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다시 한 번, 설중방우ㅡ 눈 내리는 중 벗을 찾다

by Aner병문

명필 왕희지의 다섯번째(애국자!) 아들 왕휘지는 아버지를 닮아 예술에 두루 능했는데, 그의 벗 대규 역시 그 못지 않게 뛰어나 두 사람은 종종 술을 나누며 예술에 대해 담론하였다. 눈 내리는 어느 밤 홀로 달을 보며 술을 마시던 왕휘지는 대규가 문득 보고 싶어 배를 띄워 그를 찾아갔다. 당시 왕휘지는 진나라 산음에, 대규는 섬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밤새 배를 타고 아침 해가 떠서야 당도했다 하니 못해도 서울에서 충북까지의 거리는 아니었을까 싶다. 문제는 그렇게 밤새 달려오고 나서는 벗의 문 한 번 두드리지 아니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무슨 기행이냐며 묻자 그는 흥이 돋아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왔을 뿐, 이라고 짧게 답했다. 사위 면접 보러간 날, 뭇 총각 선비들은 모두 의관을 정제하고 있는데 혼자 배를 드러내고 누워 포도나 까먹다가 덜컥 장가갔다는 아비 왕희지를 연상케 하는 이 고사는 세설신어, 진서 등에 수록되었으며, 단원 홍도 선생과 동시대에 계셨던 이인문 화백의 설중방우 한 폭으로도 그려졌다. 구도장원공ㅡ 요즘으로 치면 행정고시에 아홉 번이나 수재합격하시었던 율곡께서도 이에 관련한 문제를 받으시었는데, 설중방우의 고사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에, 그저 한때의 즐거움이었을 뿐이다, 라고 딱 한 줄 적어내시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늘 그렇듯 술 생각이 간절하던 주말이었다. 실은 처자식과 산책을 나가며 들깨 갈아넣은 고소한 삼계탕에 돼지귀무침이나 곁들여 빨간 소주 한 잔 하고 단풍놀음이나 할까 했는데, 눈 대신 미세먼지가 하염없어 건너편 산 끝자락조차 보이지 아니하였다. 바지락을 캐러 가신 어머니도 안개와 먼지가 뒤섞여 어촌계 청년들이 말리는 통에 일찍 상경하시었다 했다. 돼지고기나 끊어다가 골마지 낀 김치 털어내어 양파 깔고 달달 볶아 아내 밥반찬도 해주고 나는 슬쩍 술이나 할까 생각하던 차에 너가 꿀 같은 말을 던져왔다. 나 오늘 안양 가! 멀리 계신 반기문 총장이며 강경화 장관이 다 무슨 소용인가, 서울 북쪽에서 귀한 명분 가지고 내려오시는 너 덕분에 나는 아내의 허락을 받아 육회와 생고기를 가져오고, 너가 좋아하는 향라닭날개와 양고기 대파볶음을 사왔다. 오십육도짜리 고량주 한 병 벌여놓고, 너에게는 맥주를 주니, 아내와 너의 은혜가 참으로 감미로웠다. 친척 언니의 결혼식을 다녀왔다는 너는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옅은 갈색 원피스를 챙겨입었는데, 아내는 나중에 너를 보내놓고 아이고, 저래 이쁘가 결혼식에 민폐 우짜노, 하며 농으로 웃었다. 너는 아내가 행여나 내가 몰래 마실까 걱정하여 찬장 높은데 숨겨놓은 고량주를 보고는 손뼉을 치며 깔깔 웃었다. 좋은 벗이 명분을 가지고 이리 와주시고 커피까지 후식으로 사주시니, 어찌 아니 좋은 저녁인가, 그 날따라 아이도 비교적 일찍, 순하게 오래 자주어 고마웠다. 역시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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