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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훈련일지)

ITF 번외편 - 모두가 각자의 역할이 있다.

by Aner병문

* 비위생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일찍이 알뛰쎄는 호명 呼名 이론을 말했다. 호명이란 말 그대로 뉜가를 부른다는 뜻이다. 언뜻 보기에, 군대라는 사회에서 제아무리 장군이며 고위 장교들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혈기왕성한 신병들 수천수만 명을 혼자서 휘어잡기란 물리적으로 어려워보인다. 그럼에도 장군의 호령 한 번에 내무반 앞 산이 없어지기도 하고(^^;;), 군기 엄정한 병사들은 언제나 절대복종한다. 알뛰쎄가 보기에 인간의 삶이란, 애초에 하나의 연극무대처럼, 지어진 역할로 불려 나온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김철수! 넌 오늘부터 신병 을이야, 라는 상황의 부름에 따라, 어제까지 부모님 말씀도 안 듣고 제맘대로 먹고 마시고 놀던 '먹고 대학생' 김철수 군은 얌전한 신병이 되어 남들처럼 부조리한 군복무에 적응하고자 노력한다. 설사 그가 울뚝밸을 부려 하극상을 저지르려 한들, 아무도 그의 행동을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의 당연한 행동이라고 긍정해주지 않는다. 군대에서 반항이란, 군대라는 연극 무대를 깨는 일이고, 호명된 역할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명 이론이 힘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사회적 배경이나 상징적 이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들어본 적은 있을, 이데올로기- 이념이라는 단어다. 이러한 이론은, 고대 동양 사회에서도 있어 왔는데, 공부자께서는 명 命 은 곧 名 이라고 하셨다. 이름 名 이란, 다른 개체들과 구별되기 위한 고유한 호칭이며, 이 호칭으로부터 내가 평생 지켜야할 사회적 역할 命이 서로 연결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오랜만에 위나라 고위직으로 취업 기회를 얻은 공부자에게 수제자 겸 경호원이었던 자로가 '재상에 다시 오르시거든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라고 여쭈자 '이름을 다시 세우리라. 正名' 고 말씀하셨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작해야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투덜대는 자로에게, 공부자는 '야재 野哉 - 요즘으로 치면 쌍놈 정도?!' 라고 욕을 하셨을 정도였다. 물론 고대 중국의 학자에게, 지금과도 같은 민주사회를 바라기엔 당연히 무리겠으나, 공부자께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 - 대동사회란,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역할을 올바로 다하는 곳이었다. 비록 훗날 모택동의 공산중국으로부터 계급적 사회를 고착화시킨 부르쥬아적 반동이라고 철저히 비난당하기는 하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이란 나 혼자 오롯이 살고자 하기보다(위아론 을 부르짖은 양주처럼 아주 없지는 않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얼마나 보탬이 되고, 의미있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철저히 고민하는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말은 이미 너무 유명하며, 묵자 역시 상공업을 중심으로 서로를 아낌없이 사랑하는 겸애 兼愛의 공동체를 주장하기도 했다.




지저분한 이야기를 감추느라 사실 앞말이 좀 길었는데, 엊그제인가, 안그래도 퇴근 후 지쳐 돌아온 나는, 집 앞에 떨어진 웬 휴지 한 뭉치를 보았다. 갈색의 끈적해뵈는 덩어리가 떨어져있기에 누가 고구마를 먹다 흘렸는가 버렸는가, 별 생각없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치우려고 하니 아무리 날 풀리는 봄날에 방치된 고구마라고 해도 지나치게 찐득거렸다. 그제서야 인분인 걸 알고 기겁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빗자루를 대지 말고 차라리 휴지로 더 둘둘 싸서 버리는 건데, 아니, 그걸 떠나서 대명천지에 집 앞에 인분을 던져놓은 사람은 누군가 싶었다. 다른 사람 집도 아니고 내 집이요, 이미 손을 댔는데 나몰라라 할 수도 없어 우거지죽상을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안그래도 강사 교육 일정이 잡힐때까지 다시 본 부서로 돌아갔지만, 강사 부서에서 나의 업무를 예의 주시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뜩이나 압박을 받은 표정으로 집에 들어오지 말기를 당부한 아내였지만, 내 얘길 듣고는 선선히 청소도구를 내주었다. 물티슈로 어떻게든 해보려했으나 도저히 물티슈로 될만한 양이나 질감이 아니라서, 일단 휴지로 싹 싸서 버리고, 물통으로 물을 길어다 몇 번이고 문지르고 닦으며 겨우 집 앞 흉물을 치웠다. 농사짓던 시절에는, 짚과 흙과 함께 비벼다가 푹 삭힌 뒤에 별 생각없이 삽으로 퍼서 고랑에 뿌리기도 했으며, 유기농업계의 아이돌로 유명했던(ㅋㅋ) 지인 푸른들은, 어렸을때부터 삭아가며 열을 내는 거름들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녹이기도 했다고도 했었는데, 다시금 속세에 나오면서 인분이란 그저 안그래도 골치 아픈 삶에 더 복잡스런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여하튼 아내는 속이나 풀라며 선선히 술을 내주면서, 내 그거 누군지 알겠십니더, 오늘 낮에 소은이랑 자전거 타고 돌아오는데, 웬 행색 초라한 아주머이가 내 보더니 후다다닥 막 도망가더라꼬, 근데 그기이 꼭 똥 사놓고(쌍시옷 발음 못했음ㅋㅋ) 도망가는 꼬라지라, 슬마슬마 했더만은, 기어이 고 앞에 샀는지(ㅆ 2연타! ㅋㅋ) 버맀는지 하여간 고래 가뿟네, 하여간 고생하셨니더.



술도 안 잡숫는 중래향 사장님이 권해주신 38도짜리 장송은 부드러웠다. 늘 찌르는듯한 50도짜리 고려고량주만 마시다가, 오랜만에 다시 마신 장송은, 도수가 약간 낮은만큼, 더 길고 넓은 향취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딱 석 잔만 마셨다. 그리고 아내가 딸을 돌보고, 약을 먹이고, 잠자리를 보는 동안, 저녁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했다. 술을 마셔도 인사불성 될때까지 마시지 않으며, 반드시 내가 할 일을 한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정 힘들면 내게 도와달라 부탁하지만, 아내는 기본적으로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항상 소은이를 돌본다. 요즘 황사가 기승이라 다시금 감기를 앓기 시작하여 어린이집을 보내지 못한 요즘에는, 더욱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던지듯이 아이를 본다.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아이는 당연히 혼자 평온하게 클 수 없다. 아비는 밖에 나가 생업을 하고, 돌아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처자식을 건사하며, 어미는 자식과 함께 하고, 가정을 꾸려준다.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의무도 아니지만, 서로 도와가며, 때로는 역할을 바꿔서라도 반드시 둘이서 해야할 일이다. 그런 합의가 없다면 가정은 정말 힘든 공간이 될 터이다.



어찌 남편과 아비로서의 역할만이 있으랴. 오늘 나는 닳듯이 힘들어 예민했다. 생각해보면, 다시금 기침콧물 재채기가 심해진데다, 부쩍 바깥 세상에 관심을 더 가지며 좀처럼 잠을 자지 않으려는 딸 때문에 자꾸 잠을 설쳐 더 힘든지도 모르겠다. 멍하게 아침에 일어나 아내와 함께 소은이를 돌보다 출근한 오늘, 평소처럼 10시 출근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알고보니 9시 출근인데 넌 어디냐는 사무실 전화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출근길 버스 기사님은 누가 봐도 늑장을 부리며 매 신호마다 일부러 정차하고, 정차할때 느긋이 전화기로 유튜브를 보다가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앞서 말했듯이, 부서가 애매하게 걸쳐진데다 이제는 타의모범이 되는 역할도 해야했기에 잘 처리하지 못한 업무로 인하여 조리돌림 당하듯이 오랜만에 크게 혼났다. 어느 정도는 신입 길들이기겠지 싶어 이해도 못할 바는 아니었으나, 하필 또 업무를 지시한 상사께서도 미안해하시는 바람에, 오히려 분위기 푼다 농담 몇 마디 한게 더 어색해져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정말 오늘만큼은 꿔바로우를 먹고 싶다고 했고, 그래서 중래향에 가니, 안돼, 나의 소중한 중래향에 웬 손님들이 이렇게 가득한가, 안 그래도 살집이 없는 사장님은 커다란 냄비를 부여잡고, 볶고 굽고 부치고 끓이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치엔 시엔셩, 미안해, 좀만 기다려주, 여 들어와 만두나 좀 먹으라! 뭔 이 집 아들도 아니고, 중년의 부인께서 혼자 음식 만드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 만두 좀 먹다가, 불 앞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안쓰러워 커피 두어 잔 사다드리고, 방금 튀긴 꿔바로우와 만두를 가지고 집에 돌아오려는 찰나에, 버스 노선이 또 바뀌어서, 또 정류장이 더 멀리 밀렸다. 안돼, 튀김옷 눅눅해진단 말이야, 게다가 나 지금 이러한 사소한 것들 계속 쌓이는 걸 버틸 수가 없다구 ㅠㅠㅠㅠㅠ 나는 결국 오늘도 우거지죽상을 하고 대문을 열었고, 아내는 진심 미안해했지만, 하루 종일 아이를 보는 아내 입장에서 나 아니면 누구에게 뭘 사다달라 부탁을 하고, 누가 하루 종일 대화도 제대로 되지 않는 아이 뒤치다꺼리한 그 속을 풀어주겠는가. 남편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다만,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나라도, 기분이 나쁠 때는 사실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아내의 성의가 고마워서, 그냥 두어 잔 정도만 마셨다.



아내는 소은이를 위해 커다란 자전거를 하나 샀다. 사실 네살바기 아이 몸에나 크지, 우리가 보기엔 아담하였다. 보조 바퀴를 달아놓으니 제법 그럴듯하였다. 안그래도 슬슬 이제 발로 탁탁 미는 킥보드- 정식 영어로는 스쿠터Scooter라고 하는 탈 것에 지루해하고, 놀이터에서 큰 오빠들이 타고 노는 자전거며, 동무들의 세발자전거에 자꾸 관심을 갖기에, 아내가 아이의 첫 애마를 마련해주었다. 조그마할때 태우던 유모차 옆에 제법 위풍당당한 자전거가 놓여져 있으니 세월이 무상하여 그 또한 그럴 듯하였다. 출퇴근할때마다 아이의 자전거에 눈에 들어오니,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늘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정치하는 이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면 나라가 혼란스럽고, 부모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면, 슬프고 아픈 것은 아이다. 하필이면 자꾸 교회 다닌다는 작자들이 온갖 그럴듯한 짓은 다하면서, 죄 없는 아이들을 자꾸 하늘로 올려보내니, 끔찍해서 뉴스도 못 볼 지경이다.



역할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끔은 숨을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아내는 보통 퇴근이나 주말에 내게 애를 맡기고 잠시 유튜브를 보거나 혹은 내 옆에 누워서 꼼지락꼼지락 헤헤 웃는다. 아내가 마음을 비우는 방식이다. 나는 요즘에 날이 풀려 밖에 나가 태권도 훈련을 자주 한다. 오늘 밤에도 나갔더니, 아내보다도 너와 곽선생이 더 야단이었다. 안그래도 간암 걸리도록 술을 마시는데, 이젠 미세먼지 마시고 폐암까지 걸릴 셈이냐며 성화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듣고나니 요즘 목이 따끔거리고, 늘 입안이 텁텁한 것이 그래서 그랬는가 싶었다. 그래도 나온 걸음이라 어쩔 수 없었다. 추워서 못 하고, 더워서 못하고, 비와서 못하고, 미세먼지 많아 못하면 안그래도 부족한 실력에 언제 익혀 언제 또 늘겠는가. 마음에 쌓인 때를 비우고 버린다는 생각으로, 보 맞서기 삼십개를 마치고, 유신 틀과 삼일 틀을 반복하고, 이후 유급자 틀 처음까지 거꾸로 쭉 내려왔다가, 다시 유신 틀과 삼일 틀로 마무리하고, 여유롭게 근력 훈련을 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주지 않으면, 번잡스러운 마음을 다잡을 수 없다. 선선히 집안을 치워주고, 밖에 나가 몸 좀 풀라고 내보내준 아내에게 감사한다. 잡스러운 말이 길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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