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이 맞는 사람과 대화에 대하여
비슷한 과학 지식을 다루는 책이라도, 지금 읽고 있는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보다 곽재식 선생의 '아파트 생물학' 이 더 잘 읽힌다. 국적이나 분량, 주제 여러 가지를 감안하더라도, 한 번의 번역을 거친 빌 브라이슨의 문장보다 곽재식 선생의 문장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터이다. 나는 스무살때부터 다양한 스승들께 다양한 무공을 사사했으나, 결국은 서른 살 되던 해에 ITF태권도를 하게 되어 지금까지 연을 맺어오고 있다. 내가 배운 무공들이 어찌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는 무공이 아니며, 나를 가르쳐주신 모든 분들은 다 각자의 분야에서 한 획을 그으신 분들이나, 원체 둔한 내게 가장 상세하고 이해가 잘 되게 알려주신 분은 지금의 사범님이셨다. 그러므로 같은 내용이라도 누가 어떻게 가르쳐주시냐 에 따라, 공부도 무공도 다른 성취를 지닐 수 있다.
회사에서도 역시 많은 고객들께 동일한 내용을 설명하는 일을 종종 하는데, 어떨 때보면 세계 유수의 석학들이 달라붙어 직접 번역했다는 설명서의 문장도 난해하고 불친절할때가 많다. 그러므로 나같은 반거들충이도 어찌어찌 배워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을 수 있을 터이다. 설명문 이라는 자체가 누가 읽어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끔 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모순적인 상황이지만, 여하튼 나는 어려운 설명서를 반복해서 읽고, 또 그 설명서를 내 언어로 바꾸면서, 다시 내 언어를 상대방의 언어로 바꾸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태권도가 단지 도장 안의 움직임만이 아니듯이, 철학 역시 멀리 있지 않다. 철학은 일상을 겪고 대하는 방식이다.
아내가 없는 동안, 곽군과 너가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너의 결혼(약혼?!ㅋㅋ) 겸 생일 축하를 하는 자리였으나 막상 좋은 명분을 준 너가 못 오고 말았다. 장정 둘이서 낄낄대며 태권도와 권투 얘기도 하고, 서로의 직장 얘기도 하고, 과학과 철학 이야기도 하다가, 곱창집과 중래향을 오며가며 술을 많이 마셨다. 곽군이 가져온 삼양춘은, 수도권 인근의 사대부가에서 즐겨 마셨다는, 세 번 빚어 숙성한 술인데, 막걸리는 달고, 청주는 구수하여 전부 내 입맛에 맞았다. (입에 안 맞는 술이 드물겠으나) 오미자 고량주와 개미 고량주를 한잔씩 입가심을 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영화 사도에서 왕인 늙은 아비와 젊어 가정을 꾸린 왕자 아들이 서로의 감정을 부딪히며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들을 손수 뒤주에 가두는 아비의 마음이란, 그조차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땅굴을 파서 무기를 묻어두고 아비를 죽일 마음까지 먹었던 아들이란 또 오죽한가. 그러므로 책 한 권을 읽어도 내 마음에 스미는 문장을 찾고, 무공 한 초식을 배워도 내 몸에 배일 때까지 반복하는데, 하물며 사람일까. 그러므로 죽림칠현이 길지 않은 세월이 아쉬워 마음에 맞는 저들끼리만 어울려 노는 뜻을 알겠고, 마음을 헤아려주는 벗이 죽자 스스로 악기의 현을 끊어 더는 즐기지 않은 마음을 알겠다. 절현. 백아와 종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