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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일기

by leaves

문 밖을 나서니 진한 라일락 꽃향기가 나를 온통 감싼다. 향기에 취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 향기로움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꽃은 왜 향기로우며 인간은 왜 그 향기에 도취되는가. 꽃의 향기는 어디에 쓸모가 있는 것일까. 나비나 벌도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그 향기에 취해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것일까.

올 봄은 제대로 봄꽃을 만끽할 기회가 많았다. 이전에 내가 왜 봄을 즐기지 않고 그냥 흘려보냈는지 과거의 내 자신이 이해가 안 갈 정도다. 먹고 살기 바쁘고 아이 키우느라 꽃구경은 먼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날이 더워져 아침 일찍 산책을 하기로 했다. 밤새 식은 서늘한 공기와 따스한 햇살이 산책길을 기분좋게 만들어 주었다. 봄꽃 식물도감을 보았는데 안양천에 핀 꽃 중 도감에 있는 꽃은 애기똥풀과 개나리, 진달래 정도였다. 예전에 봄맞이나 꽃마리 같은 꽃을 본 것이 기억이 났다. 오늘은 그냥 지나쳤던 안양천에 피어 있는 꽃의 이름을 알아보기로 했다. 처음 만난 꽃은 꼭 꽃마리 같아서 다음어플에서 꽃검색으로 찾아보니 꽃마리가 맞았다. 오래전 친구를 만난 듯 기분이 좋았고 숲동이 시절이 생각나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또 발견한 꽃은 괴불주머니, 개불알꽃 등 이름이 특이한 것들이었다. 꽃마리는 옅은 하늘색이고 괴불 주머니는 노란색과 보라색 두 가지가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안양천을 다녔는데 꽃마리와 괴불 주머니는 처음 보았다. 예전에도 피어 있었겠지만 내가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 해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을 양분 삼아 새로운 꽃을 피어내는 꽃들을 보니 죽음에서 피어난 삶이라는 부활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꽃이 졌다 피는 것도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처럼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을 머금은 새싹은 갓 태어난 아기얼굴처럼 해맑게 웃고 있다. 태양이 가까이 올수록 제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몰랐던 씨앗들이 천천히 자기 안에 숨겨져 있던 싹을 틔운다. 온기는 회색빛으로 잠자고 있던 씨앗에 생명을 부여한다. 씨앗은 아직 자신이 무엇이 될지 모른다. 껍질을 뚫고 그 싹을 힘차게 밀어낼 뿐이다. 기대에 찬 눈으로 연두빛 싹을 지켜본다.

창덕궁에 다녀온지 일주일도 안되어 한 차례 봄비가 내리더니 벚꽃잎이 흰눈처럼 날린다. 어슴푸레한 새벽 인도 갠지즈강에서 보았던 시체를 태우며 날리는 하얀 재같기도 하다. 꽃과 죽음은 전혀 다른 단어이지만 내게는 꽃이 단지 기쁨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생은 나무나 꽃보다 유한하다. 한번 지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 그런면에서 식물은 인간보다 차원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죽음보다 살아있다는 것이 더 신비한 일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매해 단지 태양이 가까워졌을 뿐인데 마른 가지에 물이 오르고 그 어떤 것보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나도 죽고 나서 나무 아래 묻히고 싶다. 그 놀라운 존재와 하나 되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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