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훈련일지)

ITF 번외편 - 2023 옥상 도장 드디어 개장!

by Aner병문

4층 꼭대기인 우리집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면 빨랫줄, 장독대와 함께 있는 서너 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 여름에는 소은이 수영장을 설치하기도 하고, 부모님과 고기 구워먹기도 하며, 고등어를 좋아하는 날 위해 아내가 에어프라이어를 돌리기도 하는 곳이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옥상도장 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하루하루 지나고 한해한해 갈수록 내게 무척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왜냐하면 처자식과 함께 하면서, 총각 시절처럼 매일매일 하루 4시간씩 도장에서 태권도 연습에 할애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아이가 낮잠든 시간이나, 출근 전, 혹은 퇴근한 후의 자정 무렵이라도 누군가의 방해없이 도복입고 맨손발로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의 나는, 공부건 훈련이건 누가 보건 말건, 있건 말건 언제 어디서든 내가 필요하면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어데서든 술을 마시며 책을 읽었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기도 하고, 투로나 형 연습을 하기도 했는데, 남들 눈이 무섭지 않았다는 건 둘째치더라도(사실은 그만큼 눈치 보지도 않았고, 눈치도 없었다는 뜻이 더 정확했겠으나), 처자식이 생겼으므로 내 체면 상관없이 멋대로 행동할 수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시공간적으로 유리된 자유로운 틈새가 없었다. 오죽하면 유명한 문호들은, 집안의 자질구레한 살림에조차 신경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오로지 집필하기 위하여 비싼 호텔에 묵으며 글쓰기에만 전념한다고도 하지 않던가. 결혼하고 나서야 나는 책 한 권 올바로 읽을 틈이 없어, 늘 몇 줄의 인문학을 읽으며 생각하기에 힘썼고, 백 개의 팔굽혀펴기조차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누어 채우는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속세와 연결되지 않고 단 몇 시간만이라도, 벌거벗을 수는 없으니 도복을 입고 오로지 태권도만 생각할 수 있는 곳- 당연히 도장이겠으나 버스타고 사십분씩 왔다갔다 하기만도 바쁜 곳으로 늘상 갈 수 없으니 결국 날씨가 좋을때의 옥상도장은 더할나위없이 내게 소중한 태권도의 공간이 되었다.



어제 모처럼 도장으로 가서 일본 대회를 준비하는 콜라 부사범을 도와주면서 나도 내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3단 승단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가정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가장 부족하고 적은 연습량으로 승단에 임했기에, 늘상 연습량과 노력으로 부족한 재능과 실력을 메워왔던 나는, 정말이지 내가 나온 유튜브조차 누구에게 자랑하지 않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못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나는 체력적으로 준비되지 못했고, 가장 자신 있었던 틀 연무도 허우적허우적 하다 동작 몇 개를 놓쳤다. 그러므로 올해 9월 ITF 월드컵을 위해서라도, 군살을 줄이고, 체력과 근력, 유연성을 겸비하여 틀과 맞서기 기능을 높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였다. 좌우간 집안일도 대략 정리되고 해서 조금씩 훈련량을 높이고는 있고, 또 3단의 첫번째 틀인 삼일 틀도 손수 유튜브로 외워 어느 정도 길을 잡는 등 노력했으나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사는 도시의 날씨는 낮에 무려 13도, 도복을 입고 밖에 나가보니 그리 춥지 않고, 움직여보니 제법 땀이 흘렀다. 삼일 틀부터 거꾸로 되짚어내려가 사주찌르기-막기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딸이 낮잠을 딱 꺠었고, 아내는 나를 부르다 부르다 밖으로 나와보니 내가 헐떡거리고 있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뒤따라 나온 딸이 내 도복을 보고, 태권도! 라고 했다. 다시 봄이 왔으니, 할 수 있는만큼 또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