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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독서감평)

국수(國手)- 소은이가 좋아하는 음식 말고, 나라 제일로 바둑을 잘 두는

by Aner병문

김성동, 국수, 솔출판사, 한국, 2018.



바둑을 배워보고픈 마음은 있지만, 아직 손을 대보진 못했다. 장기는 어렸을때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셔서 그럭저럭 둘 줄 안다. 중국 천하를 두고 유방과 항우가 서로 다투던 초한지의 이야기도 잘 안다. 공부자께서는 일찍이 노느니 활 쏘고 바둑이라도 두라고 하셨으며, 서양의 신사들은 체스로 지략을 겨뤘고, 허리 아래로는 감히 치지 않는 권투와 지팡이 봉술로 자신을 지켰다. 한국 환상소설의 한 축을 연 이영도 소설가는, 피를 마시는 새에서 바둑을 소재로 거대한 군상극을 펼쳤고, 바둑계의 타짜 영화로 불리는 신의 한 수 1편은, 바둑만 소재일뿐, 전형적인 무협지의 서사를 따르고 있으나, 나처럼 겨우 바둑책이나 읽어본 사람도 잘 알 정도로 바둑과 관련된 비유를 잘 사용하였다.



충청 제일의 기재라 불리던 소설가 김성동 선생이 바둑에도 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그의 자전소설로도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어머니께서 김성동 선생의 자전소설 3연작인 길, 만다라, 집을 구판으로 다 갖고 계셔서 나는 어렸을때부터 종종 읽으면서 자랐다. 지금 생각해도 만다라의 서사는 중학생이 감히 따라가기엔 버거울 정도로 파격적이었지만, 소심하고 생각많은 소년 영복의 성장기는 어린 나에게도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켰었다. 아주 나이를 먹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김성동 선생이 훌륭한 대작가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사실 몇 년전부터 갖고 싶긴 했는데, 이래저래 안 읽은 책들도 많고,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쁜 삶에 함부로 다섯 권짜리 굵직한 책을 섣불리 읽을 여유도 없어서 망설이고 있던 차였다. 그러다 지난 생일에 너가 마침내 사주어서 고마웠다. 그 때 나는 제2차 안산대회를 준비하면서, 짬짬이 거스리 선생의 희랍철학입문을 읽고 있었다. 국수 한 권에도 비해도 1/4 도 안될 얇은 책이었지만, 하루 한 장을 나가기 힘들 정도로 번역체의 글투에 내용이 난해하여 붓방아를 찧던 차였다. 옥상이건 도장이건 땀을 빼고 읽어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때마침 부서를 옮기고 적응이 어려워 매일 깨지던 차에 어려운 서양 철학을 계속 붙잡을 여력이 없어서 너가 책을 사주자마자 곧바로 펴들었다. 한동안 소설이라고는 이영도 선생의 환상소설이나, 차현이 형님 혹은 배명훈 선생의 공상과학 소설만 주로 읽던 요즘이었다. 차마 젊었을때처럼 한강 선생의 소설을 펴들고 몇날며칠 보라빛 우울에 푹 빠져 잠 안 오는 밤을 술로 지샐수는 없었다.



시디신 김치와 비계 두꺼운 돼지고기로 푹 끓인 비지찌개, 강새우가 씹히면서 살짝 흙내가 나는 민물매운탕, 뜨거운 밥에 비벼 짠지 올려먹으면 그만일 쿰쿰한 청국장은 한국 사람의 깊은 속을 파고드는 음식이다. 한동안 엄밀하게 계산된 설정과 정돈된 현대어만 읽던 나는, 마침내 식은 밥에 장국 한 그릇 말아 소주 한 잔 마시던 그 때 그 느낌을 찾았다. 어렸을때 무턱대고 읽던 박경리 선생의 토지, 혹은 최명희 선생의 혼불,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처럼 별 생각 없어도 그저 당기듯 읽어야만 하는 글이었다.


국수 라는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소설 초반부, 그리고 중간중간 사이에만 잠깐 바둑의 이야기가 나올뿐, 바둑이 주된 소재는 결코 아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께서 읽으셨다는 광고가 하도 붙어, 제법 기사에도 오른 책이었기에 '바둑 이야기가 아니다.' 라는 설명은 언론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바둑이 흑돌 백돌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다투는 이야기이듯이, 이 소설 또한 피를 마시는 새와 같이 하나의 거대한 군상극임은 분명하다. 비록 큰 대갓집 양반은 아니나 글공부와 바둑에 두루 통달하여 개화선비 김옥균, 한양 제일 기생 일매홍과도 교분을 맺은 천재선비 김병윤과 그의 아들 석규, 아기장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힘과 무예가 뛰어나고 글도 어느 정도 읽어 무인을 꿈꾸지만 화적이 되고마는 만동, 그를 가르쳤던 청빈한 무인 장선전과 딸 인선 등이 흑돌 백돌처럼 서사의 주를 이루며, 그를 둘러싸고, 뜻을 품었으나 어지러운 19세기 개화기 조선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남녀호걸들과, 또 시류를 타고 그저 한 세상 잘 살아보려는 비겁하고 졸렬한 무리들이 넘실대면서 서사의 겉을 돌고 있다. 한두번 읽어서 쉽게 줄거리가 잡힐 이야기는 아니지만, 명확한 주제나 결말을 전하기보다는, 19세기 말 어지러운 조선을 배경으로 당시 충청도 중심의 순수 우리말을 가능한 남기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명확히 보이고 있다.



김성동 선생은 고전에도 통달했을뿐 아니라 실제로 서예도 매우 능한데, 그가 손수 쓴 천자문에서, 그는 일제 강점기 때 넘어온 일본식 한자 표현을 경계하고, 한자 표현을 쓰더라도 가능한 우리식 표현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테면 부부 夫婦를 내외 內外 로, 오후 午後 를 하오 下午 로 쓰는 식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어렸을때부터 한자를 배워서 한자 자체를 적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쓰는 표현이 일본식인지, 우리 나라 식인지는 아직 헤아려본 적이 없다. 그렇게 헤아릴 정도로 내가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지도 않다. 다만 선생께서는 2년전 이제 별세하시어 이처럼 흙내나는 글을 쓰는 이가 또 몇이나 되랴 생각한다. 좋은 벗이 좋은 책을 사주어 한동안 꿈꾸듯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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