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

사도 바울의 위대함

by Aner병문

이성의 감옥, 철학의 암흑기라 흔히 불리는 서양의 중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logos 이 매몰될리 없다. 안쎌무스는 알기 위해 믿는다 했으며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그저 단순히 맹목적인 종속에만 쓰기엔 너무 복잡하고 몹시 귀한 능력이었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 신앙을 설명하려는 이른바 스칼라 철학이 대두되며 교회와 대학에서 배출한 많은 신학자들이 특히 플라톤 철학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윤리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신학대전의 저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면도날의 윌리암 오컴, 섬세한 박사 둔스 스코투스 등이 활약했던 때도 이때다. 강신주 선생은 질료에 매이게 되는 장인 匠人으로서의 한계에 부딪힌 하나님을 설명치 못해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을 완성치 못했으며 개체와 하나님을 직접 하나하나 연결시킨 오컴의 유명론 有名論 을 더 높게 평가한다.


한 명의 독자에 불과한 내 생각은 다른데, 강신주 선생은 교회를 다니거나 신앙을 가져본적 없으며,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보낸 이어령 박사께서 교회에 귀의하자 한국을 대표하는 인문학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맹렬히 비판했다. 신앙 없는.이가 신학을 이해할수 없다는 일차원적 저열한 비난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이성으로 설명할수 없는 것이며, 신학 또한 하나의 다리 역할을.할뿐 그 자체로 신을 증거하거나 진리는 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약의 에스겔은 숨을 쉬지 않는 인간이 숨쉬는 환상을 보았고, 신약의 바울은 예수님 승천 후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가 그릇의 용도를 제 마음대로 나눌 능력이나 의지가 없겠느냐며 로마 시민들을 일깨웠다. 강신주 선생은 결국 아퀴나스가 믿지못할 이야기들을 믿으라 강변하는 한계에 봉착했다 하지만, 예수님.말씀처럼 믿음은 원래 그 자체로 믿는 것이다.


쉼없는 정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성경 내용은 무엇보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다. 서양 최초의 대제국에서, 지금으로 치면 뉴요커와 같을 로마 시민들에게 바울은 겸손과 사랑을 가르쳤고, 교인으로서의 몸가짐에 대해 몸소 본을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사랑은 최신 문명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해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현대인들에게 순자와 바울이 가장 필요하다 믿는다. 물질문명의 세례가 퍼붓는 지금, 두 성인은 유학과 신앙의 가장 손쉬운 입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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