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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일세를 풍미한 고수가 돌아가셨다.

by Aner병문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스무살 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무공에 푹 빠지리라 생각도 못했던 십대 시절에 그는 이미 인간극장에 출연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대학에 들어가 결련택견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학교에서 멀지않은 본부 전수관에 계시던 그는 여전히 이소룡을 연상시키는 더벅머리에 강건한 몸, 너그러운 미소를 지닌 이셨다. 편하게 형이라 부르라셨고, 자신의 꿈 중 하나가 위대한 무술 영화를 찍는 것이라며 씨나리오와 스크립트를 보여주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부끄럽게도 그 때 내 인격은 지리멸렬한 무공과 학문보다 더욱 얕았었다. 대단치도 않은 청춘을 사는 주제에 젊은 시절의 유용주 소설가마냥 인간말종 파락호의 부끄러운 삶을 가리느라 어데서도 무엇이든 깊고 진득히 익히지 못하고, 낱낱의 기술을 주워모아 내세우기 바빴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결련택견의 전통을 지켰고, 독립영화에 출연하여 무덕을 뽐냈으며, 전통권을 익히시는 황주환 회장께 사사하여 강력한 격파의 내공을 지니시기도 했다. 나는 가끔 그가 TV나 유튜브나 기타 책 등에 나오실 때마다 그나마 태권도를 익히기 전 십년 세월이 늘 부끄럽고 죄스러워 괜히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던 그가 지난 주말에 돌아가셨다. 생각지도 못하게 젊은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흑인 영웅을 연기하여 영원을 외치던 배우처럼 투병 사실을 숨기다 암으로 돌아가셨다. 소천하시던 자리는 무인답게 굳건하고 의연하여 아름다웠다 들었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로 이름을 날리던 정도회관의 고수 앤디 훅도 링에서 싸우듯 암과 싸워 이겨 돌아오겠다 했으나 끝내 정갈한 도복과 바랜 띠만을 남겼더랬다. 나는 근 십오년 만에 학교 시절 동문 선배님께 조심스레 전화드렸다. 형님은 살아 있었냐며 웃으며 안부를 물으셨으나 나는 그때 더 마음이 아팠다. 나만 알고, 나만 내세우던 시절에, 나는 주변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상처입혔을 뿐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도 떳떳치 못했다. 그러고도 끝내 잘 되겠지 고집만 부리다 내 스스로 몸과 마음을 두 번이나 망쳤다. 나는 성경과 논어를 읽으며 바닥을 기었고, 단 둘 남은 벗과 태권도와 아내를 만나 겨우 사람 꼴 하고 살게 되었다. 2단 띠도 언제나 항상 부끄러울 뿐이다. 실력은 둘째치고, 띠를 맬 자격이나 내게 있는가.




오늘은 심지어 지도선생님의 생신이시다. 삶의 끝까지 몰려, 공부고 무공이고 체면조차 챙길수 없었을 때에도 장학금을 알아볼테니 공부를 포기하지 말라 말씀해주시던 분이었다. 인사동을 떠난지 3년인데 아직도 근처를 지날 때마다 내 생각을 하신다는 선생님은, 늘 책을 읽고 있는지 공부는 하고 있는지 물어보신다. 나는 늘 꾸역꾸역 읽고 짬내어 마시지만, 선생님의 질문에 답할 정도로 공부하는지 자신할 수 없다. 세상은 어찌하여 나같은 반거들충이는 두시고, 저토록 훌륭한 고수를 일찍 데려가시나. 십오년만에 연락드린 기억이 내 머리와 마음을 헤집어 오후 내내 비에 절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왜 그토록 모자라게 살았을까. 오늘은 참말 우울하다. 땀이나 실컷 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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