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든 것을 이 책에 담은 도스토옙스키
내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손에 든 것은 오징어잡이 배들이 낮잠을 자는 제주의 한적한 작은 포구 마을이었다.
삼다수처럼 투명한 공기와 바닷바람처럼 맑은 새 소리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행운'이라는 말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담겨있겠지만, 그중에서 많은 분들이 공감할만한 한 가지를 꼽자면 이 사실이 아닐까 싶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대단히 길고, 대단히 어렵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2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이다. 평생에 걸쳐, 소설만 계산해도 무려 4만 장의 원고를 써낼 정도로 다작을 했던(수많은 에세이들은 제외하고) 도스토옙스키가 필생의 역작으로 빚어낸 작품이니 그 양이 방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대단히 긴 소설'을 넘어 '대단히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스타일 자체에 기인한 바가 크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은 그의 하버드대 강연록 <소설과 소설가>에서 소설가의 스타일을 두 가지로 나눈다. 그림을 그리듯 이미지로서 소설을 보여주는 '시각적' 소설가와 지식과 관념을 전달하는데 무게를 두는 '단어적' 소설가가 그것이다. "붉은 기와를 얹은 하얀 지붕의 뾰족한 집들이 언덕의 비탈길에 늘어서 있으며..."로 시작하는 <적과 흑>의 스탕달은 '시각적' 소설가의 좋은 예를 보여주는 반면, 우리의 도스토옙스키는 (안타깝게도) '단어적' 소설가의 전형이다. 이를테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출발한다.
"나의 주인공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전기를 시작함에 있어 나는 다소간 의혹에 빠져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비록 알렉세이 표도로비치를 나의 주인공이라 부르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전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들이 불가피하게 튀어나올 것임이 미리부터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어휴.
이미지를 상상하기 쉽지 않은 '단어적' 문장. 선과 악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 프로이트 같은 최고의 심리학자가 경탄했던 치밀한 심리분석.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2000페이지의 높은 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더욱 험준하게 만드는 절벽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파도의 발끝이 닿는 곳에 쌓아 올린 모래성처럼, 끊임없이 집중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일상의 한 가운데서 이 책을 폈더라면 얄팍한 인내력의 소유자인 나로서는 끝까지 읽어서 깨뜨려 낼 수 있었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여유로운 시골 바닷가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난 '행운'이란 이런 의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출퇴근 지하철에 시달려야 하는 직장인으로서는 '시간을 따로 내지 않으면' 읽기 힘든 책인 까닭에, 나는 시작부터 많은 기대를 안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기대를 품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질문이 샘솟는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손에 든 나에게도 이런저런 질문이 떠올랐다. 작가는 2000페이지나 되는 긴 여정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것인가. '대문호'라 불리는 소설가의 문장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 작품이 문학사에 불멸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어떤 까닭에서인가. 그리고 과연 이 책을 나는 끝까지 '흥미'를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을 것인가.
하여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했다.
첫째, 막장과 걸작 사이. 이 책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한 구원과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셋째, 이 책의 서두에 인용된 요한복음 12장 34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의 의미는 무엇이며, 밀알은 과연 누구인가.
#1 막장과 걸작 사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위대한 이유
카라마조프 가의 아버지 표도르는 꽤 성공한 지주(地主)다. 그는 대단히 탐욕스러운 인물이라, 여자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족을 못쓰는 호색한이며, 돈을 움켜쥐기 위해서라면 자식과의 불화도 불사하는 탕아다. 표도르에게는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사생아가 있는데, 이 네 명을 중심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진행된다.
첫째 아들 디미트리는 현직 장교로서 술과 도박을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전형적인 러시아인이다.
그는 열정(그리고 욕망)이 가득한 인물로서 돈을 쓰거나 사랑에 빠지는 일에도 왕성한 행동력을 보여준다. 높은 명예심 역시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성격이다. 불같은 욕망에 끄달려 저지르는 잘못과 그 잘못에 대한 수치심이 디미트리가 심리적인 갈등에 시달리는 내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역사의 이곳 저곳에서 장성한 큰 아들이 그 아버지와 충돌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디미트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금전과 여자 문제로 아버지 표도르와 갈등 관계에 놓이며,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중심 사건을 형성한다. 디미트리를 상징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러시아인, 욕망, 명예다.
둘째 아들 이반은 지극히 이성적인 인물이다.
교양과 지식의 유럽인을 상징한다. 그는 논리와 사색을 추구하고, 논리적인 사유를 통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행동은 허용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차가운 이성을 바탕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뜨거운 디미트리와 대비되고, 논리를 통해 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믿음으로 가득한 알렉세이와도 다르다. 이반의 키워드는 유럽, 이성, 논리다.
셋째 아들 알렉세이는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선한 인물'의 전형이다.
신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수도사로서 구도의 길에 몸을 바치려는 확고한 열정을 갖고 있다. 마을의 존경받는 어른인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대로 '사랑'의 높은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노력한다. 알렉세이는 어디를 가든 누구에게든 사랑받는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지만, 마을의 아이들이 그를 흠모하며 따른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이것은 알렉세이의 삶이 러시아적인 욕망이나 유럽의 지성에 기대기 보다는 실제 민중의 구체적인 현실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알렉세이는 이야기 내내 카라마조프 가의 갈등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알렉세이의 키워드는 선, 믿음, 민중이다.
스메르자코프는 표도르의 사생아(로 추정된)다.
표도르가 떠돌이 여자를 임신시켜 낳게 한 인물로 카라마조프 가의 요리사이자 하인으로 살고 있다. 그는 순수한 악의 캐릭터로서 '끔찍할 정도로 사람을 싫어하고' '모든 사람을 경멸했다.' 스메르자코프는 어릴 적부터 잔인한 면모를 보인 바 있는데, 고양이를 목매달아 죽인 뒤 장례식 놀이를 하곤 했던 것이다. '누구 하나 좋아할 줄 모르는' 그에 대해 도스토옙스키는 작중 인물의 말을 빌려 "너도 사람이냐"고 평가하기까지 했다. 스메르자코프의 키워드는 악이다.
사실 이 책의 줄거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독 한 사람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문학, 심리학, 철학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으며 그만큼 많이 주인공의 이름과 주요 사건들이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 가에서 벌어진 사건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아버지 표도르에게 세 아들이 모인다. 첫째 아들 디미트리가 돈 문제로 아버지에게 담판을 짓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의 현로, 조시마 장로가 동석한 가운데 가진 카라마조프 가의 회합은 합의는커녕 추잡한 스캔들(특히 표도르와 디미트리의)로 끝나고 만다.
금전 문제가 카라마조프 가에 드리워진 그늘에 불씨로 작용했다면, 그 위에 기름까지 끼얹은 것은 다름 아닌 여자 문제.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디미트리는 아버지 표도르가 점 찍어 놓은 여자(그루셴카)에게 한 눈에 반해버리고, 둘째 아들 이반은 버림받은 디미트리의 약혼자에게 사랑에 빠진다. 그루셴카가 표도르와 디미트리 사이에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여우짓을 하는 동안 아버지와 아들의 불화는 주먹다짐으로 폭발하여 디미트리가 표도르를 '넘어뜨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지경에 이른다. 아버지의 여자를 뺏으려는 첫째 아들. 첫째 아들의 약혼자를 사랑하는 둘째 아들. 돈과 여자로 카라마조프 가는 풀릴 수 없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이 때 악한 스메르자코프가 등장한다. 스메르자코프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하는데, 돈과 여자 문제에 이성을 잃은 디미트리를 함정에 빠뜨려 마치 그가 친부를 살해한 듯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마침내 디미트리는 존속살해범으로 체포되고 모든 증인과 정황 증거가 디미트리를 유죄로 몰아간다. 디미트리는 비록 방탕하고, 돈을 훔치고, 이웃 사람들을 모욕하는 망나니 짓을 저질렀을지언정 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건만, 배심원들의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재판은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스메르자코프는 사실 '신은 없고,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둘째 이반의 생각에 기대 범죄를 저질렀다. 스메르자코프는 이반이 자신과 한 편이 되어주리라 바라면서 범행 사실을 털어놓지만, 진범을 알게 된 이반은 스메르자코프의 고백에 경악하고, 법정으로 달려간다. 마지막 공판일. 이반이 디미트리의 무죄를 주장하고 표도르의 살해범은 스메르자코프임을 주장하지만, 이반의 반응에 낙담한 스메르자코프는 간밤에 이미 아무런 유서 없이 목을 매어 자살한다. 스메르자코프가 진범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배심원들은 디미트리의 유죄를 인정하는 오심을 저지른다. 디미트리는 시베리아의 유형지로 떠날 운명에 처하고 이반과 알렉세이는 그를 구출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줄거리만 훑어보면 흔하디 흔한 막장 드라마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2013년 일본에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높은 인기를 얻었는데, 요즘 써낸 각본이라 알고 본 사람들도 많았다 한다. 호색한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의 금전 갈등, 친부 살해와 출생의 비밀(사생아)까지. 막장 드라마에 들어가는 요소는 빠짐없이 들어있다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전업 작가로서 늘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글자 수가 곧 수입'인 경제적으로 각박한 삶을 삶았다. 훗날 도스토옙스키가 남긴 육필 원고를 보면, 좌우의 여백에 '이 원고를 팔면 얼마를 벌 수 있는지'에 대한 계산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돈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디미트리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는 실제로 감옥에서 4년의 유형 생활을 했고, 사형집행 직전에 기적적으로 집행이 취소된 일도 있었으며, 간질병에도 시달렸고, 도박에도 어느 정도 빠져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가난, 유형, 간질, 도박로 점철된 피폐한 삶이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삶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의 피폐한 어둠 때문이 아니라, 그 많은 곤란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같은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글을 쓰고, 또 써서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소원대로 '발자크에 필적하는' 대문호가 되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생의 숱한 어둠에 그치지 않고, 그 어둠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 우리가 도스토옙스키의 파란만장한 어둠에 보내는 경탄은 단지 그가 겪어야 했던 어둠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어둠이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의미 있는 경험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이와 같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단순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가장 중요한 물음을 담아내는 도구로 가장 통속적인 소재를 택했다.
표도르의 네 아들은 각각 선과 악, 뜨거운 욕망과 차가운 이성을 상징한다. 우리에게는 순수한 선(알렉세이)과 순수한 악(스메르자코프)이 존재한다. 그 둘은 늘 양쪽 귀 주변을 날아다니며 속삭이는 천사와 악마다. 이들은 순수함 그 자체이므로 인간적인 고뇌가 거의 없다. 끊임없이 사랑받고 지침 없이 사랑하며, 이유 없이 미워하고 고민 없이 괴롭힌다. 하지만 인간은 선과 악으로 깨끗이 나뉠 수 없는, 보다 복잡한 존재다.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디미트리) 임과 동시에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이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욕망과 이성 중 한쪽만 옳다고 일방적으로 손을 들어주어서도 안된다. 도스토옙스키에 의하면 악이란 욕망과 이성 어느 쪽에도 깃들 수 있는 것이다. 절제하지 않은 욕망이 디미트리를 파멸로 이끌고 갔다면, 인간성이 배제된 이성의 추구 역시 이반으로 하여금 내면의 죄('모든 것은 허용된다.')를 저지르게 했다. 따라서 욕망과 이성의 외줄 위를 걷는 한 인간은 언제나 양쪽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짊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네 아들을 낳은 아버지, 표도르를 주목하게 된다.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의 뿌리를 더듬어가면 결국 하나의 지점, 표도르에 이르게 된다. 지극히 선한 것과 지극히 악한 것, 인간적인 욕망과 이성적인 판단은 물과 기름처럼 깨끗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두가 한 명의 아버지가 낳은 자식이고, 하나의 시원(始原)에서 출발한 물줄기다. 표도르는, 검사의 말을 빌리면 '우리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우리 모두는 언젠가 아버지가 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언젠가 아버지가 된다. 그러므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 표도르는 곧 우리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은 우리의 마음 그 자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 탐구 과정의 문학적 도구로서 막장 드라마를 택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위대한 걸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와 진배없지만, 그 안에 깃든 의미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줄거리만 훑은 채 의미를 곱씹지 않으면 이는 껍질만 뜯어먹으면서 '오렌지의 맛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피폐한 인생을 살면서도 그 피폐한 인생의 경험을 토대로 위대한 글을 써낸 도스토옙스키처럼, 통속적인 막장의 소재를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탐구했기 때문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위대한 작품이다.
#2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한 구원과 희망.
도스토옙스키가 탐구한 바, 인간이란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이 흙탕물처럼 뒤섞인 복잡다단한 존재다.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복잡한 것이기에, 우리 역시 언제든 표도르처럼 방탕한 삶을 살 수 있고, 디미트리처럼 돈 때문에 아버지를 들이받을 수 있으며, 스메르자코프처럼 철저한 악인이 될 수도 있다. 알렉세이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같은 계단에 올라서 있는데, 다만 누구는 몇 계단쯤 위에, 다른 사람은 그 아래에 있을 뿐'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벗어날 수 없는 죄악으로부터 구원은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다.
구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죄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죄를 지음으로 해서 벌을 받게 되고, 그 고통을 전제로 하여 구원과 희망을 모색하게 되는 까닭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기본적으로 법정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카라마조프 가를 둘러싼 인물과 갈등 관계가 제시되고,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며,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디미트리는 3000 루블을 어디서 구한 것일까')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법정 공판을 통해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법정 소설과 같이 '진범은 누구인가', '범행 동기는 무엇인가', '결국 정의는 바로 서는가'의 질문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즉, 디미트리는 누명을 벗고, 잃었던 명예를 회복하며, 스메르자코프의 파렴치함이 널리 알려지면서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는 평범한 내용으로 마무리될 가능성도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위대하다 평가받는 것은 이 책이 단순히 형사적인 유무죄의 문제로 카라마조프 가의 비극을 귀결시키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마음으로 저지른 잘못' 또한 유죄라고 본다.
스메르자코프가 표도르를 살해하는데 기댔던 것은 둘째 이반의 사상이었다. '신은 없고,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이반의 논리적 사유에 그는 범행의 이론적 당위성을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스메르자코프는 자신의 범행 의사를 일부분(간질 발작 시간을 미리 예고하는 등) 이반에게 털어놓는다. 물론 이반에게는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도, 살해를 교사할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이반 역시 마음속으로는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날 밤' 아버지 곁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감으로써 결과적으로 범행을 돕게 된다. 스메르자코프는 이런 사실을 들어 '이반 역시 아버지가 살해당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라 주장한다. 물론 이반이 범행을 알았거나, 눈치챈 것은 아니다. 스메르자코프의 범행 의사를 사전에 명확히 알았다면 그에 찬동했을 리도 없다. 다만 이반은 '이따금' '마음속으로'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반은 스메르자코프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한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법정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증인석에 서서 "저는 그냥 살인자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하고 만다. 물론 재판에서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주장이다.
'마음으로 저지른 잘못 역시 유죄'라는 생각은 형사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명제다. 형법의 처벌 대상은 행위이며, 행위가 없는 부작위(不作爲)라 할지라도, 행위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의 적극적 행위나 마찬가지로 간주될 수 있는 부작위만이 처벌의 대상인 까닭이다. 범행을 준비하는 '예비'나 여럿이 범행을 모의하는 '음모' 조차 예비하는 '행위'와 공모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다. 즉, 정의의 여신 디케의 저울에는 마음으로 저지른 잘못이 올라갈 자리가 없다.
그러나 저 유명한 말, '법은 도덕의 최소한'을 떠올려 보면 우리는 '마음의 잘못'에도 들이대 온, 보다 눈금이 촘촘한 잣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십계명 중 일곱째는 "간음하지 말라."다. 간음의 의미에 대해 마태복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범주에서 악업을 짓는다. 뜻으로 저지르는 잘못도 몸과 말로 짓는 악업과 마찬가지다. 온 우주의 인과 법칙은 마음으로 품은 악한 뜻에도 에누리가 없다.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법치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형사법상 규정된 행위만을 죄라고 여긴다. 법전으로 울타리를 세워놓고 그 담장을 넘지 않는 한 '나는 무고한 사람'이라 자신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언급한 대로 우리는 '식탁 위에 놓인 돈을 훔치지는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자기가 대단히 정직한 사람인 양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울타리를 뛰어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가 닿을 수 있는 최선의 자리인가.
선과 악, 욕망과 이성이 뒤섞인 우리 마음이 지향해야 할 이상향이 고작 그것뿐인가. 2500년 전 공자는 말하길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라. 법으로 이끌고 형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벌은 면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온갖 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낯짝 두꺼운 생각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마음의 잘못'도 유죄라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가슴 안에 항상 촘촘한 잣대를 품은 채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의 스메르자코프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의 잘못조차 유죄로 받아들인다면, (거의)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죄에는 벌이 따르고, 벌은 고통스럽다. 벗어나기 힘든 이 굴레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구원은 무엇을 통해 가능하며,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도스토옙스키는 그 답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불신(不信)'으로 '죽도록 괴로워하는 여인'에게 도스토옙스키는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어 길을 알려준다.
"사랑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그럴 수 있습니다. 부인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실천적으로, 끊임없이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사랑'을 통한 구원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전체를 관통하여 각 인물들을 통해 몇 번이나 반복하여 드러난다.
수도원의 회합에서 스캔들이 있던 날, 골칫덩어리 가족과 영적 스승 조시마 장로 사이에서 고된 하루를 보낸 수도사 알렉세이가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은 병약한 소녀 리사의 갑작스런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 리사가 손에 쥐어준 편지를, 알렉세이는 그 자리에서 세 번이나 거듭하여 읽는다.
"한 순간이 지나자 다시 조용하고 행복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천천히 편지를 봉투에 접어 넣고 성호를 그은 뒤 자리에 누웠다. 영혼의 혼란이 갑자기 사라졌다."
수치심과 좌절감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려 마음먹었던 디미트리를 생명을 붙들어준 것도 사랑에 대한 희망이었다.
"새벽 5시, 이곳에서 동틀 녘에 스스로를 죽이겠노라고 선언했기 때문이지요. 야비한 놈으로 죽건 고결한 놈으로 죽건 어쨌거나 매한가지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매한가지가 아닌 게 돼 버렸어요. 믿으시겠습니까...(중략)... 때가 어느 때입니까. 내 사랑이 결실을 맺어 바야흐로 내 앞에서 천국이 다시 펼쳐진 때가 아닙니까."
논어에 이르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선 살기를 바라는 것'이라 했다(愛之欲其生). 차가운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시비를 가리고자 했던 이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알료샤, 나는 살고 싶어, 논리를 거역해서라도 살고 싶어. 내가 비록 사물의 질서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봄이면 싹을 틔우는 끈적끈적한 잎사귀들이 소중하고, 파란 하늘도 소중하고,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들이 내게는 너무 소중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어떤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인가.
도스토옙스키는 사랑의 두 가지 원칙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실천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사랑과 대비되는 의미의 사랑이다. 우리가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인 것이다.
"인류 전체를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인 사람들, 즉 사람들 개개인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 행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를 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정작 고작 이틀도 누구와 한 방에서 지낼 수 없다, 이건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테레사 수녀는 말했다. "난 결코 대중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작은(것부터 베푸는) 사랑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양파 한 뿌리'의 우화가 등장한다. 나쁜 짓만을 저지르고 살아온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이 평생 동안 베푼 선행이라고는 떠돌이에게 못난 양파 한 뿌리를 적선한 것이 전부였다. 결국 사후에 부인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되었는데, 천사들이 그 부인을 지옥에서 건져내려 할 때에, 바로 그 양파 한 뿌리를 내려 붙들게 했다는 이야기다.
디미트리의 재판에서도 '호두 1푼트'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배심원 제도를 통한 형사 소송은 배심원단이 피고인에게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느냐가 유죄 판단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모든 정황이 디미트리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디미트리에 대한 여러 증언들이 그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몰아갈 때, 마을의 터줏대감인 어떤 노인이 나와 디미트리에게 도움을 준다.
노인은 디미트리가 어릴 적에 1푼트의 호두를 건넨 적이 있었는데, 마을을 떠난 디미트리가 20여 년 후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어 나타났을 때 '호두 1푼트'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드렸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친부를 살해한 파렴치한 인간인가'를 가리는 재판에서 노인의 증언은 배심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짓는 죄와 구원의 길로서의 사랑, 그것에 대해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정리한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십시오. 우리 개개인이 모두 지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이며 그것도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차원의 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 각각의 사람에 대해 개별적으로 유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식이야 말로 수도승의 길은 물론이고 지상의 온갖 사람의 길이 도달해야 할 월계관인 것입니다."
#3 밀알의 의미, 밀알은 누구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가장 첫 페이지에는 요한복음 12장 34절이 인용되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에 수감된 4년 동안 오로지 <성경>만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곳곳에 있는 신과 불멸, 선과 악에 대한 깊은 논쟁들은 그가 유형 생활 동안 <성경>을 붙들고 치열하게 사유하여 도달한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므로 '밀알'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사상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인다.
'밀알은 누구인가'를 고민할 때, 맨 처음 떠오르는 인물은 일류샤(일류셰치카)다.
그는 가난한 스네기료프의 어린 아들로서 침대에 누워있는 병약한 아이다. 그러나 아픈 몸, 지독히 어두운 가정환경에도 일류샤의 내면 만큼은 절대로 아프지도, 어둡지도 않다. 그는 아버지 스네기료프를 모욕하는 어른과 자신을 따돌리는 학급의 급우 전체를 상대로도 당당히 맞설 줄 아는 용감한 인물이다.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주눅 든 채 살아가는 아버지와 병들고 철없는 어머니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조숙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이 실수로 죽인(나중에 건강하게 살아 돌아온다) 개를 떠올리며 끊임없이 마음 아파할 정도로 자비심도 있다. 결국 일류샤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 학급 친구들은 일류 샤의 진심에 공감하고 그에게 사과함으로써 하나가 된다.
그런 일류 샤가 일견 '밀알의 상징'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일류 샤의 장례식을 그리며 마무리된다. 그를 괴롭히던 학급 급우들과 알렉세이는 일류샤를 떠나보내며 "영원히 이렇게! 평생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갈 것을 다짐한다. 일류 샤의 높은 도덕성과 불굴의 용기가 '많은 열매'로 맺히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원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2부작으로 쓸 계획이었는데, 돌연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가 구상했던 다음 내용은 시간이 흘러 알렉세이가 혁명가가 되고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 한다. 일류샤라는 밀알 하나가 땅에 묻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밀알로 태어나게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땅에 묻힌 밀알'을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조시마 장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일류 샤의 죽음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막을 내렸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마을의 현로 조시마 장로의 죽음으로 막을 올렸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조시마 장로는 깊은 지혜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존재다. 수도원에는 장로와의 면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장로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개개인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가르침을 전한다. 생명을 다해 민중에게 사랑을 베풀어준다는 점에서 조시마 장로의 모습에 2500년 전 붓다, 그리고 2000년 전 예수가 오버랩된다.
장로의 곁에는 그를 존경하는 수도사들이 늘 함께한다. 알렉세이도 그중 한 명이다. 조시마 장로는 그를 특별히 아끼는데, 몇 시간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의식하고 알렉세이에게 유언이자 마지막 가르침을 남긴다.
"고뇌 속에서 행복을 구하도록 해라. 일을 해라,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선과 사랑의 상징인 알렉세이가 골방에 틀어박힌 유약한 수도사가 아니라, 행동을 통한 사랑을 실천하는 리더로 자랄 수 있었던 데는 장로의 영향이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조시마 장로의 오랜 경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묻혔고, 알렉세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감화되어 '많은 열매'로 자라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의 주인공 알렉세이는 또 어떤가.
비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알렉세이지만, 그 자신만큼은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진실을 추구하고, 진실을 믿으며, 진실에 당장 뛰어들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 싶은 열정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불멸을 위해 살고 싶다. 어정쩡한 타협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디미트리를 진범으로 의심할 때에도 인간 본성의 선함에 대한 확신으로 형의 무죄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반이 자책감으로 시름시름 앓을 때, 건강을 되찾아 살아가야 한다고 독려한 것도 알렉세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사랑했으며,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고자 애썼다.
알렉세이의 삶에 죽음은 아직 먼 이야기일지라도(그는 스무 살이다) '밀알'으로서 그의 영향력은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조시마 장로로부터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부단하게 노력했는데, 특히 아이들의 사회에 뛰어들어 일류 샤와 급우들 간의 화합을 끌어낸 것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장로가 지시한 바, 수도원을 떠나 보다 넓은 세상에서 방황하고 배우게 될 그의 앞 일을 생각하면 알렉세이 역시 하나의 '밀알'로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에 이르러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시마 장로가 베푼 가르침을 알렉세이가 따랐고, 알렉세이가 실천한 사랑은 일류사에게 닿았으며, 일류샤가 보여준 용기는 그와 척을 지었던 여러 급우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즉, 조시마라는 밀알은 알렉세이에, 알렉세이라는 밀알은 일류샤에, 그리고 일류샤라는 밀알은 많은 친구들에게 이어져 더 '많은 열매'로 맺혔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시마가, 알렉세이가, 일류샤가,
그 모두가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밀알'이 아닐까.
앞에서 고민해 본 두 번째 질문 '구원과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살핀 바와 같이 도스토옙스키는 '우리 개개인은 모두 지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이며 각각 개별적으로도 유죄'라고 했다. 모든 이가 모든 이에 대해 유죄인 것은 이 세상이 그물망처럼 촘촘한 인과 관계로 빠짐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잘못은 눈에 보이는 인과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과 관계를 거쳐 어딘가에 도달하고, 무엇인가에게 해를 끼친다. 우리가 길가에 쓰레기를 버린다 하여 우리 자신이 직접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이 세상의 어떤 존재는 그 쓰레기로 인하여 반드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비단 잘못과 죄악, 이 세상의 부정적인 면에 있어서만 적용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 개개인이 지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 틀림없이 유죄'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개개인은 지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에 대해 '밀알'이 될 수 있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묻혀 많은 열매를 맺듯, 우리가 베푼 사랑도 인과 관계를 따라 어딘가에 닿을 것이고 무엇인가에 이로움을 보탠다. 비록 밀알을 심는 우리의 눈으로는 그 결과를 볼 수 없을지라도, 이 세상의 어떤 존재는 그로 인하여 분명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결국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지상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으며, 이 땅의 모든 사람들 각각의 존재에 대해 개별적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이야 말로 인간으로서 도달해야 할 월계관이다."
대단히 길고, 대단히 어려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덮으며, 우리 모두는 하나의 밀알이 될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도스토옙스키의 격려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비록 가난과 유형 생활, 간질병과 도박에 빠져 피폐한 삶을 영위하였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끝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끝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가장 막장의 소재를 통해 온 세상에 가장 위대한 질문을 던졌듯, 도스토옙스키도 파란만장한 어둠의 삶을 토대로 휘황찬란한 밀알이 되었다.
그렇기에 도스토옙스키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기에 전적으로 행복한 자는 자기 자신에게 곧장 '나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서약을 이행했노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