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병子의 지인열전 (2)ㅡ 인사동 최강! 밥 잘하는 유진이뎐

by Aner병문

나는 학교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면서 팔자에도 없는 직장인 생활을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어찌 보면 어울리는 듯도,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한 유기농업계에서 근 오륙년을 보냈다. 장롱면허나마 서른에 겨우 딸 정도였으니 애시당초 농업기술을 몸에 익히기는 무리였고, 정책팀에 한동안 몸을 두었다가 소비지와 직접 맞닿을 수 있는 현장을 주로 돌았다. 나의 유기농업 관련 마지막 경력은, 인사동의 유기농 식당 홀 매니져였는데, 유기농 공정거래 까페를 제외하면 난생 처음 요식업계에 별처럼 떨어진지라, 그때 주방의 터줏대감인 밥 잘하는 유진이를 처음 만났다.


훗날 나의 안식구와 초성조차 똑같을 이 아가씨의 첫인상은 실로 대단했다. 열아홉살 나이부터 십 년이 훌쩍 넘게 요리를 해온지라 주방에서의 냄비질로 단련된 팔뚝과 어깨하며, 손등 곳곳에는 문신으로도 가릴 수 없는 흉터가 가득했다. 요리를 참말 좋아했으며,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야하는 주방 일정 앞에서도 수영을 즐기는 근면성실한 아가씨였다. 정말이지 백종원 저리 가라 할 정도로의 성실함과 뛰어난 요리 솜씨, 귀여운 얼굴, 화통한 성격이었으니 처음부터 나랑 잘 맞겠거니 싶었지만 웬걸, 밥 잘하는 유진이는 자기 스스로 말하듯 칼과 불을 다루는 주방에서 맞아가며 엄격히 배운 거의 마지막 세대였고, 어깨와 팔뚝에 쟁반도 연이어 올려나르지 못하는 주제에 영어 몇 마디 할 줄 안다고 갑자기 홀 책임자로 뚝 떨어진 나를 처음에는 정말 싫어했었댔다. 그래도 순하고 여린 성정은 어데 가지 않아서 항상 나를 맵게 혼내키고 나면 제 성격 못 이겨서 그날 점심이나 간식은 무엇이든 더욱 볶아내고 부쳐내서 막걸리와 함께 내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가씨였다. 어떤 날은 신경성 복통으로 속이 쓰려 그 좋아하는 술도 몇 잔 못 마시고(안 마시진 않았다!) 휴식 시간에 끙끙 누워있으려니 손수 죽까지 끓여 쓰윽 밀어넣어주곤 했다. 이러니 꼭 군대 막내마냥 이쁨받는지 미움받는지 알 수 없어 퀭한 인사동 밥집 생활이 계절이 바뀌어 근 반 년이었다.



당시 나는 줄검은띠 1급으로 첫 승단을 준비할 때라 새벽 일찍 도장 문을 열고, 2시간 훈련한 다음, 지옥철에 끼어 안국역으로 출근한 뒤, 점심 영업을 하고, 반주를 곁들여 밥을 먹고 저녁 영업 장을 보고, 너와 잠시 커피 한 잔 마셨다가, 바람 서늘한 정독도서관 정자 그늘 아래서 책 몇 장 읽고 돌아와 다시 저녁 장사를 하면 벌써 테이블 아홉 개짜리 작은 식당 안에서만 하루 삼만 보를 넘게 걸었다. 어깨와 다리가 떨어져 나갈듯한 몸을 끌고도 사이사이 팔굽혀펴기와 스쿼트와 스트렛칭과 다리찢기를 하고, 시간이 남으면 저녁 도장에 나갔으니, 생각해보면 하루의 낙이란 술과 너와 마시는 커피와 태권도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처럼 순결히 충실하게 즐겁던 청춘이 다시 올까 싶다.



어지간히 일도 손에 배고, 없던 눈치도 생기고, 밥 잘하는 유진이의 외강내유한 속도 헤아리기 시작할 무렵, 첫 손님 오시기 전 그 날도 정권 단련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데 밥 잘하는 유진이가 특유의 억양으로 툭 던지듯 물었다. 대체 그거 뭐야? 태권도가 글케 재미쒀요? 그럼 엄청 재밌지, 유진 씨도 함 해봐, 힘도 세고 성격도 다부지니까 사실 잘 맞을 거 같은데? 그런 격투 운동은 한번도 해본 적 없다는 밥 잘하는 유진이는, 흰 띠 시절부터 이를 악물고 도장 막내 생활을 주방 생활처럼 견뎌내더니 어제 10월 10일, 코로나 열풍마저 뚫고 2단을 따내었다. 직장에서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밥 잘하는 유진이, 늘 혼내놓고 제가 먼저 미안해서 술상을 차려놓고 창을 두드리는 밥 잘하는 유진이, 오늘은 술 안 마신다 해놓고 늘 어머님 전화오실 때까지 새벽 늦게까지 남는 밥 잘 하는 유진이, 사실 병문 오빠 할 정도면 자기도 할만하겠다 싶어 입문했다던 밥 잘 하는 유진이, 김장할 때면 도장 식구들 몫 떼놓고 보쌈까지 얹어싸주며, 연말 수련 음식 혼자 출장 뷔페처럼 다 차려내던 미슐랭 빕 구르망에 빛나는 밥 잘 하는 유진이, 사찰 음식 전문점에서 보쌈과 족발을 제일 잘 배워와 미심쩍던 밥 잘 하는 유진이, 내 결혼 때 커다란 항아리에 오십도짜리 야관문주 담가 건네주던 밥 잘하는 유진이, 이제는 태권도 없이 살지 못하며, 어느 틈에 나와 단이 같아져버린, 우리 도장의 대들보, 든든한 사매 윤유진 2단에게 늘 내 우정을 다하여 이 열전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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