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의 팔불출 일기
어머니가 어제 손녀 운동회 첫 도시락을 싸신다고, 이미 소고기 잔뜩 넣은 카레에 전복까지 데쳐 잘라 얹어주시고(진짜임!) 추석 때 사놓은 보리굴비 덕에 조기 맛을 알게 된 딸내미는 집에서 먹는 매 끼마다 비린 것을 거르지 않는데도, 어머니는 김창완 선생 노랫가사마냥 소금에 절인 고등어를 세 손이나 사 오셨다. 정작 그 고등어는 아직도 냉장고에서 얌전히 누워있는데, 어머니는 불고기를 재워놓으시고, 더덕과 가지를 무치고, 진미채와 더불어 잘고 굵은 멸치를 따로 볶으시었다. 심지어 문어도 한 마리 통으로 찌셨다. 그동안 어머니는 한우구이, 고등어 및 갈치, 병어, 삼치 등 각종 제철 해산물 등 소은이 반찬에 내가 손대려할때마다 이건 며느리와 손
녀 반찬이라며 눈을 부라리곤 하셨다. 아니, 너 참말로 진짜 이거 맛이나 알고 묵는 것이여? 하기 무섭게 소은이는 내가 잘게 자른 문어다리와 전복을 밥숟가락에 얹어 물에 적신 김치와 뚝딱하더니, 아빠아, 생선 주세요! 라며 할아버지가 이미 발라놓으신 조기구이 달란다. 이놈아, 그 조기는 느그.외할머니 살아 생전에 너 먹으라고 미리 장만해주신 것이여, 알고나 묵어라이, 하며 살점을 또 얹어주니 물에 만 밥에 김을 살짝 적시고는 돌돌 말아 잘도 먹는다. 제정신 박힌 부모라면 어느 누가 제 자식 입에 들어갈 밥을 아까워하랴만, 참 잘 먹고 잘 놀고 잘 큰다.
내 입으로.이런 말하기 참으로 뭐하나, 아내는 현모양처 재색겸비 천하효부라, 늦은 밤에 상경하여 오자마자 내 뒤를 이어 어머니 반찬 만들기를 돕고, 새벽 네 시에 또 일어나 어머니의 도시락 싸기를 마저 도왔다. 내가 하려하자 아내는 어제 본인이 오기 전까지 살림 다하지 않았냐며 소은이 끼고 좀 더 누우라 하였다. 착하고 무던한 며느리지만, 그래도 어른이시니 살림에 이런저런 얘기 안하실수 없는데, 그럴때마다 아내는 아이고, 어머이, 알겠습니데이, 걱정 마시소 하며 헤헤 웃었다. 평소 둘이 있을 때도 아내는 늘 고마워하는 내게, 어른은 원래 그런기라, 펭생 그래 사신 어른을 우리가 어째 바꾸려카겠능교? 젊은 우리가 마차야 옳지, 글고 어머이 내한테 엄청 잘해주쎄요, 내 어머이도 가뿌고 이제 내한테 남은 어머이는 진짜 시어머이밖에 더 있어예? 했다.
잠이 많은 아내는 함께 운동회를 다녀와 꾸벅꾸벅 졸더니 마침내 잠들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소은이를 돌보다 소은이도 일찍 일어나 푸지게 먹고 놀고 마침내 지쳐 이른 잠을 자기에 뉘어놓고 빨래와 설거지를 해놓고, 티비 불에 비춰 이제야 한 잔 한다. 수요일 혹은 금요일마다 한번씩 오시는 홍어무침 어르신은 비슷한 사투리를 쓰는 나를 귀여워하셔서, 아따, 큰 눔으로 하나 줘야제, 하며 삭히지 않은 살점을 입에 넣어주시었다. 갓 무친 홍어에 멸치볶음, 진미채, 소은이가 먹다남긴 밥과 녹두죽, 불고기, 성찬이다. 술 한 잔 마시고 말랑말랑해진 머리에 책 읽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 삶은 늘 힘들지만, 처자식 덕분에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