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단과 등단 ㅡ 우리는 작가인가?
음식을 잘한다, 태권도를 잘한다, 글을 잘 쓴다, 노래를 잘 한다ㅡ 도대체 무언가를 잘한다 란 무엇을 의미할까? 사십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내 삶의 고삐를 주체적으로 잡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 삶의 많은 영역은 내가 쟁취했다기보다 던져지듯 주어졌었다. 나는 밀어닥치는 많은 것들을 허우적허우적 해치우기 바빠 내가 무언가를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판단의 기준은 늘 당시의 부모님을 비롯하여 타인에게 있었다.
나는 이 일기를 쓰기 전에 다시 한 번, 잘한다 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고민했다. 젊은 날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언어에 대한 철저한 사유라고 했다. 몸에 가장 절박히 닿는 것은 늘 태권도였다. 마투라나는 몸에 채워진 경험이 사유를 만든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태권도의 기본기와 틀과 맞서기 연습을 반복하면서 어떤 모습이 태권도를 잘한다 설명할수 있을지, 그나마 심판을 통해 명확한 기준이 있는 태권도 이외의 다른 주관적 영역들은 어찌 숙련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예컨대 밥 잘하는 유진이의 모든 음식들은, 내가 아는한 적어도 국내 최고지만, 누군가는 그녀의 음식을 좋아하지 않거나 맛없다 할수도 있다. 음악도 미술도 문학도 취향에 따라 우열을 나눌 수 있으니 더욱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다시 태권도로 돌아와 생각하였다. 태권도에는 목적이 있다. 작게는 몸을 지키는 기술을 익히고, 크게는 스스로의 심신을 단련하고 단속한다. 그러므로 틀이나 맞서기, 격파 등의 기술을 서로 겨룰 때, 그 움직임이 과연 효율적으로 최적의 효과를 내는지 심사한다. 이쯤되면 누군가는 방어를 위주로 상대가 지치길 기다려도, 누군가는 몰아치는 공격으로 상대가 기가 질려 꺾이도록 해도, 목적에만 합당하다면 잘한 태권도가 된다. 요리도 음악도 미술도 문학도, 취향을 넘어선 합리적 효율의 당위성이 있다. 어떤 이는 매운 음식이나 지나치게 슬픈 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잘 만들었고 의미 있다는 평을 내릴 수도 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썼을때 잘 썼다 하는가? 혹은 어떤 글을 잘 썼다 하는가? 현재 등단은 한국과 일본에만 남아 있는 제도다. 등단이란, 승단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방향이나 기술이나 감성 등을 근거로 문단에 편입케 하는 인증과정이다. 등단하지 않는다 하여 글을 쓸수 없는 것도 아니요, 등단했다 하여 그로부터 생산되는 작문이 모두 탁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많은 일반 수련자들이 기본적으로
승단의 첫 관문인 검은 띠를 바라듯이, 작가로서의 등용문 역시 등단으로 꼽는 이가 적지 않다.
브런치의 심사를 통해 작가라고 불리게 되었노라 일컫는 이들이 있다. 브런치의 심사기준은 공개되지도 않았기에 공신력이 있다 없다 논하기도 어렵다. 개인적으로 감상을 말하자면, 옆집 여고생에게 매일 일기를 쓴다 말했더니, 어머, 매일 글을 쓰시면 작가이시네요, 안녕하세요, 작가님, 출판은 언제 하세요? 되묻는 상황과 비슷하다 생각한다. 이 인터넷 사이트에 문장을 올릴수 있는 승인을 받았다고 해서, 등단과 같은 자격을 받았다 생각할수는 없다. 등단을 숭고히 여겨 그를 통해 인정받은 이만 글을 쓸수있다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오랫동안 글을 쓰고 다루며 팔아온 이들이 공개된 기준으로 평가한 내용도 아닌데, 기껏해야 이 사이트의 심사에 구태여 목맬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기라성 같은 준재들이 넘치는 이 사이트에서 뉜들 내 잡스러운 일기를 눈여겨 보랴만은, 그래도 이 사이트의 심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굳이 신경쓸 필요 있겠느냐는 무례할수도 있는 언사를 올린 이유는, 예전부터 다소 거슬리고 피곤하던 글쓸 자격에 대한 논쟁이, 글쓰는 이들에게 금액으로 응원하는 제도가 생기며 더욱 심화된듯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일기를 쓰며 술주정을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예전부터 스스로가 브런치의 심사를 통과한 작가입네 하며 검증되지도 않은 좁고 얕은 풍문들을, 퇴고하지도 않은 지저분하고 천박한 문장들로 줄줄 써내려가는 주제에 저들끼리 마치 문단이라도 이룬듯이 작가님, 작가님 호칭해대는 일부 무리들이 아니꼬웠고 같잖았다. 젊어서 철이 없을때 나는 주먹처럼 혀로도 싸웠고 술상을 엎었으며 온갖 기술로 드잡이질하며 치고받았다. 그렇게 살아야만 문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쓸데없이 타인에게 엄격했고, 나는 그 기준을 채울 수 없으니 늘 자주 취해 있었으며, 무공이든 문학이든 철학이든 내가 아는 영역에서 어긋나는 이들과 늘 말과 주먹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스스로가 브런치의 심사를 통과해 마땅히 인정받은 이인데, 왜 충분한 좋아요, 를 받지 못하는지, 왜 충분한 금액으로 투자받지 못하는지, 왜 출판 제의가 오지 않는지, 고민하고 질투하고 화가 나는 이들에게 솔직히 묻고 싶다. 아주 오래
전 신달자 시인께서 젊은 시인들에게 너무 쉽게 글쓰려하지 말라하여 김경주 시인과 논변을 벌였듯, 나는 그런 이들에게 솔직히 스스로 과연 돈 받고 팔만한 글을 쓰고 있는지, 정말 그리 생각하는지, 그 정도 독서와 습작은 먼저 했는지 묻고 싶다. 누군들 태권도를 할수 있지만, 대회에 입상하거나 도장을 운영하려면 그에 맞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만약 그에게 있어 태권도가 단순히 돈을 벌거나 유명세를 갖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그에게 내실을 다지는 훈련은 중요치 않다. 그러므로 왜 내 글이 팔리지 않는지, 왜 출판되지 않는지, 왜 나를 좋아하고 알아봐주지 않는지 서운함을 토로하는 이들께 물어보고 싶다. 정말로 스스로의 글이 그만한 가치가 있으신가? 애초에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은 있으신가? 젊은 날, 강연에서 우연히 마주쳐 고미숙 선생에게 아무 글이나 써도 좋으니 그냥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묻던 처녀처럼, 막연한 욕망과 욕심은 아닌가? 이렇게 며칠간 묵힌 이야기를 마침내 풀어버린 나는, 이미 거쳐왔고, 부끄러웠고, 절망했으며, 더는 욕심 부리지 않으려 한다. 읽는 일만으로도 이미 너무 넘치게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