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밤하늘의 등뼈 - 이오니아 과학자(플라톤, 피타고라스), 허블
제7장 밤하늘의 등뼈
나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느니 차리리 인과율 하나를 터득하는 쪽을 택하겠소이다.
- 아브데라의 데모크리토스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책을 한 권 집필했는데 그 책의 가설에 따르면 우주가 현재 알려진 것보다 수배가 더 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가 택한 전제는 별들과 태양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가 태양을 중심에 두고 그 주위를 원을 그리면서 회전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가정에 따르면 항성들이 박혀 있는 천구의 중심도 태양 부근에 있으며 항성들의 천구가 아주 크기 때문에 중심에 대한 그 천구 표면까지의 거리와 지구에서 항성들까지의 거리가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 아르키메데스, 《모래를 헤아리는 사람》
이 장에서는 관측과 실험을 바탕으로 우주와 지구의 위상에 대해 처음으로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기원전 6세기경의 이오니아의 과학자들과 그 이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인류가 의식적이든 아니면 무지에 의해서든 그에 대해 얼마나 잘못 인식해 왔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별은 무엇인가?
칼 세이건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숱한 의문을 가졌다가 처음 도서관에서 별에 관한 책을 읽고 새로운 사실들에 놀라 천문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이 장을 시작한다.
별이란 무엇인가? 인류는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살아왔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아주 특별한 점은 다행히 이 질문에 우리가 어느 정도 그럴듯한 답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칼 세이건은 수렵 채집인 집단 시절로 빙의하여, 인류가 가졌을 법한 별에 대한 의문들과 그에 대해 별들을 하늘을 덮고 있는 가죽의 뚫린 구멍으로 설명하는 이야기를 상상해 본다.
우리는 열매와 뿌리를 먹고 산다. 나무 열매와 잎 그리고 죽은 짐승. 어떤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그리고 또 어떤 것은 죽여서 먹는다. (중략) 사냥을 나갔을 때 우리는 짐승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동물이 하는 일이 우리의 생사를 좌우하기도 한다. (중략). 우리 대부분은 하늘이나 나무 아래 그냥 쓰러져 잠들거나 아니면 나뭇가지에서 잔다. 우리는 동물의 가죽과 털을 옷으로 쓴다. (중략)
폭풍우가 지나간 후 근처 숲에 깜빡거리며 탁탁 소리를 내는 것이 있었다. 거기에는 노랗고 빨가며, 밝고 뜨거우며, 화르르 타오르는 물체가 있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 번도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것을 ‘불꽃’이라 부른다.
하늘은 중요하다. 하늘은 우리를 덮고 있다. 불꽃을 찾기 전 우리는 어둠 속에 누워 빛의 점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몇 개의 점들이 모여서 하늘에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중략) 별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언덕이나 나무 위로 올라가도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다. (중략) 불꽃을 발견한 후로 나는 모닥불 옆에 앉아 별에 관해 많은 상상을 하고는 했다. 별이 불꽃이라는 생각. (중략)
우리 중 누군가가 또 다른 생각을 했다. 그는 밤이 하늘에 펼쳐진 커다란 검정 동물의 가죽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가죽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고 그 구멍을 통해 불빛이 새 들어온다는 것이다. (중략) 어느 쪽이 사실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모른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
별에 대한 위 이야기 정도의 정교한 생각들은 원시 공동체의 집단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보츠와나 공화국(영어: Republic of Botswana)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쿵족'(글자 앞의 !는 앞니 안쪽에 혀를 대는 동시에 K를 발음하라는 것이다)도 은하수를 그들 나름대로 설명할 줄 안다.
그들이 사는 위도에서는 은하수가 사람의 바로 머리 위에 떠 있다. 그들은 하늘이 거대한 짐승이고 우리는 그 짐승의 뱃속에서 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머리 위의 은하수는 그 짐승의 등뼈이다. 그래서 그들은 은하수를 '밤의 등뼈'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비유적 해석들은 대부분의 인류 문화에서 점차 다른 생각들로 대체되어 갔고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 그 막강한 존재들이 다양한 이름의 신으로 승격됐다. 그들에게는 이름과 계보가 만들어졌고 인간과 자연을 다스리는 역할이 주어졌다. 수천 년 동안 인류를 억눌러 온 생각은 이 우주가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신 또는 신들이 실을 당겨 조종하는 꼭두각시연극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오니아의 과학자들
그러다가 2,500년 전 이오니아(이오니아는 이오니아 해에 있지 않다. 이오니아 해에서 에게 해 연안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곳을 이오니아라고 불렀다)에서 새로운 깨달음의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이 깨달음의 진원지는 사모스 섬이었다. 그리고 동부 에게 해 주변의 섬과 해안가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그리스 령의 식민지가 이 깨달음의 진앙이었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태초에 ‘형태가 없는’ 혼돈이 있다고 믿었는데, 혼돈의 신 카오스(Chaos)가 먼저 밤의 여신을 만든 다음 짝짓기를 해서 거기서 태어난 자손들이 결국은 모든 신과 인간이 됐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에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사조가 탄생했는데, 그들은 우주에 내재적 질서가 있으므로 우주도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에게는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는데 이렇게 훌륭하게 정돈된 질서를 “코스모스(Cosmos)”라고 불렀다고 한다.
왜 이오니아인가?
이오니아는 인도, 이집트, 바빌로니아, 중국, 중앙아메리카와 같이 먼저 문명이 시작된 곳들에 비해 오히려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우선 이오니아가 섬들을 중심으로 발달한 세계라서 다양성이 존재했고 강력한 중앙 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탐구가 가능했다.
그리고 여러 문명이 교차하는 길목에 있었는데, 페니키아의 음성 알파벳 기호를 처음으로 그리스어에 사용한 곳이 이오니아였고 그로 인해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검토와 논의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정치적 권력은 상인들의 손에 있었고 상인들은 번영의 성패가 달려 있는 기술 개발에 적극적이었으며, 다양한 사상들이 한데 만나서 교차・배양되며 각기 다른 문화와 수많은 신들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을 가정하지 않고 세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깨달음이 바로 이 지역에서 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류 사상사에서 위대한 혁명이 기원전 600년에서 기원전 400년 사이에 일어났다. 혁명의 열쇠는 손이었다. 이오니아의 뛰어난 사상가들 중에는 항해사, 농부, 직조공의 자식들이 있었다. 그들은 손을 써서 물건을 주무르고 고치고 만드는 일에 익숙했다.
밀레투스의 탈레스
이오니아의 첫 번째 과학자는 ‘밀레투스의 탈레스’(Thales of Miletus, 기원전 626년경 ~ 기원전 548년경)였다. 탈레스는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탈레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Politics)》에서 그에 관한 일화 한 토막을 찾아볼 수 있다.
탈레스는 그의 가난 때문에 세인의 비아냥을 받았다. 그의 가난이 철학의 무용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능력과 기술을 이용하여, 겨울철에 그다음 해의 올리브가 대풍일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탈레스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기름 압축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당만 차지하는 기름 압축기를 기꺼이 팔았다. 올리브가 풍작일 때, 탈레스는 마을의 거의 모든 압축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탈레스는 기름 압축기를 사람들한테 빌려 주면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자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관심은 돈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다는 점도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 줬다.
탈레스는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라는 도시 출신이며,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넓었다고 한다. 탈레스는 이집트 여행의 영향으로, 수학과 천문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바빌로니아의 지식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수학과 천문학에 관련된 업적들이 아주 많은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천문학을 이용해서 기원전 585년에 일어나는 일식을 예언한 것이 있다. 또한, 수학의 기하학적 방법을 빌어서 이집트에서도 가장 큰 피라미드라고 알려져 있는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한 업적도 유명하다.
철학자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라틴어: Theaetetus, 플라톤의 저서 가운데 기원전 369년경에 지은 ‘대화편‘ 중에 나오는 ‘지식의 본질’에 대한 장이다)에 따르면, 탈레스가 밤에 별을 보면서 걷다가 우물에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영리한 트라키아 하녀가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바로 앞의 우물은 보시지 못하는군요!"라고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탈레스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유클리드보다 먼저 증명한 인물이다. 예를 들어 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이 같다는 정리들이다. 뉴턴은 1663년 스투어브리지 박람회에서 구입한 책 중에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이 들어 있었는데 이 책이 뉴턴과 탈레스를 이어 주고 결국 현대 과학 기술을 탄생시킨 중대한 계기를 낳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의 지적 노력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지는 탈레스, 유클리드, 뉴턴의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탈레스는 신들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었는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만물이 모두 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땅도 물 위에 떠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칼 세이건은 "정말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 그가 택한 접근방식에 있다. 신들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물리적 힘의 결과로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야말로, 당시 사고의 근본을 뒤흔드는 발상의 전환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밀레투스의 아낙시만드로스
탈레스의 동료이자 제자인 밀레투스의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기원전 610년 ~ 546년)는 연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수직으로 세워 놓은 막대의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을 1년의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했고 계절의 시작과 끝도 제대로 알아냈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에서 최초로 해시계를 만든 사람이었고 당시까지 알려진 세상을 지도로 표현하고 별자리의 모양을 나타내는 천구도를 만든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생명은 진흙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했으며, 최초의 동물들은 가시로 덮인 물고기로서, 이들 중 일부가 뭍으로 올라와 변이를 통해 다른 동물로 진화했다고 주장했고, 세상에는 무한히 많은 수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 모두에 생명이 서식하고 있어서 소멸과 재생을 반복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 아낙시만드로스 또한 스승 탈레스의 영향을 받아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 재료가 존재한다’는 명제에는 동의를 하였다. 하지만 탈레스가 만물의 단일한 근본 재료가 '물'이라고 한 것에 반해, 그는 만물을 구성하는 더욱 근본적이고 1차적인 재료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물이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까닭은 물의 성질이 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습함이라는 규정적인 성질을 가진 물이 건조한 물질의 재료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존재는 성격이 무규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뜻의 접두어 'a-'와 경계 혹은 한도 뜻하는 ‘peras'의 결합어인 'apeiron(아페이론)'이라고 불렀다.
폴리크라테스와 테오도루스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당시 사모스의 참주로 스파르타 연합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고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노예를 동원하여 15년에 걸쳐 길이가 1킬로미터나 되는 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만들었다. 당시 양쪽의 두 개의 구멍이 중간에서 거의 정확하게 만났는데 이 터널 공사의 성공은 당시 토목 기술의 우수성과 당시 이오니아 인들의 실용적인 능력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 폴리크라테스가 친구인 이집트 왕의 충고를 따라, 그의 끝없는 성공에 질투한 신들을 달래고 다가올 파멸을 막기 위해 가장 소중한 물건인 자신의 에메랄드가 박힌 황금 반지를 자발적으로 바다에 버린 것과 같이 스스로에게 처벌을 가하는 현상을 ‘폴리크라테스 콤플렉스(Polycrates Complex)’라고 한다(1945년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존 칼 플루겔(John Carl Flugel)이 《인간, 도덕, 그리고 사회》라는 책에서 언급).
테오도루스(Theodorus)는 그 시대 공학 기술의 거장이며, 열쇠와 자물쇠, 자, 목수용 곱자, 수준기, 지렛대, 선반, 청동 주조 기술, 중앙 난방법 등의 발명가로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널리 존경받던 인물인데 특이하게 현재 그의 기념비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칼 세이건은 “당시의 이론가들은 공학자나 기술자와 자주 대화를 나누며 지냈고, 이론가는 대부분 기술자를 겸했다. 이렇게 그리스 사회에서는 이론과 실제가 함께 했던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히포크라테스
코스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of Cos, 약 기원전 460년~약 기원전 370년)는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시대 의사이고, 의학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보통 그를 의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히포크라스 학파를 만들었다. 이 학파는 고대 그리스의 의학을 혁명적으로 바꾸었으며, 마술과 철학에서 의학을 분리해 내어 의사라는 직업을 만들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그가 세운 의학의 전통은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것이었고, 그는 의술이 물리학과 화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의 《고대 의술에 관하여》라는 책에서는 “사람들이 간질을 신이 내린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그 병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모두 신이 내렸다고 여긴다면, 그 목록에 어디 끝이 있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엠페도클레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오니아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은 실험의 기법들과 함께 그리스의 전역을 거쳐,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까지 퍼져 나갔다. 당시 공기에 대한 실험을 최초로 했다고 기록에 나오는 인물은 기원전 450년경에 시칠리아에서 활약했던 엠페도클레스이다.
그는 아래 오른쪽 사진과 같은 도구('물도둑' 내지 '물시계'라고 했다고 한다)를 사용하여 실험을 하였는데, 엄지 손가락으로 위를 막으면 물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다만 너무 작게 나뉘어 있어서 하나의 형태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공기도 물질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3년경 ~ 기원전 430년경)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시칠리아섬에서 출생하였으며 정치·의술·예언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가졌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바람·불·물·흙 등 4개의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것들이 사랑과 미움의 두 힘에 의해 분리되고 결합하는 것으로 만물의 생성·소멸이라고 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미쳐서 스스로 신이라 여긴 나머지 에트나 화산의 칼데라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용암에 빠져 죽었다고 하나, 칼 세이건은 그가 매우 용감한 지구물리학자였다고 상상하면서 그의 죽음은 생명을 무릅쓴 관측 중에 일어난 실족사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데모크리토스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기원전 460년 무렵~380년 무렵)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그는 그리스 북부 지방 트라키아의 해안 도시 아브데라에서 부유한 시민인 헤게시스트라토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데모크리토스는 젊은 시절에 바빌로니아와 이집트를 여행하였다고 한다. 레우키포스에게서 배운 후, 그 생애의 대부분을 연구와 저술 및 교수로서 보냈다. 이 밖의 개인적인 면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데모크리토스는 전(前)소크라테스 철학자 가운데 마지막 큰 인물로서 소크라테스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철학 사상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둔 이른바 원자론을 먼저 손꼽을 수 있으며, 윤리학, 인식론 등은 원자 개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데모크리토스가 만들어 낸 '원자'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자를 수 없다라는 뜻이다. 원자는 궁극의 입자로서 원자를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려는 시도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라는 뜻이 이 한 단어에 담겨 있다. 그는 원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모든 물질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작은 것, 곧 원자(atomos)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이 바로 물질의 보이지 않는 가장 작은 구성요소로서, 세계는 무수한 원자와 공(空)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데모크리토스는 그 안에 있는 별을 하나하나 분간해 볼 수는 없지만 은하수가 수많은 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별들의 집단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칼 세이건은 "그의 사고력이야말로 '헤라의 젖'(그리스 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헤라의 유방에서 뿜어져 나온 젖이 밤하늘에 흘러서 빛을 내는 띠, 즉 은하수가 됐다고 한다. 그래서 은하수를 영어로 ‘Milky Way‘라고 한다)을 극복하고 '밤하늘의 등뼈'를 뛰어넘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라고 감탄하고 있다.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기원전 500년경~기원전 428년경)는 고대 그리스 시대 소아시아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이오니아의 클라조메내(오늘날 튀르키예 이즈미르 인근) 출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이다.
그는 비교적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오랜 여행을 마친 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의 집은 이미 폐허로 변해버린 뒤였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아낙사고라스가 폐허로 변한 집 앞에서 “이곳이 폐허로 변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리 되었겠지.”라고 말했다고 기록하였다.
아낙사고라스는 천체와 여러 자연 현상에 대해 관찰에 입각한 설명을 시도하였는데, 예를 들어 태양은 펠로폰네소스보다 더 큰 불타는 덩어리라고 하였고, 달도 보통 물질로 만들어진 하나의 장소이며 달이 빛을 내는 것은 태양빛이 반사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아낙사고라스의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경죄로 여겼고, 결국 아낙사고라스는 추방되었으며, 트로아스의 영토였던 람파스카쿠스로 건너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아낙사고라스가 불경죄로 몰린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은 아낙사고라스를 공격함으로써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고 한다.
역사나 철학 책을 보면 탈레스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아낙사고라스로 이어지는 그리스의 위대한 과학자들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라고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옛 이오니아인들의 전통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그리스 사조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도리어 현대 과학과 더 잘 어울린다.
칼 세이건은 “이오니아의 과학자들이 강하게 영향을 준 시대가 겨우 200~300년밖에 이어지지 못했음은 이오니아의 각성기와 이탈리아의 부흥기(르네상스) 사이에 태어나서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피타고라스
사모스와 관련된 인물들 중에서 후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70년~기원전 495년)일 것이다. 그는 기원전 6세기의 폴리크라테스와 동시대 인물이다. 피타고라스는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으며, 아마도 어린 시절 이집트를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학식을 닦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피타고라스는 최초로 '철학'을 말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플리우스의 참주 레온이 피타고라스에게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보자, 피타고라스는 아래와 같이 말하며 자신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er, 철학자)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인생은 축제와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상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서 축제에 가고, 어떤 사람들은 장사를 하러 가지만,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구경하는 사람들로서 참석한다. 그렇듯이 인생에서는 노예와 같은 사람들은 명성과 이득의 사냥꾼으로 자라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들은 진리의 사냥꾼으로 자라게 된다."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추론한 최초의 인물이고,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우주를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천체라고 주장했으며, 그가 만든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을 통해 완벽한 현실 즉 신의 영역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피타고라스 학파는 실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수학자였으며 철두철미한 신비주의자였다. 약간의 지나친 혹평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버틀런드 러셀(Bertrand Russel)은 피타고라스학파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새 종교를 창시했는데, 그것은 영혼의 이주성(transmigration)과 콩 섭취의 죄악성에 그 핵심 교의를 둔 일종의 밀의 종교였다. 그의 종교는 교단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그 교인들이 여기저기 국가의 권력층에 끼어들었고, 드디어 성인들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콩 맛을 잊지 못하고 안달하다가 결국에는 교의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모든 면이 동일한 정다각형으로 만들어진 삼차원적 구조물, 즉 정다면체에 특별히 매료돼 있었다고 한다. 정다면체는 오로지 다섯 가지만 가능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면이 정오각형으로 구성된 정십이면체 코스모스의 신비와 연관시키면서 그에 관한 지식을 위험한 것으로서 일반인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로 간주했다고 한다.
나머지 네 종류의 정다면체들을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구성하는 '4대 원소'로 여겼던 흙, 불, 공기, 물과 연관시켰으므로 정십이면체와 연관시킬 수 있는 대상이란 결국 하늘(내지 우주)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만물의 근원을 수, 특히 정수라고 보았고 세상의 만물은 모두 정수의 비율로 표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리수만 인정하고 그렇게 표현할 수 없는 무리수(예를 들어 루트2)에 대해서는 모종의 위협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무리수의 존재가 그들 세계관의 불합리성과 오류를 암시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구를 완벽한 존재로 여겼는데, 표면에 있는 모든 점들이 중심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그 완벽성의 근거로 삼았던 것 같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원 또한 완전한 도형이었고, 행성들도 원형의 궤도 위를 언제나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자연에 수학적인 근본 얼개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과학적 사고를 부흥시켰지만, 과학을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로 여기고 실험을 천시하였으며 신비주의를 용인하였다.
그로 인해 실용적 가치를 얕잡아 보는 풍조가 고대 사회에 만연하고 이오니아의 자유로운 사상도 그 이후로 죽어버렸다고 한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벤저민 패링턴은 고대 과학의 쇠퇴 이유를 노예 제도에서 찾고 있다. 이오니아의 중상주의적 전통은 과학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노예 경제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육체노동은 노예들의 몫이고 과학실험도 육체노동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과학은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
지구가 하나의 행성이며 지구인은 우주 시민이라는 생각은 피타고라스 이후 3세기가 지난 뒤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아리스타르코스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오니아의 마지막 과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에 와서 지적 깨달음의 중심지가 위대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이미 이동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타코스(Aristarchus of Samos, 기원전 310년~기원전 230년)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일했으며, 세계에서 제일 먼저 지동설을 믿은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기하학을 응용하여 태양이나 달의 크기를 처음으로 계산하였다. 그는 이집트에서 지구의 둥근 크기를 관측하였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제자로는 히파르코스가 알려져 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월식을 보면서 달과 지구의 크기의 비를 알아냈고, 그것을 활용해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의 비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의 비를 구해냈다. 그리고 당시 아리스타르코스의 친구였던 아리스토테네스가 지구의 크기를 알아냄으로써 결국 태양, 달, 지구의 크기와 그 사이의 거리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계산 결과에서 볼 때 태양은 정말 압도적으로 컸다. 따라서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보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지구 궤도 중심에 태양을 놓았고 지구가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하는 동시에 태양을 1년에 한 번씩 공전한다고 가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를 태양 중심 우주관을 “복귀시킨 사람이며 입증한 사람”이라고 기술했지 태양 중심 우주관의 창시자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근세 이후의 천문학자들
윌리엄 허셜
프레더릭 윌리엄 허셜(Frederick William Herschel, 1738년 11월 15일~1822년 8월 25일)은 독일에서 태어난 천문학자, 수학자이자 작곡가이다. 30대 중반 이후에는 천문학에 매진했는데, 그는 천왕성과 그 위성인 티타니아와 오베론을 발견했고, 후에 토성의 두 위성인 미마스와 엔셀라두스를 발견하는 등 천문학에서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1785년 허셜은 '무한한 우주는 별의 집단인 은하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 이루어진다'는 우주의 기원에 관한 이론인 우주 생성론(cosmogony)을 정립했고, 아직도 이 틀은 유지되고 있다.
그는 별들의 분포를 지도로 작성했는데 그 지도에는 은하수의 띠가 흐르는 평면 안에서 어느 방향으로 보든지 비슷한 수의 별들이 늘어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지구가 은하수 은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할로 섀플리
미국의 미주리 주 출신 할로 섀플리(Harlow Shapley, 1885년 11월 2일~1972년 10월 20일)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구상 성단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을 새로이 고안해 냈다.
섀플러는 구상 성단에서 특정한 패턴으로 밝기가 변화하는 별을 찾아내고 그 변광 주기에서 그 별의 원래 밝기를 추정한 다음 겉보기 밝기와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그 별까지의, 즉 구상 성단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100여 개에 이르는 구상 성단들의 거리를 알아낸 다음 이를 3차원적 분포를 조사해서 이를 바탕으로 1915년 “태양계는 은하의 중심이 아니라 은하의 외진 변방에 있다”라는 참으로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 할로 섀플리(영어: Harlow Shapley, 1885년 11월 2일 ~ 1972년 10월 20일)는 미국의 천문학자이다. 1885년 11월 2일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태어났다. 미주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천문학 박사 과정을 헨리 노리스 러셀 아래서 밟았다. 1914년 윌슨 산 천문대원, 1921~1950년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장을 지냈다.
윌리엄 허블
천문학자들은 20세기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코스모스에는 오직 하나의 은하, 즉 우리 은하수 은하만 있다고 믿었다.
이미 그전에 여러 학자들이 세련된 나선 형태의 빛을 발하는 성운들을 찾아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선형 성운은 은하수 은하 내부에서 중력 수축 중에 있는 성간운이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나선형 성운까지의 거리 측정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었는데, 에드윈 파월 허블(영어: Edwin Powell Hubble, 1889년 11월 20일 ~ 1953년 9월 28일)은 1924년 안드로메다 성운(M31)이 어림잡아 200만 광년이 조금 넘는 아주 먼 거리에 있다고 규명했고 이에 따라 나선형 성운 M31은 우리 우주에 속하지 않는 어엿한 하나의 은하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 허블은 1921년 경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하여 우주의 크기를 재었다. 이 발견은 후에 할로 섀플리와 히버 커티스의 대논쟁을 종결하는 데 근거로 쓰였다. 그는 1929년 경 은하를 관측하여 스펙트럼의 선에 나타나는 적색 편이를 시선속도라고 해석하고, 후퇴하는 속도가 은하 간 거리에 비례한다는 허블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여 이후 빅뱅 이론의 기초가 된다. 그의 발견 때문에 그는 여러 영예를 누렸다. 허블 우주 망원경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칼 세이건은 다음과 같이 이 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아리스타르코스 이래 과학자들의 임무는 우주 드라마의 중심 무대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한 발씩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물러서기는 계속됐다.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과 대면하게 될 때마다 우주에서 인류의 지위는 점점 강등됐다.
하지만 우리가 정녕 코스모스와 겨루고자 한다면 먼저 겨룸의 상대인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위상과 위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주변을 개선할 수 있는 필수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성 지구가 우주에서 중요한 존재로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지구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와 던져진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답변만이 우주에서 지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인류가 하나의 생명 종으로서 그 유년기부터 품어 왔던 질문을 가슴에 안고 우주 항해에 첫발을 내디딘 지 이미 오래됐다.
별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탐험의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나그네로 시작했으며 나그네로 남아 있다. 인류는 우주의 해안에서 충분히 긴 시간을 꾸물대며 꿈을 키워 왔다. 이제야 비로소 별들을 향해 돛을 올릴 준비가 끝난 셈이다.“
<8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