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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Mar 26. 2022

그 봄에 한 소년이 있었다

보글보글 글놀이
3월 4주 봄 시리즈 세 번째 주제
"봄 사람"




그 해 봄,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애의 이름은 하윤. 10살이지만 또래보다 약간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가진 예쁘장한 아이였다. 수진은 첫 만남에 비록 겉으로는 장난꾸러기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예의바르고 사려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조금 외로운 아이라는 것도...


그 애를 알기 두 달 전, 6살인 수진의 딸 가은이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운동을 배우겠다는 어린 딸이 기특해서 수진은 아파트 단지 앞 큰 사거리 건너편 상가 건물에 위치한 태권도장으로 바로 달려가 가은을 등록 시켰다. 태권도장은 집 근처까지 차량을 운행하지만 아직 엄마손이 필요한 가은은 한사코 엄마가 바래다 주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하는 수 없이 수진은 날마다 유모차를 끌고 가은을 태권도장에 데려다 주고 한시간 후에 다시 부랴부랴 유모차를 끌고 데리러 가야 했다. 추운 겨울에 한달을 그리 하니 수진은 그만 몸살이 나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 즈음 가은이가 태권도장 아이들과 친해져서인지 차량을 타겠다고 해서 수진의 고생은 '한달천하'로 막을 내렸다.


꽃샘 추위가 물러나고 꽃봉오리가 올라오던 어느 봄 날, 가은은 수진에게 태권도장에서 만난 어떤 오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평소 남자아이들에게 관심도 없던 딸 아이가 이성을, 그것도 자신보다 4살이나 많은 오빠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이 수진은 퍽 귀여웠다. 수진은 하윤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하윤은 마침 수진이 살던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어서 태권도장 차에서 내릴 때 혹은 타러 갈 때마다 마주쳤다. 수진은 만날때 마다 그 아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말도 잘 붙였다. 확실히 그 아이는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리 가은이를 살뜰하게 챙겨주는 구석이 있었다. 인사도 어찌나 예의 바르게 하던지 수진은 '우리 딸이 남자 보는 눈이 있구나' 라며 속으로 흐뭇하게 여겼다.


아파트 화단에 목련이 환하게 필 무렵, 가은은 수진에게 하윤과 함께 놀이터에서 놀고 싶다는 소망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아마도 엄마가 조금 나서주기를 기대하는 듯도 하지만 수진은 난감했다. 자신의 딸보다 4살이나 많은 오빠가 놀이터에서 함께 놀아줄까 의구심이 들었다. 태권도장과 차량 안에서야 한정된 공간과 시간 때문에 어찌어찌 대화도 하고 챙겨도 준다지만, 수진은 그때까지 6살 여자아이와 10살 남자아이가 놀이터에서 함께 노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만일 수진이 하윤에게 자신의 아이와 놀아달라고 부탁한다면 하윤은 아마 거절하지 못하고 억지로 가은과 놀아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건 하윤에게도 가은에게도 옳지 않은 일이다.


수진은 가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빠와 놀고 싶다면 가은이가 하윤에게 직접 물어봐야 한다고 다독였다. 그렇게 말은 해 두었지만 막상 하윤이 진짜로 거절이라도 한다면 어떻하나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가은이 상처 받을텐데...가은은 하윤에게 같이 놀자고 말하기 쑥스러웠는지 몇날 며칠 끙끙댔다. 수진은 그런 딸을 보며 표현하는 법도 거절을 받는 법도 슬슬 배워야 할 만큼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기특하면서도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자라기를 바라면서도 자라길 바라지 않는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태권도 차량에서 하윤과 함께 내린 가은이 용기를 내어 함께 '오빠 나랑 오늘 놀이터에서 놀자'라고 물었다. 뒤이어 '좋아' 라는 명쾌한 하윤의 목소리가 맑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수진은 예상치 못한 하윤의 대답이 기뻤고, 딸이 느낄 행복이 기뻤고, 하윤이가 착한 아이라 기뻤다. 작은 녀석들의 인간 관계가 큰 녀석이 된 수진에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뿌듯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두 아이의 사랑 혹은 우정이 이제 시작되려는 아름다운 사건을 목격하고 있으려니 곳곳에 피기 시작한 꽃봉오리에 담긴 봄의 의미가 한웅큼 마음에 쥐어졌다.


수진은 팽이를 가지고 놀거나 잡기 놀이를 하거나 모래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하며 두 녀석이 옹기종기 노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심성이 고와서 그런것인지 아니면 하윤도 가은이 마음에 있는 것인지 수진은 알쏭달쏭했지만 어찌됐든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호감과 탐색 끝에 함께 어울려 놀자 두 아이 사이에는 인간적인 유대감이 생겨났다.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 인연을 두 아이가 만들어 가고 있었다. 수진은 결심했다. 앞으로도 가은이가 어떤 이성을 좋아하더라도 판단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개입하지도 말자고 말이다. 가은은 경험하는 만큼 성장할 것이고, 사랑이든 우정이든 어느 방향으로든 호감의 감정을 더 깊은 사람 사이의 관계로 발전시켜 나갈 줄 아는 어른이 되리라 믿어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하윤에게는 하람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여동생과 가은이는 유치원에서 같은 반이었다. 가은은 하람과도 친해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오빠와 달리 하람은 가은이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고 했다. 놀이터에서 오빠와 놀고 있는 가은을 보면 오빠와 인사도 하지 않았고 가은에게도 냉랭하게 구는 걸 수진도 직접 보았다. 가은은 잠이 들기 전 수진에게 속은 상하지만 하람이 대신 하윤 오빠가 자기랑 친하니 그걸로 괜찮다고도 했다. 6살 인생도 나름대로 만만찮은 세상이로구나 싶어 안타까웠지만 수진이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가은을 그저 꼬옥 안아줄 도리밖에 없었다.


꽃샘추위가 물러나고 따스한 봄 햇살에 벚꽃이 활짝 피던 4월 중순의 어느 날, 수진은 하윤을 집에 정식으로 초대했다. 초대장은 가은이 손수 만들어 하윤에게 전해주었다. 초대장을 받은 하윤은 퍽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는 눈치였다. 수진은 하윤을 초대하기 위해 일주일 전 레모네이드용 레몬청을 만들었고, 초대 당일에는 토마토를 직접 삶고 각종 야채와 고기를 다져 만든 소스로 맛있는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얄팍한 옥수수 또르띠야에 꿀과 모짜렐라와 고르곤졸라 치즈를 뿌려 달콤 짭짤한 피자도 구웠다. 두 녀석은 음식을 맛있게 먹고 거실에 앉아 레고를 만들며 꽁냥꽁냥 수다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하던 수진에 귀에 둘의 대화가 들려왔다.


"오빠"

"왜?"

"하람이는 나를 싫어 하나 봐"

"왜?"

"...유치원에서 내가 말 걸어도 대답도 안하고 쳐다도 안 봐"  


아, 아이의 말을 들으며 수진은 마음이 아팠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해줄거라 여겼는데 가은이는 여전히 자기를 무시하는 친구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있었나 보다.


"걔는 나도 싫어해. "

"진짜?"

"응. 하람이는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아마 할머니만 좋아할걸? 그리고 내 동생이지만 자기밖에 몰라. 그러니까 신경쓰지 마"

"아, 그렇구나!"


그 날 이후로 가은은 하람이 때문에 더이상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윤이의 대답으로 가은은 정답을 얻은 모양이었다. 수진은 10살 소년의 무심한 듯한 대답이 그 어떤 대답보다 딸 아이에게 위안이 되었음을 알았다. 수진은 하윤이에게 마음 깊이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어린 아이지만 그 소년에게서 위로하는 법을 한가지 배운 기분이었다.


5월 중순이 되니 한 낮에는 꽤 무더워지고 있었다. 수진의 집은 아파트 1층이라 문을 열면 바로 놀이터가 보였다. 그래서 가은은 놀이터에서 놀다가도 목이 마르다며 하윤과 함께 종종 집에 들렀고, 수진은 그때마다 얼음을 동동 띄운 레모네이드를 타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레모네이드를 마신 후 컵을 가져다 주면서 하윤이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도 예전에 레모네이드를 많이 만들어 주셨어요. 진짜 맛있었어요."


생각해보니 그동안 하윤이 입에서 엄마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수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방금 들은 하윤의 말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어느새 수진의 풍경 안으로 들어왔다. 수진은 하윤을 볼 때마다 잘생긴 아이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을 엿볼때가 있었다. 그건 그저 이 소년이 풍기는 분위기나 개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진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엄마가 곁에 없었기에 소년은 외로웠던 것이라고...


태권도 승급심사를 하던 날, 태권도장에는 자녀들의 승급심사를 보기 위해 학부모들로 북적거렸다. 수진 또한 한쪽 벽 앞에 서서 가은이의 품새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수진의 옆에 서 있던 아줌마들의 대화에 수진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아, 쟤구나. 하윤이라는 애"

"왜? 누군데?"

"저기 맨 앞 오른쪽 끝에 있는 허여멀건한 남자애 있잖아. 걔 엄마가 몇년전에 교통사고로 죽었거든"

"어머나, 그래? 아이구 안타까워라"

"할아버지 할머니랑 사는 것 같은데 오냐오냐 해서 키웠는지 애가 좀 거칠어. 지난번에 우리 아들을 얼굴에 멍이 들 정도로 때렸더라고. 그래서 학교에 찾아갔더니 담임이 그러더라구. 쟤 엄마가 없다고. 몇 년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그러니 나보고 좀 봐달라고 담임이 사정사정해서 학폭위에 올리려는걸 간신히 참았어."

"아니 그런데 태권도를 배우고 있단 말야?"

"아휴 말도마, 우리 아들이 쟤 꼴통이라고, 학교에서 말도 별로 없고 툭하면 사고치고 암튼 그런가봐. 엄마가 없다고 하니 불쌍하기도 하고, 저러다가 불량 청소년으로 크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고 그러네"

 

수진은 순간 그 아줌마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큰 소리로 분명하게 말하게 싶었다.

'저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오해하신 거예요. 아들 이야기만 듣고 함부로 판단하지 마세요'


그러나 수진은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뭐라고 나서서 하윤이를 변호해 준단 말인가. 토해 내지 못한 분한 마음이 가슴팍에 걸려 몇날 며칠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수진은 그저 하윤이를 볼 때 마다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고, 가끔은 집에 불러 레모네이드와 간식을 먹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기력한 스스로가 못나서 부끄러웠고, 하윤이 동네 아줌마들에게 오해를 사고 있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하윤은 멀리서 수진을 발견할 때 마다 '이모~!' 하며 반갑게 달려오곤 했다. 수진은 그럴때마다 하윤을 힘껏 안아주고 싶었다. 엄마품이 한창 그리울 나이에 어디에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원망과 그리움을 삭히고 있을 어린 소년이 못내 아프고 안타까워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수진에게 주어진 배려의 권한은 달달하고 시큼하고 시원한 레모네이드 한 잔 만큼이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가은은 그 사이 동네 또래 여자아이들과 친해져 어울려 놀면서 하윤과는 점점 멀어져 갔다. 하윤 역시 어느 날부터 또래 남자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느라 꽤 바빠 보였다. 두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만남과 이별은 어른들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다는 걸 느끼면서도 수진은 어쩐지 씁쓸했다.


9월이 된 어느 날 수진네 집은 옆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를 하기 전 하윤에게 작별 인사를 하던 날, 하윤의 눈 속에 찰랑 거리던 슬픔을 수진은 볼 수 있었다. 수진은 용기를 내었다.


"하윤아"

"네?"

"이모가 부탁 하나만 할까?"

"뭔데요?"

"이모가 한번 안아봐도 될까?"

"...네"


수진은 하윤을 꼬옥 안아 주었다. 소년 역시 수진을 꼬옥 안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이별을 했다.


3년 후 어느 봄 날, 수진은 우연히 길에서 하윤을 만났다. 못 알아볼 정도로 키가 커버린 하윤은 친구들과 까불거리며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하윤은 수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수진은 섭섭하지 않았다. 소년의 미소가 봄 날의 햇살처럼 화사했기에 수진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가은이에게 하윤이를 보았다고 하면 가은이는 하윤이를 기억할지 궁금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해 봄만난 한 소년이 있었다. 앞으로도 봄이 되면 조금은 생각 날 외롭고 예뻤던 한 소년이...






7년전 만난 그 소년은 지금 18살이 되었습니다. 이사를 간다고 작별을 고하던 날, 그 아이를 안아주지 못한 것이 두고 두고 후회가 됩니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합니다. 그리고 레모네이드를 자주 타 주던 이모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을지도... 네가 어디에 있든, 외롭지 말길, 사랑받고 사랑하길, 동생과 조금은 친해져 있기를, 항상 건강하기를...이모는 바란다. 꼬마야.

(본문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 보글보글 매거진에 (드디어) 처음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매번 매거진에 참여하고 싶다 생각했다가도 어쩐지 자신이 없어 선뜻 참여하지 못했어요...그런데...이번주 주제를 보는 순간 그 아이가 떠올랐지요. 잘 쓰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그 해 봄 큰 아이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준 그 소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보고 싶어 글을 썼고, 용기내어 보글보글 매거진에 참여를 했습니다. 아마 이렇게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보글보글 매거진의 힘...소소하지만 따듯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매거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보글보글팀 여러분...




보글보글 매거진의 이전 글입니다.


보리 작가님의 <사업실패로 숨어든 귀농은 실패로 이어졌다>

https://brunch.co.kr/@1ac7bfd8df3c4eb/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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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hitom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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