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들의 명복을 빌며 - 한 명의 아비로서 몇 글자 끄적임
팔자에도 없는 기술직 일을 하다보니 가끔 난감할 때가 있다. 정말이지 진실이야 하늘에 계신 분만이 알 터이다만, 어쨌든 기기가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손상되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 범위까지 파손되고 만 탓인지, 혹은 정말로 쓰던 분이 모르쇠, 남용하거나 무단 개조를 해버리고 이제 와서 본인은 한 적 없다 발뺌하시는지 일개 회사원인 나야 알 도리가 없다.여하튼 이러한 상황의 종국에는 어찌 되었든 기기 사용자와 기술지원으로서의 입장이 서로 상충하게 되니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을뿐, 일은 미궁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 소은이도 그랬다. 전직 간호사였던 아내의 정밀한 육안 검사와(^^;;), 소아과 진료로는 수족구라고 했다. 그런데 소은이는 주말간 약간 열이 나고 자주 지쳐하긴 했지만, 여전히 식욕도 좋았고, 잘 놀고 잘 잤다. 발바닥에 잡힌 여남은 개의 물집도 다른 곳으로 더 번지지 아니하였다. 아내가 일찍 첫 차로 떠난 뒤 출근이 늦는 나는, 아이와 함께 다시 병원에 가서 수족구가 아니라는 진단서와 함께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웬걸, 어린이집에서는 아무래도 수족구 같다며 다시 아이를 돌려보냈다. 아이 한 명이라도 혹시나 수족구가 걸려버리면 순식간에 전염될 수 있는데다, 예전에 어느 병원의 오진으로 한 반이 모두 수족구에 걸린 적도 있다 하니 어린이집만을 탓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초복 더위에 느닷없이 연락받고 애를 들쳐업은 채 다른 병원을 찾아 가셔야할 어머니 아버지의 입장도 입장이었다. 즈그들이 의사여 뭐여, 아닌 말로 여그서도 아니라고 허믄, 수족구 맞다고 하는 븽원(병원) 기어이 찾아낼 판이여? 전화기 건너편에서 하시는 말씀도 이해는 되었다. 어찌되었건 소은이는 다른 병원에서도 수족구가 아니라고 했다. 회사에서도 속타다 안심한 애비 마음이나, 하루 종일 고생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마음을 아는지, 소은이는 오늘 아비 어미 없이도 유독 잘 놀고, 유독 애교를 부리며 놀다 아비 퇴근하기 십 분전에 잠들었다며 어머니 아버지는 흡족해하셨다.
무남독녀 고명딸이 될지, 아니면 제 부모가 어떻게든 동생 하나 더 낳아줄지, 아직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고 총명하고 활달한 우리 딸. 주말에도 소은이는 아비 없이도 어미와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따라 잘 놀고 온갖 맛있는건 실컷 먹고 왔다. 집에서는 보통 중요한 일이 있거나 큰 일 치를 때 연중행사로 장어나 복어를 먹으러 가곤 하는데, 한우갈비, 오리로스, 삼계탕, 생선회, 생고기, 과메기, 보리굴비, 갈치조림, 고등어구이 등 하여간 조부모님 밑에서 크느라 입맛 하나만큼은 예술인 소은이가 무엇보다 제일로 치는 음식은 다름아닌 면. 그 중에서도 몸을 좀 더 가렵게하는 국수보다는 냉면을 제일로 친다. 소은이는 피자나 햄버거, 과자 등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간식으로도 옥수수나 감자, 블루베리, 키위 등을 좋아하는 편인데, 하여간 냉면, 국수, 짜파게티라면 사족을 못 쓴다. 뭘 갖다붙여도 냉면을 이기는 일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고, 저가 좋아하는 추어탕(이미 세살 때부터 동네 앞 단골 추어탕 집만 지나가면, '할머니, 배고파요, 우리 추어탕 먹으러가요.' 했었다.) 에 국수를 말아놓으면 게눈 감추듯, 후루루룩 먹고 마시는 일도 다반사인데, 웬일, 잘게 썰어놓은 장어를 한 입 쓱 입에 넣더니, 눈이 휘둥그레, 국수가 불어터지도록 안중에도 없고, 아빠, 짱어 주세요, 또 주세요, 또 주세요를 연발하였다. 아내가 '아이고, 소은이 아빠도 먹여야 됩니데이.' 해서 기어이 한 마리 사온 장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여간 너는 색시 하난 잘 뒀다, 즈그 신랑이라고 아조 입 챙기는 것은 지성이여.' 하며 웃으시던 그 장어, 세상에 어느 부모가 안 그렇겠냐만, 소은이가 꽃잎처럼 혓바닥을 내밀면서 히히히 장어를 먹고 또 먹는데, 그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고 술이 당겨서, 차마 젓가락이 선뜻 안 나갔다. 아내가 꿀밤때리는 시늉을 하며 '아이고, 소은아, 니 인마, 낮에 윽수로 무놓고 아빠 꺼를 또 탐내모 우짜노? 이건 아빠 거데이~ 그만 무!' 해도 아이는 '아빠아, 나 짱어 먹고 시포요~' 하며 찡긋찡긋 애교를 부리니, 나 역시도 지금 쓰면서 또 눈물이 울컥 하는데, '아따, 이 사람아, 그러니까 애제, 혀 있시민 국수 안 묵제, 나 같어도 장어 묵네. 소은아, 많이 먹어라잉, 많이 먹고 탈나지만 마잉?' 하고 잔뜩 먹이고 재웠다. 어머니 아버지는 주무시려고 윗층으로 올라가시면서, 소은이가 인쟈 장어 맛까지 깨챠부렀응게 큰일났다, 느그들은 더 벌어야 써, 하시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아니 그렇겠는가.
아니 그런 부모가 있다는 듯 싶었다. 하필 소은이가 장어를 실컷 먹고 만족해서 부른 배를 둥둥 두드리며 자던 밤에, 모처럼 시간이 나서 아내는 소파에 반쯤 눕고, 나는 예의 그 위스키에 하몽과 살라미를 잘라먹으며, 못 먹은 장어의 시름을 달래던 그 밤에, 모처럼 함께 본 SBS의 그 유명한 '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는 놀랍게도 아기 매매에 관한 내용을 방송했다. 제 배 아파 낳은 아이를 팔아 억만금이나 버나 싶었더니, 믿기지도 않는 금액이었다. 싸면 150만원, 비싸봐야 천만원을 넘지 않았다. 그 정도 금액조차 허위허위 급하게 덤빌 정도로, 어미들은 어렸고, 철이 없었고, 급박했다. 일단 잘 알지 못해 맺은 관계의 결과가 너무 무거워서, 서둘러 숨겨야 했고, 아이는 어데론가 보내야할 짐덩이였기 때문에, 어린 어미들은 유학으로 말하자면 하늘이 내려준 성性 중에서도 모성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어미들은 휴대전화에 매달려 제 아이를 사간다는 사람들에게 서둘러 연락했고, 그 와중에 또 성착취가 벌어지는 일들도 있었고, 마침내 잔돈푼에 아이를 멀리 보낸 어미들은 다시금 취재하러온 기자들에게 화를 냈다. 이러니 모정이 싹트기를 바라기조차 무리다. 아내는 마음이 아프다며 채널을 돌렸는데,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학생들 성적 올려주는 방송이 나왔다. 저런 방송에서도 역시, 어느 집 자녀들은 으리으리한 냉장고에서 때 되면 좋은 밥과 간식을 꺼내먹고, 비싼 컴퓨터와 전화기, 패드로 첨단을 달리며 공부하는데, 어느 집 자녀들은 공부는커녕 학대하는 친부모를 피하고 숨기에도 바쁘다. 주말간 뉴스에서는 여러가지 슬픈 소식들을 더 전했는데, 웬 태권도장 사범이 둘둘 말린 매트에 4살배기 아이를 거꾸로 꽂아놓고 방치하여 심정지가 오게끔 했다 하고, 또 많이 먹기로 유명한 어느 젊은 아가씨의 과거를 둘러싸고, 덩치는 산만한 장정들이 돈을 뜯어내느라 정신없었다고 하니, 참말이지 여기저기 팔려가는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일단 낳은 애들이나 잘 돌봤으면 싶었다. 오산 참사와 이태원 참사의 법적공방은 이제야 겨우 1심 결과가 나왓는데, 어머님들의 절규가 아직도 생생하다.
술이 오르긴 했으나 소식이 소식이라 입맛이 썼다. 그날따라 장어 먹고 잠든 소은이가 더 이쁘고,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했다. 나도 고생없이 순탄하게 자랐다 하기는 어려우나, 어머니가 혼내시려고 일부러 그러지 않은 이상, 집이 가난해서 굶거나 추위에 떨며 자라본 기억은 없다. 오히려 불가항력으로 굶고 한뎃잠을 잔 기억은, 내 혼자 살아보겠답시고 어설피 독립한 20대에 더 많았다. 어느 집 아이들은 제 부모도 모른 채 팔려가거나, 오히려 부모가 악착같이 미워하는데, 우리 소은이는 아비는 그렇다쳐도 양가 조부모님, 어미, 고모 잘 둔 탓에 농담이 아니라 삼시세끼 고기 반찬에, 비단 옷에 멋내고 공부하고 즐겁게 자란다. 당연히 아이들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야 하지만, 어째서 같은 세상에 이토록 차이가 나는가, 내 스스로도 아비가 되니 더욱 이 잔인한 모순에 내 스스로 가슴이 아팠다. 모든 억울한 이들이 그렇겠지만, 먼저 져버린 꽃잎 같은 아이들의 명복을 빈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으나, 소은이는 평안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다른 아이들도 그렇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