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겠지만
외세의 압박에 시달리던 근세ㅡ근대 중국의 상황에 맑시즘은 하나의 이론이라기보다 차라리 강령에 더 가까웠을 터이다. 투쟁과 운동으로 세상의 근원을 정립해나가던 젊은 모택동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이론가, 투쟁가들 역시 맑시즘을 앞다투어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체화된 이론이라기보다,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서 받아들여졌고, 이에 대한 한계가 분명하였다.
일찍이 마루야마 마사오 는 서양 학문의 근원이란 사람의 손목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뻗어나가듯, 하나의 형이상학 ㅡ하학이 분파하여 다섯 손가락처럼 전문성을 갖춰나가므로 그 유기적 관계를 꼭 파악해야 하는데, 단지 손가락 끝만 이식하듯 부국강병을 위한 학문의 결과값만을 가져오려는 근대 일본의 폐해를 지적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우리만의 근대를 자립적으로 가져올 기회를 박탈당한 한국의 해방공간 역시 이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었다. 최강의 실전무공을 자처하며 각 나라로 유입된 주짓수는 평생 그 실전성을 시험받아야하고, 가장 최적의 심신교육기관을 자처하던 국기원 태권도는 언제나 무공 그 자체로의 본질을 증명해야한다. 첫 뿌리내림이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맑시즘의 중국 도입 초반부도 이와 다르지 아니하였다. 맑스는 만국의 노동자에게 단결하라 외쳤지만 각국 노동자들의 투쟁방식은 너무도 달랐다. 황석영 선생의 철도원 삼대에서도 러시아 라인이네, 중국 라인이네 하며 노동투쟁과 독립운동이 결합된 당시 조선 항일전선에 얼마나 내부적 걸림돌이 많았는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