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는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에드워드 핼릿 테드 카(Edward Hallett Ted Carr, 1892년~1982년)의 대표적인 역사철학 저서이다. 이 책은 1961년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를 역임하며 케임브리지의 또 다른 역사학자인 'G. M. 트리벨리언‘에 관한 강좌에서 강의한 부분의 원고를 바탕으로 쓰였다.
제1판은 1961년에 출간되었고 제2판은 카의 사후인 1987년에 출간되었다. 카의 사망 당시 제2판의 서문만 완성해 놓았기 때문에 ‘까치’ 출판사에서 나온 국내 번역서에는 제2판의 서문이 추가되어 있다.
E. H. 카는 1892년 6월 28일, 영국의 중산층 집에서 태어났다. 머천트 테일러스 스쿨을 나왔고, 1911년~191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1916년부터 20년간 외교관으로 활약하였다. 1936년 웨일스 대학교 교수로서 국제 정치학을 강의하다가 1947년에 물러났다. 1941년부터 1946년까지는 《타임스》지 부편집인을 지냈다.
그 후 1953년~1955년,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올 컬리지 튜터 겸 펠로우를 역임했고, 1955년~1982년 11월 3일, 별세할 때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펠로우를 역임했다. 국제 연합의 세계 인권 선언의 기초 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20년 CBE훈장을 받았다.
[출처 : 나무위키, 위키백과]
그가 역사학자로서 이름을 떨친 저작은 이 책과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명저인 "20년의 위기(Twenty Years’ Crisis, 1919-1939: An Introduction to Study of International Relations)"지만, 정작 그가 평생을 바친 연구대상은 역사철학이나 국제정치학이 아니라 소련사였다. 그의 4부작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명저로 꼽힌다.
그는 칼 마르크스와 소련의 주요 인물들의 전기를 작성하고 소련에 대한 수정주의 시각을 대두시킨 것으로 유명하며, 국제적으로도 소련 편향적으로 역사를 서술한다고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전두환 정부 때 이적표현물로 지정되었다가 ‘부림 사건’ 피고인들이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면서 이 책도 이적표현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이 책 자체의 내용상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참고로 부림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변호인'에서도 검찰측에서는 이 책을 불온서적이라고 주장하였고, 노무현 대통령(당시 변호사) 역을 맡은 송강호가 이를 반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은, 역사가의 사명은 "실제로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밝혀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년~1886년)의 사실주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1824년 출판된 랑케의 《라틴 및 게르만계 민족의 역사(1494~1514)》(Geschichte der romaenischen und germanschen Voelker von 1494 bis 1514) 서문의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wie es eigentlich gewesen) 사실을 다루고자 했다.'라는 글귀에서 나옴)
랑케 이후 E. H. 카와 동시대를 살았던 역사학자들로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의 저자 아놀드 조셉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CH, 1889년~1975년)와 《서양의 몰락(The decline of the West)》을 지은 독일의 문화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년~1936년), 로빈 조지 콜링우드(Robin George Collingwood, 1889년~1943년) 등을 들 수 있다.
제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역사관은 시대적 위치를 반영한다*
* 아래 제목들은 이해의 편의를 위해 달은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카는 먼저 《케임브리지 근대사(The Cambridge Modern History), 1903》를 처음 기획한 영국의 역사가 액턴 경(John Emerich Edward Dalberg-Acton)과 두 번째로 간행된 《신 케임브리지 근대사(The New Cambridge Modern History), 1957》의 서문을 맡은 조지 클라크 경(Geroge Clark)의 글을 비교한다.
액턴 경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의 특별평의회에 보낸 1896년 10월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19세기가 막 전달하고자 하는 풍부한 지식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록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이다. …… 적절한 분업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최근의 문서들과 국제적인 연구가 낳은 가장 원숙한 결론들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대에 완전한 역사를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정보를 입수할 수 있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으므로 종래까지의 역사를 치워버릴 수 있고 전진의 도정(道程)에서 우리가 도달한 지점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런데 거의 정확하게 60년이 지난 후에 조지 클라크 경은 언젠가 ‘완전한 역사’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액턴과 공동 연구자들의 그러한 신념에 관해서 언급한 다음,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조금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거듭되어 극복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과거의 지식은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사람들을 거쳐 계승되어왔고, 그들에 의해서 '가공되어 왔으며', 따라서 그 어느 것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기본적인 비인격적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연구는 끝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일부 성급한 학자들은 회의주의 안으로 도피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모든 역사적 판단에는 인간과 관점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판단은 저 판단과 마찬가지로 옳으며 따라서 '객관적인' 역사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리 안으로 도피한다.
액턴과 조지 클라크 경의 충돌은 그 두 사람의 발언 사이의 기간 동안 사회에 관한 우리의 견해 전체가 변화했음을 반영한다. 액턴 경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긍정적인 신념과 분명한 자신감을 표명하고 있는 데에 반해 조지 클라크 경은 비트 세대(beat generation, 제2차 세계대전 후 기존 질서에 저항하던 젊은 세대)의 방황과 곤혹스러운 회의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카는, 이처럼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시대적 위치'를 반영하게 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관해서 우리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더욱 폭넓은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19세기 사실 숭배 역사관
19세기는 사실을 숭배하는 위대한 시대였다. 그런 시대 흐름에서 1830년대에 랑케는 올바르게도 역사를 도덕화하는 것에 항의하면서, 역사가의 임무는 ‘실제로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고 그다지 심오하지도 않은 이 격언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열렬히 주장한 실증주의자들(positivists)은 이러한 사실 숭배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선 사실들을 확인하고, 그러고 나서 그것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라고 실증주의자들은 말했다.
영국에서 이러한 역사관은 존 로크와 버트런드 러셀에 이르기까지 영국 철학의 지배적 경향이었던 경험주의적 전통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 인식론은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분리를 전제한다. 즉 사실들은 외부로부터 관찰자에게 들어오는 것이고(수동적) 그의 의식과는 독립해 있다.
그 수용 과정은 수동적이다 : 관찰자는 자료를 수용하고, 그러고 나서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상식적인 역사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확인된 사실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역사가는 생선장수의 좌판 위에 있는 생선처럼 문서나 비문 등에 있는 사실들을 집어들어 집에 가서 자기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그것들을 요리하여 내놓는다. 액턴은 요리 취미가 소박했기 때문에 담백하게 조리하여 내놓고 싶어했다.
이는 역사는 확인된 사실들을 모아 놓고 자기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요리(해석) 하여 내놓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저널리스트 C. P. 스콧의 유명한 격언을 상기시킨다. ‘사실은 신성하며, 의견은 자유롭다(Facts are sacred, opinion(원문은 comment) is free).’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에 대해 카는 반론을 제기한다. 우선 단순한 과거의 모든 사실과 '역사적 사실'은 구별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모든 역사가들에게 똑같은, 역사의 척추를 구성하는 어떤 기초 사실들이 있다. 예를 들어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노르만 군을 이끈 윌리엄이 해럴드의 영국군을 이긴 전투)가 '1066년'에 '헤이스팅스'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견해에는 명심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로, 역사가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이 전투의 연대가 1065년이나 1067년이 아니라 1066년이고, 그리고 장소가 헤이스팅스라는 점을 아는 것은 분명히 중요하다. 하지만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라는 하우스먼(1859~1939 영국의 시인이자 고전학자)의 말처럼 이런 기초 사실들은 단지 역사가의 원료라는 범주에 속한다.
두 번째는, 그 기초적인 사실들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이 사실 자체의 어떤 성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의 선험적 결정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이며 그 순서나 전후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이다. 사실이란 마대와 같아서 그 안에 무엇인가를 넣을 때까지는 서 있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피란델로(이탈리아의 극작가)의 주인공들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 역사의 사실이 된 것은 역사가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결정한 일이다.
탤컷 파슨스(미국의 사회학자) 교수는 과학을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들의 선택체계(a selective system of cognitive orientations to reality)'라고 정의했다. 역사도 바로 그런 것이다. 역사가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딱딱한 속알맹이가 객관적으로 그리고 역사가의 해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믿음(조지 클라크 경의 표현)은 어리석은 오류이지만, 그러나 뿌리 뽑기는 매우 어려운 오류이다.
어떠한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는지는 그 사건을 인용하면서 의지했던 명제나 새석을 다른 역사가들이 타당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인정해주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그것의 지위는 해석(interpretation)의 문제에 좌우될 것이다. 이 해석이라는 요소는 모든 역사의 사실에 개입한다.
고대와 중세의 역사의 경우는, ’페르시아 전쟁 시기의 그리스‘를 예를 들면, 알려져 있는 소수의 선택된 사실이 살아남은 역사의 사실 전부(the facts of history)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에 대한 성가신 구별은 사라진다. 그 시대를 연구한 J. B. 베리(John Bagnell Bury, 1861-1927 영국 역사가)가 말했듯이 '고대사와 중세사의 기록은 빈틈투성이이다.’
그러나 주요한 곤란은 빈틈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그림에 결함이 있는 이유는 주로 수많은 조각들이 우연히 분실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대체로 소수의 아테네 시민에 의해서 그렸다는 것이다. 또한 중세사 책에서 중세인들이 종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은 종교 이론과 활동 전문가인 연대기 편찬자들이 우리를 위해서 선택해 준 것이다.
중세사 연구자인 G. 배러클러프(Geoffrey Barraclough, 1908-1984 영국의 역사가)도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엄격히 말하면 결코 사실 그것이 아니라 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다.’라고 말한다.
그에 반해, 근대사가의 경우는, 리턴 스트레이치 (Lytton Strachey, 1880-1932 영국의 전기 작가)가 ‘무지는 역사가의 첫 번째 필수품이다. 단순화시키고 명료하게 만드는, 또한 선택하게도 하고 빼버리기도 하는 그런 무지 말이다.’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던, 고대사나 중세사가들이 누린 이러한 무지의 여러 이점들을 결코 즐기지 못한다. 그는 이 필수적인 무지를 스스로 계발해야만 한다.
카는 “그는 소수의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하여 그것들을 역사의 사실로 전환시켜야 함과 동시에 중요하지 않은 수많은 비역사적 사실을 버려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역사란 ‘논박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을 최대한 편집’하는 것이라는 19세기의 이단론(heresy)을 그대로 뒤집어 놓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이단론에 굴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고약한 직업인 역사를 포기하고 우표 수집이라든가 그 밖의 다른 고물 수집에 착수하거나 아니면 결국에는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 이단론은 사실의 바다 속에 흔적도 없이 가라앉은 허섭스레기들에 관해서 더 많이 알게 된 자칭 역사가들의 세세하게 전문화된 논문들을 점점 더 엄청나게 양산시켜 왔다.
액턴 경은 초기의 한 논문에서 자신의 스승인 될링거 교수(1799~1890)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 '그분은 불완전한 자료로는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분에게 자료들은 항상 불완전했다.' 또한 그는 그의 사망 직후에 출간된 《케임브리지 근대사》 1권 서문에서 “역사가를 압박하고 있는 요구들은 ‘역사가에게 학자가 아니라 백과사전 편찬자가 되라고 위협하고 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문서들은 스스로 역사를 구성하지 않는다
19세기의 사실 숭배 역사관은 ‘문서들’에 대한 숭배로 완성되었고 정당화되었다. 문서들은 사실의 신전 안에 있는 ‘약속의 상자(The Ark of the Covenant)‘ (모세의 십계명 석판을 넣어둔 상자)였다.
그러나 카는 ”이 모두는 역사가가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해독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가는 문서 안에 있건 없건 사실들을 처리해야만 하며,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것들을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슈트레제만의 유산’을 든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장관이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 1878~1929)이 사망했을 때, 그는 자신이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던 6년간(1923~1929)의 시기와 연관된 300 상자 분량의 엄청난 문서들을 남겼다. 이를 ‘베른하르트’가 추려 《슈트레제만의 유산》이라는 표제로 3권짜리 방대한 책을 펴냈다.
그리고 그 문서들은 1945년에 영국과 미국 정부의 수중에 들어왔다. 슈트레제만이 사망했을 때 그의 서방정책은 일련의 놀라운 성공, 즉 로카르노 협정,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 도즈 안과 영 안 및 미국의 차관, 라인란트 점령 연합국의 철수 등을 거둔 곳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에 관한 자료들은 당연히 베른하르트의 사료선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이후 그의 이름은 독일에서 잊혀지는 신세가 되었는데, 1935년에 영국 출판업자가 독일 번역사 서턴을 통해 베른하르트의 책을 3분의 1 정도로 축약해 출간했다. 여기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들 중 일부를 생략했다고 했는데, 그로 인해 슈트레제만의 동방 정책이나 소련의 역할은 훨씬 더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슈트레제만은 소련과의 관계에 훨씬 더 꾸준하고 정성을 다해 관심을 쏟았다. 그는 베를린에서 소련 대사와 수백 차례 회담을 하고 치체린(1872~1936, 소련 외교관)과 20여 차례 회담을 벌인 기록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슈트레제만을 그 회담들의 최대 수혜자이자 늘 적절하고 설득력있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 서류들의 선별 과정을 시작한 것은 슈트레제만 자신이었던 것에 유의해야 한다.
물론 사실들과 문서들은 역사가에게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숭배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스스로 역사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원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이 귀찮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미리 준비해놓고 있지 않다.
왜 19세기 역사가들은 역사철학에 무관심했을까?
‘역사철학(philosophy of history)’이라는 용어는 볼테르(1694~1778)가 만든 것인데, 그 이후 이 용어는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서유럽의 지식인들에게 19세기는 자신감과 낙관주의가 한껏 드러내고 있었던 편안한 시기였다. 사실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운 것들이었다. 그러니만큼 그것들에 관해서 귀찮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경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랑케는, '자기가 사실들을 보살피면,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신의 섭리가 보살펴볼 것'이라고 경건하게 믿고 있었다. 또한 부르크하르트(1818~1897 스위스의 역사가)는 ‘우리는 영원한 지혜의 목적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배운 바가 없다’고 약간 비꼬아서 말했다.
A. L. 로즈(Rowse, 1903~1997 영국의 역사가)가 윈스턴 처칠의 《세계의 위기(World Crisis)》가 생명력에서는 트로츠키(1879~1940)의 《러시아 혁명사(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에 견줄 만하지만, ‘그 바탕에 역사철학이 전혀 없다’고 비판한 것처럼(‘The end of an Epoch’에서), 카는 ‘영국의 역사가들은 역사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의미란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카는 이는 '자유방임(laissez-faire)'의 경제학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즉, “누구나 자신만의 일에 힘써라, 그러면 보이지 않는 손이 보편적인 조화를 이끌어줄 것이다”라는 학설처럼 당시 역사가들은 천진난만하게 역사의 사실 그 자체도 보다 더 나은 상태를 향해가는 은혜롭고 무한한 진보의 과정이라는 그 지고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19세기 사실 숭배 역사관에 대한 도전
지난 50년 동안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수많은 진지한 연구들이 있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역사에서의 사실의 우월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학설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독일에서 나왔다. 독일은 19세기 자유주의의 안정적인 지배를 뒤엎는 일에 크게 공헌한 나라였다. 그 도전을 감행한 철학자들은 지금 이름 정도만 남아 있다.
이러한 도전의 횃불은 독일의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로 넘어갔는데, 크로체(B. Croce, 1866~1952, 이탈리아의 철학자, 역사가)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contemporary history)’라고 선언했다. 이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요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19세기 사실주의 역사학자 칼 베커(Carl Lotus Becker, 1873-1945 미국의 역사가) 역시 ‘역사의 사실들은 역사가가 그것을 창조할 때까지는 그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크로체는 콜링우드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콜링우드는 자신이 계획했던 체계적인 저서를 쓰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역사철학에 관한 원고들을 사후에 수집하여 1954년에 출간한 《역사의 개념(The Idea of History)》에서 볼 수 있는 그의 견해는, 역사철학은 ‘과거 그 자체’에 관한 것이라거나 ‘과거 그 자체에 대한 역사가의 사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된 그 두 가지‘에 관한 것이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이다. 그러나 과거의 행동은 만일 역사가가 그것의 배후에 있었던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역사가에게는 죽은 것, 즉 의미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사유의 역사이며, 역사란 사유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역사가가 그 사유를 자신의 정신 속에 재현하는 것이다. 역사가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거의 재구성은 경험적인 증거에 의한다. 그러나 재구성 자체는 경험적인 과정이 아니며 또한 사실들의 단순한 나열일 수도 없다. 실제로는 그 재구성의 과정이 사실들의 선택과 해석을 지배한다.
오크셔트(1901~1990 영국의 정치학자) 교수 역시 ‘역사란 역사가의 경험이다. 역사는 역사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Experience and Its Modes’, 1933).
카는 이러한 엄중한 비판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첫째,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항상 굴절된다.
카는 그 예로 ‘휘그적 전통이 출만한 가정에서 자란’ G. M. 트리벨리언(1876~1962)이 저술한 《앤 여왕 시대의 영국(England under Queen Anne)》은 그의 그런 배경 하에서 쓰였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읽을 때에야만 독자들은 그 책의 완전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해석의 가치를 충실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독자도 역사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콜링우드의 말대로 역사가가 자신이 등장시킨 인물들의 마음속에서 움직인 것을 반드시 자신의 생각 속에서 재현해야 한다면, 이번에는 독자가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반드시 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는 따라서 사실들의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역사가를 먼저 연구(어떤 인물이고 무엇에 전념해 왔는지 등)하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책을 읽을 경우 항상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사실들은 생선장수의 좌판 위에 있는 생선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역사가가 무엇을 잡아올릴 것인가는 대개는 그가 바다의 어느 곳을 선택하여 낚시질을 하는지에, 그리고 어떤 낚시도구를 선택하여 사용하는지에 좌우될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요소들은 그가 잡고자 하는 어종에 따라서 결정된다.
과거를 바라보는 역사가의 관점
두 번째는,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공감(sympathy)’이 아니라 ‘상상적인 이해(imaginative understanding)’라고 말하는 이유는 공감이 동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9세기에 중세사 연구가 빈약했던 이유는 중세의 미신적 신앙들과 거기에서 비롯된 야만행위들이 중세인에 대한 상상적인 이해를 너무나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가령 30년 전쟁에 관한 부르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비난을 들어보자 ‘가톨릭 교리건 프로테스탄트 교리건 종교적 구원을 국가의 보전보다 앞세우는 것은 수치스러운 짓이다.’ 자신의 나라를 수호하려고 살인하는 것은 정당하고 칭송받을 일이지만, 자신의 종교를 수호하려고 살인하는 것은 사악하고 미련한 짓이라고 믿도록 교육받아 온 19세기의 자유주의 역사가가 30년 전쟁에서 싸운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카는 자신이 연구하는 소련에 관한 분야에서, 영어 사용권 국가들의 글들 상당수는,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조차 상대방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상상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망가져 버렸다고 비판한다. 만일 역사가가 자신의 서술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어떤 식으로든 접촉할 수 없다면, 역사는 쓰일 수 없다고 한다.
세 번째로,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에 속하는 사람이며, 인간의 실존조건 때문에 자신의 시대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민주주의, 제국, 전쟁, 혁명-은 그 시대의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과거의 단어들을 쓴다고 해서 과거로 숨어 들어갈 수는 없다. 또한 새로운 사건의 발생과 사회와 세력 균형의 변화로 인해 그 이전 과거의 인물과 사건들을 바라보는 역사가들의 태도도 바뀔 수밖에 없다.
트레버-로퍼(1914~2003 영국의 역사가) 교수는, 역사가는 ‘과거를 사랑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카는 차라리 “‘과거의 죽은 손’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자”는 문구를 선택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가의 기능은 그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목적 적합성 역사관의 위험
하지만 콜링우드의 역사관에도 몇몇 위험들이 존재한다. 역사를 구성하는 데에서 역사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만일 그것을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면, 모든 객관적인 역사를 배제시키는 것이 되기 쉽다: 즉 역사는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 되고 만다. 실제로 콜링우드는 그의 책의 편집자가 인용한 미발표 노트를 보면, 한때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던 것처럼 보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았고, 티유몽은 17세기 프랑스인의 관점에서, 기번은 18세기 영국인의 관점에서, 몸젠은 19세기 독일인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았다. 어느 것이 옳은 관점인가를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각각의 관점은 그것을 선택한 사람에게 가능한, 유일했던 관점이었다.
이런 관점은 역사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이론 대신에, 역사의 의미는 무한하다는 이론-결국 모든 의미가 거의 똑같다는-을 얻게 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원칙적으로 객관적인 해석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만일 역사가가 반드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눈을 통해서 자신이 연구하는 역사적 시대를 보아야만 하고, 또한 현재의 문제들의 열쇠로서 과거의 문제들을 연구해야만 한다면, 그 역사가는 사실에 관한 순전히 실용적인 견해에 빠져서 올바른 해석의 기준은 현재의 어떤 목적에 대한 그 해석의 적합성(suitability)이라고 주장하게 되지는 않을까? 이렇게 되면 역사의 사실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해석이 전부가 된다.
니체는 이 원칙을 이미 이렇게 천명했다(‘Beyond Good and Evil’).
어떤 의견이 오류이므로 우리가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생을 고취하고, 생을 유지하며, 종을 보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종을 창조하는가에 있다.
오늘날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의무는?
자신의 사실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역사가의 의무는 자신의 사실이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주제나 자신의 해석과 연관되어 있는 내지 연관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실들을 그려내도록 애써야 한다. 동시에 역사가는 역사의 생명원인 해석을 제거하면 안 된다.
역사의 사실에 대한 역사가의 관계를 검토해온 우리는 스킬라(메시나 해협의 이탈리아 해안 쪽에 있는 큰 바위 혹은 그 바위에 살던 머리가 6개, 다리가 12개인 여자 괴물)와 카리브디스(시칠리아 섬 앞바다의 위험한 소용돌이)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항해하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역사란 사실을 객관적으로 편찬하는 것이며 해석보다는 사실이 무조건 우월하다고 간주하는 역사이론과 역사란 해석과정을 통해서 역사의 사실들을 확정하고 지배하는 역사가의 정신의 주관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이론 또는 과거에 무게중심을 두는 역사관과 현재에 무게중심을 두는 역사관 사이에서 항해하는 그런 상태 말이다.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드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하고도 무의식적일 수 있는 변화들을 겪는다.
또한 역사가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에서도 이러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며,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카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d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고 말하고 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