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들과 함께 하는 술은 늘 좋다.
너와 곽선생, 엄 군과 만나는 날이면 나는 도장 가기 전날처럼 냉가슴을 앓으며 밤잠을 설친다. 퀭한 눈과 부푼 가슴으로 집안 정리를 하고, 중래향에 들러 늘 내가 좋아하는 오미자 고량주와, 또 늘 독한 술 마신다며 질색하는 너희들에게 맛보여줄 포도 고량주를 챙긴다. 그렇게 여러 병 쟁여가려거든, 차라리 큰거 한두병 마시고 말라며, 작은 병들 다 내려놓게 하시고 큰 병 두어 개 챙겨주시는 사장님이 농을 건넨다. 중국 사람들도 그래는 안 먹어, 치엔 시엔셩(전 선생), 성격 좋은 마누라 생각해서 적당히 먹어. 즐거워 부푼 마음에 들어올 리 없는 말이겠지만 그러겠노라 찡긋 눈짓을 하고 안양 북쪽에서부터 서울 북쪽까지, 오랜만에 어느 짐승의 등뼈 같은 지하철 노선을 타고 이영도 선생의 단편집을 읽으며 올라간다. 마음이 거리를 당겨서 금방 도착햇다. 우리는 간단히 장을 봤고, 사이에 엄 군이 돌아왔고, 3시 무렵부터 다음날을 넘겨 새벽 무렵까지 우리는 아기 참새처럼 떠들었다. 정작 명분 삼아 내걸었던 너의 상견례는 얘기도 못하고, 서로 사는 이야기, 힘든 이야기, 책 이야기, 정치 이야기, 철학 이야기, 과학 이야기, 교육 이야기, 예술 이야기, 무공 이야기, 사랑 이야기, 세상의 주름살 하나 펴지 못할 작은 삶의 결들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지만, 늘 그렇듯 재잘재잘 떠들면서 술을 마셨다. 나는 전에 약속하고 결심한대로 금룡 고량주 반 병, 포도 고량주 작은것 한병, 그리고 오미자 고량주 큰것 한 병만으로 참고, 더는 고량주 병을 따지 않았다. 대신 흑맥주로 가볍게 입가심을 하는 동안, 너가 오, 아저씨, 절제했어, 손뼉을 쳤다. 나는 기억이 끊겨 날아간 순간이 지금도 몹시 부끄러웠다.
곽선생을 이겨볼 요량으로 한동안 서양 과학과 겹쳐진 철학의 영역을 많이 읽었다. 요컨대 현상학이니, 과학철학이니 하는 내용들이다. 분명 철학과 겹쳐진 내용들이 있었으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무슨 입자네 파동이네 원자네 상수네 하는 것들이 알 수 없어 개념이 어지러웠다. 다만 저번에 곽선생이 말했듯이 철학은 물질을 탐구하는 역할을 과학에게 내주고, 과학의 연구결과와 기술의 발전, 용도 등을 윤리적으로 어떻게 재단해야 할 것인가 에 대해 더 매진해야되지 않겠느냐 반론한 적이 있어, 나도 역시 그런가, 잠시 쫄아붙은 적이 있었으나, 프리고진이나 하이젠베르크, 혹은 토마스 쿤 같은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아,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세계를 읽고자 출발할때, 어떤 연구의 전제나 세계를 상상하는 힘 등은 역시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과학을 하는 이의 사고력과 출발점은 역시 철학이 아니면 추동할 수 없는 것이구나, 싶어 힘이 났다. 곽선생은 그에 대해서는 별 말하지 않았다. 아니면 나 역시 은근히 취해서 그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새벽 1시가 꺼뻑 넘었다. 술을 못하는 엄 군은 일찍 들어가누웠다. 내 친구라기보다 이제 남의 새색시가 된 너는 새벽 늦게까지 우릴 붙잡아주었다. 이사 준비하느라 이불만 있었으면, 또 내 출근 아니었으면 밤새워 이야기 하고 또 놀았을 거라고 말해주어 고마웠다. 새벽녘에 게임하고자 일어난다는 엄 군이 일어나서(밤중에 일어나도 잘생겼다.) 너가 챙겨준 커다란 책 상자를 테이프로 몇 번 감아주었다. 골목길로 들어온 택시에 책 한더미를 싣고 너에게 약간의 책값을 그래도 추렴하여 주고 나는 밤길을 돌아 빈 집으로 왔다. 아내는 아침 나절에 약간의 걱정을 했지만, 나는 별일없이 무사히 잘 왔다. 기억도 지켰고, 재미있게 놀았고, 책 한더미까지 얻어 잠시 눈을 붙이고 일을 하고 이제 돌아왔다. 간단하게 먹고 읽고 쓰다가 오늘은 푹 잘테다. 다시 처가에서 딸의 생일을 챙기기까지 며칠 간의 강행군이 남아 있다. 돌아오는 금요일은 오랫동안 코로나로 미뤄두었던 천번 찌르기가 예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