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중에 마야자와 겐지의 시를 그림책으로 만든 <비에도 지지 않고> 라는 책이 있다. 살아온 날들 중에 요즘처럼 비가 자주 왔던 적이 있었나 싶다. 젊은 시절에는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차가운 비가 몸을 젖게 하는 것도 싫었고 돌아다니는데 불편한 날씨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마야지와 겐지는 비로 시작해 인생의 지혜를 시에 담았다. 소박하게 살며 남을 돕고 사는 삶. 자연의 순리에 따라 순응하는 삶을 지향해 보인다. 나 역시 나이가 들어서인지 사계절이 있다는 것이 좋다. 다양한 날씨를 경험하면서 생각에 잠길 수도 있고 각 계절의 특성에 따라 삶의 방식을 바꾸어 보고 좋아도 했다가 싫어도 했다가 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게 이제는 삶의 진리를 깨닫는데도 좋은 것 같다. 적도에 사는 나무들과 짐승들은 그저 한곳에서 먹고 살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무언가 준비를 해야 한다. 비에도 지지 않고 더운 여름에도 지지않고 눈에도 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이겨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지혜가 생기고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제 곧 겨울. 눈을 기다리고 그 다음 봄을 기다리며 계절의 운치를 경험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좋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꽃은 피어 나를 즐겁게 하고 열매를 맺고 다시 나목이 된다. 나무는 생각할 수록 신비하다. 나는 나무가 있는 곳이면 언제나 평온하게 될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 위기의 순간에 저희들끼리 소통하며 서로를 도우며 산다는 나무의 이야기 너무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서로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는 걸 나무는 알고 있는데 인간은 왜 그렇지 못할까. 계절의 혜택을 누리며 자연의 일부임을 알고는 있지만 우리는 왠지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는 외롭다고 말한다. 아마도 수만년의 지혜를 쌓아온 나무보다 그 지혜를 발휘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낙엽을 밟으며 나무는 또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어떠한가. 한해 한해가 지나면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퇴화하고 있는지. 하지만 어떻게 해야 새로 태어나는지 난 아직 모르겠다. 벌써부터 눈이 침침하고 기억력은 떨어지고 다리는 오래 걷기에 무리가 된다. 아, 나무처럼만 살 수 있다면... 봄에 다시 꽃이 피고 햇빛을 머금어 자신을 성장시키고 미련없이 다음 해를 준비하며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아름다운 순환의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 폭풍우에도 태풍과 지진에도 꿋꿋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당당함이 좋다. 내가 세상의 먼지가 되어갈 때 나무와 하나될 수 있다면 다음 생에 좀 더 강한 존재로 태어날 수 있을까. 비오는 숲에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그 진한 나무향 그리고 빗소리와 입김. 나도 나무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그 느낌이 좋다. 나를 살게 한다. 습기와 나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언젠가 나와 하나될 나무들과 계속해서 친분을 쌓고 싶다. 그래서 다시 태어날 때 나무처럼 단단하고 지혜로운 존재로 태어나고 싶다. 이번 생은 글러 먹었다. 하지만 내게도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비에도 지지 않을 오늘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