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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r병문 Jan 31. 2024

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선배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 학교, 가정, 도장, 회사를 중심으로.  

사실 선비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학교 다닐때 몽골 말로 '존경할만한 사람' 을 센바이 라고 한다고 들었다. 고대 희랍 철학을 처음 배울때 andreia(용기)는 aner에서 왔는데, 남자라는 뜻이긴 하나, 그냥 남자도 아니요, 어려움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남자라는 뜻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안그래도 당시 300으로도 유명했던 스파르타로부터 그리스-로마에 이르기까지 시민 사회와 군대의 핵심이었던, 중장보병들의 견고한 팔랑크스 생각도 나면서, 나도 한동안 그와 같은 남자가 되어야지, 결심했으므로 여하튼 한동안 영어 이름을 그렇게 썼다. aner는 그리스식으로 읽으면 발음가는 그대로 아네르 라고 읽기는 하나, 주짓수 도장이건 인사동이건 쌀사 바건, 태권도장을 지나, 심지어 새벽에 잠시 다녔던 어학원에서조차 한국 선생님이 '이건... 어떻게 읽는거죠? 설마 애널Anal?' 하셔 가지고 왜 그 동안 많은 외국인들이 내 영어 이름을 가지고 그렇게 놀라고 당혹스러워했는지 알았다. 안녕하세요, 국제태권도연맹 중앙도장 평일 성인반 부사범 전똥꼬 3단입니다.



잠시 억울함에 곁말이 길었는데, 하여간 그 무렵에 배웠던 말이라 내가 아무리 몽골말을 솔롱고스, 캬반 정도밖에 모른다고 해도 그걸 잘못 기억하진 않았을텐데, 아무리 구글링이나 국립국어원을 찾아봐도 비슷한 내용이 없다. 이미 나는 오래 전에 어쭈구리가 어주구리魚走九里- 숨 못 쉬는 물고기가 살려고 연못밖에서 물구덩이를 찾아 구 리나 뛰는 모습을 본 데서 연원했다는 고사가 전혀 근거없다는 사실을 국립국어원에 직접 문의해서 답변을 받았다. 중국무술의 수많은 투로가  그렇게 만들어지고, 세 사람이 호랑이가 나타났다면 나타나듯이, 올더스 헉슬리가 미리 내다본 정보 과잉의 시대에서, 우리는 이미 그럴듯한 이야기에 쉽게 마음을 쏟고 빼앗긴다. 다시 곁말이 길어지기 전에 다시 쐐기를 박자면, 나는 몽골어 센바이에서 선비와 선배가 나왔다고 배웠기에, 결국 선비는 존경받을만한 사람이어야 되는구나, 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요즘 참 많이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선배가 되는 일 또한 결코 쉽지 않다. 도장에서 띠만 높다고 무조건 사형 대접 해주지도 아니하며, 가족들하고는 어떨지 몰라도, 타인을 함부로 나이로 찍어누르려다 큰코 다치는 경우도 종종 있는 법이다. 공부자께서는 한때의 공시생(!) 답게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주로 갖춰야 할 여섯가지 재주 - 즉, 육예를 정리했다. 숫자를 헤아리고, 행정문서를 처리하는 서書와 수數, 예법을 지키고 각종 행사를 집행하는 예禮와 악樂, 마차를 몰고 활을 쏘는 전투기술로서의 어御 와 사射 다. 나는 군대도 행정전경을 나와 한때 공문서도 다뤄봣고, 기본적인 기획 작성 및 행사 집행이야 NGO, 도장, 대안학교 교사 등을 거치며 다양하게 써봤고, 음악이야 술 마시고 하다못해 집에서 젬베 치며 '이십세기 힛트쏭' 틀어놓고 몇 곡조 나지막하게 불러야하고, 예법이야 마음에 우러나서 어른들께 인사 잘 드리고, 국궁은커녕 운전도 못하지만, 군대도 현역으로 갔다오고, 태권도 포함 이십년 무공연습에 자전거라도 잘 타니(^^;;) 대애애애애충 육예를 익혔다고 할 수 있나? 나는 정말 존경받을만한 위인인가?



학교 다닐때는 존경보다는 사랑을 받고 싶었다. 누군들 어머니 아버지 깨실세라 모자란 쪽잠까지 설쳐가며 새벽녘에 행여나 소리 샐까 두꺼운 담요를 컴퓨터 본체에 감싸놓고, 그 다음 그 담요로 혹시나 컴퓨터 불이 샐까봐 문틈 꽁꽁 가려놓고, 컴퓨터 발열 때문에 들킬까봐 차가운 물걸레 미리 준비해놓고(참 피곤하게 산다;;) 몰래몰래 하던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 게임, 이른바 미연시를 안해본 소년소녀가 있겠는가. 그 나잇대에 봐서는 안되지만, 막을수도 없을 성적 환상 때문은 둘째치더라도, 그 당시의 작고 통통했던 소년이었던 나는, 사실 그 게임 속 주인공이 늘 부러웠다. 뭘 특별히 하지 않았는데, 늘 부모님은 집에 안 들어오시고, 용돈은 풍족하고, 학교 생활 느긋하게 하다보면 각양각색의 미소녀들이 애틋하게 사랑을 고백해온다. 성경의 가나안 땅처럼, 나는 서울대 법대를 가야 비로소 부모님의 속박(?) 에서 놓여난다는 유년시절을 보냈고, 내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책의 세계는 너무 좁았으며, 나는 바깥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덜 된 십 대를 보냈다. 제대로 사람 한번 못 사귀어본 채 12년 동안 책 읽고 습작 쓰고 음악만 들었다. 그 때 나의 꿈은 마치 짐 모리슨이나 제니스 조플린 마냥 노래도 잘하고 가사도 잘쓰고 곡도 잘 만들어 알아서 사랑받는, 철저한 음유시인과도 같은 연예인이었다. 될 턱이 없었다. 내 스스로의 세계가 너무 좁고, 바깥 세상도 제대로 모르는데 무슨수로 존경은커녕 사랑을 받는다 말인가. 나의 대학 생활은 사실 좌충우돌 사고의 연속이었고, 나는 이십대 후반에서야 겨우 조금씩 철이 들었다.



군대를 제대하여 나는 가장 큰 갈등을 부모님과 겪었고, 나중에 더 길게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학교 후문의 공원에서 노점상 좌판을 열고 본격적인 독립의 길로 들어섰다.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처럼 열심히 사는 이는 운명처럼 성공한다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수한 믿음이 그 때 있었다. 어쩌다 인연이 잘 풀려서 나는 큰 보드게임 까페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좋은 조건에 그 가게를 인수하여 학비를 댈 정도로 잠시 운이 좋았었지만, 정말이지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나는 입출금 장부를 전혀 쓰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혼자 가게를 운영했으며, 늘상 술에 미적지근하게 취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체육관에 나가서 종합격투의 기술을 연마하고, 샤워하고 수염 다듬고, 학교 수업 나가서 잘난척 실컷 하고, 지갑에 돈이 빵빵하니 먹고 마시고픈거 다 사주며 후배들에게 생색내고, 사고 싶은 책 다 사고, 다시 밤골목으로 돌아와 가게를 열거나 젊은 여학생 일용직과 교대한 뒤 또 하루종일 손님들에게 온갖 독특한 척, 잘난 척, 인기 끌고 싶은 짓은 뭐든 다했다. 진지하거나 걱정되는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다 오그라들 듯한 기분이다. 여전히 나는 내 스로를 전혀 사랑하지 못했고, 그러니 술잔으로 위태하게 이은 인연들은 쉽게 흩어졌다. 내 것이 아닌 돈과 허황된 꿈과 허세섞인 욕망으로 세워둔 나는 금세 무너졌다. 나는 오래 아팠고, 내 바닥을 절실하게 알앗고, 단 두 명의 소중한 벗만이 소중히 남아 있다. 그 유명한 죽림칠현의 혜강은 광릉산(廣陵散 : 산 자는 산개하다, 산탄총, 해산 할때 흩어질 산 자. 광릉산은 칠현금 연주곡 중에서도 복잡하기로 유명하여, 산 이란 연주법이 복잡한 탄주곡이라는 뜻)은 누명으로 죽기 전 여섯 벗들에게만 마지막으로 광릉산을 들려주고 참수당했다고 한다.



절치부심, 와신상담 이라는 옛 고사를 감히 끌어다댈 순 없지만, 오랫동안 내게는 아주 작은 방과, 그 방을 꽉 채우는 남은 책들과 아령 2개, 그리고 가끔 구걸하여 가지고 오는 탈취제용 커피가루와 무슨 종류일지도 알 수 없는 여러 술이 섞인 독주병만이 남았다. 그토록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거만하게 뛰쳐나갔지만, 나는 결국 타인이 아니기에 끝까지 인연을 맺어야 하는 부모님께 돌아올 수 밖에 없었으며, 대학과 성경을 번갈아 읽으며 술에 취해 숨죽여 울었던 새벽녘도 많았다. 탈취제용 커피가루를 한약 달이는 보에 싸서 뜨거운 물에 우려마시거나, 어머니 아버지의 욕과 눈칫밥 먹기도 힘들면, 몰래 밖으로 나가 너의 착한 마음에 기대어서 술 한 잔에 무엇이든 얻어먹고 돌아오곤 했다. 백수시절을 두번 겪으면서, 여러 고마운 인연들에게 늘 신세를 졌지만, 현재의 곽선생과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올바로 버틸 수 없었을 터이다. 곽선생은 서울의 모든 정형외과에 전부 전화를 돌리는 과정 속에서 나를 찾았고(휴대전화 2년 동안 없었음. 편하긴 진짜 편했다.) 너는 병원이나 내 집에 자주 찾아와주고, 입과 말만 가지고 다니는 나를 늘 군소리없이 먹여주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선물도 주었다. 나는 늘 언젠가 천하를 얻어 빚을 크게 갚겠다며 외치고 다녔던 배수진의 장군 한신의 고사를 신물나게 들려주며, 나도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을 하고 다녔다.



내가 정말로 책임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평범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모든 허황된 꿈을 접어내고 정리한 때는 솔직히 결혼하고 나서다. 나는 서른넷에 결혼했고, 어지간히 내 스스로의 한계도 알게될 무렵이었다. 크고 작은 내 방황들은 너와 곽선생이 가장 많이 알긴 하는데, 거의 백 번에 가까운 맞선 끝에(아내에겐 극비! ㅋㅋ) 마침내 바다 같은 우리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를 기대하긴 어려웠을 터이다. 아내는 경주 토박이라 오래된 역사처럼 익숙함과 정겨움이 있었고, 가까이 있는 포항 바다처럼 늘 관대하고 넓은 사람이었다. 가정에서 항상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생각하니, 비로소 신이 나서 나는 가정 밖에서 필요 이상으로 원숭이처럼 날랑대는 꼴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부득불 사랑이나 존경을 구걸하기 위해 일부러 꾸며대거나 과하게 비하하거나 있지도 않은 특이성을 억지로 가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여유가 생겼고, 나는 예전보다 당연히 많이 차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쯤 소중한 보물인 소은이가 태어났고, 2박 3일을 한숨도 못 자고 오로지 코스모스만 읽으며 아이가 나오길 기다린 그때,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나와 아내가 품어 만들었으며, 나와 꼭 닮은 순진무구한 최초의 타인이자, 평생 함께 갈 가족을 볼 때, 나는 가슴이 벅찼고, 한편으로는 저 것을 어찌 올바로 키울까, 어찌 나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할까 떨었다. 나는 그제서야 어머니 아버지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출발선에 섰고, 자리가 달라지니 마음먹는 바도 달라져, 수처작주 라는 말씀처럼 부모님의 날선 말씀도 훨씬 맥락에 닿기가 수월하였다. 내 나이 올해로 알토란 같은 마흔, 이제 겨우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비, 친오빠로서 조금이나마 어른다운 모습을 보이는가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가족은 원래 하늘로 함께 볼 수 없는 사이가 아니고서야, 구본승 노래마냥 미워도 다시 한번, 품고 참을 인연일 수 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몸가짐을 바로 해야하듯이, 가장 가까운 가족을 편하게 대하는 것도 좋지만, 중요할때 짐을 넘겨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존경과 사랑을 감히 강요할 수 없다. 사실 그럴 마음도 없거니와 내가 올바른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자부심은 지금도 거의 들지 않는다. 다만 할수 있는만큼 할뿐이다. 잘 가르치지 못하니 책 읽는 모습을 보이고, 부부의 벌이만으로 온전히 잘 먹이지 못하니, 어머니께 음식도 배워가며 먼저 가리지 않고 먹는 모습도 보여주고, 무공이 얕으니 매일 연습하는 모습을 보이고, 내가 그랬듯 가장 막역해야할 부부와 부녀 간에 각기 오해가 쌓일까봐 항상 직관적으로 안아주고 사랑하다고 말해주고 이뻐해주도록 노력한다. 내 알기로 짐승도 제 자식은 예뻐하며, 의도적으로 학대치 않는 이상 부모는 모두 자식을 마땅히 사랑함이 도리라고 알고 있다. 도리를 도리대로 행한다고 존경과 사랑을 받을순 없다. 만약 그런 세상이라고 한다면, 세상이 지독히도 어지럽다는 뜻이다.



나의 부사범이자 전임 부사범이었던 산본 사범님은, 젊은 나이에 4단 띠를 받고 드디어 본인의 도장을 열었다. 그 전까지 3단으로 오래 머물러 있어 가끔 별명이 '삼범님' 으로 불리긴 했다. 마땅한 이를 구하기 어려워 사범님이 주 7일씩 오래 고생하시다가 몇 년 전에야 콜라 부사범을 겨우 영입하셨으니, 그 동안은 부족하나마 결국 내가 부사범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막 결혼하였고, 본업이 있으니 전업은 애시당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내 실력이나 지도력 또한 전혀 미치지 못했다. 나는 돈을 받고 정식으로 일하는 부사범이 아니요, 태권도는 내 삶의 방식일뿐, 예전처럼 이를 통해 천하제일 실력을 갖춰 조명 번쩍이는 링에서 서양의 거한들을 쓰러뜨려 자랑스레 여긴다든가, 혹은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려 칭송받는다던가 하는 꿈은 아예 접었다. 열심히 연습해서 받은 띠와, 정규 지도 과정을 통과하여 받은 부사범 및 심판 면허는 있지만, 태권도는 내 삶의 방식이자 중요한 취미, 유희, 그리고 유사시에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언외언 言外言의 수단일뿐, 이를 통해 나를 내세운다던가 호구해볼 생각은 한 적이 없다. 도장이라고 해서 모두가 만화 주인공들처럼 뛰어난 실력을 갖추려는 이만이 오진 않기 때문에, 나는 이미 어지간히 도장 밥을 먹은 뒤에는 비교적 빨리 나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정할 수 있었다. 나는 진지할때는 사제사매들이나 오랜만에 찾아와 다시 기본기를 익혀야하는 사형사저들이 빨리 기본을 익힐 수 있도록 조언했고, 내가 하지 못하는 아주 난해한 기술들은 콜라 부사범이나 사범님께 넘겼다.  나는 요령만 알뿐이었고,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기본 기술들을 수없이 많이 연습했으며, 여유 시간에는 반드시 듣는 이가 불쾌하지 않을 시 상식선의 농담을 하고 늘 도장을 즐겁게 했다. 모두가 극진의 최배달 총재님처럼 천하주유하며 소뿔을 자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는 그냥 운동이 부족해서, 누구는 재미있게 하고 싶어서, 누구는 살 빼려고, 충분히 생활 체육의 영역에서 가능한 분위기를 내가 즐겁게 만들어주어야 도장에 소속감도 생기고, 우리 모두 가족이자 형제자매라는 인식도 생긴다. 돈 내고 편한 시간에 와서 기술만 배우고 돌아가는 '서비스식 체력단련' 과 함께 도복을 입고 속세의 바깥을 내려놓은 채 같은 기술을 연마하는 '옛날식 도복 훈련' 에는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여러 번 말했듯, 돈 받는 부사범도 아니요, 자주 오지도 못하고, 방향 자체가 태권도를 재밌고 즐겁게 하고, 무엇보다 나 같은 이도 열심히 해서 분명 발전이 있고 나아지는 모습을 겪을 수 있다 라는 증거로 만족한다. 워낙 성장이 느리니 1~2년 전과 비교한다면 잘 구분이 안될수도 있지만, 사실 중국무술, 권투, 종합격투기, 주짓수 좀 했답시고 십년전의 5월 첫날 노동절에 쌀값 인상 시위 하다 말고 최루 가스 향기 매캐하게 풍기며 우리 도장에 입문하던 그 때에 비하면, 내 몸에는 기초부터 철저히 다진 정통 무공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현재 도장에 남아 있는 남녀노소의 사제사매들께 좋게 보이면 다행히지만 감히 내 스스로 존경할만한 부사범이라고는 입이 뒤집어져도 말하기 어렵고 부끄럽다.



교사의 꿈을 오랫동안 꾸었고, 군대 가기전 철 모르던 시절에  대안학교 교사도 한동안 했었으며, 보드게임 까페의 운영, 모 중학교에서의 논술 강사를 거쳐 도장에서 부사범 노릇을 사이사이 하면서 교사의 꿈은 이로써 됐겠거니 했다. 회사에서 교육 업무를 맡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으며, 그렇게 힘들리라고도 생각을 못했다. 트레이너는 정말로 3주 동안 혼자서 모든 걸 다해야 했다. 나는 아카데미 라고 불리는 회사 입사 후 가장 양 많고 길고 복잡한 직무 교육을 해야 했기에 시설팀과 협의하여 적어도 교육 전날 저녁까지는 인원수보다 더 많은 최대치의 맥Mac과 인터넷 설비를 마련해두고, 출석부를 정리하고, 간식을 챙겨야 했으며. 교육 당일부터 3주간 교육을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게 진행해야 함도 물론이며, 매일매일 출석 확인하고 수업 도중 바로 보고하고, 특이사항 생겨도 바로 보고하고, 2주차와 3주차에는 각 이틀씩 실습도 내보내야 하고, 갑작스레 들어오는 상사의 평가도 감내해야 하고, 모든 사람 면담도 해야 하고, 갑작스럽게 못 나오게 되거나 말도 없이 빠지거나 아파버리는 사람들 전부 달래주며 회사에 나오도록 해야 하고.. 이렇게 세 기수를 배출하며 9주를 보냈다. 결과적으로 너무 육아에 무리해버리신 아버지께서 이명耳鳴을 호소하시며 병원에서 오랫동안 요양하셨기에 나는 결국 얼마 전 자녀 계획과 육아가 모두 종료되기 전까진 다시 트레이너를 하긴 어려울 듯하다고 면담하였다. 대신 나는 교육 부서 대신 더 어려운 장비를 만지는 부서로 옮겨졌고, 다음주부터 그와 관련된 새로운 교육을 받는다. 그 교육은 나와 같이 시험을 봐서 트레이너가 된 동료가 맡게 될 것이다.




트레이너 일은 정말 힘들었다. 그동안 기술 부서에서 내 혼자만의 일을 하다 갑자기 스물 몇명씩 되는 내 새끼들을 다 챙겨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하려니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제대로 훈련도 못했는데 9주 동안 7kg가 빠졌다. 매일 5시에 일어나 7시까지 회사에 가서 9시 전까지 교육 및 서류 준비를 하고, 점심 건너뛰고 오후 교육 준비하고, 18시부터 21시까지 상사에게 혼나가며 하루의 교육을 정리하고, 다음날 교육 준비하고, 주말에는 또 나와서 다음주 교육중 틀린건 없나 확인하고, 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한 명의 완벽한 강사- 트레이너가 만들어지는데는 최소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며, 트레이너는 누굴 만나도 시간을 들여 낯선 장비의 재원과 체계, 기술 등을 올바로 전달하고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 나뿐 아니라 내 동료, 내 상사들도 다 이렇게 교육 부서의 일을 했으며, 내 후임들도 앞으로 그렇게 될 터이다. 다만 공부와 태권도가 숙련되는데 다른 이들보다 훨씬 오래 걸렸듯, 돈을 받고 일하는 업무에서도 나는 느렷고, 도저히 효율을 메우기 위해 내 시간을 온전히 투자하기에는 소은이 옆에 있어야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하다못해 수업 자료를 외부로 반출하여 집에서 준비만 할 수 있었어도 조금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은 포기해야 했고, 나는 너무 안타까웠다. 왜냐하면 비로소 난생 처음 보는 남녀노소의 학생들에게 존경과 사랑이란 걸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은 서먹서먹한 스물 몇 명의 남녀노소들을 전부 소개시키고, 얼음 같은 분위기를 깨어 서로 동료로 만들고, 하나하나 생선 반찬을 발라주고, 질긴 고기를 씹어 입에 넣어주듯이, 교육 자료를 소년소녀문학전집 보듯이 보며 다시 쓰고, 다시 해석하고, 다시 알려주었다. 강의할때 졸다가도 멋쩍이 웃으며 나를 바라봐주는 마흔 몇 개의 눈들이 고마웠고, 내 사물함에 가끔 들어가 있는 초콜릿, 편지, 직접 담근 술병(!)은 내가 십대 때부터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던 인기의 증표였고(여고 교생 선생님의 말씀을 알겠더라니까 ㅠㅠ), 나를 믿어주고 울면서 신청하는 면담, 가끔 밤에 오는 연락들, 술 한 잔 하면서 꼭 얘기하고 싶다는 고마운 손길들. 심지어 이번에 빠르게 승진하여 내가 원래 있던 기술부서로 네 명의 내 새끼들이 왔을떄, 나는 기쁘고 고마워서 사실 화장실에서 혼자 좀 울었다. 회사에서의 부사범이랍시고 사실 매일 서둘고  정신이 없었는데, 잘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모두들 빨리 배워서 나와 같은 트레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하며 승진 시험을 통과해서 왔다. 그 전부터도 함께 일하며 항상 방글방글 웃으며 전후 좌우로 반갑다고 달려들었고, 내 사물함에는 사나흘이 멀다 하고 간식거리와 술병(아내는 기술 가르치랬더니 술 얘기만 한거 아니냐며 반농반진으로 혀를 찼었다^^;;) 이 있었는데, 팀장님은 미리 아셨는지, 혹시나 내가 내 새끼들 앞에서 망신당할까봐, 한 두 달 동안 해병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절차와 설명서를 다시 복습시키셧다. 덕분에 내 새끼들이  왔을 떄 나는 현재까지 가장 좋은 업무 성과치로 내 새끼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오늘 퇴근이 좀 늦었는데, 역시나 또다른 내 새끼가 잠시 나를 부르더니 흑 눈물을 떨궈 놀랐다. 원래 발래를 오래 하다 그만둔 그녀는, 특유의 초현실적인 우아함이 있었고, 늘 살이 쪘다 스스로 예민해해도 살이 넘치지 않았다. 대장 기질이 있는 그녀는 매 강의 시간 전마다 항상 내게 커피를 주었고, 내  생일에는 소주잔을 채워주는  개구리 인형 기계를 선물했었다. 정말 힘든 일이 있다며 조용조용 설명을 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돈을 받고 일하고 있는 곳에서 정말 열심히 준비했기 때문에 몇몇 이들에게 겨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신뢰를  잘 지켜야 한다. 내가 다시금 옛날처럼 천둥벌거숭이가 되면 안된다. 아내의 허락을 받아 곧 보게 될 너는, '본인 새끼부터 잘 키우세요, 언니 힘들겠어요.' 라고 보내와서 나를 또 부끄럽게 만들었다. 과연 일년지계 막여수곡(一年之計, 莫如樹穀) 십년지계 막여수목(十年之計, 莫如樹木) 백년지계 막여수인(百年之計, 莫如樹人)이구나. 관중과 포숙아의 뜨거운 우정- 즉 관포지교로도 유명하며 제나라 환공을 주나라 밑 최고의 패자로 올려놓은 제나라 정승 관중이 남김 말로서, 일년의 계획으로는 곡식을 심고, 십년의 계획으로는 나무를 심으면 족하지만, 백년의 계획으로서는 사람을 기르는 일보다 좋은 것이 없다 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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