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과 소통
신필 김용 선생이 특히 여러번 개작했던 의천도룡기의 도입부에서 각원대사를 도와 소림사의 허드렛일을 하던 불목하니 소년 장군보는 훗날 아미파의 개파조사가 되는 소동사 小東邪 곽양에게 한 쌍의 철나한 인형을 선물받는다. 감아둔 태엽이 다 풀릴 때까지 소림권의 기본공 중 하나인 나한권을 반복하는 인형인데, 소년 군보는 비록 단순한 기초무공일망정 반복하여 연습했고 스승 각원대사 역시 장경각을 관리하며 자신도 모르는 새 구음진경의 내공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그는 소림사로부터 환속하여 무당파를 열었으며, 백살 되던 해에 그 유명한 태극권을 창시하니 그때 그의 이름은 장삼봉이라고 했다.
김용 선생은 이 대목에서 몇 문장을 보태었는데, 사람이 무공을 직접 가르치게 되면 사람이다보니 동작의 높낮이나 완급, 강약 등이 그때그때마다 달라 조금씩 차이가 있을수 있는데, 철나한 인형은 인형이니 항시 완벽한 동작을 똑같이 보여주므로 소년 장군보의 초식은 완벽할수밖에 없다 하였다. 내가 아직 끝맺지 못한 소설 습작을 구상할 당시 유급자 시절, 사범님께도 같은 내용을 들려드리며, 로봇 사범이 득세하는 시절이 오지 않겠느냐 하자, 동작은 똑같을지 몰라도 수련자마다 배움이 달라 맞춤식 교육이 되어야할텐데 로봇이 과연 인간을 개별적으로 감성적으로 파악할수 있을까 되물으셨다. 내 질문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었으나 나는 그 답변도 현실에서의 무인으로서 좋다 생각한다.
절대적인 재현이 예술에도 중요할까? 어쨌든 교본대로 틀을 연습하는건 매우 중요하지만, 교본대로 하지 않고 좀 더 빠르거나 느려도 멋있어뵈는 경우도 있다. 특히 고당 틀이나 문무 틀, 서산 틀처럼 높이 차고 오래 버티는 동작이 많을 경우 필요 이상으로 오래 끌며 유지한다면 실전적이지는 못해도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 심사에도 영향을 준다. 그림도 다르지 않아서, 사진의 발명 이후로 미술은 하이퍼리얼리즘처럼 사진 못지 않게 자세히 그리는 경우도 있지만, 화가가 풍경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 유명한 인상파의 태동이다. 인상파를 개막했다고 흔히 평하는 쎄잔은, 색의 대비가 진할수록 윤곽선이 드러난다며 색을 통한 감성적 표현을 중시했다. 반면 모든 회화는 선으로부터 시작한다며 선을 중시하는 끌레 같은 이도 있다.
그림 보기만 좋아할줄 아는 이로서 선과 색, 면, 점 등을 논하는 일은, 글씨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내가 관여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도와 검법은 통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나는 글씨를 쓸 정도로 정신력이 높지도 않고, 검은 지금껏 세미나에서 목검 몇번 잡아본 것이 전부다. 원래 마흔쯤 되면
슬슬 병기를 잡아볼까 생각했는데, 태권도조차 갈 길이 멀고 아내가 좋아하질 않아서 자녀들 다 키우면 부부가 함께 가까운 국궁장이나 같이 가볼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아는 선은, 단지 찌르기나 발차기를 할때 내 몸에서 상대에게까지 닿는 거리를 잇는 간격이며, 올바로 타격했을때 비로소 점이 생기며, 상대가 나를 공격할때 나는 손아귀나 팔뚝 등의 면으로 넓게 막아야 저지력이 생긴다. 내가 헤아리는 점 선 면 이란 이 정도이며, 색이란 어쩌다 잘못 맞아 생기는 코피 정도이지 싶다.
요컨대 무조건 현실을 재현한다 해서 예술이라 할수는 없을터이다. 내가 아는 사진 작가께서는, 예술 사진과 일상 사진을 나누고, 프로 사진작가와 아마츄어를 나누는 기준은, 사진에 얼마만큼의 의도를 잘 담고 전달하느냐 에 있다고 했다. 최근에 곽선생이 알려준 사진 한 장을 열심히 음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