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F 번외편 : 자세(2) - 안하면 잊고 멀어지는 것.
결국 타고난 하이어라키 hierarchy 의 한계를 여실히 보였지만 어린시절 우리에게 고승덕 변호사, 장승수 선생과 더불어 7막 7장의 신화를 깊이 각인시킨 홍정욱 전 코리아헤럴드 사장은 십대시절, 밤마다 화장실에서 별을 보며 영영사전을 외웠다고 했다. 절실하여 그럴수밖에 없었을터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인 중 하나인 억만재 김득신은 논어를 십만번 이상 읽었어도 문구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해 아버지 제삿상에서 젯주祭酒 따르면서까지 시경의 싯구를 외워 친척들에게까지 눈총을 받았으나 끝내 환갑되기 전 문리를 깨쳐 뛰어난 학자이자 지방 공무원으로서 명성을 떨쳤다는 이야기도 여러번 했다. 너가 어제 쓰면 잘 외워지냐 했을때, 나는 늦은 퇴근 후 소은이를 옆구리에 끼고 글자를 흩어 써주며 외우게끔 하고 있었다. 유튜브도 좋고 A.I 블럭도 좋지만, 제 몸과 입술을 움직여 직접 쓰고 읽지 않은 것은 내 속으로 녹지 않는다. 무공처럼 어학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글은 뭐가 되었든, 소리내어 읽고 직접 쓰고 자주.봐야만 한다고 배웠다. 어렸을때부터 어머니께 한자를 배우던 방식이 그랬고, 불안한 청춘에 몸을 지키려고 외국 사범님, 교련들께 주짓수며 가라테며 중국무술을 배우며 입에 붙이던 영어 중국어 일본어 쓰던 그때도 다 그랬다. 지금 내게는 그나마 말할줄 알던 중국어 일본어는 술 깨듯 혀 끝에 녹아 없어졌다. 나중에 때가 되면 각 잡고 읽고 쓰겠지만, 지금은 한자 다음으로 오래 읽고 쓴 영어가 그나마 일상회화는 할만하다. 고등교육의 말석에나마 있었으며 도장에서 늘 쓰는 탓이 클 터이다.
매주 월요일은 늘 일찍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하느라 잠이 부족하고, 화요일은 평소라면 도장까지 다녀오느라 커피를 더 많이 마셔서 피곤하다. 따라서 이때쯤이면 참을수없어 푹 녹듯이 잔다. 웬일로 소은이도 밤새 깨지 않아 열한시부터 아침 일곱시까지 한번에 푹 자서 개운했다. 나는 평일에도 출근 전 훈련, 출퇴근, 퇴근 후엔 도장 혹은 육아, 아이 재운 뒤엔 삼사십분이라도 공부나 독서, 휴일이라면 덧붙여 술 한 잔이라도 마시는 버릇이 있어 하루를 쪼개어 사는데 익숙하다. 그러므로 뭐 하나라도 변수가 생겨 이 하루의 흐름이 밀리면 은근히 짜증스럽다. 젊었을때는 내키는대로 읽고 마시고 훈련하고 만나고(?) 그야말로 제멋대로 사는 파락호에 지나지 않았는데, 상갓집 개 궁도령을 꾸며냈던 흥선 이하응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 청춘의 값을 아주 독하게 치렀다. 다시는 그리 살기 싫어 일부러 성격에 안 맞게 계획을 짜두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유단자 틀부터 할 차례라 몸을 푼 뒤에 발차기가 높지 않은 포은 틀과 충장 틀을 먼저 하고 광개, 계백, 의암, 고당, (분노!) 삼일, 유신, 최영 이렇게 나갈 차례였다. 확실히 틀 연습을 쭉 하며 처음부터 하지 않고, 중간부터 시작하니 힘이 남아 동작들 버티기가 잘 되었는데, 삼일 틀이 기억이 안 나… 서른세 동작밖에 안되고 크게 어려운 동작도 없으며 이어지는 기술들이 많아 흐름을 타기 좋지만, 반대로 중간에 갑자기 탁 끊기면 어? 어? 하면서 잊어버리기도 쉬운 틀이다. 판 튀는 반주 속에서도 귀신같이 노래 중간을 찾아부르는 박효신 대장이 아닌 다음에야 노래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빨리 되짚어부르듯, 틀도 그런 편이라 나는 오늘 결국 삼일 틀을 네 번이나 더했다. 부족한 신체 기능을 더하고 맞서기 연습 늘린만큼 틀 연습 횟수를 줄였더니 대번에 티 나네ㅜㅜㅜ 에우클리피데스가 수학에 왕도가 없다했는데, 공부도 무공도 내 몸으로 직접 안하면 다 티가 나는 법이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