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제3장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역사가 과학인지 여부’에 대한 논쟁은 영어에만 특이한 것이다. 다른 모든 유럽에서는 ‘과학(science)’의 동의어에 어김없이 역사가 포함된다. 그러나 영어 사용권 세계에서 이 문제는 그 배후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부터 제기된 논쟁들은 '역사에서의 방법의 문제'에 대한 편리한 입문의 역할을 한다.
19세기 과학 혁명의 반영
과학이 세계에 관한 인간의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육체적인 속성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도 눈부시게 기여했던 18세기말, 그 과학이 사회에 관한 인간의 지식까지도 진전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사회과학 중의 하나인 역사의 개념은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발전했다; 그리고 자연계의 연구에 적용되었던 과학의 방법론이 인간의 문제에 대한 연구에도 적용되었다.
이 시기의 전반부에는 뉴턴적 전통이 우세했다. 사회는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되었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도 후일 ‘기계수학만큼 정확한 인간 행동의 수학’이 조만간 나타나리라고 기대했던 시절을 회상한 적이 있다(‘Portraits from Memory’ (1958)).
그 시절에 다윈은 또 하나의 과학혁명을 이룩했다(‘종의 기원’ 1859년); 그리하여 생물학에서 단서를 얻은 사회과학자들은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윈이 이미 찰스 라이엘(Sir Charles Lyell 1787~1875 영국 지질학자)에 의해 지질학에서 시작된 것을 완성시키는 가운데* 역사를 과학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 1831년 12월 27일 시작한 〈비글호〉의 항해를 떠나기 전에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는 항해의 동반자로 선택한 찰스 다윈에게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 1권을 선물한다. 여기서 라이엘은 ‘과거의 지질 현상은 현재의 자연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으로 알 수 있으며, 과거의 지질 시대의 각종 현상도 현재의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발생했다'는 동일과정설을 채택했고, 이후 찰스 다윈은 5년간의 항해에서 이 책을 탐독하였으며, 그의 진화론이 세상에 나오는데 많은 도움을 준 책이 되었다.
과학은 더 이상 정적이고 초시간적인 어떤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다루는 것이 되었다. 과학에서의 진화는 역사에서의 진보를 확증했고 보완했다.
먼저 사실을 수집하고 그다음에 그것을 해석하라는 '귀납적인 역사방법‘ 역시 같은 맥락이고, 존 베리가 1903년 1월에 있었던 교수 취임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역사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과학(a science, no more and no less)’이라고 표현했을 때 그가 분명히 염두에 두었던 견해도 바로 이것이었다.
과학적 역사 방법론에 대한 반발
하지만 그 이후 50년 동안에 이러한 역사관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제기되었다. 콜링우드는 1930년대에 과학적 연구의 대상인 자연 세계를 역사 세계와 뚜렷이 구분하는 일에 특히 열심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풍조로 인해 그동안 베리의 견해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당시에 깨닫지 못한 것은 그동안에 과학 그 자체가 심원한 혁명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라이엘과 다윈의 방법론은 이제 천문학에서도 수행되어 천문학은 우주는 어떻게 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즉 우주의 역사)를 다루는 학문이 되었다.
게다가 현대 물리학자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조사하는 것은 사실(fact)이 아니라 사건(event)이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가가 100년 전보다는 오늘날에 과학의 세계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법칙의 시대
18세기와 19세기 과학자들은 자연에 관한 여러 법칙들-뉴턴의 운동법칙, 중력의 법칙 등(뉴턴의 ‘프린키피아’ 1687년)-이 발견되어 명확하게 확립되었다고 생각했고, 과학자의 직무는 관찰된 사실로부터 귀납적인 추론 과정을 통해 그러한 법칙들을 더 많이 발견하고 확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연구가 과학적인 지위를 가진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서 똑같은 용어를 사용했고, 자기들도 과학에서와 똑같은 연구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믿었다.
정치경제학자들이 '그레셤(1519~1579 영국의 금융가)의 법칙'과 '애덤 스미스의 시장법칙'(‘국부론’ 1776년)을 가지고 가장 먼저 무대에 등장했다. 버크(1729~1797 영국 정치사상가)는 ‘자연의 법칙이며 신의 법칙인 상업의 법칙’에 호소했다(‘Thoughts and Details on Scarcity’).
이후 맬서스의 인구법칙, 라살레의 임금 철칙 등이 등장했고, 마르크스는 《자본론(Das Kapital)》(1867년)의 서문에서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헨리 버클(Henry Thomas Buckle 1821~1862 영국 정치사상가) 역시 《영국 문명사(History of Civilization in England)》의 결론에서 인간사의 행로에는 ‘보편적이고 일관된 규칙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원리가 스며들어 있다.’는 확신을 표명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말투는 거만할 뿐만 아니라 낡아빠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자연과학자들에게도 대체로 낡아빠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가설과 검증의 방법론
1902년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1854~1912)는 《과학과 가설(La Science et l’hypothèse)》라는 제목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학자들이 제출한 일반 명제들은 그것들이 단순한 정의이거나 또 다른 형태의 용어 사용에 관한 규칙이 아닌 한, 사유의 진전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설이다. 따라서 증명과 수정과 반론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과학자들의 발견과 새로운 지식의 획득이 정확하고 포괄적인 법칙의 확립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연구를 향해 길을 열어주게 될 가설의 제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인정되어 있다. 미국의 표준적인 교과서에서는 과학의 방법을 ‘본질적이고 순환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경험자료, 즉 ‘사실’이라고 추정되는 것의 도움을 빌려서 원리들을 위한 증거를 획득한다 ; 또한 우리는 원리들을 기초로 하여 경험자료를 선택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M. R. Cohen and E. Nagel, Introduction to Logic and Scientific Method (1934))
모든 사유는 관찰에 기초하는 일정한 전제를 받아들이게 마련인데, 그 전제는 과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 사유에 비추어 수정되기 마련이다. 또한 검증이란 어떠한 경우든 그 가설들이 새로운 통찰을 진전시키고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키는 데에서 실제로 유효한지 여부를 가려내는 경험적인 검증이다.
연구 과정에서 역사가가 이용하는 가설의 지위는 과학자가 이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대단히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막스 베버의 유명한 분석을 그전에는 법칙이라고 불렀을지 몰라고 오늘날에는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1900년대 초 유명한 경제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1863~1941)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해 버린 사람들에게 덮쳐온 ‘불안감’을 이렇게 털어놓았다(‘The Quintessence of Capitism’[자본주의의 정수(精髓)]).
복잡한 현실 속에서 이제껏 우리의 안내자가 되어준 편안한 공식들을 상실했을 때….. 우리는 새로운 발판을 발견하거나 수영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사실의 바닷속에 빠져버린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역사에서의 가설과 검증 방법론
역사의 시대 구분은 사실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가설 또는 사유의 도구에 해당한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한에서 유효하며, 그 유효성은 해석에 좌우된다. 역사의 지역별 구분도 마찬가지로 사실이 아니라 가설이다.
역사가의 편향은 그가 채택하는 가설로 판단할 수 있다. 40대에 들어와서 사회문제에 관한 글을 쓰기 전까지 기술자로 일했던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 1847~1922 프랑스의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스트(syndicalist))은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을 초래할 수조차 있는 상황에서도 특수한 요소들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누구나 신중하게 전진해 나가야만 한다 ; 누구나 그럴듯해 보이는 부분적인 가설들을 철저히 시험해야 하고, 점진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여지를 항상 남길 수 있도록 일시적인 근사치인 것들에 만족해야만 한다. (Matériaux d’une théorie du prolétariat)
이것은 19세기의 방법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그때는 잘 검증된 사실을 축적하면 논쟁거리가 되는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줄 광범한 지식을 언젠가는 확립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오늘날 과학자나 역사가 모두 더욱 겸손한 희망, 즉 자신의 해석을 매개로 사실을 추려내고 그 사실로 자신의 해석을 검증하는 가운데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부터 또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 점차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과학과 역사의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가
상이한 학문 분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듯이, 오늘날 역사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잘못이라고 믿고 있는 논의들을 각각 고찰해 보자.
첫째, 역사는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다룬다고들 한다.
이 견해는 "시는 일반적 진리에 관한 것이고 역사는 특수한 진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며 ‘더 심오하다'"라고 공언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하나의 오해에 근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홉스는 말했다. “이 세계에는 이름 이외에 보편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데, 왜냐하면 이름 붙여진 것들은 모두 하나하나가 개별적이고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에서 똑같은 두 개의 역사적인 사건이 존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가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과학자들처럼 일반화에 관여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은 매우 달랐고,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가지는 모두 특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는 양쪽 모두를 '전쟁'이라고 부른다.
기번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과 이슬람교의 발흥을 '혁명'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두 개의 특수한 사건들을 일반화하고 있었다. 근대의 역사가들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에 관해서 서술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역사가의 진정한 관심은 특수한 것 안에 있는 일반적인 것에 있다.
역사가는 항상 자신의 증거를 검증하기 위해서 일반화를 이용한다. 만일 리처드 3세가 런던탑의 감옥에 있는 왕자들을 살해했는지 그 증거가 분명하지 않다면, 역사가는 '자기 왕위를 노릴 가능성이 있는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그 시대의 지배자들의 버릇이었는지'를 자문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의 판단에는 그 일반화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반화와 관련한 16세기의 근대 국가의 성장에 관한 부르크하르트의 설명을 들어보자 (‘Judgements on History and Historians‘);
보다 최근에 생겨난 권력일수록 정지해 있기란 더욱 어려운 법이다. 첫째, 그 권력을 창출한 자들은 신속한 전진운동에 익숙해져 있는 데다가 본질적으로 혁신가들이며 또 계속해서 혁신가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이 일으키거나 제압한 세력은 더 심한 폭력행동을 통해서만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화가 역사와는 관계없다고 하는 것은 몰상식한 말이다. 역사는 일반화 위에서 번성한다. 영국의 역사가 엘턴(Geoffrey Rudolph Elton, 1921년~1994년) “역사가를 역사적 사실의 수집가와 구별해 주는 것은 일반화이다.”라고 말했다.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의 관계를 다룬다. 역사가라면 사실과 해석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그 두 가지를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둘째,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화의 진정한 핵심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것, 즉 어떤 일련의 사건들에서 이끌어낸 교훈을 다른 일련의 사건들에 적용하고자 한다는 것에 있다.
17세기에서 19세기의 서유럽이 구약성서 시대의 역사로부터 이끌어낸 교훈들을 검토한다면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검토 없이 영국의 청교도 혁명은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그리고 근대 민족주의 성장에서 선민 관념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점도 이해될 수 없다.
또한 러시아 혁명을 실현시킨 사람들은 프랑스혁명과 1848년 혁명들과 1871년 파리 코뮌의 교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사로잡혀 있었던 이라고까지 말해도 좋다-것이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에 있다.
셋째, 역사는 과학과 달리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들 한다.
역사란 과학과 달리 미래를 예언할 수 없으므로 역사로부터는 어떠한 교훈도 얻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문제는 오해투성이로 에워싸여 있다.
과학의 법칙이란 여타의 조건들이 동일할 경우에 또는 실험실의 상태에 있을 경우에 무엇이 발생할 것인가에 관한 설명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우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예언할 수 있다고 공언하지는 않는다. 현대 물리학 이론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을 개연성만을 취급한다고들 말한다.
콩트(1798~1857 프랑스의 철학자)가 지적하듯이 ‘과학에서 예견이 나오고, 예견에서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실증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역사에서 예언의 문제에 관한 실마리는 이렇게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 보편적인 것과 유일한 것을 구별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가는 일반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역사가는 비록 특정한 예언은 아니더라도 미래의 행동에 대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따라서 사회과학자 혹은 역사가가 과학자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보는 것은 좋지 않다. 인간은 하나로 특정 지을 수 없는 가장 복잡한 자연의 존재물이다. 이의 행위에 대한 연구는 자연과학자와 역사가, 사회과학자 모두 다른 종류의 어려움만 있을 뿐 각 목표와 방법이 다르지 않다.
넷째,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라고 한다.
역사를 포함하는 사회과학에서는 과학과 달리 주체와 객체가 동일한 범주에 속하며 또한 서로에게 상호작용을 한다는 논법이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물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다. 다른 종에 속하는 독립적인 관찰자들에 의해서가 아닌 같은 인간에 의해서 연구되어야만 한다. 신체 구조와 신체적 반응만으로는 부족하여 여러 사람들의 행동을 탐구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관찰하는 사람과 관찰되는 것 사이의 관계가 형성된다. 역사가의 관점은 모든 관찰에 불가피하게 개입하기 때문에 상대성으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다.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의 말대로, “경험을 포괄하고 수집하고 정리하는 범주마저도 관찰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Ideology and Utopia’)
인간의 행동은 분석과 예언의 대상이 되는데, 역사가 거의 반복되지 않는 하나의 이유는 두 번째로 공연할 때의 등장인물들은 첫 번째 공연의 결말을 알고 있고, 따라서 그에 관한 지식이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카는, 볼셰비키는 프랑스혁명이 결국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게서 끝장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혁명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끝나지 않도록, 나폴레옹을 가장 닮은 트로츠키를 불신하고 가장 닮지 않은 스탈린을 신뢰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울러 카는, 일부 물리학자들이 자연계와 역사가의 세계 사이에 더욱 두드러진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용어들로 자신들의 학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첫째, 그들의 연구결과에는 불확실성(Uncertainty) 또는 불확정성(Undeterminancy)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 원리에서 우리의 역사 예언 능력과의 의미 있는 유사성을 찾으려는 것에 대해서 똑같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현대 물리학에서는 공간상의 거리와 시간의 흐름을 재는 척도가 ‘관찰자’의 움직임에 좌우된다고 한다.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고 모든 측정이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주 조금만 바꾸어놓더라도 역사가와 그의 대상의 관계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
또한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고전적인 인식론들은 모두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라는 뚜렷한 이분법을 전제했다. 당시에는 인식론은 과학의 선구자들의 견해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당시에는 인간은 분명하게 외부세계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철학자들이 그 인식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여, 인식과정은 주체와 객체를 뚜렷하게 분리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의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을 일정한 정도까지 포함하는 과정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섯째, 역사는 종교와 도덕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 일반, 심지어는 다른 사회과학과도 구별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역사와 종교의 관계
어떤 진지한 천문학자가 우주를 창조하고 정돈한 어떤 신을 믿는 것은 양립할 수 있지만, 제멋대로 우주의 운동 규칙을 바꾸려고 끼어드는 어떤 신을 믿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지한 역사가라면 역사 전체의 경로를 지시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 어떤 신은 믿을 수 있지만, 구약성서에 나오는 것처럼 아말렉인들(Amalekites)을 학살하는데 개입하거나 여호수아의 군대를 위해서 낮시간을 늘임으로써 날짜를 속이는 그런 부류의 신을 믿을 수는 없다.
영국의 가톨릭 신학자 신부(M. C. D’Arey)는 말한다.
“어떤 연구자든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역사의 모든 문제에 대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현세의 사건들과 인간의 드라마를 최대한 말끔하게 정돈한 후에야 비로소 더 폭넓게 성찰하는 것이 허용된다.”
그 이전에 폴리비우스(Polybius)도 “발생하고 있는 것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경우라면, 절대로 신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카는 역사의 완결성은 역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좌우하는 어떤 초역사적인 힘-종교의 신이나 헤겔의 세계정신이건 간에-에 대한 신념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본다. 즉, 신의 힘에 의존하는 종교의 문제와는 달리 역사는 신의 힘(deus ex machina: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 기중기와 같은 기계를 이용해서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데서 나온 말로 매우 급작스럽고 간편하게 작중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사기 캐릭터나 연출 요소 등을 일컫는 말이다.
역사와 도덕의 관계
역사와 도덕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역사가는 자기 이야기 속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거의 불필요하다.
역사가와 도덕가의 입장은 똑같은 것이 아니다. 역사가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하는 부분은 역사적 사실의 주인공들의 사생활이 아닌 ‘업적’이다. 역사가는 자신의 책에 등장하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옆길로 새지 않아야 한다.
더 심각한 애매모호함은 ‘공적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나타난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주인공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도덕주의적인 경향과 개인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다같이 그 신념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로즈버리(Lord Rosebery 1847~1929 영국의 정치가)는 영국인이 나폴레옹에 관해서 알고 싶어한 것은 그가 ‘좋은 사람’이었는가 아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고 말했다(‘Napoleon’).
이런 경향은 최근에도 종종 등장하곤 하는데, 토인비 교수도 1935년의 무솔리니의 아비니시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 침공을 ‘계획된 개인적인 범죄’라고 비난하기도 했고('Survey of International Affairs' 1935), 이사야 벌린 경도 ‘샤를마뉴, 나폴레옹, 칭기즈칸, 히틀러, 스탈린 등을 대량학살자들로 심판하는 것’이 역사가의 의무라고 아주 맹렬히 주장하기도 했다.('Historical Inevitability')
이에 반해, 놀즈(D. Knowles 1896~1974 영국의 역사가) 교수는, 필리프 2세(프랑스 왕 재위기간 1180~1223)나 존 왕에 대한 역사가들의 도덕적 비난을 사례로 들면서 개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역사가의 발언권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며, 더구나 교수형을 내리기 좋아하는 재판관은 아니다’라는 것이다(‘The Historian and Character‘).
크로체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훌륭한 글을 남기고 있다(‘history as the Story of Liberty').
“그 고발은, 우리의 법정(사법적인 것이건 도덕적인 것이건)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위험한 인간들을 상대로 설치한 현재의 법정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위험한 인물들은 이미 그들의 시대의 법정 앞에 세워졌기 때문에 두 번씩 유죄판결을 받거나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 이 둘의 커다란 차이를 잊고 있다. 역사를 쓴다는 구실로 재판관처럼 부산을 떨면서 여기에서는 유죄판결을 내리고 저기에서는 용서를 해주는 사람들, 그런 것이 역사의 직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역사 감각이 없는 자들이라고 인정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히틀러나 스탈린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는 주장에 트집을 잡는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우리들 중 많은 이들과 동시대인이며, 그들의 행위로부터 고통받은 이들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역사가가 처해 있는 하나의 주요한 곤경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오늘날 샤르마뉴나 나폴레옹의 죄를 고발한들 누가 어떤 이득을 보겠는가? 그래서 카는 개인이 아닌, 과거의 사건이나 제도나 정책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는, 좀 더 유용한 문제로 눈을 돌려보자고 한다. 그런 판단이 역사가의 주요한 판단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역사가가 개인에 대한 도덕적인 유죄를 매우 열렬히 주장하는 것은, 그들을 낳은 집단과 사회 전체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주거나, 개인을 자신들이 저지른 ‘집단적 범죄’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개인을 찬양하는 도덕적 판단도 그만큼 그릇되고 해로운 것일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일부 노예 소유주들이 개인적으로 고결한 사람들이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노예제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힐난하지 않기 위한 변명 거리로 끊임없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역사가는 개인에 대한 판단에 가담하지는 않더라도 당시의 제도(예를 들어 동양의 전제주의나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의 제도)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공평무사한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역사적 해석은 항상 도덕적 판단 내지 가치판단을 포함하는 것이다.
역사의 희생자들에 대한 시각
역사는 투쟁의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의 결과는 다른 집단들을 희생시킨 어떤 집단들이 성취한다. 패배자들은 대가를 치른다. 재난은 역사에 고유한 것이다. 역사의 모든 위대한 시대에는 그 시대의 승리자뿐만 아니라 희생자도 있다. 역사에서는 이 문제가 ‘진보의 비용’이라든가 ‘혁명의 대가’라는 특별한 제목 아래 종종 토의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베이컨(Francis Bacon)이 《혁신론(On Innovations)》이라는 논설집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습의 완강한 유지는 혁신만큼이나 난폭한 것이다.’ 특권이 없는 사람들이 치러야 할 보수의 비용은 특권을 빼앗긴 자들이 치러야 할 혁신의 비용만큼이나 크다.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누군가의 재난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는 모든 통치형태에 잠재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급진적인 것만큼이나 보수적인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 영국의 문학가) 박사는 더 작은 악이라는 논거를 거침없이 내세워 현존하는 불평등의 존속을 정당화했다.
보편적인 평등 상태에서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을 터이므로, 그것보다는 누군가가 불행한 것이 더 낫다.
이 문제가 가장 극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때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한 '역사가의 태도'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도 그 시기이다.
이를테면 1780년 무렵과 1870년 무렵 사이의 영국의 공업화에 관해 살펴보면,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산업혁명을 이론의 여지없이 위대하고 진보적인 하나의 업적으로 취급하며, 도시로부터 농민 추방, 더러운 공장과 아동 노동의 착취 등의 폐해들이 적어도 그 최초의 단계에서는 공업화 비용의 불가피한 일부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역사가들은 19세기 서구 국가들에 의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화를 용서하면서, 그 근거로 그것이 세계경제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 두 대륙의 후진국민들에게 가져다준 장기적인 결과를 들먹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영광이나 이익을, 당시 서양인이 운영하는 개항장의 공장이나 남아프리카의 광산에서 내지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 일했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받은 것은 아니다.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카는, "저 유명한 엥겔스의 화려한 글은 기분 나쁠 만큼 적절하다"(‘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 Correspondence 1846-1895’)고 하면서 인용한다.
역사는 모든 여신들 중에서도 아마 가장 잔인한 여신일 터이니, 그녀는 전쟁의 시기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경제 발전의 시기에도 시체 더미 위로 승리의 전차를 몰아댄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은 나머지 거의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고통을 항하여 내몰리지 않는 한 진정한 진보를 위해서 용기를 내지 않는다.
‘이반 카라마조프’(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표도르의 둘째 아들)가 보여준 유명한 저항의 제스처는 일종의 과감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역사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입장권을 제공받은 경우란 결코 없다.
"만약 고통으로 영원한 조화의 값을 치러야 해서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아야 한다면, 대체 여기에 왜 아이들이 필요한 거니? 설명 좀 해줄래, 제발? 대체 뭣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고통받아야 하고, 대체 뭣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대가로 조화를 얻어야 하는 건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 나는 숭고한 조화 따위는 일절 거부하겠어. 그따위 조화라면 저 구린내 나는 화장실에서 고사리같이 작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보상받을 길 없는 눈물로 '하느님'에게 기도한 저 불쌍하게 고통받은 어린애의 눈물 한 방울의 가치도 없는 거야! 왜냐하면 그 아이의 눈물은 영원히 보상받지 못한 채로 남겨졌기 때문이지. 그 눈물은 반드시 보상받아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그게 무슨 조화야! (...)
그리고 만약 아이들의 고통이 진리의 대가를 치르는 데 꼭 필요한 고통들의 총량에 들어가야 한다면, 미리 단언해 두겠는데, 그 어떤 진리도 그럴 만한 가치는 없는 거야. 그러니 나는 개한테 아이를 물어 죽이게 한 박해자와 그 아이의 어머니가 화해의 포옹을 하기를 원치 않는단 말이야! 그 어머니도 감히 그를 용서할 권리가 없어! 비록 어린아이 자신이 그것에 대해 박해자를 용서했다 할지라도 어머니는 그런 놈을 감히 용서해서는 안 되는 거야! (...)
대체 이 세상에 용서를 할 수 있고, 또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존재가 있을까? 조화 따위는 원하지 않아.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원하지 않는 거야. 나는 차라리 복수하지 못한 고통과 함께 남겠어. 비록 내가 틀렸다 하더라도 나는 차라리 복수하지 못한 고통과 해소되지 않은 분노를 택하겠어.
조화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우리 주머니 사정으로는 도저히 그 비싼 입장료를 낼 수가 없거든. 그래서 나는 그 입장권을 서둘러 반납하는 거야. 그리고 만약 내가 정말로 정직한 사람이라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것을 반납할 의무가 있는 거야.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있는 거란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냐, 알료샤. 나는 그저 신에게 매우 정중하게 입장권을 반환하는 것뿐이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이반의 대사)
역사가의 도덕적 판단 기준
그러나 과학자와 달리 역사가는 그가 다루는 자료의 성격 때문에 이러한 도덕적 판단의 문제들에 빠져들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며,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인 어떤 개념적 틀 안에서 내려진다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카는, 역사적 행위를 판단하게 해 줄 수 있는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기준을 세우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틀림없이 양쪽 모두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역사적 조건과 열망에 알맞은 특정한 내용을 그 같은 기준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역사가란 모든 가치의 성격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지,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야말로 역사를 초월하는 객관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가진 신념과 우리가 설정하는 판단의 기준 역시 역사의 일부이며 똑같이 역사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카는, 오늘날 완전한 자립성을 주장할 수 있는 학문은-무엇보다도 사회과학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역사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 근본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며, 이 점에서 역사는 다른 학문과 구별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역사는 과학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
이미 과학이라는 용어에는 수많은 다양한 방법과 기술을 이용하는 다양한 지식 분야들이 포괄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에서 역사를 배제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인문학의 한 분야로서 역사의 지위를 옹호하고 싶어 하는 역사가들이나 철학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이는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낡아빠진 구분이 보여주었던 편견을 반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문학은 지배계급의 폭넓은 교양을 일컫는 것으로, 그리고 과학은 그 계급에게 봉사하는 기술자의 기능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카는, 그런 주장들이 이른바 ‘두 문화’ 사이의 틈새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 틈새 자체가 편견의 산물인데 그 편견은 본래 과거에 속하는 영국 사회의 계급구조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카는 하나의 해결책을 제안한다. 역사학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 역사학을 더 과학적으로 만드는 것,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요구사항을 더 엄격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더욱 강한 믿음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찰스 스노 경(Charles Percy Snow 1905~1980 영국의 물리학자)은 과학자들의 ‘성급한’ 낙관주의를 그가 말하는 소위 ‘문예 지식인(literary intellectual)’의 ’나직한 목소리‘나 ‘반사회적 감정’과 대비시켰다. 카는 역사학의 성과와 가능성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는, 역사가들 중 일부는 이 ‘문예 지식인’의 부류에 속한다고 비난한다.
카는 그 틈새를 메우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과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목표가 동일하다는 점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자, 사회과학자, 역사가는 분야는 서로 다르나 모두가 동일한 연구를 한다: 그것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그리고 인간에 대한 환경의 영향에 관한 연구”이다. 연구의 목표도 동일하다: 그것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지배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역사가와 자연과학자는 전제와 방법은 세세한 부분에서 크게 다르지만, 설명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적, 그리고 질문하고 답변하는 근본적인 절차의 측면에서는 똑같다. 역사가도 여느 다른 과학자처럼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동물이다.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