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rma’s Last Theorem과 수학 영화 이야기
제7장 사소한 문제
케임브리지에서 증명을 발표한 후 와일즈는 검증을 받기 위해 자신의 논문을 ‘배리 마주르’가 편집자로 있는 <Inventiones Mathematicae>라는 학술지에 제출하였다.
와일즈의 논문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학 테크닉들이 종합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마주르는 의례 2~3명이었던 심사위원의 수를 6명으로 늘리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고, 200여 쪽에 이르는 복잡하고 방대한 증명과정을 여섯 개의 세부 과정으로 나뉘어 6명의 심사위원들이 각각 한 부분씩 맡아 심사를 책임지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당시 세 번째 부분의 심사를 맡은 사람은 이미 와일즈와 함께 증명을 검토한 '닉 카츠'였는데, 그는 자신이 맡은 부분이 너무 벅차 파리에 있는 ‘뤽 일루지에’(Luc Illusie)와 함께 공동심사를 할 수 있도록 추가 요청하여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닉 카츠와 뤽 일루지에가 논문을 검토하던 중 어느 날 아주 사소해 보이는 문제점 하나를 발견하여 이를 와일즈에게 질의하는 과정에서 와일즈가 적용한 콜리바긴-플라흐의 방법이 모든 경우로 확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오류가 발견되었다.
와일즈는 이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쉽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와일즈 논문의 제3장에 오류가 있다는 구체적인 소문까지 나돌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하버드 대학의 노엄 엘키스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틀렸음을 반증하는 엄청나게 큰 정수를 찾아냈으며 따라서 <다니야마-시무라의 추론>도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는 내용의 가짜 이메일까지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6개월이 지났지만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자 와일즈는 같은 대학의 동료 교수인 ‘피터 사르낙’(Peter Sarnak)에게 절망적인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 사르낙은 와일즈에게 믿을만한 파트너를 구하여 다시 한번 시도해 볼 것을 권하였고, 와일즈는 케임브리지에서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겨온 ‘리처드 테일러’(당시 그는 와일즈의 논문을 심사하던 여섯 명 중의 한 사람이었고 한때 와일즈의 제자였다고 한다)를 영입하기로 결정하였다.
1994년 1월부터 와일즈는 테일러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 한번 콜리바긴-플라흐의 방법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는데,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어느 날 와일즈는 그가 전에 콜리바긴-플라흐의 방법을 채택하면서 버렸던 ‘이와사와 이론’이 콜리바긴-플라흐의 방법과 서로 보완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콜리바긴-플라흐의 방법을 연구하면서 얻어낸 정보들이 ‘이와사와 이론’으로 귀납법을 완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작용하였고, 결국 두 가지 방법을 합쳐놓으니 모든 문제점이 기적과도 같이 말끔하게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와사와 겐키치(일본어: 岩澤 健吉, 1917년 9월 11일 ~ 1998년 10월 26일)는 일본의 수학자다. 대수적 수론에 공헌하였고, 특히 그 한 분야인 이와사와 이론을 창시하였다. 1945년에 도쿄 제국 대학에서 이야나가 쇼키치 아래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50년에 미국에 초청되어, 이후 2년 동안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있었다. 1952년 봄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67년에 프린스턴 대학교로 이전하였다. 1998년 10월 26일 도쿄에서 사망하였다.
와일즈는 당시를 떠올리며 울먹거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간결하면서 또 우아했어요. 왜 이 사실을 진작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정말 기쁘면서도 넋이 나가서 계산 결과를 한 20분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 수학과 건물 내의 복도를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는 제가 발견한 것이 아직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꿈을 꾼 건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 아름다운 녀석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더군요. 저는 너무 흥분해서 정신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제 연구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지요. 앞으로 제가 어떤 발견을 한다 해도 그런 정도의 환희는 두 번 다시 느껴보지 못할 겁니다."
결국 와일즈는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고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정리에 마침표를 찍었고, 기한이 2007년 9월 13일로 되어 있던 ‘볼프스켈 상’의 상금도 수령하게 되었다(당시 10만 마르크가 여러 번의 디노미네이션을 거쳐 1997년에 와일즈가 수령한 것은 약 4만 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수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하인츠 바그너 교수는 <볼프스켈 상>이야말로 노벨상보다 훨씬 값진 세계 최고영예의 상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노벨 상 수상자는 매년 여러 명씩 탄생하지만 <볼프스켈 상>은 제정된 지 90년 만에 단 한 명의 수상자를 배출해 내고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와일즈는 1995년 3월호 《수학연보》에 논문을 발표해서 드디어 358년 된 수학 난제인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완벽하게 증명하였다. 그가 10살의 나이에 처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풀겠다는 꿈을 갖고 나서 30여 년 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와일즈 교수의 고향이자 증명 발표가 있었던 케임브리지가 있는 영국에서도 성대한 축하와 기념행사들이 열렸다고 한다. UKTV에서는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나중에 <The Proof>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다. 영상 초반에 그 영광스러운 때를 떠올리며 울먹거리는 와일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와일즈는 1996년 3월에 랭글런즈와 함께 수학의 대통합에 기여한 공로로 울프상(Wolf Prize)을 수상하여 상금 10만 달러를 나누어 가졌다. 또한 1998년에는 국제 수학 연맹(IMU)이 수여한 기념 은판 특별상(필즈상은 40세 이하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에 특별상을 수상)을, 2016년에는 아벨상도 수상하였다.
어쨌든 이렇게 페르마부터 시작해서 오일러, 소피 제르맹, 디리클레, 르장드르, 라메, 다니야마, 시무라, 프라이, 켄 리벳, 콜리바긴, 플라흐, 이와사와 등 수 많은 수학자들을 거치면서 결국 마지막으로 앤드류 와일즈에 의해 모든 이론들이 종합되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참인 것으로 드디어 증명되었다.
그동안의 히스토리를 재미있게 정리한 그림이 있어 인용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