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ITF 번외편 ㅡ 가사 노동을 하듯이 꾸준히!

by Aner병문

어제도 그제처럼 훈련도 좀 하고 손놓았던 보맞서기 연습이나 좀 하렸는데, 아내의 상태가 썩 좋지 아니했다. 잔잔한 바다에도 풍랑이 일듯 바다처럼 너른 아내도 두어 달에 이삼일쯤은 피곤하실 때가 있다. 요즘 들어 서고 오르고 돌아다니는데 재미를 붙여 부쩍 잠투정이 심해지는 아이를 겨우 재운 아내의 얼굴이 때꾼하기에 부족하나마 쟁여둔 닭모래집을 에어프라이어에 데우고 웬일로 술 약한 아내가 맥주까지 찾기에 북촌처녀 명분 씨가 놔두고간 맥주를 땄더니, 아니나다를까, 4년 전 신혼여행으로 갔던 괌에서의 첫날밤처럼 망고맥주 두어 모금에 얼굴이 벌개진 그 분이 오셨다. 그래도 아기 엄마의 저력인지, 괌의 망고맥주가 국내 맥주보다는 셌던 탓인지 무려 캔맥주 삼분지일을 비우고 아내는 사과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잠들었다. 이러구러 치우고 정리했더니 벌써 늦은 밤, 애매하게 마신 술이 몸을 늘어지게 해서, 훈련은커녕, 책 읽기도 번역도 차이나는 클라스 미술사 편도 보기 어려워서 그냥 가라테 만화책이나 보며 빈둥대다 나 역시 잠들었다.



맥주 반 캔이 몸이 나른하게 한 탓인지 아내는 웬일로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때마침 출근이 늦은 시간이라 다행이었다. 아이를 돌보고 분유를 먹이고 놀리면서 나도 어제 미뤄둔 훈련을 시작했다. 고류 검술 세키구치류의 종가를 이은 요네하라 명인은, 놀랍게도 일본의 한적한 마을에서 두부를 만들어 파는 소박한 노인이다. 배우 견자단이 주연한 엽문 시리즈에서 전문 무관을 차려 호구하던 무림인들이 근대의 세태에 휩쓸려 우산을 고쳐주거나 수산시장 노동을 하는 장면도 있거니와 역시 엽문 노사의 일대기를 그려낸 양조위 주연의 일대종사에서도, 북파 무림인들의 도전에 남파 무림인들이 분기탱천하는 장면이 있다. 우리가 비록 평소에는 주판알이나 굴리고, 기루에서 분이나 바른다지만 우리도 무공을 하는 사람들일세! 과연 북파무림의 명가인 궁씨들과 맞설 대표를 뽑을 때 남권의 무공을 잇는 이들은, 위세당당한 무관을 차려놓은 교련이나 사범이 아닌, 기녀, 상인, 심지어 날백수 거렁뱅이까지도 나온다. 요네하라 명인을 직접 취재하고 온 한병철 박사 역시, 겉으로 보기엔 사람 좋은 두부집 노인처럼 보이지만 눈빛은 쏘는듯하며, 검을 들면 위세가 대단하다고 했다. 평생 정통 고류 검술을 익혀온 이답게 그는 마치 죽도로 타격하듯이 점수를 따내는 현대 검도의 스포츠적 면을 비판하셨다지만, 나는 현대 검도는 세미나 몇 번 들은게 다이고, 명인의 의견이시니 따로 더 말을 덧붙이기는 어려울 터이다.



역시 같은 도장에서 동고동락하는 밥 잘하는 유진이와 손발 맞춰 일해보니 주방에서 불과 물과 쇠를 다루는 일은 비할 바 없는 중노동이었다. 두부를 만드는 일도 결코 녹록하지 않을 터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단들 전업주부인 아내의 가사노동을 따를 수는 없겠으나, 결국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일이야말로 무공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쌓는 일이 아닌가 싶다. 남명 조식은 공부의 오직 한 비결로 경 敬을 꼽았고, 구봉 송익필은 직 直 을 강조했는데, 신분도 학파도 다르지만 두 선인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방향은 비슷하리라 본다. 내 비록 실력이야 끽해야 힘센 문외한이 덤벼도 겨우 도망칠 수준에 불과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무 武 라는 글자가 본디 싸움 戈 을 말린다 止 는 뜻인만큼, 약자가 강자의 겁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뼈와 살을 쥐어짜 익히고 대물려준 체계일 터이다. 그러므로 매일 밥을 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아이를 돌보듯, 삶의 여백에 무공을 익힌다. 생각해보면 폭력에는 고민이 없다. 있을 턱이 없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