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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r병문 Jan 28. 2024

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영화감평)

더 플래시 - 몇 가지 열쇠 단어들을 중심으로

감독 앤디 무사에띠, 주연 에즈라 밀러, 마이클 키튼, 사샤 카예, 키어시 클레멘스, 더 플래시, 미국, 2023.



** 빠르기에 대하여


꼭 태권도가 아니더라도, 각종 격투기의 기술을 배울 무렵부터 내게도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남보다 더 강한 힘을 기를 것인가, 혹은 더 빠르고자 노력할 것인가. 마흔이 되기 전까지 나는 빠르기보다 힘을 우선시해왔다. 남들보다 많이 먹었고, 더 많은 무게를 들거나, 같은 동작에서 오래 버티거나, 혹은 여러 번 반복하는 힘을 길렀다. 원래도 팔다리가 짧고 둔한데다 발목 수술의 여파로 관절마다 쑤시고 아프니 도저히 빠르게 움직이진 못할 듯 했다. 문제는 ITF태권도 역시 어찌 되었건 득점제였기 때문에 이기기 위해서는 기술마다 표준 이상의 속도와 정확도가 필연적이라는 점이었다. 기본적으로 상대의 얼굴이나 타격 부위가 접혀질 정도로의 위력이면 되었다. 나머지는 상대보다 빠르게 치고 차야 더 많은 점수로 이길 수 있었다.



마흔이 가까워서야 나는 그 동안 정했던 목표를 약간 수정하였다. 늘 빠를 필요는 없었지만, 상대보다는 빨라야 했다. 때로는 상대보다 늦게 차도 상대보다 빠르게 닿을 수 있도록 틈을 찌르는 연습도 해야 했다. 상대보다 필요할때 빠르려면 전체적인 체력도 높여야 했고, 빠르게 찬다고 해서 힘없이 던져서는 의미가 없었기에 결국 힘은 늘 필요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기초적인 물리 F=ma는 여전히 통하고 있다. 질량이 무겁든지, 속도가 빠르든지. 플래시처럼 빠를 순 없지만 상대의 공방보다 빠를 수 있도록 달리기도 하고, 제자리에서 뛰다 치고 차는 연습도 하고, 하여간 예전과는 좀 더 다른 방향의 훈련을 하느라 관절이 더 많이 아프다.



** 멀티버스, 혹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아니면 가능성의 유혹에 대하여



어느 떄부터인가 멀티버스Multiverse 이야기가 너무 흔해졌다. '항성군단' 이라는 소설에서 존 바르 분기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가토 모토히로의 추리만화 Q.E.D에도 등장하여 대중적으로도 유명해졌다. 역사적 사건에 간섭할 경우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여 인과가 헝클어지고 새로운 미래가 생긴다는 점이다. 나는 아직도 양자역학이나, 미시과학, 아니 과학의 세계 자체는 거의 알지 못하지만, 아주 미세한 세계로 진입할때 우리는 어떠한 존재도 그 자리에 존재한다 말할 수 없으며, 다만 무수히 많은 다중차원의 존재들이 겹쳐짐을 통해 존재할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으로 수렴한다고만 알고 있다. 그 가능성이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특히 과거로 돌아가 무언가를 바로잡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 이들은 미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부자 아이언맨과 배트맨. 아버지와 같던 삼촌을 잃은 서민적인 영웅 스파이더맨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애니메이션판의 스파이더맨 역시 악당 출신의 삼촌을 잃고, 또한 특수 능력을 지닌 십대 소년으로서의 동질감을 찾기 위해 여러 우주를 헤매게 되며, 이 영화의 주인공 플래시 역시 빛보다 빠른 속도로 시간축을 뒤흔들며, 어머니의 살인범으로 몰린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주고 자신의 평화로운 가족을 되찾고 싶다는 욕망 하에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 표현, 혹은 연출


영화와 연극, 서적과 음악, 라디오 드라마, 심지어 사진까지도 모두 서사를 전달하는 기능이 있지만, 영화는 그 중 가장 박진감 넘치는, 압도적인 시각적 연출을 장점으로 삼는다. 나는 아직도 샌드라 블럭 주연의 그래비티만큼은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만 되는 서사를 지닌 작품으로, 논술 수업 시 꼭 예시를 들었다. 잠시라도 지지대를 놓치면, 기댈 곳이 없는 무중력의 무저갱으로 내쳐지는 위험한 순간에서, 관객들은 주인공과 일체되어 삶의 근거를 맹렬하게 찾게 된다. 반면 맨 프럼 어스 같은 영화는 솔직히 연극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으며, 실제로 국내외 여러 단체에서 연극으로도 연출한 적이 있다고 알고 있다. 설정상 음속만큼 빠르다는 마블의 퀵 실버 의 연출 또한 나쁘지 않았지만, 플래시의 빠르기를 강조하는 시각적 연출은 실로 화려하다. 한번 달릴때마다 번개와 불이 번쩍이고, 주변의 상대방들은 모두 느려져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빨리 달리는 이만이 가장 여유로운 스피드 포스의 세계로 진입한다. 지금까지 DC역사상 이 상태의 플래시를 실시간으로 따라잡은 이는 클립톤 행성 출신의 수퍼맨 칼 엘 뿐이었다. 어마어마한 칼로리를 소모하기 때문에 능력을 쓰고 나면 늘 걸신들린듯이 먹는 설정조차 흥미롭다 .



** 합의, 수용, 혹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아이언맨은 '내가 아이언맨이다.' 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선언을 유언으로 남기며 죽었다. 그와 동시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블의 시대도 함께 죽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탐정, 아이언맨만큼이나 부유한 남자, 가라테의 달인이자 온갖 기상천외한 도구, 무엇보다 불굴의 의지로 스스로의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는 배트맨이 저스티스 리그의 대장이듯이, 아이언맨 역시 정재계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지구 내외의 어벤져스를 이끈다. 우리들의 영원한 이웃 스파이더맨이 십대 소년답게 방황할때, 그야말로 규칙과 계도에는 가장 어울리지 않을 듯한 아이언맨이 스파이더맨에게 매사에 책임을 지고, 얌전하게 굴라며 '꼰대' 가 된다. 아이언맨은 세계의 절반이 없어져버리는 상실의 시대에서 가정을 꾸리며 살아남았으나,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가장 소중한 자신을 잃었다. '과거를 되돌리고 싶었던 주인공은, 역시 주인공답게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제 입맛대로 과거를 바꾼 다음,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영화는 아직까지 보지 못햇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되짚고 싶은 잘못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어쨌든 내 삶을 타인처럼 먼 거리에서 보면, 그러한 결핍과 잘못에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므로 결국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소재의 모든 영화는 약간 과장하자면, 모든 것은 운명이니 받아들이는 편이 성숙하다는 교휸을 전달하며 끝난다.  혹시 아직까지 그런 결말로 끝나지 않는 영화가 있다면, 볼 의향 있으니 추천 부탁드립니다. (내가 본 최초의 시간 여행물은, 스릴 시커Thrill seeker 였던 듯함.)



** 다시 한 번, 빠르기에 대하여.



빠르다는 점은, 무엇이든 서둘러서 한다는 뜻도 될 터이다. 모처럼 DC 영화의 전성기를 불러 일으킨 영화는, 중간중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여러 평행 우주의 인물들 CG가 옥의 티가 아니라 거의 금간 수준이었는데, 영화의 주된 CG작업을 맡은 회사에서 빠듯한 일정 때문에 제대로 마무리 작업을 할 수 없었다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역시 뭐든지 빠르다고 좋은 건 아니다. 정말 최고로 속력을 내면 그 순간만큼은 수퍼맨조차 그 옷깃을 잡을 수 없다는 설정의 플래시의 배리 앨런이, 유독 소심하고 매사에 서툴고 겁 많은 청년으로 설정된 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범님은, 유독 승급과 승단이 늦었던 내게, 결국 빠르거나 늦거나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다 같은 산에서 만나게 될거라고 말씀하셨었다. 그게 벌써 십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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