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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r병문 Jan 22. 2024

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어느 부족한 남편의 자기 고백 - 히브리서를 중심으로.  

작년 마지막 날 밤에 있었던 일이다. 주일이기도 해서, 지난 밤에 아무리 형님과 술 퍼마셨어도 아침에 일어나 달리기 한 번 하고, 아내와 장인어른, 형님 몫으로 유명한 단팥빵 하나씩 사와서 아내 체면도 세워주고 ("아빠, 봐봐라, 갱상도 남자들은 이런기 없는기라!") 처가 교회를 갔다가 곧바로 올라와서 어머니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나는 다시 송구영신 예배를 보러 자정 무렵쯤 우리 교회를 가야 하는 강행군 중의 강행군이었다. 그때 12월 31일 저녁에 안양 집으로 돌아왔을때, 웬 고소한 김치 볶는 향이 온 건물에 가득하기에 나는 속으로 '아따, 어느 집이다냐, 고소헌 것이 기양 회가 동허네.(뱃속의 회충이 먼저 움직인다는 뜻으로, 요즘으로 치면 군침이 싹 도노 정도?!)' 이러고 있었는데 그 집이 우리 집일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것이 어머니는 내 나이 마흔 먹도록 단 한 번도 김치볶음밥은커녕 김치볶음도 해주신 적이 없었다. "아니, 갈치 속젓에 생굴에 좋은건 다 넣은 김치를 머덜라고 기름에 허천나게 볶아부냐? 아깝게스롱." 하는 말씀이 늘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집에서 볶은 김치라니 이게 웬건가 햇는데 다름아닌 김치갈비찜! 어머니 말씀인즉, 2박 3일 일정으로 모처럼 아들 며느리 손녀가 없으니 맘편하게 아버지와 다큐멘터리 보시다가 김치갈비찜이 나와서 한번 해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셨다는 것이다. 하여 냄비를 여니 아닌게 아니라 두툼한 김치 사이사이로 하얀 뼈가 붙은 갈비가 지금 생각해도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어보였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가 누구신가. 내가 미처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어머니는 마치 성룡 영화에 나오는 취권 사부 소화자처럼, 젓가락으로 내 젓가락을 탁 막으시면서 "야, 너는 김치만 묵어라잉. 갈비는 전부 소은엄마랑 소은이 겅게. 갈비 한점이 금값이여, 금값." 서러워라. ㅠㅠㅠ 다행히도 아내가 '아이고, 어머이, 그래 묵는 갈비 내 황송해가 어찌 먹니껴, 같이 잡사야 안 되겠어예? 아부지도 한나(하나) 드리고오, 어머이도 한나 드리고오, 우리 남편도 한나 주고오, 아가씨도 한나 드리고(연말 밥상이라고 여동생도 와 있었음), 소은이도 하나 묵고, 내캉도 하나 묵고오~ 이래야 옳다 아잉교.' 하여 아내 덕에 하하호호 갈비 맛이라도 봤다.



자정쯤 되어 다시 교회로 가는 서울행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나와 기다리고 있는데 때마침 동네 큰 마트에서 늘 소은이를 귀여워해주시는 여사님이 큰 짐을 지고 퇴근하여 역시 집에 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러다 문득 여사님이 내게 먼저 물으셨다. "아니, 어머니 말예요, 아주 젊으신 나이도 아니신데, 어쩜 그렇게 신세대세요?" 어머니나 나나 아내나 옛날 사람처럼 살기로는 남 부럽지 않은 줄 아는데, 이건 또 무슨 말씀인가 싶어서 "잉? 그게 뭔소리셔요?" 하니까 여사님 왈 "오늘 저녁 갈비 맛있지 않았어요? 어머니께서 마트 와서 갈비값이 너무 비싸다고 혼잣말 하시니까 정육 코너 아저씨가 LA갈비도 괜찮다고 그러셨나봐, 그러니까 어머니가 펄펄 뛰시면서 아들이면 몰라도(왜!!) 며느리, 손녀 절대 LA갈비 안 준다고, 한우 갈비로 달라고 큰 소리로 그러시더라구. 평소에도 어쩜 며느리 생각, 손녀 생각 그렇게 끔찍하신지 몰라요. 요즘 진짜 그런 시어머니 없어요. 손녀야 그렇다 쳐도 다 자기 아들 편 들지. 누가 며느리 편 들어. 진짜 대단한 시어머니셔요." 물론 우리 어머니 나한테도 LA갈비, 돼지갈비 한번도 해먹이신 적 없었으니, 단지 그 사랑이 며느리와 손녀에게로 갔을 뿐이다. 우리 어머니는 정말로 내 편을 드신 적이 없다.



하여 얼마 전에 어머니와 짬이 나서 같이 냉장고 정리를 하다가 불현듯 그때의 생각이 나서 어머니께 빙글빙글 농을 걸었다. "아니, 근디 엄니, 생각해봉게 어찌 엄니는 나 편을 한번도 안 든다요? 어찌 그렇게 맨날 소은엄마 편이여?" 분위기도 좋고 해서 어머니가 농으로 받아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두어 호흡 쉬신다음 차분하게 건너오는 어머니의 말씀은 전혀 뜻밖이었다. "나가(내가) 배아퍼 낳은 자식잉게 어쩔 수 없이 거두고, 또 제일 많이 보았지만서도, 나는 니가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스러운 종자인지 잘 안다잉. 부족한 씨앗을 맹글었응게 당연히 내가 책임지고 메누리 편 드는 것이여. 하여간 너는 내 속 썩이디끼 소은에미 속만 뒤집어봐라잉, 자근자근 머리버텀 발끝꺼정 씹어서 꼬라지도 못 보게 삼켜불라니까." 그때 나를 노려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어렸을때 내가 그토록 진저리나며 싫어하던 파란 불꽃이 돋아 있었다. 젊었을때 나는 누구보다 비겁하고, 잔혹하고 잔인한 족속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그러지 않아도 될 삶의 많은 순간을 망치며 가족과 벗들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래도 애 낳고 살면서 많이 잊혀졌으리라 생각되는 옛 일들이 어머니 가슴 속에서는 아직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부끄러웠다.



부끄러울 일은 끊이지 않았다. 정암 조광조는 '누구든 허물 없는 이가 없건만은, 알고 고치면 비로소 귀하다고 한다.' 라고 말했다. 고칠 기회를 만드려고 그렇게 부끄러운 일도 많았던 것일까? 하여간 1년에 한번 있는 국제태권도연맹 한국 본부의 워크샵이 있던 날, 아내와 나는 번갈아가며 지난 주는 내가 아내에게 소은이를 맡기고 1박 2일로 태안으로 워크샵을 다녀오고, 돌아오는 이번 주에는 아내가 여고 동창들과 같이 돌잔치를 다녀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금요일 밤까지만 해도 괜찮던 아내는, 토요일 아침부터 안색이 하얗더니, 그예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면서 좀 자야겠다며, 열과 오한이 나고 뼈마디가 쑤신다면서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이러니 아무리 간 큰 남편이라도 갈 수가 있나. 솔직히 어머니 아버지는 중요한 자리라면 애를 봐주겠으니 다녀오라 하셨지만, 원래 애는 부모가 보는 것이고, 아무리 태권도 일이 중요해도 주5일을 이미 육아해주시는 부모님께 또 애를 맡기고, 더군다나 아픈 아내를 두고 태안까지 가봐야 마음 편하게 태권도 하며 술 마실 수 있을것 같지도 않았다. 하여 과감하게 버스 표를 당일에 환불하고, 못 간다 아쉬운 소식을 여러 사범님들께 전했다.



대범한 결정이 심기에까지 전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 큰 며느리가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니 어머니 아버지도 모두 민망하시어 그냥 자리를 피하셨다. 아내가 다시 내려가는 월요일 새벽쯤에 일찍 올테니 걱정말고 쉬라 하셨다. 집에는 아픈 아내와 철 모르고 뛰노는 아이와 나만 남았다. 한숨이 절로 났다. 사실 백 번 잘 한 결정이었지만 이상하게 흥이 나지 않았다. 1년에 딱 한 번 있는 자리라 그랬을까? 1년에 한번이라도 내가 중앙도장의 부사범이요, 괜시리 명예욕에 엣헴 검은 띠라도 한번더 흔들어보고 싶었을까? 나는 매사에 한숨을 쉬었고, 뭘해도 흥이 나지 않았다. 책도 읽히지 않았고, 만화도 안 보였고, 영화도 못 봤고, 심지어 잠을 자려도 잠이 오지 않았다. 신경이 곤두서고 매사가 재미없고 허무해서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솔직히 아내에게 서운하였다. 내가 운전과 기계에 서툴고, 손재주가 없는만큼 아내는 늘상 즉흥적이고 전체적인 기획력이 부족해서, 닥치면 쫓기듯 일을 하는 체질이라 약속 시간에 자주 늦거나 가족 간의 계획에 영향을 주는 일이 많았다. 참고 참았더니 그예 1년에 한번 있는 행사조차 못 가는구나 싶어서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아내도 어느 정도 상태가 나아졌지만, 도저히 아내 혼자 두고 내가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아내는 그날 종일 내 눈치를 보았다. 나도 안 그러고 싶었는데, 어찌 방법이 없었다. 오죽하면 기분 나쁘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고량주까지 마셨으나, 진짜 놀랍게도 술이 달지 않았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딸랑 고량주 한 잔이 목구멍에 넘어가질 않았다. 또 한숨이 나왔고, 참고 참던 아내는 마침내 밤 아홉시쯤, 해도 너무 한다고 폭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우거지 죽상하고 한숨 폭폭 쉴꺼면, 차라리 그냥 가뿌지 그랬노! 이거이 소탐대실인기라!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기라! 한자 읽으모 뭐하고, 태권도 하모 뭐하노! 아내 말은 틀린게 없었지만, 나도 그동안 참은 게 많아 언성을 높였다. 아이 앞에서 언성 높이지 않는다는 원칙도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잠시 옥신각신 말다툼을 했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때 아이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아내의 입을 막고, 내 입을 막으며, 또렷한 목소리로 "둘 다 그러지마아~ 사이 좋게 지내야지이~" 하고 타이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내 독기는 거기서 빠졌다. 배꼽이 부르르 떨리고 풋 웃음이 나왓는데 겨우 참았다. 아내도 그랬다고 했다.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는데, 아내는 내가 그렇게 입씨름을 하면서도 집안 청소하고, 설거지 하고, 분리수거 해놓고, 아내가 먹을 약과 갈근탕을 타서 부엌 앞에 두는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고 했다. 여하튼 아내는 "소은아, 아빠 엄마가 미안하데이, 좀 서로 서운해 그랬다 아이가, 사이좋게 지낼게~" 하고 우리는 서로 어색하게 잤다.



다음날이 되고 나서야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다.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탓인지, 나는 눕자마자 바로 잠들어서 한번도 안깨고 잤다. 아내는 먼저 일어나서 아이 밥을 먹이고 있었다.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아내를 안고 미안하다고 했다. 아내도 잘 받아주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약속했다. 아내도 이해한다고 했다. 대신 21시까지 똑같이 자신의 투정을 받아달라고 했다. 못해줄 이유가 없었다. 하여 원래는 못 갔을 교회로 온 가족이 다같이 가니, 평소에 태권도하다 다치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으시는 목사님도 기도가 통했다며 웃으셨다. 아내는 기가 살아서 "목사님, 사모님, 언니(나와 동갑인 목사님 딸 얀미를 말하는 것임), 내 말 좀 들어보시소. 소은아빠 때문에 내 어제 서러웠니더~" 하며 자기 편을 들어달라 해주었다. 얀미는 "그래, 네가 잘못했네, 소은엄마 좀 잘해조라." 라며 아내 편을 들어주었다. 그날의 설교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이었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결코 방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가르치시니, 그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충실히 받으라는 뜻이었다. 아, 징계였구나, 싶었다. 내 나이 마흔에 물론 태권도도 중요하지만, 다시 한번 무엇이 우선인지 확인하라는 뜻이었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했다.



징계는 오래 갔고, 화끈했다. 오늘 아침, 아내가 먼저 떠나고 뒤이어 일곱시쯤 내가 출근하기 전에 소은이를 다시 돌보시러 어머니 아버지가 오셨는데, 젊지 않으신 연세에 추운 날씨를 뚫고 오느라 어머니 아버지는 지쳐 계시었다. 당연히 좀 더 예민하실 수 있고, 나는 물론 주말에 아내와 소은이 수발을 드느라 쉽지 않았지만, 거기에 덧붙여 덜 된 청소와 설거지와 빨래 정리 등에 대해 또 아버지께 혼났다. 사실 혼날 수 있는 일이었고, 정말 징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들었고 얼른 다녀오겠다고 인사드리고 출근했다. 아들로서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교적 젊은 나도 밤새 잠을 못 이루면 예민해져서 아내에게 선인장처럼 군 적이 불과 2주 전이다. 하물며 칠순을 바라보시는 부모님이 오죽하실까 싶을 정도로, 나도 약간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혹시나 소은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주신 뒤 좀 주무셨을까 싶어, 슬쩍 아버지께 메시지를 보내니 아버지께 놀랍게도 장문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아침에 나를 그렇게 보내놓고 아버지께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는건, 연세를 드시니 자꾸 사람이 예민해진다는 것, 그래도 남이 아니고 자식이고 가족이니 마음껏 짜증도 부리지 않겠냐는 말씀을 적어 보내주셨다. 적어도 내가 젊었을때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속을 내보이며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상황 자체가 늘 여의치 않았지만, 부모님을 피하고 늘 밤거리를 맴돌며 내 스스로 휘어져 있던건 늘 내 먼저였다. 이제서야 나는 가족끼리 다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또한 타인과는 어찌 다른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러므로 종법적인 가족 제도 안에서, 가족은 타인과 다를 수밖에 없으며, 가족이 우선해야 한다고 말했던 공맹의 도리는 가슴에 와닿을수밖에 없다. 맹자는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는 겸애를 주장하던 묵자가 비현실적인 사랑을 주장한다며 사기꾼이라고 강렬히 비판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더 가까운 가족이나 벗이 있을 것이며, 그를 더 아끼는 것이 마땅한 태도라고 본 것이다. 나는 비로소 서로 싸워도 다시금 손을 내밀고 얼굴을 봐야 하는 가족의 테두리를 느낀 듯하다. 비단 이러한 혈족의 감정은 동양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영화 코코 에서도 보이듯, 서양 사회에서도 능히 볼 수 있는 점이다.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 자꾸 주말마다 아내에게 안 좋은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 정말 미안스럽다. 그래서 천자문에서도 내 허물을 먼저 고치라고 말했는가보다. 더 신경써야 한다. 더 내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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