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가지 문화 비교
어느덧 인턴을 제외하고 15년가량을 6개 회사에서 일하면서, 꽤나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144년이나 된 오래된 제조업인 코닥의 한국지사에서 시작한 후, 역시나 134년이나 된 회사인 필립스 코리아로 이직했고, 이후 다이슨의 한국지사 셋업 초기 멤버로 합류한 후, 쇼피로 이직해서 이커머스를 처음으로 경험하면서 한국/일본 물류팀을 리딩했고, 다시 쿠팡의 신사업인 로켓그로스 PM으로 이직해서 End to End 이커머스를 바탕으로 속도와 데이터에 미쳐있는 문화를 경험했으며, 현재는 스타트업에서 스케일업을 준비 중인 더파운더즈의 COO Staff에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셋업에 집중하고 있다.
어찌 보면, 컨설팅이나 솔루션 회사, 극초기 스타트업, 전통적인 국내 대기업을 제외하면, 많은 영역을 오고 가며 배웠고, 이 경험들을 4가지의 기준으로 분석해 보는 것을 통해, 그동안의 시간을 조금 더 구조적으로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테마 1: 프로세스를 창조하는 자 vs. 프로세스를 지키는 자
조직이 이미 안정된 시스템을 가졌는지, 아니면 이제 막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사업을 구축하는 단계인지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근본이 달라졌다. 다이슨 코리아의 한국 지사 셋업 경험과 더파운더즈에서의 CEO Staff (그리고 COO Staff으로 직무 이동) 경험은 필립스/코닥 같은 성숙한 조직의 경험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 프로세스를 창조하는 자, 개척자 문화 (다이슨 셋업 초기, 더파운더즈)
다이슨 셋업 초기와 더파운더즈의 현재 경험은, 개척자 정신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목표는 명확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경로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업무의 기본은 '프로세스 셋업'이었고, 기존 매뉴얼은 없거나, 상황에 맞춰 빠르게 변화시키고 개선해야 했다. 물론, 다이슨은 본사의 강한 통제와 가이드가 있었던 회사였기에 (보통 외국계 회사가 지사를 셋업 할 때는 본사 인원이 다수 파견되어 셋업을 리딩한다) 더파운더즈보다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훨씬 적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 프로세스를 직접 디자인 및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높은 자율성이 주어지지만, 그만큼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하고, 직무 경계가 매우 모호하여 1인 다역을 수행하는 오너십 문화가 강했다.
- 프로세스를 지키는 자, 전문성 문화 (필립스, 코닥)
두 회사에서의 경험은 운영자의 역할이 강했다. 이미 정교하게 구축되어 오래도록 운영된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최적화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프로세스 지키기와 안정적 운영이 핵심으로, 글로벌 표준 안에서 효율성 극대화가 목표가 된다. 역할 분담이 훨씬 명확하며, 정해진 범위 내에서 깊은 수준의 전문성을 발휘해야 했다. 자율성보다는 안정적인 시스템 준수가 우선시되는 문화였다. 리스크 혹은 서프라이즈는 상당한 부담이었고, 계획대로 운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작은 변화에도 신중하고 체계적인 검토 과정을 거치게 된다.
테마 2: 의사 결정의 본질 - '속도' vs '합의와 보고'
조직이 본사인지 지사인지에 따라서, 그리고 제조업과 이커머스라는 산업의 특성에 따라 의사 결정 구조가 바뀌게 된다.
- 외국계 지사 (코닥, 필립스, 다이슨, 쇼피)
전략은 글로벌 본사가 큰 틀을 잡고, 지사는 이를 한국 시장에 맞춰 실행하는 역할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의사 결정은 본사의 Top-down 이 매우 강한 동시에 글로벌 합의와 체계적인 보고라인이 매우 중요했다. 느리지만 신중하며, 각 나라별 지사 → 지역별 헤드쿼터 (ex. 아태지역 HQ) → 본사 헤드쿼터로 이어지는 보고 라인과 동시에 매트릭스 조직 운영을 통해 SCM팀의 경우 한국 지사장님 및 아태지역 SCM 임원에게도 같이 보고하고 평가를 받아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사의 자체적인 이니셔티브가 불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며, 각 지사에서도 역량과 환경에 따라 충분히 많은 이니셔티브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만, 전반적으로는 글로벌 본사의 가이드 안에서 움직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
또한 여기에 언급한 4개의 회사 중, 쇼피만 이커머스 회사인데, 이커머스 회사는 일반적인 제조업보다 의사 결정 및 변경의 속도가 최소 2배는 빠르기에, 같은 외국계 지사라고 하더라도 속도 측면에서는 별도로 구분하는 편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또한 나는 지사에서만 근무했지만, 지역별 헤드쿼터 혹은 글로벌 본사에서 일하는 것은 또 다른 업무 방식이기에 이는 별도로 구분해야 한다.
- 국내 본사 (쿠팡 로켓그로스, 더파운더즈)
본사이기에, 각 사업 영역을 주도할 전략을 직접 설계하고 실행한다. 데이터와 실험 기반의 빠른 실행과 즉각적인 피드백을 중시한다. 성과와 효율을 최우선으로 하며, 과정보다 결과를 빠르게 내는 데에 더 중심을 둔다고 느껴진다. 이는 특히 두 회사의 상황과 관련이 큰데, 쿠팡의 로켓그로스는 쿠팡 내의 신사업이었기에, 쿠팡 내부에서도 극적으로 빠르게 성장해야만 하는 사업부였고, 더파운더즈는 스타트업에서 시작해서 점차 스케일업을 준비하고 있는 단계였기에 역시나 속도에 중심을 두어야만 했다.
테마 3: 성장을 위한 '실험'의 무게와 범위
모든 회사는 성장을 원하지만, 자원의 규모와 실험의 범위는 달랐다. 이는 로켓그로스 PM, 더파운더즈 CEO Staff 역할을 비교할 때 두드러진다.
- 대기업 신사업 (쿠팡 로켓그로스 PM)
쿠팡이라는 거대 인프라가 있었기에 그 안에서 신사업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쉽다고 느낄 수 있지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기존 레거시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사업을 확장시켜야 했고, 그 안에서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자들과의 미팅과 논의와 다툼과 에스컬레이션을 통해 다양한 실험과 사업의 확장을 밀어붙였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언어는 데이터였고, 데이터의 취합 방법, 분석 방법, 해석 방법에 대해 서로 같은 이해를 갖기 위한 노력이 가장 필요했다. 다만, 쿠팡에서 신사업으로 대대적으로 밀고 있던 만큼, 유관부서들도 최대한의 서포트를 해주었고, 기존 레거시의 퍼포먼스를 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신사업을 다양한 실험을 통해 무서운 속도로 성장시켜 나가는 것을 보며, '압도적 1등'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
- 스타트업 (더파운더즈 CEO Staff)
실험의 목표는 폭발적 성장이었다. 제한된 자원 (사람, 역량, 시간, 비용 등)으로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설계하고 다양한 가설과 가설 검증을 통해 빠른 성장을 이루어나갔다. 고객의 깊은 니즈를 파악한 후 제품과 마케팅을 역기획하여 히트 상품을 만들고, 이 과정을 반복 가능한 성공 구조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회사의 중심 축이었다. 처음 입사한 후, '테크 회사처럼 일하네?'라고 느꼈을 만큼,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일하는 방식이 세팅되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크게 성장해 왔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테마 4: 'B2B/제조업' vs 'B2C/이커머스'가 만드는 인재상
고객의 정의와 산업의 본질이 조직이 필요로 하는 인재의 핵심 역량을 일정 부분 정의하고 있었다.
- B2B/제조업 (필립스, 코닥)
기술적 전문성, 복잡한 시스템을 다루는 능력, 장기적인 파트너십 관리에 강한 인재가 필요했고, 전문 조직 간의 협업과 팀워크가 중요한 문화였다. 요청받은 것을 정확하게 딜리버 하는 역량이 각광받았고, 팀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역량 또한 중요하게 평가받는 지표였다.
- B2C/이커머스 (다이슨, 쇼피, 쿠팡, 더파운더즈)
시장에 민첩하게 반응하고, 데이터를 깊게 이해하고 분석하는 역량이 중요했다. 각 부서 간 협업이 수없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일을 되게 하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리더십 (직책과는 관계없는) 이 강하게 필요한 문화였다. 시장이 빠르게 변하는 만큼, 직무 간 경계가 낮고, 마케팅-테크-운영 등 전 부서가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이 중요했다.
각 회사마다 짧게는 2년 내외, 길게는 3~6년까지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4가지 테마로 분석해 보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 가깝다. 또한 내가 있었던 사업부, 팀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이기에, 다른 사업부/팀은 또 다른 경험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글이 약간이나마 다양한 회사들이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주었다면, 그래서 이를 통해 개인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역할을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