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F 965일차 - 명절 전 도장 풍경(2) : 쓰는 것과 치는 것
우리 어렸을때도 극본이 따로 출판되었는지 알수는 없으나, 적어도 어렸을때 극본을 본다 하면 거의 교과서에서나 있었다. 촌스럽게도 요즘 들어서야 유명 드라마나 영화, 혹은 연극 등의 대본집이 출판되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브런치에 로그인할때 씌어진 영어 문구는, 저 유명한 톨킨과 비견할만할 당대의 환상소설가이자 신학자, 개신교 변증법 철학자이기도 한 C.S.루이스의 '당신은 글을 써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라는 문장이다. 그러므로 저 함민복 시인의 말씀처럼, 시를 쓰는 이는 누구든 하얀 원고지든 화면 앞에서 자신에게 깊이 잠겨 대화하거나, 저 세상에 끝없는 물음을 던져 메아리처럼 나오는 답변들을 문장으로 옮길 수 있을 터이다. 함민복 시인께서는 스스로 게으르다 말씀하시며, 자신은 그렇게 열심히 소설의 설정을 짜거나 문장을 만들어 오랫동안 끈질기게 쓸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나의 친애하는 차현 형님께서도 그렇게 글을 쓰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간혹 쓰는 습작의 내용들이란, 결국, 내 스스로 수다 떨듯 채우고 싶은 욕망에 흙칠하듯 화면에 채우고 채우는 문장의 연속이었다. 즉슨, 시나 소설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 쓰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출발하여 거의 그로부터 완성된다. 다만 극본은, 무대나 영상에서의 모든 환경을 상정해야 하므로, 매 대사를 어떤 억양으로 전달해야할지, 어떻게 발음해야할지, 심지어 주변의 음향이나 조명까지도 신경쓰지 않으면 안된다. 이래서야 내가 아는 글쓰기라기보단, 숫제 하나의 조형적 작업에 가깝다. 이번에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도, 박찬욱 감독은 이래서 명감독인가, 어찌 이렇게 모든 장면에 스스로 작업에 대한 열정을 아낌없이 쏟았을까 싶으면서도, 전혀 그 열정이 어색하지 않았고, 연출이 촌스럽지도 않았다. 감독의 노고가 어느 장면에나 자연스럽게 녹아나오면서도 완성미가 두드러졌기 때문에 그래서 마땅히 잘 만든 영화라고 말할 수 있었다.
어제 오늘 공도 형님과 연이어 붙었다. 얼마 전 셋째를 낳으신 공도 형님은, 92kg의 거구를 자랑하시면서 예전의 근육보다는 비교적 부드러운 살이 더 많이 보이긴 했으나 여전히 위압적이고 뛰어나신 분이었다. 나는 그동안 주로 저녁반에 갓 유단자가 된 콜라 부사범이나 햄버거 사매, 혹은 어느 정도 경력이 있어도 아직 검은 띠를 받지 못한 유급자들을 상대로 가볍게 치고 빠지는 일들을 주로 해왔기에 오랜만에 야수처럼 도장에 다시 돌아오신 형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다. 나의 보법과 하단차기는 모두 가벼웠고, 나는 분명히 치고 들어가거나 제때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치 훨씬 실력이 낮은 흰띠 사제사매들을 도와주듯이, 팔락거리는 가벼운 움직임으로 임했다가 정말이지 직사하게 맞았다. 실컷 부어 무거운 양쪽 허벅지를 움직여 출근하면서도, 나는 어떻게 하면 예전의 움직임으로 형님과 맞설수있을지 고민했다. 키로도 30cm, 체중으로도 30kg, 어느 쪽이든 무시못할 무게와 길이 차이에다, 오랫동안 공도를 익히시며 타격-관절 어느 쪽으로든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을 자랑하시는 공도 형님을 상대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형님은 비록 애 셋을 낳고 돌보시면서, 몸매가 많이 무너지긴 했으나, 여전히 다리를 쭉 차올려 본인의 정수리 위쪽을 스스로 후리실 수 있고, 연이은 주먹에 이은 발차기 조합도 무뎌지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동안 역시 익혀온대로, 형님과 서로 맞닿는 타점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좀더 허리를 깊게 넣고, 팔과 어깨도 훨씬 더 길게 찔렀다. 즉, 예전의 움직임을 버리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상대를 쳐야겠다, 물러나야지 말아야겠다, 이기고 싶다는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 때 나는 당연히 불리함을 알았지만, 더이상 머리로 좌우 공격이나 방어의 조합을 생각치 않았고, 오로지 그냥 몸에 밴 기술들을, 감정에 따라 문장을 옮기듯 뿜어낼을 뿐이다. 결론은, 오늘도 작살나게 맞아서 양쪽 허벅지는 더욱 붓고, 심지어 오른쪽 훅을 카운터로 관자놀이에 맞아 그자리에서 쓰러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후련하다. 아내는 결코 좋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처럼 오전반에서 분에 넘치는 상대와 붙어 본인을 마음껏 소진하고 왔는지 무척 후련해보인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내는 늦은 시간 고기를 넣은 된장찌개를 끓여주어, 아주 조금 남은 고량주와 빨간 소주를 섞어 입가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