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서 떠나는 말과 글에 대하여.
스무살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주 아팠거나, 혹은 딸을 키울때를 제외하곤 무공에 뜻을 놓아본적은 없었다. 돈이 없어도 산에 올라 맨손발로 나무를 쳤고(지금 생각하면 주변 어르신들이 얼마나 놀라셨을까 싶다.) 달밤에도 이른바 산스장의 낡은 헤비백으로 업어치기 연습을 했으며, 출장 가서도 모텔방 구석에서 벽 잡고 발 뻗는 연습을 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무공은 무엇보다도, 몸을 쓰는, 몸 자체의, 몸이 배어나오는 활동이었다. 특히 상형권의 표연 동작들을 보면, 사지를 써서 땅을 기고 걷는 인간이, 곰이며, 호랑이, 심지어 뱀, 독수리, 용까지, 강하다 싶은 짐승들의 동작을 얼마나 본따고 싶었는지 여실히 알게 된다.
그렇다면 책을 읽고, 말을 하고, 글을 쓰는.일도 신체 활동인가? 나는 일찌기 바둑이나 전자오락 또한 e-sports 라면서, 체육 활동의 반열에 들어야한다는 의견이 낯설고, 공감하기 어려우며,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술을 겨루어 승패를 나눈다고 무조건 스포츠랄수 없다.
다만 생각해보건대, 넓은 의미에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일 또한 신체적 조건에서 결코 온전히 자유로울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창천항로에서, 조조는 희대의 군사 곽가의 어깨를 손수 주물러주는 것만으로도 그 매서운 입을 다물게 하며, 메를로 퐁띠는 쉼없이 반복되고 겹쳐진 몸의 경험이 생각의 기초가 된다고 했다. 김훈 선생에게도 자전거 풍륜이 없었다면, 헤밍웨이에게 권투와 독한 술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그들은 전혀 다른 문장의 주인이 될수도 있지.않았을까. 왜 마르셀 프루스트는 코르크.마개로 가득찬 방에서 글을 쓰고, 당시사걸唐詩四傑 중 한 명인 이하는, 요절하는 그 날까지 하루종일 나귀타고 소요하며 시를.썼을까.
말과 글이 언제나.경쾌하게 내달리진 못한다. 나는 어떠한 장애물을 생각해야 하는가? 놀랍게도, 나는 직장인이 된 이후로, 가장.많은 글을 회사에서 읽고 또 썼으며, 많은 말들을 주고 받고 기록했다. 어느 누가 봐도 이해하고 동일한 과정을 수행해야 하기에, 내가 본 작업지시서나 설명서에 관한 내용은, 담백하고 명료했으며, 자의적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명백한 글이었다. 한때 나는 세계적 기업에서 생산된 전자제품의 설명서를 골라읽으며, 건조하리만치 명확한 의도를 전달하려는 문장의 전개 방식에 놀랐던 적이 있었다. 노벨 비문학상이라도 하나 신설해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설명서들의 수준 편차는 컸다. 전화기 한번 볼틈 없이 일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작물은 자라며, 가공품은 생산되는데, 이 모든 변화의 계측은 모두가 공유하는 숫자와 글씨를 규칙대로 표현하여 매일 보고를.반복하며 흘러간다. 변수가 생길때 말은.일상처럼.흐르다 틀어지거나, 곁가지를 치고, 다시 그 말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두려고 적는 글은, 형식을 지키려 간결하면서도 개요와 결과를 망라해 요점은 전해야하므로 결국 때때로 매 분 매 초마다 뱉고 듣는 말은, 허망한 아지랑이.같기도 하고, 그를 정리해둔답시고 쓰는 글은 서둘러 뚝딱 만든 통조림 같기도 하다. 매일매일 쳇바퀴 같으면서도 세밀해지는 하루를 표현하는 말과 글은, 나같은 직원들의.몫이지만, 이를.총합하여 정제하고 규격화된 보고서로 만드는 일은, 또한 상사들의 몫이니,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메일과 또 전화를 옮기는 기록과 사내 메신저의.대화방이 아득했고, 해외에서 건너온 내용들까지 합치면 기가 질리었다.
그러므로 이토록 직장의 언어에 질식하고 체하듯 절여져.있다가 또다른 말과 글을 대하면, 나는 놀라고 마는 것이다. 인문학이나 시문詩文은 극히 정제되어, 견고한 타격과 같고, 소설이나 노랫말은, 낭만과 서정으로 풍부하여, 아무리 몸을 빼어도 조여오는 관절기 같으니, 때때로 나를 부르는 아내나 딸의 목소리에 비로소 고개를 들면, 그녀들의 말과 글에는 그저 이유와 근거, 목적없는 사랑만이 가득할 뿐이다. 세상에는 이런 관계에서 나오는 말과 글도 있구나, 가정을 꾸리고서야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