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세상 만사 원래가 부화뇌동이라지만.
제 줏대없이 세파에 휩쓸려 뉘가 이런다고 이리 삐쭉, 뉘가 저런다고 저리 삐쭉, 이를 일컬어 부화뇌동(附和雷同)이라 한다. 천둥 소리 나는 곳마다 고개 돌려보듯 부산스럽다는 뜻이다. 일찍이 공부자께서는 자로에게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움직이지 않아도 주위와 화합하지만, 소인은 아무리 움직여도 화합하지 않는다 꼬집으시었다. 장에 나귀 팔러 갔다가 누가 이런다고 아비가 타고, 또 뉘가 저런다고 아들이 타고, 둘이 타기에는 또 가엾어서 아예 힘겹게 지고 가다 물에 빠진다는 아이소포스 우화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어린 아이를 범하여 끝내 장기형을 살고나온 이가 다시금 제 도시로 돌아올때 벌떼같이 달려들던 유튜버며 기자들은 과연 그 스스로 정의로워서였을까. 바다 건너 CJ까지 알 정도로 대서특필된 어린 양녀의 학대 사건에 뭇 정치인 연예인들까지 입장 표명 줄을 잇는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 정부 또 뉘 안타까운 목숨 덕 봐서 사는구나 라는 비아냥 또한 천박할지언정 흘려들을 수는 없다. 장자는 일찍이 마차 장수가 모두가 부자가 되길 바라고 관짜는 이가 모두 빨리 죽기 바라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이득에 달려 있다고 보았고, 알뛰쎄는 인간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사회 구조의 부산물로서 계급에 따라 각자 맡겨진 역할을 배우처럼 연기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맑스의 이데올로기론에 맞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호명할 뿐이다." 한 문장으로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통렬히 고발했던 그 유명한 알뛰쎄의 호명 테제Thesse 는, 라깡의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뿐이다." 라는 주장을 상기시킨다. 연극 무대의 원숭이처럼 뛰놀며 남들따라 정의로운 척, 남자다운 척, 남의 동네에서 난장을 피우고 돌아올 수 없이 져버린 어린 목숨을 보란듯이 목놓아 부르는 그 모든 꼴들이 결국 "그래야만 이득을 얻는 역할" 을 위한 것이라니 그냥 보기 싫고 피곤하여 몇 자 적었다. 나는 그저 내 주변의 취객 몇 잡아도 집에 돌려보내는 오지랖조차 힘겨워 숨이 넘어가는 필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