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짧은 끄적임)

ITF 814일차 ㅡ 도장을 갈 수 있는 날의 하루

by Aner병문

육아로 닳아져 녹을듯한 저녁, 아내와 채널을 돌리다가 학교 가는 길 이라는 다큐멘터리 를 본 적이 있다. 전세계의 오지쯤 되는 곳곳에서 마치 그 유명한 랍비 아키바가 공부하고 싶어서 겨울날 교실 처마에 매달려 도강했듯, 배움의 열망을 놓지 못한 소년소녀들이 어떻게 산 넘고 물 건너 매일 학교를 가는지 보여주는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그 날 우리 부부가 본 소년 윌리엄은, 북미스러운 이름과는 다르게 페루의 고산지대에서 위로는 장정 같은 형 둘과 함께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며 아버지를 도와 산지를 개간하고 새 집을 지어올리며, 아래로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러 누이들을 도와 매일 험한 산비탈을 몇 시간씩 오르내리며 학교에 무사히 가도록 이끈다. 나이가 많아봐야 열대여섯의 소년들이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서 어린 여동생들에게 아침마다 떡을 구워주고 소젖을 챙겨먹이는 누이 또한 고작해야 아홉살이다. 이들은 요즘 세상에도 촛불을 켜놓고 천막 같은 집에서 저녁 숙제를 하고, 학교 또한 스마트폰은커녕 그 흔한 컴퓨터 한 대 없이 칠판 하나 덩그러니 놓인 판잣집이지만, 윌리엄은 밤마다 시를 외우고 수학 공식을 풀며 매일 왕복 하루 반나절의 등하교길에서 수도 리마의 고등학교로 진학할 꿈을 꾼다. 이 올곧게 철든 아들딸들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우리 딸 또한 부모의 속마음을 잘 헤아려줄 자녀로 자라기를 바랐고, 나는 더욱이 늘상 도장에서 종종 영상으로 보는, 또다른 오지의 태권도 수련생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윌리엄처럼, 세계 곳곳의 남녀노소 수련자들은, 제 집 마당에서, 산비탈에서, 들판에서 지붕은커녕 흙바닥에 신발조차 벗고 한 장짜리 낡은 돗자리 위에서 틀 연무를 하거나 혹은 타격 연습을 하곤 했다.



비록 냉난방이 안될때는 제법 춥고 더운 새벽녘 도장에서 나도 연습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바람 막아줄 지붕이며 부상을 막아주는 푹신한 바닥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평소에는 남편이자 아비의 책무를 다하고자 당연히 집에서 주로 근력과 유연성 훈련을 병행하여 기본 기술을 연습하지만, 오늘처럼 내 딸의 첫 생일을 맞아 직계 식구들이 모인 때에는 제아무리 피곤하다 해도, 이런 시간이 다시 오지 않으므로 서둘러 도복을 챙겨 도장으로 가는 것이다. 절치부심하여 끝내 코너 맥그리거를 완파한 더스틴 포이리에처럼, 두툼한 몸매로 날렵하게 턱에 일격, 크로스핏으로 멋지게 몸을 다듬은 안승일 선수를 쓰러뜨린 바람의 파이터 김재영 선수처럼, 제아무리 둔하고 늘어진 몸이라도 매일 태권도를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몸으로도 충분히 만족이다. 조각같은 몸매는 필요없다. 단지 기술이 정확히 운용되는 몸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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