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심장을 바친 그대에게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by 김정은

18세기, 프랑스 화가들 사이에서는 사람의 심장을 간 피를 물감에 섞어 칠하면 그림이 더 아름다워진다는 미신이 떠돌았습니다. 사실주의 화가인 마르탱 드롤링은 오랜 무명생활을 벗어나고 싶다며 친구인 프티 하델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고위공무원이자 건축가였던 하델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처형된 왕족의 심장 45개를 몰래 구해 보관 중이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건 당시 프랑스 왕족의 장례절차와 관계가 있습니다. 왕족이 사망할 경우 시신은 미라 처리를 하고 심장만 따로 알코올에 보관했기 때문이지요. 하델은 드롤링에게 루이 14세의 심장을 포함해 왕족의 심장 15개를 건네 줍니다.


오랜 고민 끝에 드롤링은 심장을 갈아 자신의 물감에 섞고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 그림이 바로 아래의 <주방>이라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피 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드롤링은 살아 생전 무명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죽고 며칠 후에 팔린 <주방>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습니다. 화가는 죽었지만 그의 예술은 계속 생명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심장의 힘이 정말 작용이라도 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술은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 누구든지 간에 심장을 바쳐야만 하는... 꽤 잔인한 장르인 걸까요...?


루이 14세의 심장을 갈아 그렸다고 알려진 그림인 드롤링의 <주방(1815)>




클래식 분야에는 '백조의 노래'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백조는 평생 노래를 부르지 않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 딱 한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해요. 그래서 음악가가 남긴 마지막 작품 혹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최고의 작품을 일컬어 '백조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모든 음악가들 혹은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백조의 노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죽기 직전에 만든 작품일 수도 있고, 예술가가 남긴 가장 최고의 작품일 수도 있지요. 드롤링은 자신의 '백조의 노래'를 완성하기 위해 남의 심장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이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예술가의 광기가 으스스하기까지 하지요.


타인의 심장 대신 자신의 심장을 갈아 예술혼을 불사른 음악가가 있습니다. 바로 프란츠 슈베르트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일전에 글을 발행한 바가 있는데요. 그의 작품 <네 손을 위한 환상곡>과 그의 일생을 짤막하게 정리하였으니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아래에 링크를 걸어봅니다.


https://brunch.co.kr/@anessdue/450


31세라는 안타까운 나이로 요절한 슈베르트는 20대 초반 매독에 걸린 후 죽을 때까지 후유증으로 고생했습니다. 면역체계가 무너졌으니 몸은 늘 허약했지요. 그리고 결국 31세에 걸린 장티푸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슈베르트가 죽기 직전에 만든 14곡의 가곡을 출판사에서 '백조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엮어 출판합니다. 당시의 출판사에서 무명의 젊은 작곡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기에 모음곡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제가 꼽는 슈베르트의 진짜 '백조의 노래'는 단순히 음악작품만은 아닙니다. 예술을 위해 자신을 바친 그의 삶 자체가 곧 백조의 노래라는 생각이 들어요.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와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와 <즉흥곡> 등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한곡 한곡 자신의 심장을 갈아 만든 것처럼 비극적이면서도 처절한 아름다움에 저절로 몸을 떨게 됩니다.


슈베르트는 한창이어야 할 20대에 매독으로 건강이 무너진 데다 작곡가로서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에게 헌정한 작품 역시 베토벤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우울증이 찾아와 그를 괴롭혔지요. 그의 삶 속에서 과연 행복한 때가 있었을까 궁금해질 만큼 그의 일생은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이 자신과 가깝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음악에 대한 그의 사랑은 꺼질 줄 몰랐습니다. 슈베르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아래와 같이 고백한 바 있습니다.



내 마음속은 끝없는 사랑으로 가득 찼다

나의 사랑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향한 끝없는 사랑이었다

다시금 나는 먼 곳을 방랑했다

오래오래 수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노래했다

내가 사랑을 노래하려 하면 그것은 고통이 되었고

내가 다시 고통을 노래하려 하면 그것은 내게 사랑으로 변했다

그렇게 사랑과 고통이 나를 두 조각으로 나눴다


(나성언, <슈베르트 세 개의 연가곡> 중에서)



슈베르트의 삶이 가난하고 누추하다고 해서 영혼까지 가난하고 누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질병으로 잠식당한 허약한 육체 때문에 그의 정신 역시 온전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내면 깊은 곳에는 슬픔을 연료 삼아, 불행을 장작 삼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하는 위대한 정신이 있었던 것이지요.


슈베르트는 리스트나 파가니니처럼 쇼맨십이 가득한 예술가는 아니었습니다. 모차르트처럼 신동으로 일찍이 유명세를 떨치지도 못했지요. 슈만처럼 훌륭한 배우자를 만났더라면 비극적인 생이 조금 달라졌을지도요. 그의 수줍음은 타고난 성정이었던 데다 세속적인 욕심이나 야망도 없었기에 무명 작곡가로 살아갈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가 가진 유일한 야망은 그저 음악뿐이었습니다. 슈베르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나는 국가가 부양해야 해. 왜냐하면 나는 오직 곡을 쓰기 위해 세상에 왔거든."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 작곡한 가곡 모음집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 자신을 겨울 나그네에 빗대어 노래한 유언장처럼 들립니다. 빌헬름 뮐러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이 가곡집은 사랑을 잃은 젊은이의 쓸쓸함과 외로움이 차가운 계절인 겨울을 배경으로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노래는 시종일관 어둡습니다. 실제로 <겨울 나그네>의 시인이었던 뮐러 역시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합니다. 슈베르트는 뮐러가 죽은 그 해에 이 겨울나그네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 슈베르트 역시 뮐러를 따라갑니다. 짧은 생을 살다 간 ,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두 천재가 남긴 시와 노래는 수백 년이 흘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불멸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겨울나그네의 첫곡 <안녕히, Gute Nacht>는 이별의 인사를 뜻합니다. 한때 서로 사랑했던 연인에게 버림받은 젊은이는 방랑의 길을 떠나기 전 연인의 집 대문에 '안녕히'이라 씁니다.



<안녕히, Gute Nacht>


나는 이방인으로 왔다가

다시 이방인으로 떠나네

5월은 수많은 꽃다발로

나를 맞아 주었지

소녀는 사랑을 이야기했고

어머니는 결혼까지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온 세상은 음울하고

길을 눈으로 덮여있네

가야 할 길조차도

나 자신이 선택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어둠 속에서

나는 길을 가야만 하네

... 중략...

사랑은 방랑을 좋아해

여기저기 정처 없이 헤매도록

신께서 예비하셨지

아름다운 아가씨여, 이제 안녕히!

그대의 꿈을 방해하지 않으리

그대의 안식을 해하지 않으리

발걸음 소리 들리지 않도록

살며시 다가가 그대 방문을 닫고

안녕히라고 적은 후

그대로 떠나리라

그러면 그대는 알게 되겠지

내가 그대를 생각했다는 것을



https://www.youtube.com/watch?v=ZHWNisSCJEo



<겨울 나그네>는 24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연가곡집입니다. 연가곡이란 구성되어 있는 곡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가곡 모음을 뜻합니다. 슈베르트 시대에 가곡의 위상은 지금과 퍽 달랐습니다. 가정에서 취미로 부르는 노래 그 이상은 되지 않았지요. 슈베르트 이전의 작곡가인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도 시에 곡을 붙여 가곡을 만들기는 했지만 클래식 장르의 하나로 자리잡은건 순전히 슈베르트 덕분입니다.


슈베르트는 632개의 가곡을 만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리트(독일 가곡)라는 본격적인 장르가 완성됩니다. 독일어는 평소에 딱딱하고 듣기 좋은 외국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어로 된 가곡을 들으면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독일어에 숨겨진 순수하고도 청순한 매력을 발견하게 되지요. 샹송의 불어는 '발랑 까진 반항아' 느낌이, 칸초네의 이탈리아어는 '끈적거리면서 정열적인 바람둥이' 느낌이 난다면 독일 가곡의 독일어는 '천재인데 순진한 너드남' 같달까요.


<겨울 나그네>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01. 안녕히(Gute Nacht) 02. 풍향 깃발(Die Wetterfahne) 03. 얼어붙은 눈물(Gefrorene Tränen) 04. 굽은 손(Erstarrung) 05. 보리수(Der Lindenbaum) 06. 넘쳐흐르는 눈물(Wasserflut) 07. 냇가에서(Auf dem Flusse) 08. 회상(Rückblick) 09. 도깨비불(Irrlicht) 10. 휴식(Rast) 11. 봄꿈(Frühlingstraum) 12. 고독(Einsamkeit) 13. 우편마차(Die Post) 14. 백발(der greise Kopf) 15. 까마귀(Die Krähe) 16. 마지막 희망(Letzte Hoffnung) 17. 마을에서(Im Dorfe) 18. 폭풍의 아침에(Der stürmische Morgen) 19. 환영(Täuschung) 20. 이정표(Der Wegweiser) 21. 여인숙(Das Wirtshaus) 22. 용기(Mut) 23. 환상의 태양(Die Nebensonnen) 24.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



<겨울 나그네>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하던 여인의 대문에 '안녕히'라고 적은 후 길을 떠나면서 시작됩니다. 시의 화자인 겨울 나그네는 이제 그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그 집에 걸린 풍향 깃발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깃발의 정처 없는 펄럭거림이 마치 변심한 애인의 마음 같기도 하고, 바람이 그저 초라한 자신을 희롱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 마음을 노래한 곡이 바로 제2곡 풍향 깃발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그만 겨울 추위에 얼어버리지요. 얼어붙은 눈물을 보며 겨울 나그네는 자조 섞인 탄식을 하게 되지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하던 계절은 어느새 사라지고 차가운 눈과 얼음만 덮인 들을 보며 그 모든 사랑의 일들이 이제는 헛된 꿈과도 같습니다.



오 눈물, 내 눈물아!

넌 그렇게 미지근하구나

하지만 이젠 얼어버렸네

차가운 아침 이슬처럼

< 제3곡, '얼어붙은 눈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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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내 품에 안겼던

푸르렀던 들판

하얀 눈 속에서 그녀의 발자국 찾아 보건만

모두가 헛된 일


내 뜨거운 눈물로

눈과 얼음을 꿰뚤어

지면을 볼 수 있을 때까지

바닥에 키스를 하련다


그 화사하던 꽃들과 푸르른 들은

이제 어디서 찾아볼 것인가

꽃들은 시들어 버렸고

들은 그렇게 메말라 버렸네

<제4곡, '굽은 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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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꾸었네 그 그늘 아래서 수많은 달콤한 꿈을

가지에 새겨 놓았던 그 많은 사랑의 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찾았던 그 나무

<제5곡, '보리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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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넘친 내 눈물이

눈 위로 쏟아지네

찬 눈 속으로 빨려드네

내 불타는 슬픔의 눈물이

<제6곡, '넘치는 눈물' 중에서>



화자는 길을 떠나며 사랑을 새겨놓았던 보리수나무 곁을 지나고, 냇가를 건너면서도 시종일관 사랑이 끝나버린 허무와 절망에 빠져 자신의 고통을 노래합니다. 방랑 끝에 잠시 '소박한 오두막 숯불 난로'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마음의 아픈 상처가 타들어 가기에' (제10곡, 휴식) 편히 쉴 수 없다고도 고백합니다.


겨울 들판을 거닐던 나그네는 한때 꽃으로 가득했던 푸르른 5월의 들판이 황량하게 변해버린 모습에 마치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 같아 괴롭습니다. 자신에게도 봄날의 들판처럼 희망과 설렘이 가득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사랑의 봄날이 모두 꿈만 같습니다. 여전히 사랑을 그리워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건만 기약 없는 희망에 두 눈을 지그시 감을 뿐입니다.


난 활짝 핀 꽃의 꿈을 꾸었네

5월에 피는 꽃을

... 중략...

난 사랑의 꿈을 꾸었네

아름다운 소녀와의 사랑을,

서로의 마음과 입맞춤,

기쁨과 행복을

<제11곡, '봄날의 꿈' 중에서>


길거리에서 들리는 우편마차 소리에 혹여나 그녀에게서 편지가 오지는 않을지 잠시 설레어 보지만(제13곡 우편마차) 사랑을 잃은 젊음은 더 이상 젊음이 아닌 백발의 노인이나 다름없으며(제14곡 백발) 죽음마저 자신에게 가깝다고 느낍니다(제15곡 까마귀). 메마른 겨울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잎을 보며 자신의 희망도 함께 떨어지고 있다고 노래합니다(제16곡 마지막 희망).



아! 그 잎이 땅에 떨어지고

내 희망도 함께 떨어지네

나 또한 땅으로 떨어져,

내 희망이 무덤 위에서 눈물을 흘리네

<제16곡 '마지막 희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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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은 짖고, 사슬은 쩔렁거리네

사람들은 단잠에 취해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꿈에서 가져보네

좋은 꿈, 나쁜 꿈속에서 즐거움을 찾네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

....


짖어라 개야, 나를 보고 짖어라

내가 잠자며 쉴 시간조차 없도록!

난 이제 꿀 꿈도 없는데

잠자는 사람들 틈에 있어 무엇하랴

<제17곡 '마을에서' 중에서>



폭풍이 휘몰아쳐 찢긴

하늘의 회색빛 구름

...

내 마음은 나의 모습을 보네

하늘에 그려져 있는

겨울의 모습

춥고 음산한 겨울

<제18곡, '폭풍의 아침' 중에서>



<겨울 나그네>의 가사를 읽으며 노래를 주욱 따라 듣노라면 슈베르트가 느낀 자신의 삶이 참으로 춥고 외롭고 허무했다는 걸 목도하게 됩니다. 빌헬름 뮐러 역시 당대에 그다지 유명한 시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를 무척 좋아해서 그의 연작시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에 곡을 붙여 2개의 연가곡집을 만들었습니다. 총 3개의 연가곡집을 남겼던 걸 보면,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그의 사후에 출판된 <백조의 노래>인 것을 보면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를 무척 아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시의 화자에게서 깊은 동질감을 발견했을지도요.


제20곡 '이정표'에 이르면 노래를 부르는 겨울 나그네도 그 노래를 듣고 있는 나 자신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됩니다. 슈베르트가 걸어야만 했던 외로운 길, 겨울의 황무지를 떠돌며 쉴 곳을 찾지만 쉴 곳 없는 세상살이에서 그는 묵묵히 숨겨진 길을 걸었습니다. 순전한 예술에의 헌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욕망만을 추구했던 한 젊은이의 모습에 눈물 외에는 화답할 길이 없습니다.



왜 나는 큰길을 피하는 것일까

방랑자들은 큰길을 찾건만

숨겨진 길을 찾는 것일까

눈 덮인 바위 사이로?


아무 죄도 짓지 않았건만

왜 사람들을 피하는 것일까

무슨 어리석은 욕망이 있어

황무지를 떠도는가


길거리 이정표에서는

도시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네

나는 계속해서 헤매고 있네

쉬지 않고 내 쉴 곳을 찾아


한 이정표를 바라본다

움직이지 않고 내 눈앞에 있는

내 갈 길은 하나뿐

아무도 돌아온 이가 없는 그 길

<제20곡, '이정표'>



미성의 소유자였던 슈베르트는 11살에 국립 신학원에 들어가 합창단원으로 약 3년간 활동합니다. 이곳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던 중 문학을 만나게 되었고 특히 시를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을 600여 곡 이상 작곡할 수 있었던 것도 슈베르트의 문학적 취향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슈베르트는 <겨울 나그네>를 죽기 직전까지 수정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생전에는 이 곡이 노래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언젠가 라디오 방송에서 슈베르트가 살아생전 지금 누리는 명성의 1%도 채 누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기억 납니다.



생전에 누리지 못한 영광을 그림으로나마 이루게 해 준 화가는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였습니다



겨울나그네를 감상하기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라고 적고 보니.. 이 얼마나 잔인한 표현인가 싶어 흠칫 놀랐습니다. 속으로 피 흘리며 곡을 썼을 슈베르트의 이 처연하고 쓸쓸한 아름다움을 '그래! 춥고 스산한 계절에는 역시 겨울 나그네가 제격이지' 라며 순전히 소비적인 입장에서만, 탐미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한 표현이 아닌가 싶어 타인의 심장을 갈아 그림을 그린 드롤링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느껴졌어요.


모든 예술을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한 예술가의 영혼이 담긴 <백조의 노래>를 대할 때만큼은 조금 무겁고 진중하게, 그리고 고마운 마음으로 감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삶은 내용과 무게와 무관하게 모두 자기 자신만의 <백조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달려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노래가 처연하고 슬플지, 화사하고 경쾌할지는 각자의 선택과 운명에 따라 달라지겠만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백조의 노래를 온 진심을 다해 들어준다면 성대가 상하고 목이 아프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래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겨울 나그네>는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페터 슈라이어, 그리고 이안 보스트리지의 노래를 추천합니다. 세 사람 모두 전설적인 성악가들입니다. 페터 슈라이어의 피아노 반주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리히테르가 맡았습니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는 묵직하고, 페터 슈라이어는 서정적이며, 이안 보스트리지는 청아합니다. 남성의 음성이 이렇게도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슈베르트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제럴드 무어(피아노) https://www.youtube.com/watch?v=2qesjA38qRA&t=1497s


페터 슈라이어, 스비야토슬라브 리흐테르(피아노) https://www.youtube.com/watch?v=rVdEbLh9Be0


이안 보스트리지 https://www.youtube.com/watch?v=tnuvs2w7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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