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사회와 개인
제2장 사회와 개인
사회와 개인은 분리될 수 있는가
사회 또는 개인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암탉과 달걀에 관한 문제와 같다. 사회와 개인은 분리될 수 없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고 보완적인 것이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그 자신만으로 전체가 되는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부분이며, 본토의 일부이다(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ach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라는 것은 존 던(John Donne, 1573~1631, 영국의 시인이자 성공회 사제)의 유명한 말이다(“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라는 산문집 가운데 “Meditation XVII” 중에서).
이와는 반대로, 고전적인 개인주의자인 J. S.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영국의 철학자, 경제학자)은 ‘인간은 함께 모이는 경우라도 다른 종류의 실체로 바뀌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사의 혹은 역사 이전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 사회에 의해서 형성된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가 성장해 온 집단에서 사회적으로 취득되고 환경도 인간의 사유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에 기여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신화가 계속해서 매력을 끄는 것은 그것이 사회로부터 독립한 개인을 상상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하고 있다. 그는 추상적인 개인이 아니라 요크 지방에서 온 영국인이고, '성경'을 들고 매일 영국의 신에게 기도한다. 결국 그 섬에서 다시 ‘프라이데이’라는 충실한 하인과 함께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와 연관된 또 하나의 신화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Devils)》(1871~1872)에서 자신의 완전한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살하는 ‘키릴로프’의 신화이다.
자살은 개인에게 허용되는, 완전하게 자유로운 유일한 행위이다. 그 밖의 모든 행위에는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내포되어 있다.*
*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켐(David Émile Durkheim, 1858~1917)은, 《사회분업론, 1893》과 《자살론, 1897》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의 상태를 표현하려고 ‘아노미’(anomie: 보통 사회적 일탈의 뜻으로 사용됨)라는 단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살 또한 결코 사회적인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근대 서구의 개인주의 숭배
선진 근대 사회가 될수록,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그리고 사회가 그 기회를 제공하는 개인적인 기술과 직업이 훨씬 다양해지면서 개별화(individualization)가 심화되는 것은 필연적 산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개별화의 과정과 증대하고 있는 사회의 힘이나 응집력, 이 둘 사이에 대립항을 설정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일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며, 서로를 조건 짓는다.
개별 구성원들의 성격과 사유를 형성시키며 그들 사이에 일정한 정도의 통합성과 균일성을 만드는 ‘근대적인 민족공동체의 힘’이 원시적인 부족공동체의 그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약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생물학적 차이에 기초하여 민족성을 이해하는 낡은 관념은 오래전에 타파되었지만 사회와 교육의 민족적 배경이 다른 데에서 비롯되는 민족성의 차이는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차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혹은 달리 말하자면 사회가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태도에서의 차이‘로 나타난다.
개인주의 숭배는 근대의 역사적 신화 중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신화이다.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그 제2부에 “개인의 발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 책의 설명에 따르면, 이전까지 ‘오직 어느 한 종족, 주민, 집단, 가족 혹은 단체의 구성원으로서만 자신을 의식해 왔던’ 인간은 그 시기에 비로소 ‘정신적으로 개인이 되었으며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 후의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발흥, 산업혁명의 발발 그리고 자유방임의 교리 등도 개인 숭배와 연관이 있었다. 또한 개인주의는 공리주의의 기초였다. 몰리(John Morley 1838~1923 영국의 정치가)는 《타협론(On Compromise)》에서 개인주의와 공리주의를 ‘인간의 행복과 번영의 종교’라고 불렀다.
카는 이러한 개별화의 확대는 전진하고 있는 문명의 통상적인 과정이었고,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에서 생산과 분배는 대부분 개인 단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이데올로기가 열렬히 강조한 것은 그 체제 안에서의 개인의 주도적 역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 전체는 역사 발전의 어느 특정한 단계를 대표하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이었으므로, 사회에 대한 개인의 반역이라든가 사회적 속박으로부터의 개인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설명될 수는 없다고 한다.
이제 많은 지표들(대중 민주주의, 경제가 집단적인 형태로 대체 등)이 시사하고 있듯이 그와 같은 역사의 시기는 종말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서유럽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직도 19세기 자유주의 역사가들이 조장하듯이, 역사를 개인에 의해서 쓰인 개인에 관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역사관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역사가의 지식은 그만의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그리고 수많은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그 지식의 축적에 참여했을 것이다.
역사가는 어느 정도까지 단일한 개인들이며 어느 정도까지 사회와 시대의 산물인가
역사가도 한 사람의 개인이다. 그 역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그 사회의 의식적, 무의식적 대변자이다. 역사가는 이러한 자격으로 역사적 과거의 사실을 연구한다.
역사의 경로를 '움직이는 행렬(moving procession)' 이라고 말한다. 역사가는 다만 그 행렬의 어느 한 부분에 끼어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 돋보이지 않는 여느 인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행렬의 여러 부분들의 상대적인 위치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가 있는 그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
이는 고대사의 고전들인 조지 그로트(Geroge Grote 1794~1871 영국의 역사가)의 《그리스사(History of Greece)》와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 1817~1903 독일의 역사가)의 《로마사(Römische Geschichte)》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1840년대에 글을 쓴 계몽적이고 급진적인 은행가 그로트는 아테네 민주정을 이상화한 저서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그리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영국 중간계급의 열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거기에서 페리클레스는 벤담적인 개혁가로, 아테네 인들은 일시적으로 들뜬 상태에서 제국을 성취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아테네의 노예제 문제를 무시한 것은 그가 속했던 중간계급이 영국의 새로운 공장 노동자 계급의 문제에 대해 대처할 수 없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몸젠은 굴욕적이며 지리멸렬한 1848~1849년의 독일 혁명에 환멸을 느낀 독일의 자유주의자였다. 현실정치(Realpolitik)라는 용어와 개념이 탄생했던 시기에 글을 썼던 몸젠은 독일인들의 정치적 열망을 실현시켜 줄 강력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그가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를 이상화한 것은 그러한 열망의 산물이다.
또한 법률가이자 정치가인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가 쓸모없는 수다쟁이이며 교활하고 우유부단한 인간으로 그려진 것은, 당시 1848년 프랑크푸르트 바울 성당 국민의회 토론회장에서 주로 대학교수, 교사 또는 법률가로 구성된 각 연방 대표들이 그 해 3월혁명에 근거한 자유주의적 개혁과 통일 문제를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의 로마사는 공화정까지만 쓰여지고 로마 제국의 역사는 쓰여지지 않았는데, 이는 몸젠에게 있어서 언젠가 강력한 인물이 출현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당시에는 아직 현실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이 문제를 로마의 무대로 투사해 보도록 촉구하지 않아서이다.
또한 1차 대전 이후 학계에 등장한 가장 위대한 영국의 역사가라고 간주하고 있는 루이스 네이미어(Lewis Namier 1888~1960 폴란드 출신 영국 역사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였는데, 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가 파산하고 1920년대에 보수주의 사고방식이 부활하던 시기에 그가 영국사 분야에서 그런 보수주의 정신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 두 분야를 주제로 삼아 연구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는 영국에서 아직 프랑스혁명과 자유주의 이념이 전혀 물들어 있지 않던 조지 3세(재위기간 1760~1820)의 즉위 당시이고, 또 하나는 자유주의 희망들을 좌절시킨 1848년의 유럽 혁명(네이미어는 참담하게 실패한 그 혁명을 ‘지식인의 혁명(revolution of the intellectuals)’이라 불렀다) 시기이다.
이런 그에 대해 1953년 ‘The Times Literary Supplement’에 게재된 익명의 논설에서, 누군가가 “네이미어는 역사에서 정신을 제거했다”고 비난했는데, 그는 한 논문에서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이 나라에서 정치 일반에 관한 논의가 ‘지루하게 침체된 것’에 관해서 그리고 오늘에 와서는 아예 부재하게 된 것에 관해서 불평하고 있다. (…) 하지만 나에게는 이러한 태도가 보다 깊어지는 국민적 성숙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따라서 나는 그러한 태도가 정치철학의 작용에 의해서 방해받지 말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카는 그의 목적은 다만 두 가지의 중요한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첫째, 역사가 자신이 연구에 들어가면서 가지게 되는 입장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둘째, 그 입장 자체는 어떤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다. 즉 세뇌하는 사람의 머리 자체가 세뇌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가는 역사책을 쓰기 이전에 이미 역사의 산물이다.
급변하는 일련의 사회 질서를 저서에 반영한 사례
급속한 변화의 시기의 역사가들 중에는 하나의 사회, 하나의 사회질서가 아니라 일련의 다른 질서들을 자신의 저술 속에서 반영한 사람도 있었는데, 위대한 독일의 역사가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 1862~1954)가 가장 좋은 사례이다.
그는 자신의 생애와 연구활동 기간이 유례없이 길었기 때문에 그동안 조국의 운명 안에서 전개된 일련의 혁명적이고도 파국적인 변화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사실상 세 사람 내지 네 사람의 다른 마이네케를 보게 된다.
먼저 1907년에 발행된 《세계시민주의와 민족국가(Weltbürgertum und Nationalstaat)》의 마이네케는 비스마르크 제국에서 독일의 민족적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자신있게 발견하고 있으며, 민족주의를 보편주의의 최상의 형태와 동일시켰다.
이후 1925년에 출판한 《국가적 이성의 관념(Die Idee der Staatsträson)》에서의 마이네케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분열되고 당황한 정신상태를 대변하고 있다. 정치의 세계는 국가 이성과 도덕성이 대책 없이 충돌하는 전투장으로 변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나치의 지배 속에서 학문적 영예를 상실한 1936년에 출간된 《역사주의의 성립(Die Entstehung des Historismus)》을 통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는 역사주의를 배격하고,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것과 초이성적인 절대자 사이에서 불안한 상태로 동요하며 절망적으로 울부짖는다.
그러다가 노년의 마이네케는 1946년에 출간된 《독일의 파국(Die Deutsche Katastrophe)》이라는 저서를 통해 역사란 맹목적일 뿐만 아니라 냉혹하기도 한 우연에 좌우된다는 믿음 속으로 맥없이 빠져들어갔다.
카는 이와 유사한 영국의 사례로 버터필드 교수를 든다. 그는 1930년대에 자유당이 영국 정치의 실세로서 막 궤멸했을 당시 《휘그의 역사적 해석(The Whig Interpretation of History)》이라는 책에서 휘그적 해석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한 눈을 현재 위에 올려놓고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역사에서 모든 죄악과 궤변의 원천이다. 그런 연구야말로 ‘비역사적’이라는 말의 본질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그 후 우상 파괴의 유행이 지나가고 윈스턴 처칠 밑에서 휘그적 전통 속에 체현되어 있는 입헌적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치러졌다고 하는 전쟁에 돌입하자, 그는 입장을 바꾸어 1944년에 출간된 《영국인과 그들의 역사(The Englishman and His History)》에서는 휘그적 역사해석은 ‘영국적인 해석이고 ’현재와 과거의 결합‘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카는 이 사례들을 통해 사회 안에서 연구하고 있는 역사가가 그 사회를 자신의 연구에 얼마나 면밀하게 반영하는 가를 보여준다고 한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들 때, 저자의 이름만 보지 말고 출간일자나 집필일자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똑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한 역사가가 똑같은 책을 두 권 쓸 수 없다는 말도 똑같은 이유에서 진리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역사 서술의 주요한 경향'을 살펴보더라도 역사가가 어느 정도까지 사회의 산물인지가 훨씬 더 분명해진다. 19세기에 영국의 역사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역사과정이 진보의 원리를 증명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접어들게 되자, 역사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이단이 되어 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토인비는 직선적인 역사관을 순환론-쇠퇴하는 사회에 특유한 이데올로기-으로 대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토인비는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을 읽고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토인비가 실패한 후, 영국의 역사가들 대부분은 ‘역사에는 일반적인 패턴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만족스러워했다(H. A. L. 피셔의 《A History of Europe》 서문).
네덜란드의 역사가 피터 가일(Pieter Geyle 1887~1966) 역시 《나폴레옹의 공과(Napoleon For and Against)》에서, 나폴레옹에 관한 19세기 프랑스 역사가들의 일련의 평가들이 그 세기에 프랑스의 정치적 상태와 정치사상에서 나타난 변화와 갈등의 패턴을 어떻게 반영했는가를 보여준다.
카는 “자신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그 상황에 자신이 어느 정도 포박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그 분별성(sensitivity)에 의해서 결정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카는 “여러분은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 역사가는 개인이면서 또한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 두 가지 관점에서 역사가를 바라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역사가의 연구 대상은 개인의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힘의 작용인가?
이사야 벌린 경(Isaiah Berlin 1909~1997 영국의 철학자)은 《역사적 필연성(Historical Inevitability)》이라는 글에서, 역사의 결정적인 요소는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비인격적인 힘들(vast impersonal forces)’(T. S. 엘리엇의 작품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조롱하고 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격과 행동이라는, ‘나쁜 존 왕과 좋은 여왕 베스’ 역사 이론(the Bad King John and Good Queen Bess theory of history)은 유구한 족보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천재성을 역사의 창조력으로 간주하려는 욕망은 역사의식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서사시를 호메로스라고 불리는 어느 음유시인의 업적으로, 그들의 법률과 제도는 리쿠르고스(기원전 9세기경의 스파르타의 위대한 정치가)나 솔론(고대 아테네의 정치가)이라는 사람의 업적으로 돌렸다. 르네상스 시기에도 그리스의 전기작가인 플루타르코스가 고대의 역사가들보다 훨씬 더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론은 사회가 보다 단순하고 공적인 일들을 소수의 유명한 개인들이 수행하는 시절에는 어느 정도 그럴듯했지만, 우리 시대의 더욱 복잡한 사회에 대해서는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된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웨지우드(C. Veronica Wedgwood 1910~1997 영국의 여류 역사가)는 자신의 저서 《The King’s Peace》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행동은 집단이나 계급으로서의 행동보다 나에게 더욱 흥미롭다. 역사는 이런저런 편견으로 쓰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더 잘못될 것도, 덜 잘못될 것도 없다. 그 인물들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그리고 어째서 그들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이해해보려고 한 것이다.’
그녀와 마찬가지 생각을 하는 학자들도 많다. 로즈 박사의 말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체제는 제임스 1세가 그 체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너졌고, 17세기의 영국 혁명은 스튜어트 왕조의 처음 두 왕의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최근의 시대에서는 공산주의의 기원과 성격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칼 마르크스의 창작품(the brain-child of Karl Marx)’이라고 부르거나, 볼셰비키 혁명의 원인을 니콜라이 2세의 어리석음 때문에 또는 독일의 자금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그리고 두 세계대전의 원인을 빌헬름 2세와 히틀러의 개인적인 사악함이 빚어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카는 웨지우드의 말에 두 가지 주장이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첫째,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행동은 집단이나 계급의 성원으로서의 행동과 구별되는데, 역사가가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이든 정당하게 선택하여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행동에 대한 연구는 그 행위의 의식적인 동기를 연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카는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인간을 개인으로서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구별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인간을 개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전기이며, 인간을 전체의 일부로 취급하는 것은 역사이며, 훌륭한 전기는 나쁜 역사를 만든다”는 말을 인용한다.
두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인간은 반드시 자신들이 완전히 의식하거나 기꺼이 인정하는 동기에 따라서만 행동하지는 않으며, 또는 습관적으로라도 그렇게 행동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따라서 무의식적인 동기나 본인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동기를 통찰하지 않겠다는 것은 일부러 한쪽 눈을 감고서 일하겠다는 식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한다.
역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인간이다
카는 그렇다고 역사가 개인들의 의식적인 행동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그들의 무의식적인 의지를 이끄는 외부의 어떤 전지전능한 힘(신의 섭리, 세계 정신, 명백한 운명 등과 같은 추상적인 힘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견해를 무조건 찬성한다고 한다.
“역사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지도 않으며 전투를 벌이지도 않는다.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오히려 인간, 즉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이 문제에 관해 카는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첫째, 역사란 상당한 정도까지 수의 문제이다. 먼저 ‘프랑스 혁명’에 나오는 칼라일(Thomas Carlyle)의 감동적인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고 한다.
2,500만 명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굶주림과 헐벗음과 악몽 같은 억압: 바로 이것이, 철학자인 체하는 변호사나 부유한 상인이나 지방귀족의 상처 입은 자만심이라든가 퇴짜 맞은 철학이 아닌 바로 이것이 프랑스혁명의 주요한 동인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그와 같은 혁명들이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혹은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 ‘정치는 대중이 있는 곳에서 시작된다. 수천 명이 있는 곳이 아니라 수백만 명이 있는 것, 그곳이 진정한 정치가 시작되는 곳이다. (‘Selected Works’)
그들이 말하는 수백만은 인격이 있는 개인이며, 다소간에 무의식적으로 함께 행동함으로써 하나의 사회세력을 형성했던 개인들이다. 모든 효과적인 운동에는 소수의 지도자들과 다수의 추종자들이 있다. 역사에서 수는 중요하다.
둘째, 역사가 한 개인의 의도적인 행위로 인해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학파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개인적인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는 흔히 그 행위자가 의도하거나 요구한 것이 아니며, 더구나 다른 어떤 개인이 의도하거나 요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애덤 스미스를 본따서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지만, 역사에 남을 인류의 보편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서는 무의식적인 도구가 된다’고 말했다.
버터필드 교수도 ‘역사적 사건들의 성격에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역사의 경로를 틀어버리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다.
역사의 사실은 분명히 개인에 관한 사실이지만, 고립된 채 행한 개인의 행동에 관한 사실, 또는 실제적인 동기든 상상적인 동기든 개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움직이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동기에 관한 사실은 역사의 사실이 아니다.
역사의 사실이란 '사회 속에 있는 개인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실, 그리고 개인의 행동에서 본인들이 의도했던 것과 자주 모순되거나 가끔 상반되는 결과를 생겨나게 하는 사회적 힘들'에 관한 사실이다.
역사에서의 반역자와 위인의 역할
완전히 동질적인 사회는 없다. 모든 사회는 사회적 갈등의 장소이며, 현존하는 권위에 반대입장을 취하는 개인은 그것을 지지하는 개인만큼이나 그 사회의 산물이자 반영물이다.
리처드 2세와 예카테리나 대제가 그 시대의 강력한 사회적 힘을 대변하는 것처럼 거대한 농노반란의 지도자 와트 타일러(~1381 영국 에식스의 기와공)와 푸가초프(1742~1775 러시아 카자흐 기병대 출신) 역시 그들 시대와 나라의 특정한 조건의 산물이었다.
그들을 사회에 저항하는 개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잘못된 단순화이다. 그들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추종한 대중 덕분이며 그들은 사회적 현상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나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의 사회에 대해서 니체보다 더 격렬하고 더 철저하게 반항했던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니체 역시 유럽 사회의, 보다 특수하게는 사회 세력이 강력했던 독일 사회의 직접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1900년)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서구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니체는 기존의 도덕적 세계관이 삶을 옥죄고 있다고 인식했다.
"모든 시대의 현자들은 삶에 대해 같은 결론을 내렸다: 삶이란 의미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상의 황혼》
또한 그는 기독교와 불교를 포함한 종래의 도덕적 사상들을 데카당(퇴폐적인 것)이라 칭하며 비판한다.
"denn Christenthum ist Platonismus für’s Volk"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 사상에 불과하다)《선악의 저편》 서문
니체에게 '신의 죽음'이란 허무주의의 도래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최고가치의 상실과 허무주의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삶의 최고가치가 상실된 상태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니체는 허무주의(Nihilismus)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표가 결여되어 있으며 :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 허무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고 가치들이 탈가치화하는 것" 1887년 《유고》
"이 원숭이들을 보라. 이들은 권력을 원하며, 무엇보다도 권력의 지렛대인 돈을 원한다. 이들 모두는 높은 권좌를 원한다. 그러나 권좌 위에는 똥이 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생겨난 이래, 자신을 비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권위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도덕을 비판한다는 것, 도덕을 문제로 삼고 의문시한다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아침놀*: 도덕적 편견에 대한 생각들 (Morgenröte: Gedanken über die moralischen Vorurteile)》 * '아침놀'은 날이 밝아 올 때 아침 햇살로 하늘이 벌겋게 물드는 현상.
[출처: 위키백과]
한편 역사에서 위인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위인은 한 사람의 개인이지만, 탁월한 개인이기 때문에 현저히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기번은 ‘그 시대에 어울리게 마련인 비범한 인물이 있다는 것, 그리고 크롬웰이나 레츠 같은 천재도 오늘날이라면 눈에 띄지 않은 채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이다’라고 말했다.
그 상반되는 현상에 관해서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프랑스에서의 계급전쟁은 천박한 소인배가 영웅의 옷을 입고 으스댈 수 있는 상황과 관계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나아가 톨스토이는 위인을 '사건에 이름을 붙여주는 꼬리표' 정도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카는 그렇게 위인을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고, 단지 자신이 반대하고 싶은 견해는, 위인을 역사의 밖에 놓아둔 채 그들은 위대하기 때문에 역사에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이다. 그러면서 위인에 대한 헤겔의 고전적인 정의를 인용한다.
그 시대의 위인이란 자기 시대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고, 그 의지가 무엇인지를 그 시대에 전달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행하는 것은 그의 시대의 정수이자 본질이다 ; 그는 자신의 시대를 실현한다.
또한 카는 보다 높은 수준의 창조성은,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처럼 기존 세력의 등에 업혀 위대해진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크롬웰이나 레닌처럼 자신들을 위대하게 만들어준 세력을 형성하는 데에 힘을 쏟은 그런 위대한 인물에게서 발휘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울러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인을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자 대리인이면서 이와 동시에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사유를 변화시키는 사회 세력의 대변자이자 창조자인 탁월한 개인으로 인식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카는 "역사는 하나의 사회적인 과정이며, 개인은 그 과정에 사회적인 존재로서 참여한다. 그러므로 사회와 개인의 대립을 가정하는 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는 “추상적이고 고립적인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 사이의 대화”라고 하면서 이 장을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빌려 마무리한다(‘Judgements on History and Historians’ (1959)).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관한 기록‘이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