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나이 반팔십에 계엄을 겪을 줄이야.

by Aner병문

틀림없이 학교에 있거나, 혹은 사업을 할 줄 알았지만, 세상사 내 마음대로 되거나 예측한대로 흘러가지는 않아서, 나는 서른 넘어서야 비로소 장롱면허라도 따고 첫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명색이 정책 일을 한다고 가끔 국회를 드나들기도 했는데, 불사조 이인제 의원을 실제로 뵈거나, 무엇보다 국회의 보안을 책임지는 경호처의 요원들도 맞닥뜨렸던 때도 그 무렵이다. 나라에 손꼽는 무인들이 있을법한 곳인지라, 움직이기 편하게 통이 살짝 큰 양복을 입었어도, 날렵하고 다부진 몸은 흉하지 않았고, 걸음걸이가 가벼우면서도 깊어, 과연 아무나 국회의 경호원이 되진 않는구나 감탄했던 적이 있다. 그러다 그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듯한 거구의 사내가 역시 양복을 입고 들어오시기에, 아 대장님인가 했더니, 태권도 돌려차기로 유명했던 국가대표 출신의 문모 의원...(...) 여하튼 국회의 경호처 의원들을 본 내 소감은, 한 나라의 상위권 무인이란 어떤 모습인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하물며 누구나 손쉽게 떠올릴 특수부대인 공수특전여단과 707특임대일까. 군인은 본디 어느 때고 흔들리지 않게, 함께 뭉쳤다가 흩어지고, 걷고 뛰고, 침착하게 겨누고, 근면하게 싸우는 이들이 바로 군인이다. 안 그래도 개개인의 역량이 뛰어날 특수부대원들이 집단전투훈련을 받아 우리가 직장생활하듯, 어느 상황에듯 침착하게 단체 행동을 하는데,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이 특수부대들이 정말로 마음먹고 국회를 봉쇄하고 점거한 뒤 요인들을 구금하고자 했다면, 옛 전 대통령 꾸데타가 문제가 아니었을 터이다. 세상은 과연 바뀌어, 네그리와 베냐민이 예견했듯, 모든 대중매체가 대중 사회에 활짝 열려 다중의 사회를 구성했고, 예전에는 시대의 무기였을 군인들조차 이미 상황을 파악하여 합리적이지 못한 싸움에 미적거렸고, 수준 높은 시민들은 군인들의 입장을 이해하되 결코 명분 없는 계엄을 좌시하지 않았다. 길어야 6시간, 명분도 이유도 모를 계엄은 그렇게 3시간 천하로 끝이 났다. 일각에 이르러서는 김옥균의 갑신정변에 빗대어 갑진정변이라고도 하였다.



명분없는 계엄이 왜 실패했는지, 뉴스, 신문에서부터 인터넷 백과사전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명쾌하게 이해할법한 원인들이 이미 기술되어 있고, 합당한 의견들이라 생각하여 따로 얘기하지 않는다. 다만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긴 하나, 이토록 뛰어난 역량을 지닌 특수부대를 가지고도, 상위 계층의 기획력이 엉망이라 계엄을 끝내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앞서 말했듯 군인들은 미적거렸고, 지자체의 공무원들도 거부하고 항명하였으며, 의식 있는 시민들은 반발하였고, 심지어 여당 대표조차 이에 불복했다. 분명 이번 계엄은 내란이었겠지만, 만약 정말 외침外侵에 의한 전쟁이었다면, 이런 기획력을 지닌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어떻게 믿고 전쟁을 해나간단 말인가? 비밀이 새나갈까 두려워 대통령은 일부 학교 출신 장성들과 심복들에게만 계획을 공유했고, 대통령실과 비서실, 내각 등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용을 함께 논의하지 않았다 하니, 이제 와 홍수 나기 전 쥐떼 빠지듯, 중진 참모들이 사직서를 던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통령이 무슨 의도로 계엄을 선포했는지, 그 의도를 굳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아주 모르진 않으랴만서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밥 팔아 똥 사먹는 격이고, 떡 쪄서 시루 엎어도 정도가 있다.



그러므로 일찌기 칼 슈미트는, 정치란 결국,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모든 행위라고 정의했다. 이 필부가 감히 보건대, 대통령에게는 적도 동지도 남지 않았다. 계엄은 안된다고 미리 충언을 올렸거나, 이판국에 아닌말로 끝까지 지지하겠다는 이들도 자취를 감췄으니 동지가 없고, 적이 누군지 제대로 알았다면 계엄까지 운운하며 나라 최고의 특수부대의 총부리를 국민들에게 돌렸겠나. 이 나라는 마약에 젖은 소년병들로 득세하는 군벌들의 검은 대륙도, 연금술로 유명한 만화 속 어느 군사 국가도 아니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들은 이미 예전부터, 국가란, 그저 허상의 적을 나라 바깥에 설정해두고, 그 적을 쳐부순다는 명분 하에 착취를 횡행하는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꼬집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