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에 대하여 - 이제는 완결난 부부의 세계를 중심으로 - ㅋㅋㅋ
이번 주일,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다 말고 우셨다. 진짜로 우셨다. 아조 펑펑 우셨다. 성경에 보면 정말로 힘들고 어려울 때 옷을 찢고 애곡한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정말 그러한 구절처럼 우셨다. 이 젊은 세대들을 어찌 하냐고, 이들의 죄를 어찌하냐고 많이 우셨다. 얘기를 들어본즉, 신천지 사태에 이어 이른바 이태원 2차 사태 때문에 설교를 준비하시며 몇몇 클럽 영상을 보신 모양인데, 그게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충격이셨나보다. 성소수자들이 가련하고 불쌍한 영혼들이므로 그들을 탓하고 욕할 수 없지만, 어찌 이 남녀들이 새벽까지 길게 줄을 늘어서 서로 몸을 부비며 인생을 허비하느냐시며, 소돔과 고모라가 멀리 있지 않고 하나님 내려오실 일이 머지 않았다고 한탄하시었다. 하기사 우리 목사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렇게 생각하시고도 남음이 있다. 젊은 날 대중가요를 하시겠다고 밤무대와 음악다방을 누비시던 전도유망한 청년이셨음에도, 지금까지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으셨고, 언제나 고루하다 보일만큼 엄격하고 절제된, 소박한 신앙 생활의 기초를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이십대 후반의 백수 시절 시즌2 무렵, 나는 젊은 목사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때 우리 동네에서 새롭게 교회를 세우시고,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길에 나셔서 인사하시는 지금의 목사님을 자주 뵈었다. 백수이므로 할 일이 없어 밤을 새운 날이면 혼자 권투 훈련하느라고 달리기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오늘도 잘 다녀오시라 허리 숙여 인사만 하실뿐, 교회 다니라 예수 믿으라 한 마디 하시는 일이 없으시었다. 며칠 하다 마시겠지 싶은 날이 달이 되고 달이 모여 또 해가 되었다. 아주 궂은 날을 제외하곤 좀처럼 쉬는 날이 없으시었다. 그리하여 젊은 목사님이 까페와 동화책방을 겸하던 낡은 교회를 정리하고 다른 도시로 떠나실 때에 나는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목사님께 몸을 의탁한지도 벌써 십년 가까운 세월이다. 교회는 몇 정거장 떨어진 곳으로 옮기셨지만, 목사님은 여전히 그 곳에서도 아침마다 허리 숙여 출근하는 이들에게 인사를 한다. 목사님은 우리 아버지와 동갑이셨고, 그 딸은 또 나와 동갑인지라 나는 늘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예전에 모시던 젊은 목사님처럼, 혁신적이고 새로운 공부를 하시지는 아니했지만, 목사님은 늘 자신이 아는만큼 믿음을 고수하시며 스스로를 절제하시었다. 그 모습이 참 좋아서, 나는 교파가 좀 뒤숭숭해도 그냥 우리 목사님만 보고 교회를 쭉 다녔다. 나보다 훨씬 믿음이 깊은 아내 역시 원래 아내는 남편 따라 교회 다니는 거라며, '우리 교회' 라고 말하기 주저하지 아니한다.
다른 말이지만, 아내의 8주 간을 즐겁게 했던 쀼의 세계- 부부의 세계가 끝났다. 나 혼자 바라보고 타지에 올라와 하루종일 집에서 애만 보는 아내가 안쓰러워, 앞서 말한 목사님의 동갑내기 따님 얀미와 그 아들 오늘이를 집에 초대했더니 아직 젊은 두 자매가 깔깔거리며 어찌나 잘 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잘 걷기 시작하는 오늘이는 오히려 낯설어서 어미 품에만 있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재미날 내 딸 소은이는 한 살 위 오늘이 오빠를 훑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목사님 따님으로 나고 자라 예비 목회자 사모이기도 한 얀미조차 부부의 세계를 본다고 그래서 웃고 말았다. 진짜 재밌지 않냐면서 한참을 아내와 얘기하길래, 주여, 이 죄 많은 자매들을 용서하소서, 했더니 넌 술이나 작작 퍼마셔, 하고 대번에 대거리가 돌아왔다. 여하튼 그토록 많은 주부층들이 열광하는 드라마였으므로, 결말도 역시 주부층의 입맛답게 끝났다고 생각한다. 총 16회 중 15회 내내, 두 여자의 마음을 손에 거머쥔 채 깔끔하고 멋있었던 이태오는 16회 때 갑자기 추레하게 변했다. 그래봐야 수염 자국 좀 붙이고, 머리 좀 손질 안했을 뿐인데도, 고산의 왕자로 자신만만하던 모습이 간 곳 없이 퇴락하여 깜짝 놀랐다. 일전에도 말했듯, 나는 매 분 매 초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서로에 대한 날선 증오를 주고 받는 이 드라마가 힘들어서 잘 보지 못했는데, 다만 아비로서 아들에게 모든 애정을 다 쏟는 이태오의 모습만큼은 보기 좋아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16회 첫 장면이, 환상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태오가 가정을 깨지 않고 지선우와 아들 준영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웃는 평화로운 모습이 정말 좋아서 나도 모르게 울었다. 아내가 왜 우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길래, 아이고, 나이 먹응게 자꼬 눈물이 흔해지네잉, 하고 말았지만, 나 역시 불과 십여 년전 만해도 처자식과 함께 이리 평안한 가정을 꾸릴 줄 전혀 생각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역시 잃어야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되는 때가 있다.
내가 아직 대단치도 않은 옛 영광과 욕망의 그림자에 놓여나지 못하던 시절, 내가 모시던 젊은 목사님은 내게 국내외의 동화책과 커피 만드는 법에 대해 알려주시다가 넌지시 덧붙이셨다. 같이 성경을 읽어보면 어떨까? 늘 읽고 있어요. 아직도 제가 읽고 외운 것이 전부인 줄만 알던 내 꼬락서니가 우물 속 개구리마냥 거만하였었다. 젊은 목사님은 늘 부드러운 분이었지만 가끔 엄격하고 예민하였다. 그건 읽는게 아니지, 너의 신앙은 내가 봤을 땐 너의 고집일 뿐이야, 내가 믿고 있으니 뭐든지 내 마음대로 다 되어야 한다는 고집, 그걸 깨려면 성경을 제대로 읽어야 해. 내가 지금 모시는 목사님이 다니엘을 가장 좋아하시는데 비해, 젊은 목사님은 바울과 로마서를 좋아하셨다. 로마서를 읽으면 삶의 지혜가 보인다고 하셨다. 성경대로만 살면 사실 힘들 일이 없어. 당연히 없죠, 성경에 좋은 얘기밖에 더 있어요, 이웃을 사랑하고, 싸우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잘 아네, 넌 그런데 왜 그렇게 못 사니? 세상에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돼요, 내가 무슨 목회자예요? 라고 대들던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내 교만을 깨우쳤다. 서른이 넘으면서 성경의 가르침이 태권도와 맞닿는 구석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어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보다 많이 읽었고, 또 한때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무공 또한 늦긴 했어도 최고의 지도자들에게만 골라가라며 받았으나, 내 스스로가 실로 교만하였다. 책은 입맛대로 읽어 내 맘대로 해석했고, 신앙도 그러했으며, 온갖 정종무학은 내 필요한대로만 급하게 익혀 써먹을 궁리에만 몰두했다. 읽고 단련하고 믿으며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의 뿌리가 결국 나 자신, 그것도 욕망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데 삼십년이나 걸렸으며, 한 번 크게 망하여 온갖 망신을 당했고, 그 와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어, 가장 소중했던 벗 하나가 나를 가장 멀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아픔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꺠닫는 내 스스로가 부끄럽고 민망해서, 나는 그때서야 겨우 결혼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코 혼자서 잘난듯이 살 수 없고, 꼭 누군가와 함께 벗해가며 스스로를 낯추어 살아야겠구나. 입에 발린 겸손이 비로소 몸에 깊이 배었을때, 내게 오히려 돌아오는 몫들이 있었다. 몰락한 이태오가 아들에게 울면서 너는 아빠처럼 살지 마라고 말했던 그 비참한 말이, 진심이라면, 그에게 재기의 기회는 분명히 있을 터이다.
정말로 지팡이 하나로 천리를 횡행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던 사도 바울은 본명은 사울로, 본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였다. 그는 베냐민 지파의 바리새인으로서 학문이 높고, 군공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로마 제국 시민권까지 취득한 당대의 엘리뜨였는데, 신약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부정했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핍박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달려간 다마스쿠스에서 눈이 멀었다가 회복된 기적을 계기로 그는 개심하여 그리스-로마식 이름인 파울로스-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전도 여행을 했다. 요즘으로 치면, 조금 과장하여 이진경 선생이나 강신주 선생, 혹은 도올 김용옥 선생님 같은 분이 뭔가 기적을 체험하고 모든 것을 버린 채 전도사가 됨과 비슷할 터이다. 바울은 칼 찬 철학자로 유명한 왕양명처럼 다리가 불편하고 천식도 앓았지만, 오히려 불편한 몸을 주시어 늘 자신의 한계를 알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끝까지 평생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의 중동에서 퍼진 일개 토착 신앙이 어찌 서양 사회를 대표하는 종교로 퍼질 수가 있었는가 생각하면, 로마 제국에 개신교의 씨앗을 퍼뜨린 바울의 공로가 높다고 할 것이다.
평생 독신으로서 구도자의 길을 걸었던 바울에게도 수없는 유혹이 있었을 터이다. 지금 내가 모시는 목사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다니엘 역시 유혹이 있었다. 그는 채식만 하여도 바빌론의 다른 청년들보다 훨씬 건강하였고, 사자굴에 던져져도, 불길 속에서도 다치지 않았다. 유혹으로 치자면 옛 이집트의 총리였던 요셉만한 이가 없다. 요즘처럼 섹시한 이 시대에 뉘라서 그러한 유혹을 참아낼 터인가. 지족선사도 벽계수도, 황진이의 고혹적인 육탄돌격에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언제나 그러한 유혹 이후에 상처가 남는다는 점이다. 공부자께서는 일찍이 인자한 이에게는 적이 없다고 하셨다. 이 구절을 빌어 김용 선생 역시 소설 원앙도에서 무림 천하제일의 비술은 인자무적(仁者無敵) 네 글자에 있다고 부르짖는다. 십계를 지키는 이에게 무슨 원한이 있고 고민이 있겠는가. 불교의 계율을 지키고, 이슬람의 샤리아를 준수하는 이에게 어떤 유혹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지금은 욕망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시대라서, 목사님이 광화문에서 돈을 갈취하고, 스님이 음란 영상을 팔아먹으며, 카톨릭 신부가 부제들을 희롱해 자살케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 역시 나 잘난 줄 알고 이십대를 허랑방탕하게 보내어 지금까지 그 기억을 되씹으며 살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놀더라도 참말로 '에지간히' 놀자. 조용히 사는 것이 참말로 속편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