어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더욱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피라르 사제가 사직한 결과가 벌써 나타나는구나. 그분의 사직은 학교 전체가 알고 있을 테고 나는 그분의 애제자로 통하고 있으니, 그들의 태도에는 모욕이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모욕이나 증오심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영문인가? 아마도 함정이겠지. 조심스럽게 행동하자.
이윽고 베리에르 출신의 어린 신학생이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코르넬리 타키티 오페라 옴니아."*(타키투스 전집) 이 말을 듣자 저마다 앞 다투어 쥘리앵이 주교 예하로부터 받은 훌륭한 선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주교 예하와 두 시간 동안이나 대화를 나눈 영광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들은 세부적인 일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쥘리앵에게 비굴하게 아첨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쥘리앵에게 거만하기 짝이 없던 카스타네드 사제는 그의 팔을 잡고 그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피라르 사제는 브장송에서 제일 훌륭한 여관에 유숙하면서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거기서 이틀을 보냈다. 주교는 그를 만찬에 초대하고, 드 프릴레르 부주교를 놀려 주려는 심산으로 그를 높이 치켜세웠다. 식후 디저트 시간에, 피라르 사제가 수도에서 16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훌륭한 N 교구에 주임 사제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파리로부터 전해졌다. 주교는 이 모든 일에서 멋진 플레이를 보고, 기쁜 마음으로 피라르 사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그는 참견하려 드는 드 프릴레르 사제에게는 입을 다물게 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거리에서 피라르 사제를 줄줄 따라다니다시피 했다. 그가 후작의 소송 사건을 맡은 판사들을 만나러 갈 때 상인들은 자기 가게 문간까지 나와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상인들에게 정중한 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눈에 띄는 모든 것에 분노를 느낀 엄격한 얀세니스트는 드 라 몰 후작을 위해 자기가 선정한 변호사들과 장시간에 걸쳐 깊이 의논한 후 파리를 향해 출발했다.
남아 있는 유일한 귀족은 '공작' 칭호뿐이다.
후작도 우스꽝스러운 것이며, '공작'이란 말에
비로소 고개가 돌려진다.
─ 『에딘버러 평론」
드 라 몰 후작은 외견상 극히 예절 바르되 알 만한 사람에게는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 대영주의 거드름 피우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피라르 사제를 맞았다. 후작은 여러 해 전부터 브장송의 자기 변호사에게 프랑슈콩테 지방의 소송건에 관해 명료하고도 정확한 작업을 요구해 왔으나 허사였다. 유명한 변호사라고 한들 자기 자신이 소송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후작에게 설명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사제가 후작에게 넘겨준 조그만 종이쪽지는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채 오 분도 안 되어 인사치레며 신상 질문을 모두 끝마쳐 버리고, 후작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제님, 저는 사제님을 존경합니다. 오늘 처음으로 뵈었지만 저는 사제님이 좋습니다. 제 비서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봉급으로는 8000프랑, 아니 그 두 배라도 좋겠습니다만. 틀림없이 제겐 그 이상 이득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일할 필요가 없게 되는 날을 위해, 저는 사제님의 훌륭한 교구를 사제님을 위해 간직해 두도록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사제는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후작이 정말로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는 제 신학교 구석에 가련한 청년 하나를 놔두고 왔습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 청년은 거기서 심한 박해를 당할 것입니다. 그가 단순한 수도사라면 그는 벌써 수도원 감옥에 감금되었을 것입니다. 그 청년은 아직은 라틴어와 성서밖에 모릅니다만, 언젠가는 설교라든지 인간 영혼의 인도에 있어 위대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후작님처럼 사람과 일을 보는 안목을 지닌 분을 만나게 되면 그를 우리 주교님께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어디 출신입니까?" 후작이 물었다.
"저희 산간 지방의 목수 아들이라고들 하는데, 제 생각으로는 어떤 부유한 사람의 사생아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500프랑의 환어음이 든 익명 혹은 가명의 편지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을 시험 삼아 비서로 써 보시는 것이 어떨지요? 그는 활력도 있고 분별도 있습니다. 한번 시도해 보실 만한 일입니다."
"기꺼이 해보지요." 후작이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경찰 국장이나 또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 뇌물을 받고 내 집에서 염탐꾼 노릇을 할 그런 사람은 아닌지요? 그것이 나로서는 제일 마음에 걸리는 점입니다."
피라르 사제의 호의적인 보증을 듣자, 후작은 1000프랑짜리 수표를 한 장 내놓으면서 말했다.
"이것을 쥘리앵 소렐에게 노자로 쓰라고 부쳐 주시고, 그를 제게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피라르 사제가 말했다.
"과연 후작님께서 파리에 살고 계신 것을 알 만합니다. 저희 가련한 시골 사람들, 특히 예수회파와 한 편이 아닌 성직자들에게 어떤 압제가 행해지고 있는지 후작님은 모르십니다. 그들은 쥘리앵 소렐을 보내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아프다든지 편지를 못 받았다든지 하는 등의 갖가지 교활한 핑계를 꾸며 댈 것입니다."
"그러면 조만간 주교가 대신이 보내는 편지 한 통을 받게 하겠습니다." 후작이 말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제가 말했다. "그 청년은 비천한 출신이지만 높은 기개를 지니고 있어서,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그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는 바보처럼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 점은 내 마음에 듭니다. 그를 내 아들의 친구로 만들겠습니다. 그러면 충분하겠지요?" 후작이 대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쥘리앵은 샬롱 소인의 우표가 붙은 낯선 필적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에는 브장송의 상인 앞으로 된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고 지체 없이 파리로 오라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편지는 가명으로 서명되어 있었으나 쥘리앵은 편지를 열어 보고 기쁨에 소스라쳤다. 나뭇잎 하나가 그의 발밑에 떨어졌던 것이다. 나뭇잎은 피라르 사제와 미리 정해 둔 신호였다.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쥘리앵은 주교관에 호출되어 갔다. 주교는 어버이같이 인자하게 그를 맞아 주었다. 주교는 호라티우스를 인용하면서, 파리에서 그를 기다리는 훌륭한 운명에 대해 쥘리앵에게 재치 있는 축하의 말을 해 주었는데, 그 축하의 말은 그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훌륭한 운명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는 말이었다. 쥘리앵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전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주교는 그를 위해 많은 배려를 베풀어 주었다.
다음 날 정오경 쥘리앵은 더없이 행복한 기분으로 베리에르에 당도했다. 그는 드 레날 부인을 만나 볼 심산이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첫 보호자였던 선량한 셀랑 사제 댁으로 갔다. 사제는 냉담하게 그를 맞았다.
"자네는 내게 무슨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셀랑 사제는 인사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와 같이 점심 식사를 하세. 그동안에 말을 한 필 빌리러 보낼 테니, 아무도 만나지 말고 떠나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쥘리앵은 신학생다운 공손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타고 4킬로미터쯤 간 다음, 숲을 하나 발견하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자 그 숲 속으로 들어갔다. 황혼 녘이 되어 그는 말을 돌려보냈다. 그런 후에 한 농부 집을 찾아갔다. 농부는 그에게 사다리 하나를 파는 것과, 그 사다리를 들고 베리에르의 피델리테 산책로를 굽어보는 작은 숲까지 그를 따라올 것에 동의했다. 쥘리앵과 헤어지자 농부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꼭 무슨 징병 기피자나 밀수꾼 같은 꼴이군……. 하지만 무슨 상관이야! 사다리값은 톡톡히 받았겠다, 또 내가 평생 빈틈없이 살아온 처지도 아닌데 뭐."
밤은 아주 캄캄했다. 새벽 1시경 쥘리앵은 사다리를 짊어지고 베리에르로 들어갔다. 그는 두 벽 사이에 끼어 드 레날 씨의 아름다운 정원을 3미터 깊이로 흐르는 격류의 하상으로 황급히 내려갔다. 쥘리앵은 사다리를 타고 쉽사리 담 위로 올라갔다. 집 지키는 개들이 나를 어떻게 맞아 줄 것인가? 쥘리앵은 그 생각을 했다. 문제는 전적으로 거기에 달려 있었다. 개들이 짖어 대며 달려왔다. 그러나 그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개들은 그에게 와서 꼬리를 쳤다.
철책 문이 모두 닫혀 있었지만 그는 테라스마다 기어올라서 드 레날 부인의 침실 창문 밑까지 쉽사리 도달했다. 침실의 창문은 지상 3미터 정도 높이에 정원 쪽으로 나 있었다. 덧창에는 쥘리앵이 잘 알고 있는 하트형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작은 구멍으로 야등의 빛이 새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쥘리앵은 마음이 몹시 울적했다. 그는 생각했다. '제기랄! 드 레날 부인이 오늘 밤 이 방에 없단 말인가!'
가슴이 떨려왔지만, 그는 부인을 만나 보든지 아니면 죽어 버리겠다는 굳은 각오로 작은 조약돌들을 주워 덧창에 던졌다.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그는 창문 구석에 사다리를 받쳐 놓고 손으로 덧창을 두드려 봤다. 처음에는 살금살금 두드리다가 뒤이어 세게 두드렸다. 아무리 캄캄하다고 해도 이러다간 누가 내게 총을 쏠지도 모르겠다 하고 쥘리앵은 생각했다.
그는 내려와서 사다리를 덧창 한 쪽에 기대어 놓고 다시 올라갔다. 그러고는 하트형의 구멍 속에 손을 밀어 넣자, 덧창을 잠그는 걸쇠에 매달린 철사 줄이 이내 손에 잡혔다. 그는 그 철사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 덧창의 걸쇠가 벗겨져 열 수 있게 된 것을 알고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덧창을 살금살금 열고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해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는 제 머리가 들어갈 만큼 덧창을 열고, "친구예요." 하고 낮은 소리로 되풀이했다.
별안간 그는 자기가 눈을 대고 있는 유리창에 기대는 사람의 볼을 보았다. 그는 소스라치며 약간 물러섰다. 그러나 어둠이 너무 짙어서 그 거리에서도 그 사람이 드 레날 부인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사람이 놀라서 고함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사다리 밑에서는 개들이 빙빙 돌며 나지막이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친구입니다." 그는 꽤 큰 소리로 되풀이했다. 대답이 없었다. 흰 유령은 사라져 버렸다. "문 좀 열어 주세요. 꼭 말할 게 있어요, 저는 불행에 빠져 있어요!"
그는 유리창이 부서져라 두드려 댔다. 덜컥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창문의 걸쇠가 벗겨졌던 것이다. 그는 창문을 밀어젖히고 가볍게 방 안으로 뛰어내렸다. 유령 같은 흰 그림자가 뒤로 물러섰다. 그는 그 그림자의 팔을 잡았다. 여자였다. 그의 용기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 사람이 부인이라면, 그녀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작은 외마디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이 드 레날 부인임을 알았을 때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부인을 품 안에 끌어안았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가까스로 그를 떠밀었다.
"망측한 사람!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그녀는 경련적인 목소리로 겨우 이 한마디를 토해 냈다. 쥘리앵은 그 말소리에 정말로 분노가 스며 있는 것을 알았다.
"십사 개월의 쓰라린 이별 끝에 저는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나가세요, 당장 떠나 주세요. 아아! 셸랑 사제님은 왜 내가 편지 쓰는 것을 막으셨나? 나는 이런 끔찍한 일을 예상했었는데." 그녀는 정말로 놀라운 힘으로 그를 떠밀었다. 그러고는 숨이 차서 띄엄띄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죄를 후회하고 있어요. 하느님은 내 눈을 뜨게 해 주셨어요. 나가세요! 어서 가세요!"
"십사 개월이나 고통을 겪은 끝에 당신에게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이대로 떠나지는 않겠습니다. 부인이 겪은 일을 모두 알고 싶습니다. 아! 저는 당신을 지극히 사랑했으니 그 얘기를 들을 만합니다……. 모든 걸 알고 싶습니다." 드 레날 부인을 품 안에 꼭 껴안고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힘에 저항하던 쥘리앵이 팔의 힘을 좀 늦추었다. 이 동작이 드 레날 부인에게 약간 안도감을 주었다.
"사다리를 끌어 올리겠어요. 소리를 듣고 깨어난 하인이 집 안을 돌아보면 큰일이니까요." 쥘리앵이 말했다.
"아녜요, 나가세요, 그러지 말고 나가세요." 그녀가 정말로 화를 내며 말했다.
"사람들이 무슨 상관이겠어요? 당신이 내게 하고 있는 이 끔찍한 장면을 보고 계신 것은 하느님이에요. 하느님은 나를 벌하실 거예요.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품었던 감정을 비겁하게 악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내게 그런 감정은 없어졌어요. 쥘리앵 선생, 내 말을 아시겠어요?"
허물없는 말투를 거절하고, 쥘리앵이 아직도 기대하고 있는 부드러운 애정의 끈마저 끊으려는 그 퉁명스러운 태도에 쥘리앵의 사랑의 격정은 미친 듯한 흥분의 상태로 휩쓸려 들어갔다.
"뭐라고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요!"
그는 냉정하게 듣기는 힘든, 가슴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쥘리앵은 쓰라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말없이 울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렇지만 몇 번 손을 빼내려는 경련에 가까운 동작을 한 다음 그에게 손을 내맡겼다. 그들은 부인의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십사 개월 전과 이렇게도 달라졌던 말인가! 쥘리앵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눈물이 더 욱 비 오듯 쏟아졌다. 이렇듯 눈앞에 보지 않으면 사람의 감정이란 모두 파괴되어 버리는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말해 주세요." 이윽고 침묵에 거북해진 쥘리앵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을 책망하는 듯한 냉정한 어조의 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떠날 무렵 내 나쁜 소문은 시내에 쫙 퍼졌어요. 당신의 행동은 무척 조심성이 없었으니까요! 얼마 후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존경하는 셸랑 사제님이 나를 찾아오셨어요. 그분은 오랫동안 고백을 받아 내려고 애쓰셨지만 허사였어요. 하루는 그분이 내가 첫 성체 배령을 받았던 디종의 성당으로 나를 데려가려는 생각을 하셨어요. 거기서 그분이 먼저 말을 꺼내셔서…….
얼마나 창피스러웠던지! 나는 다 고백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 착하신 양반은 노하시긴 했지만 나를 꾸짖진 않으셨어요. 나와 함께 몹시 슬퍼해 주셨지요. 그 무렵 나는 매일같이 당신에게 편지를 썼으나 부치지는 못했어요. 조심스럽게 편지를 감추어 두고는 너무나 슬플 때면 내 방에 들어앉아 다시 읽어 보곤 했어요. 마침내 셸랑 사제님은 편지를 자기에게 맡겨 두게 하셨어요. 좀 더 조심스럽게 쓴 편지 몇 통은 당신께 부쳤었지요. 그런데 답장이 전혀 없었어요."
"신학교에서 나는 당신의 편지를 한 통도 받지 못했어요. 정말이오."
"어머나, 누가 그 편지를 가로챘을까?"
"성당에서 당신을 본 그날까지는 당신이 살아 있는지조차 몰랐으니 내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나 생각해 보세요." 드 레날 부인이 다시 말했다.
쥘리앵은 아무런 생각 없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부인의 품 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그러나 드 레날 부인은 그를 밀어내고, 단호한 어조로 계속 얘기했다.
"존경하는 셀랑 사제님은 내가 드 레날 씨와 결혼할 때 내 애정을 모두 그에게 바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어요. 당신과 숙명적인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내가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던 애정까지도 말이죠…….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그 편지들을 맡겨 버린 이후로, 내 생활은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꽤 평온하게 흘러왔어요. 이 생활을 흔들어놓지 말아 주세요. 내 친구가 되어 주세요……. 내 가장 좋은 친구."
쥘리앵은 그녀의 손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쥘리앵이 아직도 울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울지 마세요, 당신은 나를 너무도 괴롭게 하시……. 이제 당신이 어떻게 지냈는지 말씀해 주세요."
쥘리앵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이 신학교에서 지낸 생활을 알고 싶어요. 그걸 얘기해 주고 가세요." 그녀가 되풀이했다.
쥘리앵은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른 채, 처음에 마주쳤던 수많은 음모와 질투와 복습 교사로 임명받은 이후부터 좀 평온하게 지내게 된 내력을 얘기했다.
"그때였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아마도 오늘의 상황, 당신이 이제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저는 이제 당신에게 관심 밖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는 것이겠지만,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끝에 ……" 말이 여기에 이르자 드 레날 부인은 쥘리앵의 두 손을 꼭 쥐었다.
"당신이 제게 500프랑의 돈을 보내 준 것은 그때였습니다."
"나는 보내지 않았어요." 드 레날 부인이 말했다.
"의심받지 않게 하려고 폴 소렐이라고 서명한 파리의 소인이 찍힌 편지였는데요."
그 편지의 가능한 출처에 대해 잠시 얘기가 오고 갔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심경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드 레날 부인과 쥘리앵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엄숙한 어조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다정한 어조로 돌아와 있었다. 어둠이 너무나 짙어서 서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가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쥘리앵은 연인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부인은 쥘리앵의 팔을 떼어 내려고 애썼지만, 이 순간 쥘리앵은 교묘하게 이야기의 흥미로운 상황으로 부인의 주의를 돌렸다. 그래서 그의 팔은 잊혀진 듯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대로 쫓겨난다면 무슨 수치란 말인가! 쥘리앵은 생각했다. 그것은 내 일생을 망칠 후회 거리가 될 것이다. 부인은 다시는 내게 편지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언제 다시 이 고장에 돌아오게 될지 알 게 뭐냐!
이 순간 쥘리앵의 마음속에 있던 순결한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불행하게도 신학교의 교정에서 자기보다 힘센 동료의 놀림을 받았을 때만큼이나 계산적으로 냉정해지고 있었다.
쥘리앵은 자기 얘기를 계속하면서 베리에르를 떠난 이후부터 겪었던 불행한 삶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드 레날 부인은 이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 사람을 잊고 있었던 동안, 이분은 아무런 추억의 흔적도 없는 일 년간의 생활을 오직 베르지에서 보냈던 행복한 나날을 생각하며 지내셨구나. 그녀의 흐느낌은 더 거세어졌다. 쥘리앵은 제 얘기가 성공적임을 눈치챘다. 그는 이제 마지막 수단을 시도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그는 불시에 파리로부터 받은 편지 얘기를 꺼냈다.
"저는 주교님께 하직을 고했습니다."
"뭐라고요, 브장송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요! 당신은 영영 떠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쥘리앵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일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조차 버림받은 땅을 저는 버리고 떠나렵니다. 이 땅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저는 파리로 갑니다……."
"파리로 가신다고요!" 드 레날 부인은 상당히 큰 소리로 외쳤다.
눈물로 가로막힌 그녀의 목소리는 극심한 마음의 동요를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쥘리앵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처한 상태의 모든 것을 결판낼 행동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인의 외침 소리가 있기 전까지는 자기의 말이 어떤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부인. 저는 영원히 부인 곁을 떠납니다. 부디 행복하십시오. 안녕히 계세요."
그는 창문을 향해 몇 발짝 걸어갔다. 벌써 창문을 열려하고 있었다. 그때 드 레날 부인이 그에게 달려와 그의 품에 몸을 내던졌다. 이렇듯 세 시간에 걸친 대화 끝에 쥘리앵은 처음 두 시간 동안 열렬히 원하던 것을 얻어 냈다. 좀 더 일찍 애정이 되살아나고 드 레날 부인의 회한이 사라졌더라면 그것은 지고(至高)의 행복이었을 것이다.
사랑의 기쁨에 취한 쥘리앵은 돌아가는 대신, 하루 낮을 부인의 방에서 숨어 지내고 다음 날 밤에 떠나겠다고 드 레날 부인에게 요청했다.
"안 될 게 뭐예요? 이 치명적인 추락은 내게서 자존심도 다 걷어가 버렸어요. 어차피 평생 불행할 텐데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며 쥘리앵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남편은 전과 같지 않아요. 잔뜩 의심을 품고 있거든요. 내가 이 모든 사건에 자기를 끌어넣었다고 생각하며 몹시 화가 나 있어요. 남편이 조그만 소리라도 듣는다면 나는 파멸이에요. 나를 쫓아내 버릴 거예요."
"아아! 꼭 셀랑 사제님 말투 같군요. 쥘리앵이 말했다. "신학교로 향하던 그 쓰라린 출발 전이라면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었지요!" 쥘리앵의 이 침착한 말은 곧 효력을 발휘했다. 쥘리앵이 자기 사랑을 의심하면 어쩌나 하는 더 큰 위험 앞에서, 부인이 남편이 나타나면 겪게 될 위험을 재빨리 잊었다는 것을 쥘리앵은 알 수 있었다.
아침 해가 점점 밝아져서 방을 환하게 비췄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하 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의무에 대한 애착에만 오로지 몸 바치고 있던 여인이, 자기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인이 거의 자기 발아래 꿇어앉듯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쥘리앵은 잃었던 자존심의 기쁨을 모두 되찾았다. 일 년 동안 계속해서 다져 온 결심도 쥘리앵의 용기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곧 집 안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 레날 부인은 잊고 있던 일에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심술궂은 엘리자가 방에 들어올 텐데, 이 커다란 사다리를 어쩐다지? 이걸 어디다 감추나?"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쾌활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렇지, 이걸 광에다 갖다 두겠어요. 사다리를 복도에 놔두고, 하인을 불러서 심부름을 시켜 내보내겠어요."
"하인이 복도를 지나다가 사다리를 볼지도 모르니 무슨 핑곗거리를 생각해 두세요."
"염려 말아요. 귀여운 양반." 드 레날 부인은 그에게 키스하며 말했다.
드 레날 부인은 사다리를 집어 들었다. 사다리는 분명 그녀에게는 너무 무거운 것이었다. 쥘리앵은 그녀를 도우려고 다가갔다. 그는 아무래도 힘이라곤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를 감탄하며 바라봤다. 그때 그녀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갑자기 사다리를 집더니 의자 하나를 들어 올리듯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는 재빨리 4층 복도로 사다리를 들고 가서 벽을 따라 눕혀 놓았다. 그녀는 하인을 불렀다. 그리고 하인이 옷을 입는 동안 비둘기장에 올라가 있었다.
오 분 후에 복도로 돌아와 보니 사다리가 거기 놓여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만약 쥘리앵이 집 밖으로 나간 다음이라면 그녀는 그런 위험에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편이 그 사다리를 보았다면! 그 사건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었다. 드 레날 부인은 사방을 뛰어다닌 끝에 마침내 지붕 밑에서 그 사다리를 발견했다. 하인이 거기 갖다가 숨겨 놓았던 것이다. 기묘한 상황이었다. 전 같으면 그녀는 이런 상황에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십사 시간 후 쥘리앵이 떠난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나든 무슨 상관이랴? 그때에는 어차피 공포와 후회 밖에 뭐가 남겠는가? 그녀는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된들 어떠랴!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믿었던 이별 끝에 그가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녀는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도달하기 위해 그가 행한 모든 것은 얼마나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가!
"당신 남편은 뭘 하고 있죠?" 쥘리앵이 물었다.
"농부들과 매매 계약서를 쓰고 있어요."
8시가 울리자 집 안이 매우 왁자지껄해졌다. 드 레날 부인이 눈에 띄지 않으면 사방에서 그녀를 찾을 것이었다. 그녀는 쥘리앵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그녀는 조심성 없이 커피 한 잔을 들고 그에게 다시 돌아왔다. 쥘리앵이 굶어 죽을까 봐 안달이 났던 것이다.
그날 아침 드 레날 씨는 외출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집 안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농부들에게 수확한 감자를 팔기 위한 매매 건으로 바삐 움직였다. 저녁 식사 때까지 드 레날 부인은 자신의 수인을 위해 잠시도 틈을 낼 수가 없었다. 저녁 식탁이 차려졌을 때, 부인은 쥘리앵을 위해 따끈한 수프 한 접시를 훔쳐 낼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수프 접시를 들고 쥘리앵이 있는 방문으로 소리 없이 다가가다가, 그녀는 아침에 사다리를 감췄던 하인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때 하인도 귀를 기울이면서 소리 없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쥘리앵이 소리를 내며 방 안을 걸어 다녔던 모양이었다. 하인은 약간 머쓱해하며 자리를 떠났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드 레날 씨는 카지노로 갔다. 부인은 두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대고 일찌감치 자기 방으로 물러나서는, 서둘러 엘리자를 내보내고 쥘리앵의 방문을 열어주려고 재빨리 일어섰다.
쥘리앵은 정말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드 레날 부인은 주방으로 빵을 찾으러 갔다.
쥘리앵은 커다란 외침 소리를 들었다. 드 레날 부인이 돌아와서, 불이 켜 있지 않은 주방으로 들어가 빵을 넣어 두는 찬장에 다가서며 팔을 뻗친 순간 여자의 팔을 건드렸다고 말했다.
쥘리앵이 들은 외침 소리를 낸 것은 엘리자였다.
"그 애는 거기서 뭘 하고 있었지요?"
"사탕을 훔치고 있었든지 아니면 우리를 엿보고 있었겠죠." 드 레날 부인이 아무런 관심도 없이 말했다.
"다행히 파이 하나와 큰 빵 한 쪽을 찾아냈어요."
"거기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죠?" 쥘리앵이 부인의 에이프런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드레날 부인은 저녁 식사 때부터 주머니에 빵을 가득 넣어 두었던 것을 잊고 있었다. 쥘리앵은 모든 정열을 기울여 부인을 품에 꼭 껴안았다. 그녀가 그처럼 아름다워 보였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파리에서도 나는 이보다 훌륭한 품성을 지닌 여인은 만날 수 없으리라. 쥘리앵에겐 막연히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보살핌에는 익숙하지 않아 서툴러 보였지만, 다른 차원의 훨씬 더 무서운 위험밖에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진정한 용기를 동시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쥘리앵이 맛있게 저녁을 먹는 동안 엄숙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부인이 그 간단한 식사에 대해 농담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세차게 흔들렸다. 드 레날 씨였다.
"왜 문을 잠그고 있소?" 그가 부인에게 소리쳤다.
쥘리앵은 가까스로 장의자 밑으로 기어 들어갈 시간밖에 없었다.
"웬일이오!" 드 레날 씨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야식을 들고 있구려. 그러면서 문을 잠가 두다니!"
평소 같으면 남편의 이런 퉁명스러운 질문에 드 레날 부인의 마음이 흔들렸겠지만, 지금은 남편이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쥘리앵이 눈에 띌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드 레날 씨가 조금 전 쥘리앵이 앉아 있던 장의자 맞은편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던 것이다. 카지노의 당구 게임에서 이긴 얘기를 남편이 길게 늘어놓는 동안, 그녀는 그들 앞으로 서너 발짝 떨어진 의자 위에 쥘리앵의 모자가 놓여 있는 것을 얼핏 보았다. 그녀는 냉정을 되찾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남편 뒤로 돌아가서 모자가 놓인 의자 위에 옷을 던져 놓았다.
이윽고 드 레날 씨가 방을 나갔다. 그녀는 쥘리앵에게 신학교에서 지낸 얘기를 다시 해 달라고 졸랐다.
"어제는 당신 얘기를 듣지도 못했거든요. 나는 줄곧 당신을 돌려보낼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까요."
부인은 조심성이 없었다. 그들은 아주 큰 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2시경이나 되었을까,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그들의 얘기는 중단되었다. 또다시 드 레날 씨가 온 것이었다.
"빨리 문 열어, 집에 도둑이 들었단 말이야! 오늘 아침 생장이 사다리를 발견했다고." 드 레날 씨가 소리쳤다.
"모든 게 끝장이에요!" 드 레날 부인이 쥘리앵의 품으로 뛰어들며 부르짖었다. "남편은 우리 둘 모두를 죽일 거예요. 저이는 도둑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녜요. 난 당신 품에 안겨 죽겠어요. 죽는 편이 살아 있는 것보다 행복해요." 그녀는 잔뜩 화내고 있는 남편에게는 대답하지 않고 쥘리앵을 열정적으로 포옹했다.
"나는 화장실 창문으로 마당에 뛰어내려 정원으로 도망치겠어요. 무엇보다도 사실을 털어놓으면 안 돼요. 그건 절대 금지예요. 확증을 주는 것보단 의심하는 편이 나으니까요."
그녀는 화장실 창문까지 그와 함께 갔다. 그런 다음 쥘리앵의 옷을 감췄다. 이윽고 그녀는 성이 나서 펄펄 뛰는 남편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남편은 한마디도 않고 방과 화장실을 살펴본 다음 방에서 나갔다. 쥘리앵의 옷은 그에게 던져졌다. 그는 옷을 집어 들고 두강 쪽의 정원 아래 편을 향해 줄행랑쳤는데 탄환이 스쳐가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총성이 울렸다. 한 시간 후 쥘리앵은 베리에르에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제네바로 가는 도로에 나와 있었다. 그들이 무슨 낌새를 챘다면 파리로 가는 길목에서 나를 찾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