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그리고 깊은 사고를 통한 문서 작성 능력

아마존의 6-Pager는 AI 시대에도 그대로일까?

by 이상민

쿠팡에서 PM으로 근무하던 시절, 내가 얻은 가장 큰 배움 중 하나는 바로 문제를 정의하고, 문제의 솔루션을 제안할 때 사용하는 '문서 작성' 능력이다. 아마존의 전설적인 '6-Pager' 철학을 이식한 이 방식은 단순한 보고 형식을 넘어, 팀 전체가 문제를 정의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고의 근간이었다.



6-Pager에 대한 가장 빠른 이해는 Working Backwards 책에서 예시로 나온 아마존의 6-Pager를 보는 것이 좋다. 아래에서 보다시피 정말 빽빽한 줄글로 채워져 있다. 또한 제프 베이조스가 공식적으로 이 내용을 언급한 주주서한을 보는 것도 내용을 이해하기에 좋다. (주주서한 링크 : https://www.aboutamazon.com/news/company-news/2017-letter-to-sharehol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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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아마존 내부에서 파워포인트를 금지하고 6페이지의 줄글 문서로 대체했고, 이는 여전히 아마존 내부에서 유효하다. 이유는 명확했다.


글쓰기는 곧 사고하기(Writing is Thinking): 불렛포인트(Bullet points)는 논리의 비약을 교묘하게 감춘다. 반면, 기승전결이 있는 서술형 문장은 작성자가 스스로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어 메우지 않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압도적인 정보의 밀도: 30분 동안 화려한 슬라이드를 보는 것보다, 30분 동안 밀도 높은 텍스트를 정독하는 것이 정보의 양과 정확도 측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화술이 아닌 본질로 승부하기: 발표자의 카리스마나 프레젠테이션 스킬이 아닌, 오직 문서에 담긴 '전략의 본질'로만 평가받는 공정한 구조를 만든다.


이 6페이지를 채우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다. 단어 하나, 데이터 하나를 쓸 때마다 수없이 자문하고 검증해야 하고, 이 과정 자체가 이미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수만 번 시뮬레이션하는 예행연습과도 같다. 나 또한 쿠팡에서 임원 보고 중, 문서에 쓰인 특정 단어 하나가 전체 맥락과 어긋난다는 강한 지적을 받았고, 이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문서의 전체 맥락은 물론,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가 분명한 지에 대해서도 오랜 셀프리뷰를 거쳐야 했다. 고통스럽지만, 이를 통해 성장할 수 있고, 내 아이디어를 보다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능력을 키우는 배움의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전 'The Ken'의 팟캐스트("Amazon's legendary memo-writing culture is on its last leg")를 들으며, 이 문화가 거대한 변곡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첫째, AI의 도입. 다양한 AI 툴의 등장으로 이제 누구나 매끄러운 6-Pager 초안을 순식간에 만들 수 있다. 결과물은 완벽해 보이지만, 작성자가 직접 고민하며 겪어야 할 '사고의 과정'이 생략된다. 스스로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AI가 뱉어낸 문장으로 채워진 문서는, 겉만 번지르르할 뿐 정작 작성자의 머릿속엔 전략이 남지 않게 된다.

둘째, 관료주의적 병목 현상. 속도가 생명인 시대에, 6페이지를 완벽히 맞추기 위한 다층적인 리뷰 과정이 오히려 혁신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나 역시 쿠팡 시절, 임원 보고 하나를 위해 본부 리뷰, 팀 리뷰, 사전 미팅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팅을 거치며 엄청난 에너지, 그리고 동일한 수준의 분노를 쏟았던 기억이 있다. 가끔은 '의사결정을 위한 문서'가 아니라 '문서를 위한 문서'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다.

셋째, 세대와 환경의 변화. 즉각적인 피드백과 빠른 소통에 익숙한 세대에게 30분간의 침묵 독서와 장문의 문서는 때로 시대착오적인 비효율로 다가오기도 하며, 이러한 친구들은 6-Pager를 AI에 넣고 요약본을 통해 이해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아마존을 세우고 쿠팡이 성장하는 동력이 되었던 이 강력한 서사 문화는 이제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 같다.

AI가 초안을 잡아주는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직접 글을 쓰며 논리를 가다듬는 그 '고통의 시간'을 고수해야 할지.

아니면 지적 엄격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AI의 효율성을 레버리지 할 수 있는 새로운 의사결정 표준을 만들어야 할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속도'와 '뾰족함'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

더 깊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문제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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