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이방인을 대하는 방법 ㅡ 마르께쓰, 썩은 잎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쓰, 송병선 역, 썩은 잎, 민음사, 2016년
마르께쓰는 젊었을때부터 늘 좋아했다. 마르께쓰뿐 아니라, 살바도르 아옌데, 라우라 에스끼벨, 루이스 세풀베다, 빠블로 네루다, 주제 사라마고 등 소위 라틴 문학을 알게 해준 계기가 그 유명한 백년 동안의 고독, 이었다. 군대 휴가 때 선물받아 이십대를 관통했다 싶을 정도로 자주 읽었고, 잠시 춤바람에 빠져 종합격투기와 함께 쌀사, 바차따 등을 배우던 공간의 이름도 홍대의 그 유명한 마꼰도였다. 나는 마르께쓰의 ‘마술적 리얼리즘’ 에 푹 빠졌다. 그의 글을 읽으면, 누구도 소설의, 문학의 패배를 말할 수 없으리라는 평은 지금도 옳았다.
다만, 지금의 시대는 더이상 그와 같은 서사를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흔이 넘으면서, 사실 늘상 책을 읽어왔다 자부하는 나조차도 긴 서사를 붙잡는 힘이 떨어졌다 느낄 정도다. 핑계처럼 태권도 연습과 회사 생활과 육아를 끝내고 나면, 온통 알수없는 잡념이 들어찬 뇌를 비운답시고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고 잠시 시간 보내보면 30분 ~ 1시간은 우습고, 피곤함에 못 견뎌 그대로 잘때가 많다. 자꾸만 짧은 영상들을 반복하다보니 문장을 붙잡고 늘어지는 힘이 줄었다. 주짓수나 유도에만 관절을 붙들고 버티는 힘이 필요한게 아니라, 타격기에도 상대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긴장감을 조성해야 하는데, 내게도 그런 인내가 없어져서 나는 어떻게든 그 힘을 다시 기르고 되찾으려고 계속해서 문장을 담으려고 애쓰고 있다.
생각해보면, 붙잡기보다 끊고 밀어내기가 훨씬 쉬운 세대가 되었다. AI는 내 입맛에 꼭 맞는 대답만을 해주며, 원치 않는 사람을 끊고 밀어내는 ’차단‘ 은 너무나 쉬워졌다. 아니, 그 이전에 불필요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다며, 자신만의 공간에 틀어박히기도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밥이며 생필품은 배달시키면 되고, 재밌을법한 일들은 전부 구독하여 보면 된다. 건강을 따로 따지지 않는다면, 손에 있는 전화기 하나로 다 할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문열의 ‘아가’ 처럼, ‘모자라고 힘든 사람도 낑가주는(끼워주는)’ 세상은 다시 오기 어려울 듯 보인다.
아직 이십대의 젊은 마르께쓰가 이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썩은 잎’ 은 바나나 회사가 흘리고간 썩은 이파리를 말하지만, 달리 말하면, 남미를 수탈하던 미국 자본주의의 대상이기도 하다. 목가적인 분위기와 나름의 번영을 유지하던 환상의 마을 마꼰도에, 백년 동안의 고독도 그렇듯이, 그링고Gringo - 백인들이 돈을 앞세워 찾아오며 혼란이 일어난다. 음습하고 고독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던 시골 마을 의사는, 미국 바나나 회사가 고용한 백인 의사들에게 밀려 돈벌이가 끊긴다. 그 복수 떄문인지, 그는 원주민 여자를 현지처로 두어 함께 살면서도, 더이상 마을의 사람들을 치료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더이상 투자할 가치가 없어진 마을에, 바나나 회사는 썩은 이파리만큼을 남긴 채 의사, 농장, 직업 등 모든 것을 거둔채 철수하고, 부정선거에 의한 총격 진압이 발생햘때 마을 사람들은 비로소 원래 있던 터줏대감 의사의 문을 두드리지만, 의사는 ‘이미 의학 지식을 다 잊어버렸다.’ 는 말로 매몰차게 거절한다. 바나나 회사가 마꼰도를 뒤흔들며 자격증이 있는 의사만이 의사 노릇을 할수있다 법까지 제정한 뒤였다. 마을 사람들은 교구의 담당 신부의 중재로 차마 의사를 공격하진 못하지만, 그가 죽을때 절대로 마을의 공동묘지에 묻어주지 않고, 장례도 치러주지 않으리라 결의한다.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은, 따라서 이미 죽은 의사의 시체를 과연 매장해줄 수 있을지의 여부와, 살아생전 의사의 삶에 대한 돌아보기, 그리고 그 매장은 과연 정당한가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화자는 수시로 바뀌며, 시간대도 넘나든다. 그러므로 역자 송병선 선생의 말처럼, 마치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듯한 느낌으로, 그다지 길지도 않은 글을 악착같이 읽어나가야 한다. 아마 요즘처럼 누군가를 방출하기도 끊어내기도 쉬운 시대에선, 혹은 무엇이든 법으로서 판정하고 단정짓기를 좋아하는 시대에선 왜 이 소설이 위대한지 전혀 알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화나 타협은, 어쨌든 상대를 밀어내지 않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싸움조차도, 서로 맞부딪혀야 시작된다. 어느 한 쪽이 피하거나 없어지면, 싸울 일도, 슬퍼할 일도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어쨌든 마을의 한 구석을 차지한 이방인을, 철저히 이방인으로서 조명하며 그와의 관계를 조절하기 위한, 좋든 싫든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요즘 시대에 오히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의사가 그랬듯, 거의 철저히 외면받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