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적을 곳이 없어서(영화감평)

원작 김언수, 감독 천명관, 뜨거운 피, 한국, 2022

by Aner병문

김언수, 뜨거운 피, 문학동네, 2016

감독 천명관, 주연 정우, 지승현, 최무성, 뜨거운 피, 한국, 2022.



누아르(Noir)란, 프랑스어 로 검다 는 뜻이다. 명확하게 규정된 쟝르는 아니지만, 어둡고 진하고 강렬한 분위기를 지닌 예술 작품을 총칭하는데 주로 쓰인다. '캐비닛' 으로 데뷔하여, 마치 차현 형님을 연상시키는 익살맞고 자유분방한 소설가로 우리 곁에 있을 듯했던 소설가 김언수 선생은, '설계자들' 에서부터(하필 비슷한 때에 비슷한 소재의 임성순 선생의 '컨설턴트' 가 출판되기도 했다.) 영화화를 노리는 듯한 묵직한 글을 써내시더니, 단편집 '잽' 에서의 특히 '단발장 스트리트' 나 '빌어먹을 알부민' 에서 점점 감칠맛을 끌어올렸고, 마침내 '뜨거운 피' 에서 한국의 누아르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누아르 자체가 하나의 분위기로 정의되는 쟝르인만큼, 거리를 두고 관조하고, 메마른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애잔한 김언수 선생의 문체로 짜낸 서사는 가히 최고다. 한강 선생의 글이 혀끝부터 마음까지 아릿하게 하는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면, 김언수 선생의 글은 오랫동안 손을 뗄 수 없는 강렬한 허무함을 남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는데도, 자꾸만 그러고 싶게 한다. 좀처럼 헤어나오기 싫은 우울감에 오래 젖게끔 하는 것도 사실이다.



천명관 선생은 '고래' 로 충격적인 데뷔를 한 이래 '고령화가족' ,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를 통해 이른바 실패 3부작을 완성하면서 문단에게도, 내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3대를 걸쳐 복을 쌓아야 비로소 영화 한 편 성공시킬 수 있는 피바람 부는 충무로에서 그는 오랫동안 유하 감독의 말처럼 '할리우드 키드' 로 살았다가, 끝내 그 꿈을 접고 소설가로 대성하는가 했더니, 결국엔 메가폰을 잡으시었다. 사실 나는 박해일 배우 주연으로 그의 고령화가족 이 영화화되었을 때, 원작자이자 '실패한 영화감독' 으로서 자신의 소설을 극장에서 보는 기분이 어떨까, 천박한 상상을 숨길 도리가 없었다. 백수 시절 씨즌 2 때 나는 정말이지 그 책 한 권을 가히 천 번 가까이 봤을 터이다. 책등이 떨어져나가고, 종이 끝이 노랗게 바래 너덜거릴 정도로 뒤적거렸다. 실패를 그토록 일상처럼 가까이 몸에 녹여 쓴 글은 적어도 내게는 처음이었다. 잔돈푼이 생기면 동사무소 앞 찌그러진 자판기에서 오백원짜리 캔커피를 뽑아마시고, 평소에는 까페에서 탈취용 커피가루를 내려다마시고, 보고 싶은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다보았으며, 남들이 마시다 남긴 술을 물통에 섞어다 부모님 몰래 골방에서 마시면서, 밤이고 낮이고 사람들 눈을 틈타 운동장에 나가 미친 놈마냥 생나무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기도를 하던, 빈약한 청춘이었다. 오로지 감정만이 넘쳐 풍요롭던 이십대 후반에 나는 천명관 선생과 김언수 선생을 오랫토록 읽었고, 이 둘이 만나 영화를 만든다 하여 나는 사실 오랫동안 기대했었다.



원작 소설이 주인공 희수에게 무게를 맞춰 그 욕망에 따라 주변의 변주를 그린다면, 영화에서 감독의 시선은 반대로 장면의 구도와 배경과 상황과 음악까지 모두 짜맞춰 놓고 그 안에서 배우 정우가 열연한 희수의 모습을 그린다. 소설에서의 희수가 본인의 욕망에 따라 거침없이 움직인다면, 영화에서의 희수는 떠밀리듯 수동적으로 유약하게 보인다. 누아르의 분위기를 한껏 뽐내는 명배우들의 연기와 사투리, 그리고 배경 음악은 나쁘지 않았으나, 지나치게 생략되고 왜곡된 서사에서 '뜨거운 피' 는 갈곳없이 식어버렸다. 소설가 출신의 감독으로서, 원작 소설을 충분히 잘 살릴 수 있다 생각했는데, 원작이 있는 영화는 제 맛을 찾기가 참 어렵다. 지금도 나는 원작 소설의 장면을 그대로 잘 살린 작품으로서, 다시 말해 오로지 영상화로 동치한 작품으로서 파트리크 쥐스킨트 원작의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를 꼽는다. 이 소설은, 감독의 어떤 재해석이나 시선의 개입없이, 오로지 소설책을 넘기는 순서 그대로 장면을 영상황했을 뿐이다. 나는 차라리 감독이 어느 원작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면 그냥 모든 문단들을 그대로 영상으로 만들어 꿰어 맞추면 될 것 아닌가 하는, 불학무식한 생각을 아직도 갖고 있다.



소설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혼자 소설의 모든 내용을 혼자 쓴다. 서사부터 문체까지, 감독 혼자 주연, 연출, 특수 효과까지 다 하는 셈이다. 반면 감독은, 똑같은 내용의 전달은,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아닌, 모든 장면을 그림처럼 만들어 관객에게 에둘러 전달해야 한다. 소설가로서 대성했던 감독은, 이제 배우와 소품과 미쟝센과 오브제로는 자신의 문장을 오롯이 전달하지 못한 것일까? 사실 혹평들을 보고, 기대는 많이 접었으나, 그래도 원작 소설에 비해 지나치게 헐렁한 영화를 본 듯하여 뒷맛이 쓰다. 정말로 기대했던 소설가들의 만남이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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