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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YES Feb 20. 2019

6월 낙엽

호스피스를 하며 만난 사람들

저희 어머니는 호스피스이셨습니다.


호스피스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들이 웰다잉할 수 있도록 돕는 봉사활동입니다.


호스피스란?


매주 월요일이면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호스피스케어를 하면서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고, (보통은 들어주시죠)

머리를 감기고 씻기고,

마사지를 해주고,

기도를 해주거나 함께 하는 여러 활동이 있답니다.


환자들이 호스피스와 보내는 시간 (특히 저희 어머니는 더욱)을 너무 좋아했답니다.호스피스의 방문을 받지 않는 다른 환자 (보통 상태가 좀 나은)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기도 했고, 때로는 항의를 받기도 하셨답니다.


어머니는 그리 건강한 체질이 아닙니다. 잘 가는 한의원에서는 죽어가는 암환자를 주무르고 씻기고 하는 일이 ‘기를 빼앗긴다’라며 극구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활동을 15년을 하셨습니다. 15일도, 15개월도 아닌 15년입니다. 매주 월요일은 빠지지 않고 여의도에 다녀 오셔서는 잠시 누워 쉬어야 할 정도로 에너지를 쓰는 일이었지만 월요일은 항상 스케쥴을 비워 이 활동을 하셨지요.


15년 후에 명예롭게 그만두신 이후에는 잠시 허한 마음이 들어 힘들어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호스피스활동을 하면서 만난 여러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그때그때 쓰신 글들의 모음이지요.


키보드나 어색셔서 손글씨로 쓴 글을 며느리가 옮겼습니다. 공식적으로 출간을 하지는 않고, 1,000부를 찍어 지인들에게 돌렸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나 옮겨봅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호스피스 경험 글모음에서 발췌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글입니다.




6월 낙엽

이른 새벽 아파트 단지를 돌며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아직은 6월인데 이름 모를 나무에 단풍이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아니 단풍이 아니라 떡잎 같기도 했습니다. 일부는 떨어져 바닥에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초봄 긴 겨울을 헤집고 뾰족이 싹 티운 새 잎을 보며 이제 봄이구나 싶었는데…… 가을도 멀었는데 시들고 누런 떡잎이 왜 몸체를 떠나 낙엽이 되었는지……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

인철이,
이름만 불러도 가슴에 그리움이 서리서리 내립니다. 늘 맑고 밝은 심성을 가진 아이, 붙임성이 좋아 많은 봉사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아이, 엄마가 있으니 큰엄마라 부르겠다던 아이.
인철이가 6월 23일 새벽 6시 50분 하느님 나라로 떠났습니다.

6월 낙엽처럼.

고통스럽고 힘든 투병생활이었지만 많은 이의 사랑과 정성으로 의사의 선고보다 1년을 더 지탱한 채 21세의 젊은 나이로 하늘나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
       
올해로 8년째의 봉사생활에서 많은 분을 만나고 또 떠나 보냈습니다. 2001년도 인철이가 수술을 받았을 때 그 애를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16세의 어린 소년은 힘겹고 충격적인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늘 밝았습니다. "아줌마, 다리가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아니 오른팔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전 철저한 오른손잡이니까요"
장애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봉사자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었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잘려져나간 팔이 가렵고 아프다며 환상통으로 보채는 그 애를 우리는 만져주고 주물러주기도 했고 머리도 감겨주고 때로는 목욕도 시켜주고 발맛사지도 해주며 인철이와 점점 정이 들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할 무렵 팔이 아프다고 밤마다 울던 인철이는 급기야 골육종으로 판명되었고 2001년 3월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왼쪽 어깨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하면 5년 안 하면 3개월 그리고 항암 7차를 받고 퇴원해 고향인 속초로 내려갔습니다.

***

동행이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저희 Hospice 봉사자는 환자와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입원하면 다시 만나고 함께 울고 웃고 속내를 얘기하고 살아온 날을 이야기하고 때론 부모처럼 때론 친구처럼. 스킨십으로 사랑을 전하고 남은 생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인철이와 6년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진료를 받기위해 서울로 올 때 그 아이는 늘 제가 봉사하는 월요일을 택했습니다. 그 애 어머니는 저를 믿고 속초에서 혼자 올려보냈고 그런 날은 새벽 6시에 어김없이 전화를 주었습니다.
MRI, CT를 찍을 때 전 의수를 벗기는 작업을 도왔습니다. 예민한 나이라 팔이 없는 부분을 간호사에게도 보이기 싫어했습니다. 인철이가 병원에 오는 날에는 함께 점심을 먹고 주스를 마시며 그 애는 이런저런 그간의 일을 신나게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일부러 데리고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밝고 맑은 심성을 가진 그 애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 애가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가끔 전화연락이 오갔고 인철이 어머니는 가정사의 고달픔과 갈등을 호소 했습니다.
"열 아홉 살에 인철이 생부를 만났습니다. 이듬해 딸을 낳았고 21살에 인철이를 낳았습니다. 찢어질 듯 가난한 생활에 남편은 술과 도박 거기에다 외도도 심했고 사흘이 멀다하고 매질을 해댔습니다. 인철이가 세 살 때 남매를 데리고 무작정 집을 나왔습니다.

어린것들을 굶길 수가 없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아이 둘을 묶어 화장실에 가둔 채 일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지독한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어부였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남편은 두 아이에게 잘해주었습니다만 아이들은 쉽게 정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인철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친 할아버지께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2년 후 인철이 생부가 위암으로 죽었고 정확히 2년이 지난 2000년 11월 인철이가 골육종으로 진단 받았습니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사실이었습니다.
인철이 동생을 낳았지만 몸이 약해 잦은 병치레로 우환이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부였던 남편이 팔을 다쳐 뱃일은 나가지만 보조역할 밖에 못합니다. 인철이가 수술을 받을 때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국회 앞을 달려가 무조건 우리 아들 살려달라고 몸부림 쳤습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이종환 최유라 입니다’ 방송을 듣고 편지를 썼습니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MBC에서 도움을 받아 수술비와 검사 비를 사회 복지기금으로 조달했지만 지금은 바닥이 난 상태 입니다.
식당에 나가 근근이 일을 했지만 생활비가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싱싱한 과일하나 제대로 사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만 3년이 되던 지난 2004년 5월 폐 한쪽에 작은 종양 발견, 다시 항암을 시작했고 2005년 2월 CT결과 종양이 0.6mm정도 커졌으며 MRI 결과 견갑골에 몇 개의 종양을 발견, 우리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환자는 전이 상태를 알고 있었고 불안해 하지만 수술하면 치료될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애 옆에는 늘 엄마가 있었고 천사 같은 여자친구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애는 다시 3년 만에 병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입원실에서 만난 그 애는 생각보다 의연했고 애써 웃고 있었지만 눈가에 불안감이 역력했습니다.

"인철이 요즘 성당 잘 다니고 있니?"
"아줌마 신부님이 미워요. 성체를 모시러 나갔는데 갑자기 신부님께서 "손빼" 하시는 거예요. 그 많은 신자들 앞에서요. 전 성체도 못 모신 채 도망치듯 성당을 나왔어요. 얼마나 속상했는지."
"그랬구나. 무척 속상했겠구나."
가만히 인철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의 눈은 그 때를 상기하는 듯 번쩍이다가 이내 그늘이 졌습니다.
"얘야 신부님은 너 하나만의 신부님이 아니야. 많은 신자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셔야 한단다. 우리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네 모습을 내려다 봐. 덥수룩한 머리, 여드름투성이의 네 얼굴, 건들건들 걷는 네 몸짓. 나라도 너를 오해할 수 밖에 없겠다. 더구나 네 본당 신부님은 네 처지를 모르시잖니. 그러니까 네 의수가 주머니에 있는걸 신부님께서 오해하실 수뿐이 없지 않겠니. 여의도 에서는 신부님 수녀님이 너를 알고 네 아픔을 이해하지만 속초에서는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모르실 수 밖에.."

그 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성사를 보았으며 병원 주일미사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수술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병실에 들어선 내게 그 애는 많이 들떠 있는 채 반가워 했습니다. 여자친구와 다른 여러 명의 친구가 함께 있었습니다.
"오늘 기분이 너무 좋구나. 엔돌핀이 많이 나오겠네."
"그런데 아줌마. 걱정이 있어요. 여자친구 대학가면 MT도 가고 OT가는 것 저 싫은데요."
"네 친구는 OT를 가도 MT를 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할거야. 우리 인철이가 이렇게 떡 버티고 있는데."
씩 웃는다. 그래도 또 하나의 불안은 안경너머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저. 아줌마. 핸드폰 샀어요. 최신식이예요. 디카도 되요. 사진 찍어 드릴께요"
"그래 예쁘게 찍어줘(그 애는 어느 후원자가 선물해준 핸드폰을 보물처럼 안고 잔다고 하였다). 


"우리 기도하자."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께 찬미 드리고 영광 드립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 인철이를 아버지께 맡겨 드립니다.
이 아이에게 특은을 베푸시고 이 아이가 앞으로 겪어야 할 힘든 순간에도 주님 늘 가슴에 안아주시고 지켜주십시오. 저희가 믿을 곳은 오직 주님뿐 입니다.
이 아이를 치료하는 모든 의료진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고 한치의 오차와 실수함이 없이 내 가족처럼 사랑과 정성으로 최선을 다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이는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사이사이 행복이랄까 힘든 순간에도 핸드폰이, 여자친구가, 신부님이, 봉사자들이 이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었다.

지금 수술을 해도 30%의 생존율을 갖고있답니다. 언제 어느 곳에 다시 전이가 될 지도 어쩌면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안타까움으로 요즘 잠을 설칠 때가 많습니다. 5년동안 밤마다 촛불을 켜고 기도했는데… 환자와도 궁합이 있는가보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앞섭니다.

수술 후 그 애는 다시 속초로 내려갔고 한번 전이된 종양은 젊은 애 답게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항암차 한달에 몇번씩 속초와 서울을 오가며 그 애는 점점 피폐해져 갔습니다. 얼굴은 검고 군데군데 부스럼이 돋았으며 입술에도 핏기가 없어져 갔습니다.

2005년 12월 25일 속초 청호동 성당에서 마리아로 세례를 받은 그 애 어머니는 영세식에 참석한 저를 붙잡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전 신앙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아줌마에게 은혜를 갚는 길은 제가 영세를 받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냥 허덕이며 악에 바쳐 살았습니다. 아이를 통해 아줌마를 알았지만 이런 세상도 있구나 세상이 달리 보입디다."

모든걸 짊어지며 고단하게 살아가는 인철 어머니의 작은 어깨가 심하게 떨고 있었습니다.

카드를 돌려 막다 가재도구가 경매에 붙여졌을 때 제발 우리 인철이가 좋아하는 컴퓨터에만 붙이지 말아달라고 몸부림했다던 그이. 내가 무능해 애비 노릇을 못했다면서 우는 남편이 너무 고맙다던 그이. 그 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혼란스럽다던 그이. 살고 죽는것 하늘에 맡기자는 말 듣기 싫다던 그이. 그이가 비록 초라하지만 빛바랜 한복을 곱게입고 주님 안에서 마리아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 애는 저를 데리고 속초 영랑호와 어릴 떄 살던 곳이라며 작고 초라한 집을 보여주고, 다니던 초등학교에도 데리고 갔습니다. 꼭 아줌마와 함꼐 오고 싶었다면서… 순간 이 애가 얼마 안 가 우리 곁을 떠나겠구나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가장 그리워하든 옛 곳을 찾아간다는 회귀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아줌마는 엄마 같아요. 하지만 엄마가 있으니 큰엄마라 부를게요."

횟집에서 젓가락질을 하던 그애는 끝내 눈물을 보였습니다.
버스가 떠날 때 한없이 손을 흔들며 한점 작아진 물체로 남을 때 난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 하느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듬해 2월 달에 병원에서 만난 인철이는 뜬금없이 "아줌마 회갑이 언제예요. 아무래도 아줌마 회갑까지 못 갈 것 같아요" 그 애는 차디찬 대리석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려 했습니다.

4월 말에 그 애를 보러 속초에 내려갔을 때 그 애는 너무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눈도 못 뜨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온몸은 진통으로 구겨져 버렸습니다.

"인철아 힘내. 아줌마가 기도하고 있어. 아줌마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저도 아줌마 사랑해요."

제가 마지막 들은 그 애의 음성이었습니다.
병원을 마다하고 집에서 하루 7-8회 속초 의료원에 가 진통제를 맞으며 그렇게 사위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신부님을 모셔다 종부성사를 받았고 성체도 모셨으며 가족들과 화해의 시간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한다고 말해줘야지
하늘나라는 꼭 있는 거라고 믿게 해줘야지

 ***

"누나 나 죽으면 제일 먼저 마리아 아줌마께 연락해야 해."

***


영안실에서 만난 그 애는 참으로 편안해 보였습니다.
웃는 듯 보였고 살색도 고왔으며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 듯 편안해 보였습니다. 곤충이 껍질을 벗어내는 아픔에서 헤어난 것 처럼…  
인철이는 그의 소원대로 영랑호에 뿌려졌습니다.

 ***

요즘 긴 터널에서 불거져 나온 듯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리고 가슴이 따뜻해 옵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늘 밝고 사랑스러웠으며 유독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고 기도를 받았던 그 애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아픔도 없고 가난하지도 않으며 외롭지도 않게 훨훨 즐겁게 뛰어다닐 것 같습니다.

 ***

오늘밤도 기도합니다.
인철이의 영혼이 주님 나라에서 편히 쉬기를.
또한 그의 영혼이 은인이었던 많은 분들과 그를 돌봤던 봉사자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 하리라는 것도 믿습니다.

그 애 어머니는 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영랑호를 간다고 했습니다. 누나를 데리고. 돌아와선 전화를 합니다. 


"아줌마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딸애 꿈에 인철이를 봤는데 하얀 옷을 깨끗이 입고 어린 아이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며 그애가 천국에 간 것이냐고 묻습니다. 아줌마께 보답하는 길은 열심히 남매 키우며 잘 사는 것이겠지요. 저도 이웃을 위해 살고 싶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끝으로 Hospice 선구자인 ‘시실리 손더즈’가 한 말이 다시금 생각납니다.

"당신은 당신이기 때문에 소중하고 당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평화롭게 죽는 것을 도와줄 뿐 아니라 당신이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입니다."

Hospice는 나눔이 아니라 배움입니다.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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