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사는 이야기)
그러니까 나는 원래 그렇게 살았다, 사실은.
아마도 황지우 시인이셨을 터이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곳마다 폐허가 되고 만다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심원하게 토로해내시었다. 아마도 또 오탁번 시인이셨을 터인데, 이 분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마지막 싯구를 쓱쓱 적어내시었다. 시인께서는 살아 생전 마치 젊은 날의 비트겐슈타인처럼 촌부들과 여름을 이겨내고자 보신탕 한 그릇을 함께 하셨던 것인데, 엘레지(Elegy)와 소위 만년필이라 불리는 개의 그 것이 우연찮게 동음인 것을 알고 또 놀라셨다고 한다. 그는 그조차도 당연히 숨기지 않고 본인의 시에 일기마냥 드러냈던 것인데, 하물며 별 것 없는 필부인 나임에랴, 사실 나는 고작해야(?) 하늘과 땅을 덮는 눈보라에도 입이 떡 벌어져 스스로의 바닥을 드러내는 이에 지나지 않는다.
몇 주 전에 정말로 눈이 세차게 왔다. 하염없이 왔다. 거리마다 온통 하얀 색으로 칠해져, 그 쌩쌩하던 피카소가 행여나 그런 나날이 있었을까 믿기지도 않았던 청색시대의 한 나날마냥, 오로지 흰색으로 온 거리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눈을 치웠고, 낮 시간에는 당연히 호구하여 처자식의 밥값을 벌었다. 오래 전 대학 생활을 할 때, 눈은 지금처럼 하염없이 내려 지하철 철로를 덮었었다. 걷다보면 하늘로 닿는다는 혜화동 비탈길을 하염없이 걸어 사회학 수업 첫 시간에 도착했을 때, 부자(父子) 2대에 이어 우리 학교에 수학하신 젊은 선생님께서는, 이 사회가 얼마나 폭설 등의 자연재해에 취약한 곳인지 증명되었다 말씀하셨다. 아직까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나라의 부름이 아니라면 죽기 쉽지 않았던 군함의 젊은 수병들이 바다로 수장되었던 무렵이었다. 나는 그 때 아침에는 권투하고, 낮에는 학교와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흉내를 냈으며, 저녁에는 주짓수를 배우다 비로소 생업으로 돌아가서 몇 마디 공치사를 하고 돈이나 겨우 거둬가며 또 그 돈을 하루 술값 책값으로 탕진하던 식으로 가게를 운영하던 망나니였다. 그 시절의 모든 얽힘을 다 말하자면 그저 부끄럽기 짝이 없을 뿐이겠으나 숨기거나 감출 수는 있어도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을 시절이었다. 나 솔직히 그렇게 산 세월이 너무 길었다.
담담히 눈을 치우고 출근했다. 나는 이제 몸의 어느 구석에 문신을 할까 고민하던 이십대 청년도 아니었고, 도복에 긁힌 얼굴의 흉터도 어지간히 나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어깨며 팔꿈치, 무릎, 발목 등, 몸과 몸을 연결하는 곳곳마다 함부로 쓴 옛 세월의 상처들이 남아 늘 아팠다. 나는 술을 마시거나 오히려 훈련을 더 강하게 하지 않으면 그 아픔을 옛 세월처럼 떨쳐낼 수 없었다. 점심으로 사천원짜리 우동 한그릇 후루룩 마시고 밖으로 나오다 여전히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흰 눈 사이로 제법 커다란 트럭 하나가 비탈길을 오르지 못해 애먹는 모습을 보았다. 장정 서넛이 여기저기 달라붙어 힘쓰고 있었으나 어림없는 모양이었다. 늘 부리던 오지랖처럼 내가 트럭의 뒷꽁무니에 달라붙었을때, 차갑게 식은 트럭 뒷부분의 한기가 팔꿈치 안쪽까지 한번에 찌르고 올라왔다. 사천원짜리 우동 한그릇이 삭아내릴 정도로 힘을 쓴 다음에야 겨우 트럭은 비탈길을 올라 도로 갓길에 섰다. 과히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트럭 기사님이 내려 힘써준 모두가 고맙다고 인사치레라도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작고 비루한 몸으로 트럭 뒤에서 힘쓰는 동안 더욱 더 애써준 장정이 서넛이 넘었고, 총합을 모으면 열 명은 가까이 되었을 터인데, 운전대를 잡은 이는 코빼기 한번 비추지 않았다. 괜히 서글펐다.
나는 그 때 기무라 마사히코를 생각했다. 주짓수 할 때부터 듣던 이름이었다. 어릴때부터 금광에서 수레를 끌고 밀던 힘이 대단하여, 미쳐버린 말이 인가(人街)를 질주할 때 열네살의 나이에 이미 그 말을 두 팔로 번쩍 들어 도랑에 내동댕이쳤다고 했다. 훗날 고류 유술의 기술을 정련한 유도를 깊이 익혀 '기무라 전에도 기무라 없고, 기무라 후에도 기무라 없다' 는 명언을 회자케 했으며, 브라질에서 조선인들과 함께 억압받던 일본인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그들을 괴롭히던 인디오 레슬러를 '하나, 둘, 셋!' 을 셀 때 이미 내동댕이치고, 그레이시 유술의 종가조차 격파하여 끝내 기무라 락(Kimura Lock)- 통칭 기무락이라는 절세의 관절기를 남겼다. 내게 그처럼 말조차 필요없는 힘이 있었다면, 트럭 따위 한번에 끌어다가 도로에 내놓았을까, 몇 푼 되지 않는 직업에 상관없이 처자식이 여유롭게 살았을까, 나는 알수 없다.
세월은 눈발처럼 자꾸 간다. 내 나이 벌써 서른 일곱, 젊다면 젊은 나이겠으나, 어느덧 내 스스로는 마흔을 바랍라보고 있다. 실상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그저 쓸데없이 혀만 길어지는 중이다. 평생 읽은 책들도, 쌓아둔 무공도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되지 못했다. 다만 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술병만 쌓았다. 내 스스로 입신양명의 꿈을 버렸다 버릇처럼 말해도 사실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몇 가지 번역할 원고를 남겨놓고, 괜시리 부끄러워 오랜만에 켜놓은 랩탑에 주절거린다. 나는 아직도 성인(聖人)의 글에 감히 닿을 수 없으며, 고작해야 4분 맞서기에도 심히 지쳐 하루 종일 낡아 나자빠지는 어줍잖은 사내에 지나지 않는다. 내 몸과 마음은 하루하루 닳아가 없어질 뿐이다. 봄이 오면 녹아 사라지는 얼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