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팽과 함께 하는 한국 정치~
서른이 넘으면서 한국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점점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일찍이 허유와 소부는 벼슬을 하라는 임금의 말에도 귀를 씻고 침을 뱉으며 멀리 물러갔다.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주장하며, 백성이 임금의 이름조차 몰라야 비로소 나라가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몰라서 물으러 온 이에게 오히려 '공부 좀 하고 오세요' 라는 말을 남발하는 이를 믿을 수 없듯이, 모든 이들이 진실을 알기 위해 이 뉴스 저 신문을 디벼보고, 검색을 해가며 매번 골머리를 앓는다며, 그 역시 옳게 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한때 어리고 젊은 날에는, 여러 이들과 어울려 늘상 거리에 나가고 밤새 술을 마시며 무언가 지새워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으며, 그 또한 작은 역사의 한자락이기는 분명할테지만, 깊은 웅지를 지닌 더 현명한 이들이 서로 다투어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므로, 나는 그 기세에 질리고, 능력이 없어 더 이상 그들의 동지가 될 힘과 의지를 잃었다. 나는 점점 더 정치를 모르게 되었고, 어째서 눈에 선연히 보이는 것들에 많은 힘들이 작용하는 것인지, 그 힘과 이론을 일일이 다 파헤쳐 알아야만 비로소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많은 비신자들이 매정한 신에 대해 비난하면서도, 정작 진영을 갈라 싸울 때 아무런 배려 없이 타인을 공박하기는 예사인지라, 나는 더이상 사람들과 함께 다투기를 그만두었다. 책은 상처를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는 더욱 책을 읽기로 다짐하였다.
책으로 정치를 비추면 모든 것이 선명한데, 뉴스 속 세상은 무엇이 그토록 흐려서 몇 년이 지나도록 아깝게 바다에 잠긴 학생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하고, 일개 가수가 경찰과 결탁하여 비리를 저질러도 군대로 선선히 보내며, 한때의 법무부 장관조차 제 자식만은 감싸고 도는 일에 사람들이 실망하고 날을 세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잘났다고 TV와 유튜브를 점령하여 이 것이 진실이다 외쳐대는데, 어째서 총칼을 앞세워 많은 사람들을 죽인 전직 대통령은 아직도 부유하게 살고, 이미 오래 전 상처받으신 할머니들이 아직도 상처받아 춥고 가난하게 사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가슴이 아팠다. 크지는 아니하였어도, 기대는 분명했던만큼 이런저런 실망도 많았던 정부이지만, 그나마 정권이 바뀌어 40주년을 맞이한 5.18에 대해 오랫동안 볼 수 있는 저녁만큼은 좋아서, 나는 모처럼 아이를 일찍 재우고, 아내의 옆에서 술을 마시며 오래오래 뉴스를 보았다.
횡령 사건에 대해서 누군가 내게 물을 때 늘 내가 인용하는 이야기가 있다. 영조 때 호조의 서리였던 김수팽은 비록 낮은 벼슬아치였으나 사람이 바르고 성정이 굳어서 모두들 대장부라고 찬탄하였다. 동생 역시 선혜청의 낮은 관리로 형제가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이니, 보다 못한 동생 부부가 염색 일을 부업으로 하여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지금으로 치면 공무원이 겸업을 하려 한 것이다. 좋은 말로 해도 될텐데, 김수팽은 득달같이 달려가 염색 항아리를 모두 깨어버렸다. 우리는 나라의 녹이라도 먹어 호구하거늘, 거기에 욕심을 부려 이러한 일까지 한다면, 염색 일로 먹고 살 가난한 백성들은 얼마나 더 힘들겠느냐? 지난 정부, 지지난 정부, 지지지난 정부- 말장난 같지만 앞선 정권들 때에도 누군가 내게 물어보면 나는 입에 붙은 김수팽의 고사를 말하곤 했다. 김수팽은 자기 것이 아닌 재물에 욕심내지 않았지만, 반대로 자기 돈이 아니라 하여 마음대로 펑펑 쓰지도 아니하였다. 김수팽은 절차에 맞지 않는 요구라면, 임금이라도 공금을 함부로 내주지 않아 영조의 치하를 들었으며, 호조판서가 청탁을 받아 일부러 바둑을 두며 서류 결재를 미루자, 당장 뛰어들어가 바둑판을 엎으며 울었다고 한다. 아내는 나랏밥을 먹는 분이라 가끔 내가 김수팽의 이야기를 해주곤 한다. 그 때마다 아내는 자신은 그냥 산에서 나무를 돌보며 사는 것이 좋아 왔다고 말할 뿐이다. 하여간 부부가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